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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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기행(南滿紀行)
* 김경하는 만주 요녕성 신보현에서 열린 예수교장로회 남만노회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1931년 2월 20일 집을 떠났다가 3월 5일에 귀국했다. 이 여행기는 1931년 7월 15일부터 8월 19일까지 6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실렸다. 김경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한 후 중국으로 가서 봉천, 삼원포, 북경에서 교사와 고려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활동하다가 남경과 산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은율읍교회에 부임하였다. 신문에 실린 원본을 최대한 살렸으며 편집부에서 덧붙인 내용은 대괄호[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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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남만주 요녕성 신보현(新寶縣)에서 열린 남만노회 도(都) 사경회에 갔다가 두 주간 만에 돌아왔다. 나는 이번의 단기(短期) 여행에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재만동포의 생사를 우려하는 일반 독자의 울적한 정을 펴는 동시에 남만교회의 가긍할 정상과 신흥 중국의 혁신적 기상을 약술하고자 한다.
예정된 사경회 일자인 1931년 2월 24일이 점점 가까워 온다. 때마침 집아이 세 아이가 차례차례로 유행하는 홍역에 걸려 대증[병의 증상에 대응하는 일]은 지냈으나 완쾌되지는 못했다. 중병 앓은 세 아이들을 집에 두고 멀리멀리 여행하기가 맘에 퍽 헤우고 걸렸다. 또 아내는 생명 보장이 없는 만주 오지에 여행가는 것을 몹시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아들이나 딸 사랑하기를 나보다 더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고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장차 차지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쾌연히 2월 20일 오전 9시 자동차로 집을 떠났다.
내가 무엇으로 군축을 당하고 살육당하고 가지각색으로 말할 수 없는 도탄 중에서 헤매는 저 불쌍한 재만동포들에게 시원한 맘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책임감도 일어나고 또는 비교적 평안한 본국에 있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저 도탄 중에 우는 동포들을 대할까 하는 미안한 생각도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한 개 막대기로 홍해를 쳐서 이스라엘 민중의 살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오, 하나님이여. 이 막대기보다 더 무력하고 지극히 적은 교역자보다 더 적은 자로되 하나님께서 기계로 쓰사 저 불쌍한 동포들에게 산 소망을 일으키는 복된 소식을 전하고 돌아오게 하여 줍소서 하고 뜨거운 기도를 올렸다.
북국(北國)에 표류하는 동포방문을 가는 나를 실은 자동차는 이제 닫기를 시작한다. 구월산(九月山)을 안고도 돌고 지고도 돌아 종달온천을 지나고 문화구읍(文化舊邑)을 지나서 차는 어느덧 두 시간 만에 신천읍(信川邑)에 이르렀다. 신천읍은 조선의 무디이신 김익두 목사님의 발상지요 또 김 목사님이 손수 세운 교회와 학교가 있는 곳이다. 오래 떠났던 김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 동사목사로 다시 오셨으니 옛 주인을 도로 맞는 그 교회에는 새 깃봄[기쁨]이 충만할 것이요, 도로 오신 김 목사님은 금석(今昔)[지금과 옛적]의 감(感)이 불무(不無)할 줄로 안다. 신천읍에서 10리를 못다가서 너른 벌판에 미려한 양옥과 즐비한 건물들은 왕재덕 여사가 독자 경영하는 농민학교의 교사(校舍)와 기숙사들이다. 이 학교는 세계의 모범농국(模範農國)인 떤막[덴마크]국농민학교를 모방하여 세운 현 조선 농민에 적합한 이상적 농학교이다. 이 학교는 피폐한 농촌 자제를 위하였기 때문에 모든 경비는 경영자 왕 여사가 독담[혼자 부담]한다. 그러므로 학비도 기숙사비도 다 없다. 오직 밥 먹는 쌀과 책과 교복밖에 더 드는 돈이 없다. 이 학교에는 농학상 전문지식을 갖춘 교원 두 분 외에 본보(本報)에 농촌구제책을 연재하는 조민형 선생께서 교장으로 계셔서 많은 노력을 한다.
신천온천역에서 기동차(汽動車)를 탔다. 기동차는 잘 걷는 당나귀 같아서 들롱들롱 들추기는 하면서도 빠르기는 대철(大鐵)에 뒤지지 않는다. 신천온천역에서 사리원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에는 황해도에, 아니 조선에 제일이라고 할 만한 남어리 벌을 지난다. 남어리라는 뜻은 그 벌의 토지가 너무 비옥하여 거기서 나는 벼를 아무리 다 먹으려 하여도 다 먹을 수 없어 남음이 있다 하여 그 벌 이름을 남어리라고 칭하였다 한다. 과연 그 벌은 넓이 10리, 길이 30리의 대평야이다. 이 30리 동안에는 농작인의 가옥 외에는 전혀가 다 수전(水田)이다. 이런 무진장의 대곡간은 이제 그 전부가 동척(東拓)[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이다. 그 벌에 산재한 집들은 일본농인의 단락한 가정이요 드문드문 솟아 있는 건물들은 동척회사의 창고들이다. 아! 옛날에 이 벌에서 물 뜨며 노래하던 사람들은 오늘날 내가 방문 가는 만주 뜰에서 그 얼마나 헤매이는가 하는 생각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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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새벽 12시 18분 사리원역을 지나는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시절이 불경기하여 행인들의 내왕이 희소해서 그런지, 임금이 보통 차보다 비싸서 그런지 승객은 예상 외로 적었다. 철도국의 불행은 내게는 대행(大幸)이 되었다. 독점한 두 의자에 요를 펴고 누으니 종일 피로한 내 몸은 꿈나라로 들어갔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아간다. 먼 동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 형사는 왔다. 안면(安眠)방해죄도 모르는 듯이 잠든 나를 깨워 놓고 재소성명(在所姓名)과 행선지를 물으면서 가방을 들추어보고 다음 승객에게로 간다.
형사가 오른 것을 보니 기차는 정주역(定州驛)을 지났고 국경이 가까워옴을 알았다. 차창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니 차는 숨이 차서 조선의 경계인 압록강 언덕 신의주역에 도착한다. 신의주역! 신의주역은 내 일생에 가장 아픈 눈물을 흘린 곳이다. [필자의 동생 김명하가 1919년 3・1만세운동 참가로 신의주에서 태장을 맞고 장독으로 사망하였는데, 필자는 신의주역에서 그 사건을 떠올린 것 같다.]
<안동현(安東縣)에서 봉천까지
신의주역에서 잠깐 쉬고 떠난 기차는 동양 유일의 대철교를 건너 안동역에 닿으니 때는 오전 7시 15분이다. 중국에서는 북평(北平)[북경을 뜻함]의 시간을 표준시로 하므로 조선보다 1시간이 늦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시계를 내여 1시간 뒤로 돌려서 6시 15분에 놓았다. 계견(鷄犬)이 상문(相聞)하는 신의주와 안동현 사이에 한 시간씩 차이 있을 리 만무하건만 자국 영토인 자국표준시간을 표준함으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지구의 공도(公道)는 사람이 시계를 뒤로 물러 거름을 식히든지 앞으로 내 거름을 식히든 것에 제제받지 않고 그냥 돌아갈 것이다. 북평의 시간이 조선보다 1시간 늦은 줄은 알아도 가는 태양을 정지시킨 사람은 옛날의 신(神)인 여호수아밖에 없을 것이다.
안동역에서 30분간 정거했던 기차는 다시 속력을 내어 달린다. 나는 일찍이 만주, 북경, 남경 산동 등지로 표류하면서 6년간이나 살았었다. 또 내가 지금 감사함으로 봉직하는 신학공부도 이 중국에서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중국의 혜택을 잊지 못한다. 6년간이나 나를 길러준 이 대륙을 7년 만에 다시 보니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기쁘고 반가웠다.
한 봉우리 산과 한 줄기 내도 퍽 애닯게 보였다.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콘스탄취 회사의 강냉이 사는 위탁을 맡은 평양 실업가 박용로(朴容魯) 씨와 더불어 신앙생활에 대한 담론을 하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봉천역에 도착하니 때는 오후 1시였다. 역전 그 넓은 대광장에는 인력거, 마차가 가득 들어찼다. 제각기 자기 차를 타달라고 4-5백으로 헤일 고력차부(苦力車夫)들의 열광적 환영 속에 다만 한 채의 인력거를 몰아 봉천교회 목사 백영엽(白永燁) 씨 사저로 들어갔다.
백 목사는 일찍이 사건으로 울릉도[실제로는 진도]에 가서 같이 정배[귀향]살이하던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부전(訃電)[부음 전보]을 받고 애통불감(哀痛不堪)하여[애통을 참지 못하고] 길림에 있는 상소(喪所)로 떠나려는 즈음에 어떤 학생은 모 학교에 입학소개서 써달라고, 또 어떤 학생은 퇴학하겠으니 학교에 냈던 학비 도로 찾아달라고, 또 어떤 학생은 목사님의 편지로 입학이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또 어떤 이는 무슨 상업(商業)을 해야 좋겠는지 가르쳐달라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찾아 온다.
백 목사의 집에는 옛적 맹상군(孟嘗君)네 집처럼 매일 식객이 삼사 명씩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백 목사는 오늘날 교역자의 급봉(給俸)으로서는 고급의 봉급을 받지만 그 실내에 놓인 가구, 그 자녀들에게 입히는 의복은 아주 거칠고 소박하다. 백 목사는 금릉(金陵) 재학 시절에도 그리하였다. 그때 남경에 유학하는 60여 명의 우리 학생이 누구 하나라도 백 목사의 소개를 의뢰치 않은 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우리는 백 목사를 우리의 총영사(總領事)라고까지 하였다.
백 목사는 무슨 일에나 정(情)과 성(誠)을 들여 하므로 지금 봉천교회도 잘 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2월 22일 주일에 낮과 밤 두 번 예배보는데 회중은 청년남녀가 200여 명씩 모였다. 국제적 대도시인 봉천 시내에 조선인의 소유 건물이라고는 우리 예배당 하나밖에는 없다. 이 예배당은 백 목사의 땀과 눈물로 된 집이다. 총회의 허락을 받고 전국 각 교회에 다니며 연보하여 지은 집이다.
이층 홍색 벽돌 양옥이다. 윗층은 예배당으로, 아래층은 유치원과 청년회관으로 사용한다. 신을 신은 채로 의자에 앉아 예배보는 것도 특색이지만, 더욱이 예배당 안에 미술적으로 수장(修裝)해 놓은 미관(美觀)은 본국의 유수한 예배당에서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편 침 맞는 절도들이 중국 각처에 없는 곳이 없지만 그중에도 봉천은 더욱 심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봉천에서는 대문 밖에 나가려면 대문 걸 사람을 데리고 나가서 대문을 걸게 하곤 한다. 백 목사 집에서도 바로 며칠 전에 손님이 와서 대문을 잠깐 열어둔 사이에 도적놈이 들어와서 집에서 기르는 오리 두 마리를 잡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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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은 동삼성(東三省)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교통상으로 중요한 중심지이다. 또 일본의 만주 세력의 중앙지이다. 봉천에는 중국인의 구시가와 일본인의 신시가가 판연히 정계(定界)되어 있다. 이전에는 구시가에는 건물이라든지 도로라든지가 보잘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즐비한 것이 신시가보다 손색이 없으리만치 진전된 것을 보고는 아니 놀랠 수가 없다. 신흥중국 신흥중국 하기에 중국이 과연 얼마나 신흥이 되었는가 하고 나는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굉장한 건물의 학교가 많아진 것, 그중에서도 건물이 굉장하고 설비가 완전한 동북대학의 시설과 또 고대 나마(羅馬)[로마]의 칼라심(戱園)[콜로세움]식으로 둥그렇게 지은 운동장, 그 안에는 10만 명이 앉아 관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또 각 서점, 그중에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분관에는 책을 사고 보는 청소년들이 장마당처럼 들싼다. 이것을 보면 독서력이 상당히 증진된 줄을 알 것이다. 서책 중에는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관한 것이 제일로 많이 팔린다고 한다. 중국에 있어서 손문은 우상화 되고 말았다. 학교 교과서에까지 삼민주의를 기입한 것 외에, 학교마다 교실마다 손문의 화상을 걸어놓고 매 일과시간마다 그 화상을 향하여 기립경례를 하고 교수를 시작한다.
내가 신빈(新賓)현 소학교, 남녀중학교, 사범학교 등을 관광하여 보니 과연 일률적으로 각 학교 교실마다 손문의 화상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안내하는 직원들에게 물으니 모두가 한 목소리로(如出一口)로 상과(上課) 시간마다 경례를 한다고 한다. 현(縣)마다 현립도서관이 있고 캐성(장거리)에는 캐성도서관이 있는 것을 보았다. 도서관 대문에서부터 혁명적 정신을 고취하는 현판을 달았고 관내에는 여러 가지 포스타를 달았다. 포스타는 열 장이 한 조(十張一組)인데 그중 한 장에는 중국이 일본에 조선 독립을 승인하는 마관(馬關)조약하는 광경을 그렸다.
일본 전권(全權)의 요구에 응하는 중국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은 얼굴을 찡그리고 승낙을 하는 모양인데 그 뒤에는 총을 멘 일본군이 둘러서 있는 모습을 그렸고, 그중에는 종류(種類)는 영국과 굴욕적 조약을 체결한 것, 어떤 것은 일본과 체결한 것 등을 기록하여 불평등조약 취소 열기를 고취하고 있다. 매 포스타 윗면에는 반드시 손문의 사진을 그려 넣었다. 또 오늘날 중국의 젊은 여자치고 학생이든 아니든 단발 안 한 여자가 없다. 인문(人文)이 미개한 만주 오지에까지 이런 혁신적 기분이 농후한 것을 보면 중국은 과연 멀지 않은 장래에 열강에 뺐겼던 강토(疆土) 권리를 완전히 회수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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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에서 신빈현(新賓縣)>
봉천에서부터 일행은 4명이다. 한 분은 이번에 같이 사경회 선생으로 초청받아 가시는 청주(淸州)에 계신 소열도(蘇悅道)[T. Stanley Soltau] 선교사요, 다른 두 분은 신빈현에 주거하면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선교사 국유치(裕致)[Welling Thomas Cook] 씨와 현대선(玄大宣)[Lloyd P. Henderson] 씨이다. 이 두 분은 북만주중동철도연변(沿邊)에서선교상황을 친제(親祭)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2월 23일 오전 6시 반에 우리 일행 네 명은 북녕참(北寧站)에서 봉해선(奉海線) 차를 타고 무순(撫順)에서 두 참(站)을 더 가 있는 영반참(營盤站)에 내렸다. 이 봉해선은 봉천에서 길림까지 통하는 선로(線路)인데 일본 만철에 대타격을 주는 평행선이다. 이 차에 빈틈이 없이 타고 가고 오는 승객들과 산 같이 실은 하물(荷物)들은 전혀 남만철도로 운수하던 것이었다. 이제 이만한 승객과 하물을 잃은 남만철도는 할 수 없이 파리나 날리고 앉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오전 10시에 우리는 영반에서 마차 두 대를 얻어 두 명씩 갈라 타고 우리의 목적지인 신빈현으로 갔다. 마차는 만주에 특유별(特有別)이다. 차 한 대에 말 네 필도 메우고 다섯 필도 메우는데 그날 우리가 탓던 차들은 각각 네 필씩 메운 것이었다.
우리를 태운 사두마차는 마부의 휘두르는 채찍 소리에 놀라서 눈보라치는 눈 산 사이로 달아 난다. 이날은 과연 찬바람 부는 시베리아 갓가온 만주 오지에 여행하노나 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 지방은 험준한 산맥에 혹 있는 소나무가 있는 것이라든지, 골짜기마다 물이 있어서 얼음을 언 것이라든지 홉사히 희천(熙川)에서 내 본향 강계(江界)로 들어가는 지세와 방불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옛날에 만주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일부인 줄 알겠다.
영빈에서 신빈현 가는 길은 통화현, 집안현, 신빈현 등 세 현이 봉천 통행하는 대통로이다. 그러므로 길에는 물자를 운반하는 마차가 수 천대 연락되어 있다.
우리는 그날 겨우 60리를 가서 무치(木奇)라는 동네에 내려 한 객점에 들어갔다. 조반도, 점심 구경도 못하고 종일토록 오장육부를 들추어놓는 마차 위에서 추움과 싸우다가 굴뚝같이 연기 가득한 새까만 방 한 구석에 팔을 베고 누우니 사지가 녹아 내리고 백 가지 생각이 스러지는 쾌미(快味)는 참말로 새털 베개를 베고 침상에 누운 이상이었다.
못 보던 서양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세 사람씩 되니까 이 객점에 든 주인, 손님, 동네의 일반 토민 등 무려 100여 명이 서양 사람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은 옷을 만져보고 어떤 사람은 가방을 들어보고, 아이들은 내버린 서양 철통을 가지겠다고 싸우는 등 방 안은 오구구 하였다.
저녁 식사가 왔다. 우리 동포들이 개간하서 벼 농사를 한 공덕으로 수수와 강냉이만 먹던 토인(土人)들도 이제는 이 밥맛을 알아 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객점에서도 수수와 강냉이 삶은 수반(水飯)을 주지 않고 이 밥을 주고 있다. 같은 입쌀을 가지고도 그 밥 짓는 법이 우리와 달라서, 아니 밥 지을 줄을 몰라서 밥 맛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토인의 밥 짓는 법은 큰 가마에 물을 많이 부어 입쌀을 삶은 후에 조루로 그 쌀을 건져서 다시 가마에 찌는 것이다.
토인들은 선교사들이 저녁을 먹을 때나 잘 때를 불문하고 그냥 둘러서서 어떤 자는 키 큰 소 목사를 가르키고, 어떤 자는 키 작은 국 목사를 가르키면서 밤새도록 담배만 피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토인들의 노(怒)를 일으킬까 두려워 일언반구의 말도 못한다. 주님 위해 몸을 바친 그들의 헌신적 생활에 탄복을 안할 수가 없었다.
2월 24일 새벽 4시에 우리 일행이 탄 마차는 무치(木奇)를 떠나 식전에 40리를 가서 능가(陵街)에서 조반 겸 점심을 먹었다. 능가는 청 태조의 발상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번화한 장거리 입구에는 커다란 대리석 비가 서 있고 그 좌편 산하에는 굉장한 능묘(陵廟)가 옛날을 말하고 있다.
점심 후 40리를 더 가니 이곳이 곧 우리의 목적지 신빈현이다. 멀리 시가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해주는 최 목사 이하 여러 교우들과 선교사 가족들의 따스한 사랑에 곤비함이 문득 일소(一消)해진다.
이 현(縣) 이름이 국민정부가 통치하기 전에는 흥경(興京)이라고 하였는데 국민정부 직할 후부터는 현 이름을 고쳐 신빈이라고 했다. 현 이름을 고친 까닭은 오늘날 중국의 대통령 격인 장개석 씨가 제일로 싫어하고 꺼려하는 글자가 ‘서울 경’(京)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북경(北京)도 북평(北平)이라고, 흥경(興京)도 신빈(新賓)이라고 고쳤다 한다.
이 현의 호(戶) 수는 3,500여 호 되는데, 우리 동포도 800여 명 살고 교회도 3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가 있다. 이 교회에는 방금 최성주(崔聖柱) 목사께서 필사적인 힘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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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회는 예정대로 오늘 밤부터 시작하였다. 도 사경회이니만큼 여러 지방에서 모여 오신 교우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3,000리나 떨어진 중동선(中東線) 연선(沿線)에서 오신분도 있었다.
분반하여 사경공부하는 외에 매일 오후마다 청년 문제, 주일학교 문제, 만주교회 진흥책 등 토론회를 개최하고 피차의 의견을 교환한 것은 퍽 재미있었고 또 유익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여러 지방에서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남만기독청년연합회 정기총회도 같은 장소에서 열었다. 나도 한 자리를 얻어 방청하였는데 만장한 청년들의 씩씩한 기상, 회칙에 숙달, 의견을 설명하는 도도한 열변, 아무리 보아도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남만 우리 민족운동에 연마훈련된 식견이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남만교회의 기원은 아금(亞今) 20여 년 전에 평북여전도회에서 파견한 선교사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남만노회가 소관하는 교회는 60여 개요, 교인은 3,000여 명이다. 이 3,000명 교인의 거주는 거의 2,000여 리에 널려 있다.
교인의 집단체인 교회가 교인의 생활이 안정되야 교회도 안정될 터인데 교인들의 생활이 부평초 같고 풍전등화 같으니까 지금 남만교회의 장래는 고사하고 현재가 어렵다. 육신의 군축을 당하고 부대낌을 받는 불쌍한 동족에게 하나님의 위로나 얻게 하려고 책 짐을 지고 산간벽지를 찾아 다니는 교역자가 있으나, 한 교역자가 10여 개 교회를 맡아 1,000여 리를 왕래하니 어찌 교회가 되기 바라랴.
우리 교인, 아니 재만동포는 누구를 물론하고 중국인의 태채(太債)를 아니 진 이가 없다. 그중에 다소 여유 있는 이는 봉표(奉票) 폭락으로 앉아서 파산을 당하고 말았다.
장작림(張作霖) 생시에 10원으로 통용하던 봉표가 장작림 사후인 지금은 2각(角)으로 폭락했다.(현재 가격으로 日貨 8전强) 주머니 속에 넣었던 10원은 쥐도 새도 알지 못하게 9원 80전을 도적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되었다. 오르내림이 무상한 중국 통화를 지지하고 있음이 위험하다 하여 현물주의(現物主義)로 백미(白米)를 저장하였더니 백미 역시 폭락하니, 이야말로 엎어지면 코 깨지고 자빠지면 대투 깨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은 교회에 연보할 힘이 반푼어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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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는 할수헐수 없어서 총회에 상납하는 총회비도 보내지 못하였음은 염의(廉義)[염치와 의리]상 여비 문제로 총회 총대도 파견치 못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가긍(可矜)한 일이랴. 경제의 파산을 당하고 토민의 군축을 당하는 불쌍한 동포들은 임사호천(臨死呼天)으로 교회를 찾아 들어오는 이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랑(豺狼)[승냥이와 늑대]에 쫓겨 우리로 찾아 들어오는 양무리들에게 꼴을 주고 물을 줄 목자가 없으니 이 아니 가탄할 일인가! 비교적 평안한 자리에 있는 우리 본국 내 각 교회는 이 쓰러져 가는 남만교회를 위하여 뜨거운 동정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토인들이 동포를 군축하는 일은 지방에 따라 완급의 차가 있을지언정 구축하지 않는 지방은 없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법령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이나 물론하고 새로 이거(移去)하는 동포는 접족(接足)을 해서 살 수가 없다. 그것은 정부령(政府令)으로서 새로 들어가는 신호(新戶)에게는 농지도 주지 말고 집도 주지 말라고 한 까닭이다. 비단 새로 들어가는 사람뿐 아니라 만주에 있는 동포로서도 갑지(甲地)에서 을지(乙地)로 이거하려면 반드시 갑지에서 신호(新戶)가 아니요 구호(舊戶)라는 증명서를 맡아 가지고야 이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갑지 소관청에서는 용이하게 증명서를 해주지 않는다. 갑지 지주가 가혹하여 도지(賭地)도 많고 농리(農利)도 박하여 을지로 옮길 맘이 간절하지만 갑지에서는 증명서를 아니하여 준다. 증명서 없이는 아무 데도 이거할 수 없는 줄을 안 갑지 지주는 도지를 자꾸자꾸 무리하게 올린다.
그러므로 지금은 소작료가 본국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데가 많다고 한다. 아무리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더라도 어디 가서 호소할 데가 없다. 다만 조상지어(俎上之魚)[도마 위의 고기]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 하나님이여, 조상지어와 같은 만주 동포들에게 어서 속히 살길을 주시오 하고 뜨거운 기도를 올렸다.
사경회는 우리에게 느낌 많은 3월 1일까지 마쳤다. 나는 2일 아침에 옛날 예레미야와 같이 재만동포들과 고락을 같이 하는 여러 선생님들의 사랑하는 손을 떠나 마차로 본집을 향하여 떠났다.
오는 길 중에 도중에 공사비 200만 원으로 장작림의 능(陵) 짓는 공사를 한다는 산 뒤를 지나서 봉천을 경유하여 오다가 약속했던 대로 비현(批峴)교회 목사 이보식(李輔植) 씨를 모시고 와서 집에 도착한 3월 5일 저녁부터 본 교회 사경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