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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새 언약의 일꾼(김요셉)
고린도후서 3장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오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가리켜서 구약성경 신약성경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데 구약성경이 올드테스타몬트, 신약성경은 뉴 테스타먼트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하는 말은 구약의 일꾼이 아니고 신약의 일꾼이다.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곧 메시아가 나타나신 이 시대가 신약 시대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 구원을 믿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만드시는 이런 일을 한다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를 내려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사는 게 아니고 은혜와 진리의 시대에 사는 것이다. 신약의 일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 고린도전후서 4장 1절말씀부터 설명해 나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며 설명하는데, 이 직분을 받았다.
첫째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다> 하고 설명을 하죠. 이렇게 해서 긍휼하심을 입었더니, 어떻게 합니까? 낙심하지 아니한다.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나타나는 첫째, 특징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둘째는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사람들에게 있어서 드러난 죄가 있고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어요. 또 남들이 아는 죄가 있고 남들이 모르는 죄 곧 나만 혼자 알고 있는 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는 남들이 아는 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 이건 내가 스스로가 알아요. 그래서 이건 내 양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내 양심의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이것을 내놓고 철저히 회개함으로 이 숨어있는 부끄러움의 일들을 다 처리해야 된다는 말이죠.
셋째로는 계율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말하잖아요. 남 속이는 짓 하지 말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계율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 남을 속이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겠다 하는 것이죠.
넷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아니 하고> 이렇게 말씀을 했어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어야 하는데 여기다가 다른 것들을 막 섞어 넣어 뒤죽박죽을 만들어 낸다는 얘기예요.
말세에는 디모데후서 4장 3절 4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게 말세의 현상입니다. 정말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 이 혼잡한 거를 제거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는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우리가 정말 사모해야 할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전함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둘째로, 새 언약이란 무엇인가. 우리 성경에 새 언약이라고 하는 말이 몇 차례 나옵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내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이런 역사 이것이 첫째, 기둥이고요. 둘째 기둥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가셨다가 거기로부터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가지고, 성령에 능력으로 강하게 만드시고, 마귀와 싸워서 이기게 만드시고,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게 하시고, 이 놀라우신 구원의 새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데 이 새 언약이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두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을 제가 몇 군데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도의 자격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열한 제자만 남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 먼저 이 결원이 된 가룟유다 자리에 다른 사도를 채우자, 열두 제자가 채워져야 되겠다. 그래서 맛디아라고 하는 사람을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롭게 채워져야 될 사도의 기본적인 자격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아직 성령 내리기 전이에요. 여기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 가운데도 낙심하여 떨어져 나가지 아니하고 여기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 된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실 때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채우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할 사람이라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속에 첫째는 십자가 권한을 받으신 그 기둥이 세워져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부활의 증인이니까. 성령 충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거잖아요. 이러한 두 개의 기둥이 제자의 기본적인 자격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전도의 주제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요. 그다음에 4절에 가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에도 두 기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 하나는 성령! 그래서 우리 설교에 항상 이 두 기둥이 있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도 항상 이 두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른 예배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찾으신다고 우리 개역 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그랬는데 우리 개정판 성경에서는 영과 진리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근데 사실은 영과 진리라는 말도 잘못된 번역이에요. 성령과 진리로 이렇게 이해를 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냐 우리가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 둘째, 진리로 하는 예배를 해야 한다. 이게 둘째 기둥이죠. 십자가의 도가 진리예요.
고린도전서 1장 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깨우쳐 주고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세 사람으로 변화받고 이렇게 하나님의 새 시대의 새 일꾼이 되는 이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구원에 두 개의 요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3절에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게 뭐냐 하나님이 택하신 게 누구냐 이 두 가지가 나타난 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이 두 가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두 가지가 뭐예요?
성령에 나타남. 또 하나는 진리고, 십자가의 도이 두 가지가 이렇게 나타나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 6장 맨 끝절에서 우리가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셨죠. 여기에도 두 기둥이 나옵니다. <너희는 먼저 무엇을 구해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해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느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셔서 귀신을 쫓아내야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시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라 의는 또 뭐예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건 예수그리스도인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어요.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서 거기서 올리신 보혈로 내 죄를 씻고 양심을 씻어서 새롭게 변화 받을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입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 여러 곳에 이 두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 될 것인가? 아까 고린도후서 4장 1절부터 나오는 이 말씀 새 언약의 사람이란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공격하면서 사는 사람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되어야지 하겠습니다. 이 마지막 때 싸구려 구원론 가르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후원을 막 싸구려로 팔아먹는 인간들이 있고요. 성령 안 받아도 된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 위에 서서 주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도록 인도하여주옵소서.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2) 산 위와 산 아래
마가복음 9장 20절-29절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산 위와 산 아래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변화산 이야기로 나와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갈보리에 산 위와 산 아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의 방주가 산 위에 가 머물렀더라. 산 위에서부터 방주에서 나와 내려오는 장면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물론이고 그 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모든 법도를 모세에게 내려주시고 다 기록하게 하셨죠.
엘리야의 경우도 갈멜 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하고 대적하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바알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아무리 소리 지르고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을 내려 주시옵소> 하고 부르짖어도 불은커녕 아무것도 내려오지도 않았지만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불을 내려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홀랑 태우고 제단까지도 다 홀랑 태워버리는 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역사하신다,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산 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예수님의 변화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산 아래에 계실 때에는 평범한 우리 사람들처럼 보이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 산 위에 올라가시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변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어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제자들이 들었는데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다고 하는 이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이렇게 나누고 있었어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산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마디로 산 위에는 신비가 있어요. 산 아래에는 신비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되 가장 중요한 거는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바르게 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게 이 신비를 체험하는 거다, 기적을 체험하는 거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역사하실 때도 마찬가지, 제일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막 쏟아붓는 거였어요. 그리고 마지막 열째 재앙이 피를 가지고 그래서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놓은 이스라엘 집에는 재앙이 들어오지 못하고 이 피가 없는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재앙이 들어가서 장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에 그들은 홍해를 건너는 것도 하나님께서 또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어요.
우리 신앙생활의 출발은 바로 이 신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변화산 위에 어떤 신비가 나타났느냐 중요하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거죠. 그분이 변화산 위에 올라가셔서는 변형이 되시잖아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분을 높이고 이분 앞에 굴복하는 모습을 볼 때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이시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이에요. 이 놀라운 신비를 첫째로, 해석해 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비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오묘하신 분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이거를 우리가 어떻게 언제 깨닫느냐 우리도 이렇게 산 위에 올라가면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거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이 헬라말로는 무스테리온인데 영어로 하면은 미스터리 또는 시크릿, 우리말로 시크릿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미스터리라고도 번역을 하고 영어 성경은 두 가지의 번역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 우리말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고 신비다. 이것이 언제 깨달아지게 하느냐, 언제 나타나 주셨느냐? 이것이 변화산 위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변화산 위에 올라가는 이런 신앙을 가질 때에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로는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어요. 모세와 엘리야가 대관절 누구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모세는 율법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 선지자예요.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 율법과 선지서 다시 말해서 이 두 책은 곧 성경입니다. 성경의 성취 이것이 변화 산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변화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거죠. 율법이 깨달아지고 선지서가 깨달아지고 율법과 선지자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지고 그래서 높은 곳에서 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산 위에서는 두세 분이 모여 이야기하는데 너무너무 신비로운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얘기했어요.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또 얘기했어요.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바로 복음이잖아요.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또 다른 말로 이것이 바로 진리라 하는 거죠. 우리 믿음이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이 될 때 드디어 이 하나님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진리의 세계가 열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산 아래에는 무엇이 없느냐. 세 가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면 여호와 이런 소리는 할 줄 알아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은 목사들도 몰라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다라고 말하면 이단이래요. 이런 멍청한 인간들이 어디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풀리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도 전혀 풀리지 않는 거예요. 그냥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알아야 되고 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닫고 예수님을 깊이 연구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생활이 이루어져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이 없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없어요. 모세와 엘리아가 우리에게 없어요. 우리가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 땅 아래 산 아래에서는 전부 성경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정말 성경 말씀에 열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 돼요.
셋째로는 이 땅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진리잖아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이 표적을 갖지 못하면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 거예요. 표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계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거를 모르는 겁니다. 이 다음 세상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거 전부 모르고 사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이 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살아야 돼요. 그거 따라가면 멸망이고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더욱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이 말씀을 열심히 읽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세상 사람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길이 뭐냐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면 부활이 있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잖아요. 나는 부활을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달게 지고 못 박혀 죽겠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이란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금식하고 기도해서 산 위의 생활을 통해 능력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속해서 세상 사람들 따라가지 않고 하늘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늘 체험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이사야 40장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첫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거를 살펴보고, 둘째,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할까 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아름다우신 분이 보내주신 선지자들, 아름다우신 그분을 전파하는 그러한 선지자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죠. 이 세상에 하나님만이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다.
둘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항상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살아가고, 세상에서 부정적으로 살지 아니하고 긍정적으로 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말을 복음이다, 복된 소식이다, 이렇게 말씀하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천하노라”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에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복음은 요약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에요.
둘째로 본문에 있는 말씀 보면 누구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느냐 하는 그 전도의 대상이 대상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첫째는 시온에 전하는 자요,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요, 셋째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유다의 성읍들에게 전하는 자다 하는 것입니다. 첫째 시온에 전한다. 예루살렘에 전한다. 유다의 성읍들에 전한다. 이렇게 같은 말인데도 세 가지로 표현을 다르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을 억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고 하면은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처녀, 딸 그러니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얘기로 시온이라 하고, 예루살렘이라고 한 것은 결혼한 여자를 가리켜서 예루살렘이라고도 하고 그랬어요. 예루살렘은 이미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 표현하는 설명이고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결혼하지 않은 순수한 처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하냐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할 것이냐 첫째는 시온에 전해야 된다. 그다음에는 예루살렘에 전해야 한다. 또 한걸음 더 나가서 유다의 성읍들에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 것이냐 시온이다, 예루살렘이다, 유다의 성읍들이다, 이 세 가지로 나오는데 이것의 공통점이라고 한다고 하면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첫째가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말씀하시죠.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첫째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고, 둘째 힘써서 소리를 높여야 된다 그랬고요. 셋째로는 아름다운 소식을 이번에는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는 자여” 되는 거죠.
첫째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이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첫째 높은 산에 올라가라 그 말은 첫째로는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첫째,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라 그 말이죠.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인격의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더 중요한 거는 우리가 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늘 아름다운 교통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이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이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예수님 믿노라고 하면서 옛날 사람들보다도 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는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소리를 높이라고 하는 말은 첫째, 언제 우리가 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느냐 첫째는 확신이 있을 때 소리를 높여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그 소식, 우리가 이 복음을 가지고 전파할 때에 첫째는 확신을 가지고 외쳐야지 한다 하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외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증인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이 증인은 도덕적인 증인이 돼야 해요. 셋째,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사람은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거 전해라 하고 주신 말씀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셋째로는 유다의 성역들에게 전하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물었어요.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너희가 나와 함께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아직도 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늘 보고 살면서도 아버지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빌립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열두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좀 보여주세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래요.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얘기하면 하나님을 내가 볼 수 있으면 하나님을 나도 믿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을 보여줄 수도 없겠지만 하나님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하나님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저 태양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데 너무 눈이 부셔가지고 그거를 억지로라도 똑바로 보고 있으면 결국 우리 눈이 멀어버리고 만다 그러죠. 그렇게 되는데 하물며 그 태양을 지으신 이 거룩하신 하나님, 저 태양보다도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 몇천 배 큰 어마어마한 그러한 별, 해를 다 만드시고 이 우주 공간에 자리를 다 잡아서 세워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했고,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말씀해요. 우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그 여러 가지 증거는 그거를 이렇게 보여주셨는데,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소경이 눈을 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게 되고 그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그렇잖아요.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고 이런 놀라운 기적이 막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이런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고요. 둘째로는 우리의 성결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또 되어야지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로는 우리의 의로운 삶, 불의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멀리 던져버리고 의를 행할 수 있는 거룩함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생활을 보여주게 될 때에 우리 뒤에 있는 많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로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로구나 하면서 우리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물론 답은 간단하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지혜로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지혜로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다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입술로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되지 않게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 세 가지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옵소서.
힘써서 소리를 높여 담대하게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마지막 때에 신실한 일꾼,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4) 나귀의 비밀
[마 2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야기가 나와요. 오늘은 이 나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성경에 나타나는 나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제일 처음 나타나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받아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왕을 만나러 가는데 “나귀를 타고 가더라” 하는 것이다. 왜 나귀를 타고 갑니까? 그런데 나귀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이 좁은 길을 만나 길옆 벽에다가 발람의 발을 다치게 했습니다. 발람이 화가나 회초리를 가지고 나귀를 3번이나 때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귀가 갑자기 발람을 향해서 “왜 때려” 하고 사람 말을 하니 발람도 깜짝 놀라서 짐승이 말을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사람과 대화를 하듯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귀가 발람을 향해서 사람의 말로 왜 때렸나고 이렇게 물었다는 이야기는 신약성경에서도 설명을 해주는데 왜 말 못 하는 짐승이 사람의 말로 “누구를 책망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왕을 만나러 가는 발람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발람을 책망한 것이 바로 나귀였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선지자들 이 세속에 물든 타락한 선지자들을 향해서 책망할 수 있는 나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나귀가 누구일까? 이것이 나귀에 대한 이야기의 첫째이다.
둘째는 또 나귀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불러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해 내시고 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새롭게 세우시는데 모든 계획을 수행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쓰셨어요. 거기에 나오는 나귀는 암나귀이다. 암나귀 한 마리를 잃어버려 사울의 아버지가 사울에게 명령했습니다. “가서 나귀를 찾아와라” 어디로 도망갔는지도 모르는 나귀를 찾겠다고 동서남북 아버지 명령에 순종해 4일 길을 돌아다닙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사무엘이 있는 곳 가까이 왔는데 그를 따라다니던 종이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선지자를 한번 만나보면 좋겠습니다.” 하여 선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십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온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아라”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에서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가 이런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그 과정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그냥 나귀 하나 잃어버린 것만 생각했는데 나귀를 잃어버린 것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귀를 통해서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인도하시고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아 주시는 하나님은 나귀라고 하는 짐승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더라” 왜 나귀를 타셨다고 하느냐?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심만을 나타낸 것이지, 왜 나귀를 타고 오셨느냐, 하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사실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나귀의 특징이 무엇이고, 또 어떤 상징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당나귀의 특징이 무엇이냐? 첫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예요. 이 말은 나귀는 귀가 크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특별히 큰 귀를 가지고 있다. 귀가 크다고 하는 거는 하나님 말씀 잘 들으라는 거죠. 우리가 귀가 작아서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요. 귀가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어야 되겠는데 이 나귀 귀가 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짐승은 다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짐승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며 내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여기서 나오는 개는 무엇이고, 돼지는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너희를 보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거기서 양은 뭔가요? 양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전도하려 내보내는 열두 제자 또는 70명의 제자들을 말하고, 이리는 이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이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귀라고 하는 놈은 대관절 무엇을 상징하느냐? 이게 다 우리 사람인데 사람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이냐? 첫째는 귀가 큰 사람.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 말씀 잘 들어라> 하시는 건데 인간들은 이 큰 귀를 가지고 사람들 소리 듣기에만 신경을 쓰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심지어는 마귀 소리를 듣는 일에 또 열중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없고,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이런 가련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나귀란 놈은 아주 고집이 쎈 놈으로 나타나요. 이 나귀는 고집이 아주 쎈 놈의 대표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3:13 유월절 규례를 쭉 설명하는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많은 짐승들 중에서 우리 집에서 키우는 소, 양도 아니고 나귀의 첫 새끼를 대속하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그럼 나귀란 무엇이고, 첫 새끼라는 말은 숫컷이라는 말이 없고 암컷이든 첫 새끼는 대속하라는 것입니다. 제사법에도 보면 번제나 속죄제나 전부 숫컷인데 화목제에는 암컷이나 숫컷이나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는데 이 첫 새끼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하는 말씀도 보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암놈이 되었거나 수놈이 되었거나 처음 낳은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3장에 모세에게 주신 명령인데 십계명이 오기도 전부터 벌써 유월절 유래를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셋째 특징은 고집이 쎌 뿐만 아니라 정욕도 아주 굉장히 쎈 놈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서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에스겔 23장 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정욕이 강하냐? 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의 하체는 나귀와 같다”라고 말을 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인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나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또 이 유대인들이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나귀가 이렇게 음란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귀가 큰 놈이고 고집이 센 놈이고 셋째로는 음란한 놈이다. 그래서 대속하라고 하시는 거죠. 이것을 꺾어버려야 하고 죽이고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특징은 체력이 아주 강해서 여러 가지 기후에도 이놈은 잘 견딘다고 하는 거예요. 적응을 빨리하고 잘 견딘다, 그러니까 당나라에 있던 나귀를 우리 한반도로 데리고 와서도 잘 적응해서 컸다. 이것이 나귀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들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나귀에서 내려버리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다음에는 무거운 짐을 싣고 또 채찍에 맞고 어린 애들한테도 조롱을 당하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나귀의 운명인데 지금 백성들이 나를 보고 환호한다면 내가 잘나서 환호하는 줄로 착각하면 큰일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한 마리의 나귀다”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한 마리 나귀에 불과합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참 놀랍게 하시는 말씀이 다른 짐승들은 다 제쳐두고 나귀에게만 첫 새끼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는 거잖아요. 또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어린 나귀 중에서도 첫 새끼여야 되는 거예요. 장자라는 말입니다. 나를 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장자면 무슨 권리를 자기고 있어요? 애굽에서 장자들은 다 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하나도 안 죽이고 다 살려내셨어요. 그래서 장자는 마땅히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3절에 <나귀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바로 뒤에 <너희도 너희 중에 맏아들은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지니라>
지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중요하느냐? 나귀가 더 중요하느냐? 이렇게 볼 때 첫째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왜 수 많은 짐승들을 다 버려두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 예수님께서 어린 양 한 마리가 되셔서 내가 너를 대속하기 위해서 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린 양 예수님을 나를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됩니다. 동시에 깊이 깨달아야 될 것은 내 등에 태우신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한 제물로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깨달았어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허다한 짐승들 가운데서 특별히 나귀를 택하셔서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장차 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므로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이 나귀를 위해서 대속하실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셔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면 나귀는 뭐예요? 나도 내 몸을 불살라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고 죽기까지 귀한 사역을 감당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1장에서는 나귀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여기는 어린 새끼 나귀만 간 것이 아니고 어미 나귀도 같이 간 걸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둘 다 같이 가요.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게 아니라 이 두 나귀를 다 타고 들어가셨다> 그래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그렇게 안 돼 있는데 마태복음만의 특징이에요. 이렇게 두 나귀를, 어미와 새끼를 같이 데리고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어미와 새끼를 함께 대속하시느라고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면서 정말 주님 앞에 더욱 충성하고 주님 잘 잘 섬기는 일꾼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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