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할아버지 안병희 ③ 가짜 해방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14)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석 달도 안 돼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38도선 이남에 들어온 미군은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인 총독부를 이어받아 군정청으로 이름을 고쳤다. 또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건설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무시하고, 기관총을 들이대며 치안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 다음에 인민들한테 맞아 죽을까 봐 도망쳤던 친일 앞잡이 관리와 경찰들을 다시 끌어모아 군정을 실시했다.
“일제 관공서 말단 직원들이 면장도 되고 군수도 되었지. 순사질하던 놈들은 간부가 돼 다시 나타났고, 부장쯤 했던 놈들은 모자에 금테를 두르고 서장이 되었고……. 왜놈이 미국 놈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어. 한마디로 ‘가짜 해방’이었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이 땅에 들어온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건준과 치안대 등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직들은 모두 탄압한 뒤 옛 친일파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사진은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해방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음을 상징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당연히 인민들은 저항했다. 우리 힘으로 진짜 해방을 이루려는 투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밀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제는 친일 주구들을 앞장세워 인민들의 투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945년 10월, 상동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유천 할아버지(안병제)가 테러를 당했다.
“유천 할배는 내게 종조부셨어. 할아버지의 4형제 중 셋째였지. 학식도 있고, 심지도 곧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어. 유천 할배는 상동면에 건준이 결성되자 위원장으로 추대됐는데,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다시 위원장이 되셨지. 유천 할배는 인민위원회가 정한 소작료 3·7제를 관철시키려다 친일 지주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그놈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말았어.”
유천 할아버지는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들이닥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출혈이 심해 위독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몇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테러는 남조선 곳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친일 지주들이 중심이 돼 건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한민당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마구 테러를 가했다. 여운형 선생도 해방 직후인 9월에만 두 번이나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이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고 막을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이를 방조했다. 증조할아버지 역시 지주들이 보낸 깡패들에게 여러 차례 피습 위기에 처했지만, 보위하던 청년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친미로 갈아탄 친일 주구들은 미군의 비호를 등에 업고 미제의 식민지 지배 최첨병이 됐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을 ‘신탁통치 결정’으로 교묘히 왜곡했다. 이러한 모략으로 벌어진 찬탁과 반탁의 논란 속에, 친일에 이은 친미 주구들은 뻔뻔하게도 자신들을 애국자로 둔갑시켜 나갔다.
“모스크바 협정의 핵심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조선반도에 들어온 미국과 소련 군대의 철수 문제였어. 아직 조선에는 정부가 세워져 있지 않아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임시정부를 만들어 놓고 완전한 자주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후견 역할을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지.”
처음에 신탁통치라는 말에 발끈했던 인민들도 차츰 이성을 회복했다. 당시 국내외 정세를 볼 때, 모스크바 협정문의 내용이 미·소 두 나라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었다.
하지만 친일 주구와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미군이 철수하면 자신들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5년간 신탁통치라는 조항에 시비를 걸며 전면적인 거부에 나섰다. 심지어 미국이 즉시 독립을 제안했는데도 소련이 이를 거부했다고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이들이 조장한 찬탁과 반탁 논란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건널 수 없는 골을 파 놓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46년 1월부터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증조할아버지는 밀양 장날에 맞춰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축하 밀양군 인민대회’를 열었다. 밀양군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당 밀양군당이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청년단체와 여성단체 등 민주단체들과 함께 개최한 인민대회에는 1만여 명의 밀양 군민들이 모였다.
아버지도 아침을 먹자마자 동무들과 떼지어 공설운동장으로 몰려갔다. 아침부터 떡반탱이를 머리에 인 할매들이 길목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막걸리 단지와 안주거리를 이고 온 아지매들도 여기저기 전을 펼쳤다. 솔밭에는 아재들이 차일을 치고 국밥을 끓일 솥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권은 인민에게로, 공장은 노동자에게로, 토지는 농민에게로!”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 실시하라!”
“미·소 공위 성공시켜 임시정부 수립하자!”
곳곳에서 구호가 울렸다. 농악대의 풍물 연주와 노래 속에 인민들의 축제 마당이 펼쳐졌다.
“인민대회에서 할아버지가 대회사를 하셨어.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모든 봉건제도를 타도하여 해방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할아버지 말씀에 다들 박수와 환호를 보냈지.”
대회가 끝나자 풍물패들이 굿거리 농악을 공연하면서 대열을 이끌었다. 주석단 대표들이 그 뒤를 따르고, 각 면에서 올라온 단체 대표들이 대열을 이었다. 그 뒤로 인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단결된 인민들의 자주독립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아버지와 동무들도 신이 나서 어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미·소 공동위원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미국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훼방을 놓았다. 미국의 몽니에 발끈한 소련은 신탁통치는 미국이 먼저, 그것도 최소 10년간을 제안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는 넉 달 만에 무기 휴회가 선언됐다.
“미·소 공위의 무기 휴회가 선언되고 며칠 뒤 할아버지께서 잡혀가셨어. 경찰은 좌익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첩보에 따라 조사할 게 있다고 했지. 이는 핑계에 불과했어. 일제 놈들이 걸핏하면 벌이던 예비검속이 미군정에서도 부활된 거야.”
당시 증조할아버지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밀양군 위원회를 조직하느라 무척 바빴다고 한다.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전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등 진보적인 정당들과 전평, 전농 등 대중조직, 그리고 여성계와 문화계, 체육계 등 수많은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민주·진보 진영의 대표조직이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 이렇게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인민당 밀양군당 대표로 민전 결성식에 참석했다.
“예비검속으로 잡아간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쯤 지나 풀려났는데, 할아버지만 풀어 주지 않았어. 할아버지는 부산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재판을 받았지. 혐의는 협박죄와 재산권 침해라고 했어.”
약산 김원봉 장군은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밀양에는 약산은 물론 의열단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증조부할아버지는 이 분들과도 인연이 깊었다. 사진은 약산의 생가지 앞에 세워진 안내판. [사진 제공 – 안영민]
해방 직후 밀양의 친일파로 유명한 신현대라는 자가 증조할아버지를 찾아왔다. 만주에서 직접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우다 고향인 밀양으로 귀향한 김원봉 장군의 거처로 쓰라며, 증조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제안을 받아들여 그 집을 김원봉 장군의 거처로 사용했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서자 신현대는 마음이 바뀌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자기 집을 강탈해 갔다며 고소한 것이다.
“신현대를 꼬드겨 고소하게 만든 이가 당시 밀양경찰서장 박찬현이었지. 밀양에서 친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박찬현은 메이지대학에 다닐 때 학병에 제일 먼저 지원했던 자야. 해방 후 밀양경찰서장이 돼 애국자들을 악랄하게 탄압했지. 그 때문에 인민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어.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박정희 유신독재 때는 유정회 국회의원도 하고, 문교부장관도 했어. 한마디로 밀양의 대표적인 친일분자였지.”
증조할아버지는 재판에서 징역 1년을 구형받았고, 최종적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증조할아버지는 그동안의 과로와 열악한 감옥살이에 췌장염이 도졌다. 결국 병들어 쇠약해진 몸으로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으로 들뜬 지 1년도 못 돼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군 군속으로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창이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하다 해방이 되고 1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1947년 여름, 대대적인 검속을 피해 밀양에서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있는 외가에 의탁하러 간 뒤다. 가장 어린 아이가 남민전 때 일본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평생동지이자 슬픔인 작은아버지 안용웅. 1942년생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런 와중에 큰 경사가 생겼다. 1946년 8월 13일이었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던 증조할머니가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쏟아냈다.
“또 뭔 일이 터졌나 싶어 급히 방에서 나와 봤지. 근데 축담에 누가 서 있는 거야. 가만 보니 아버지였어. 해방된 지 일 년이 돼가도 돌아오지 않아 다들 죽은 줄만 알았던 너거 할아버지가 살아서 우리 눈앞에 턱 하니 나타난 거야.”
일제 말기에 징용을 피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1942년 일본군 군속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지원한 것이다.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노구치 교육대)에서 2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말레이반도 남쪽 끝인 싱가포르의 창이에 위치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한 일본군은 영국이 지배하던 말레이반도를 점령했다. 일본군에 밀려 퇴각하던 영국군 내에서 포로가 속출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은 연합군 포로 감시 역할을 할 조선인 군속을 대거 모집했다. ‘노구치 부대’라고 불렀던 교육부대를 수료한 병사들의 기념사진. [사진 제공 – 안영민]
“왜놈들은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따라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그 협정을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대했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포로 감시 업무는 조선 사람들에게 떠넘겨 버렸대. 그 때문에 종전 후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전쟁범죄자로 재판에 회부돼 처벌받았고, 때로는 총살까지 당했다고 해.”
할아버지는 연합군 포로 청년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일본군 눈을 피해 그들과 친교를 나누었다. 젊어서 서울로 만주로 다니면서 영어를 조금 익혀둔 게 도움이 됐다. 병에 걸려 죽을 고비에 빠진 포로들에게 몰래 약을 전달해 목숨을 구해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할아버지도 전범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도움을 받은 연합군 포로들이 앞다투어 증언해준 덕분에 이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수용소에는 영국군 사령관 버시벌 중장과 그 참모장인 와일드 대령도 수용되어 있었다. 종전 후 전쟁범죄자조사위원회 영국군 책임자를 맡았던 와일드 대령은 할아버지에게 통역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할아버지는 조사위원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게 조선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이를 승낙했다. 이 때문에 귀국이 1년 늦어졌다. 이것도 모르고 가족들은 전장에서 죽은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너거 할아버지가 느낀 게 뭐냐면 왜놈들은 법을 무시하면서 잔인했지만, 영국인들은 법을 사용해 혹독하게 보복했다는 거야. 전쟁 포로의 뺨을 때린 자는 징역 2년, 서로 뺨을 때리게 한 자는 징역 5년, 때려죽인 자는 교수형, 비인간적 학대로 포로를 죽게 한 자는 총살형, 이런 식으로 가차 없었다고 해. 하긴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제국주의 국가였지. 일본이 항복한 뒤 말레이반도를 다시 영국이 통치했으니까.”
할아버지한테 도움을 받았던 연합군 포로 청년들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할아버지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을 방문해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안내를 받아 서울의 고궁을 둘러보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세월은 갈수록 험해졌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로 들어가면서 임시정부 수립의 희망도 점차 꺾여갔다.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동척)을 앞세워 농토를 수탈했듯이, 미제는 동척을 ‘신한공사’로 이름만 바꾸고는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군정청의 소유로 만들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미군정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미제는 일제가 강탈해 간 동산과 부동산을 ‘적산관리청’에 집어넣어 미군정의 소유로 만든 뒤,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민족반역자들에게 불하했다. 이에 저항하는 인민들은 친일 앞잡이 출신 경찰들과 우익 깡패들을 앞세워 가혹하게 탄압했다.
“북조선에서는 토지개혁이 시행되고, 8시간제 노동법이 공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수많은 민주 법률이 공포되고, 일제 식민지 유산과 봉건 잔재를 청산하고 있다고 했어. 할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들으며 나는 참 기뻤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했어. 곳곳에서 우익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탄압받는 남조선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거든.”
이런 경황 중에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중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쳤다. 밀양중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설립된 밀양실수학교가 해방이 되고 바뀐 학교였다. 아버지는 수석으로 합격해 입학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1946년 9월, 아버지는 중학생이 되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