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 [경희궁] <1>
<2024년 6월 8일>
조선의 5대 궁궐 탐방 세 번째 날,
그저께 망종(芒種)에 응하여 여름 단비가 내린다.
[경희궁] 탐방 후 서울역사박물관 관람으로 일정 조정,
순연한 [덕수궁과 환구단]은 7월 6일 탐방 예정이다.
광해군 때 창건한 [경희궁]은 100여 채가 넘는 전각으로,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친 임금의 사랑을 받았던 궁궐인데,
경복궁 중건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은 경복궁으로 이건되었고,
일제강점기 경성중학교, 조선총독부 관사 등이 들어선다.
전각 훼손은 물론 궁궐터 마저 이리저리 뜯겨나가
이제는 제대로 복원조차 어려운, 빛을 잃어버린 [경희궁]
어쩌면 누군가의 눈물일지도 모르는 비를 맞으며,
복원된 전각을 돌아보고 서암에서 하늘을 본다.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관리하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는 달리, [경희궁]은 서울특별시가 관리.
*** 서울특별시 서울역사관이 관장하는 11개 분관 중 하나인 [경희궁], 조선 궁궐의 위상이 이래서야 ~~~.
♣ 1980년 서울고등 강남이전으로 빈터로 돌아온 [경희궁 터], 이미 민간에 매각된 부지야 그렇다 하더라도,
1981년 신축청사로 이전해 온 [서울특별시 교육청], 1985년부터 설립 계획을 세우고 건물을 신축하여
2002년 개관한 [서울역사박물관] 등은 굳이 이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을까???
전시 내용도 알차고 또 접근성이 좋아 [서울역사박물관]을 자주 관람하면서도 때론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는 더 많은 전각들이 복원될 수도 있을텐데 ~~~.
♣ 경희궁 리플릿에는 경희궁을 '1620년에 완성하였다' 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1623년이 정설이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는 경복궁 중건(1865년 ~ 1867년)을 위해 경희궁 주요 전각 5개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헐어
중건 자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의하면,
"서궐내에는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 서궐은 경희궁.
광화문역 8번출구 안쪽
제법 진지하게 심도 깊은 협의도 ~~~.
첫 참가한 공주님도 복지지원금을 내고 ~~~.
10시, 참가자 자기 소개 겸 인사
버스도보 안내
등업 회원 축하 및 인사
지속적으로 내리는 비로 인해 광화문역 구내에서 [경희궁] 개요 설명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으며,
1616년부터 인왕산을 주산으로 인경궁(仁慶宮)을 짓기 시작한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술사의 얘기를 듣고, 그 터를 몰수하여 경희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으며,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1868년)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친 임금들이 사용)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전각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일제 강점기, 1910년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일부 남아 있던 전각들 마저
매각 또는 이건되었고, 그 면적도 축소되어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만다.
광복이후, 경성중학교 자리를 서울중고등학교가 이어 받았으며, 1980년 서울고등학교 강남 이전으로
서울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
*** 일본 조계사에 팔려나간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 법당(正覺院)으로 사용 중.
(이건을 검토하였으나, 지나치게 노후화 되어 이건이 어렵다는 결론으로 숭정전은 새로 복원 건립)
*** [흥화문]은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가, 다시 영빈관 정문이 되었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되돌아 옴.
*** 1898년 고종 때, 궁술 연습장으로 경희궁 내 설치했던 황학정(黃鶴亭)은 1922년 일제가 인왕산 아래로
옮겼으며, 현재도 국궁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몸풀기 준비체조
다행히 그 사이 가늘어진 빗속에 탐방을 나선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
*** [한글가온길] 18가지 한글관련 조형물 중 하나인 [서울의 미소]
'가온'은 '가운데' '중심'이란 뜻의 순수 우리말이며, 2013년 서울시가 한글학회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일원에
18가지 한글관련 조형물을 군데군데 설치, 이를 찾아 걷는 재미를 더한 산책길.
근래 들어 죄를 짓고도 뻔뻔한 얼굴들이 워낙 많은 때라, 법의 여신상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본다.
夜珠峴,
[새문안교회] ***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이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구세군회관,
*** 흥화문이 이쪽으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빛으로 [夜珠峴]이란 지명이 생기고 ~~~.
[한글가온길] 표지석
[흥화문 터]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인 금천교.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복원.
[서울역사박물관] 2002년 개관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 통신시설 보호를 위해 만든 지하 벙커.
밑동이 범상하지 않은 느티나무, 20여년 전에도 수령 380년이라 기재되었던 것 같은데 ~~~.
*** 수령을 기재할 땐, 지정연도를 같이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숭정문] 올 때마다 시선을 가로 막는 서울특별시 교육청 건물, 왜 하필이면 궁굴터에 지었을까.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정조가 이곳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일갈.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일제가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법당(정각원)으로 사용 중.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하월대)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 그 뒤로 일월오봉병을 두고, 천정에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숭정전의 어좌
편전인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서암(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이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 현재 서암을 새겨 두었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숙종대왕 어필 서암] 1708년, 세로64cm 가로 44.5cm 두께 18.5cm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으로,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당시 51세),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진은 모사본이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건립되었다.
1932년 일제가 장충단에 세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이건하였으며 '경춘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었다.
광복 이후, 그 자리에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현판 영빈관)하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200여 미터 서쪽인 현재의 자리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1932년 장춘단에 지은 박문사(博文寺), 왼쪽에 있는 정문이 흥화문.(현판은 경춘문으로 갈아 달았다) <퍼온 사진>
쉼 및 간식
경희궁 탐방은 이 대목에서 일단 마무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자유 관람 후 자유 매식으로 전체 일정 마무리.
[서울역사박물관] 관람 사진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청파님 역사길 덕에 조금씩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유식해지고 있어요~~ ㅎㅎ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즐겁게 함께 걸어요. ^^
경희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거의 잊혀진 곳 같습니다
왕기가 서린 바위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고 텅빈 그 자리,
일부 전각 복원으로 궁궐의 모습을 갗추고
일반에 공개한 지 어언 2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은 서울역사박물관의 뒤뜰같은 느낌.
언젠가, 전각들이 좀 더 복원되고
역사 이야기가 구석구석 녹아들면 달라지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