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3일 금요일, 2019년의 추석날이다.
해마다 그랬지만 올해 역시 추석이라는 단어는 내게 아무 느낌도 없고 의미도 없다.
설레지도 않고, 먹을 것이 푸짐하지도 않고, 몸이 편하지도 않고, 마음이 느긋하지도 않다.
지나온 추석들과 똑같이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다.
그래도 시간은 너무너무 잘간다.
일어나서 한 일이라곤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덮어쓰고 뉴스 한 줄 본것 뿐인데 해가 다 져버렸다.
저녁을 챙겨 먹고, 무슨 자동화 기계처럼 1박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배낭을 꾸려 집을 나왔다.
바깥 날씨는 생각보다 싸늘하고, 꼬박 이태를 녹아내린 나의 몸은 어슬어슬 춥고 한기가 든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대합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부산-인천간 거리가 그렇게 멀었던가, 어제 저녁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다음 날 아침이다.
사람들은 모두 차안에서 내방처럼 뒤로 드러누워 잠도 잘 자더마는, 나는 왜 잠도 안 올까?
근 6시간을 앞만 주시하며 허리 꼿꼿이 세우고 왔더니 전신이 다 아프다. 주리가 틀린다.
터미널 주변에 있는 해장국 집에 가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날은 샜지만 주변은 아직 어스름하고, 멍한 정신에 몸살기까지 있는데 밥은 왜 그리 맛있던고?
뜨끈뜨끈한 황태국에 공기밥 한 그릇으로 굳었던 몸이 풀리고 흐릿한 정신이 또렸해졌다.
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대합실로 들어오니 아이구, 무슨 사람이 그리 많아, 왁작왁작 한다.
(인천항 출발)
붕~ 하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배가 출발했다. 인천에서 백령도를 향하여.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괜히 울적해지고, 서운해지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다.
미리 계획한 여행이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여럿이 가고, 반드시 돌아올 것인데 왜 그럴까?
하여튼 배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4시간을 꼬박 허리 꼿꼿이 세우고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옹기포 등대해안 가는 길)
다시 붕~ 하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배가 백령도에 도착했다.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몸은 장작처럼 굳어가고 속은 울렁거려 천장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깨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밖에 나오니 내가 제일 먼저 나왔더라.
먼저 맑은 공기부터 한모금 들이마시고, 앞을 보니 가이드가 피켓을 들고 마중 나와 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나에게 길을 안내할 사람이 아니더냐, 정말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가이드를 따라 숙소에 와서 방 배정받아 짐 풀어놓고, 점심 먹고, 본격적인 관광길에 올랐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일이라곤 배 탄것 밖에 없는데 배는 왜 고프며, 밥은 왜 또 그리 땡기던고?
역시 나는 밖에 나가야만 기운이 나고 정신이 맑아지는 타고난 천태 역마살이 아닌가 싶었다.
(등대해안)
관광시작으로 제일 먼저 온 곳은 인천시 백령도 옹기포에 있는 옹기포등대 해안이다.
등대의 해안에 있다고 등대해안이라고 부르는데, 경치가 사람 입 떡 벌어지게 하는 곳이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산길로 돌아 들어가면 갑자기 기암괴석과 절벽으로 그림이 펼쳐진다.
바닷가로 푹 꺼진 이 등대해안은 잔잔하고, 포근하고, 아늑하여 따스한 내방같은 느낌이 든다.
(산꼭대기에 등대)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펼쳐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사람들은 놀라 감탄사를 연발하고,
저마다 그것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울퉁불퉁한 바윗돌에 이리 펄떡 저리 펄떡, 정신이 없다.
나도 덩달아 울퉁불퉁한 바윗돌을 밟으며 이리 펄떡 저리 펄떡, 풍경 잡느라 정신이 없다.
누가 말했던가, "남는 건 사진 뿐" 이라고. 우리는 추억을 남기기 위하여 사진을 엄청 찍었다.
저마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재고 찍고, 마누라 어깨 손 턱 얹고 찍고, 남편 허리 끌어안고 찍고,
친구들 불러서 엉거주춤 찍고. 보다보니 또 새로운 곳이 나와서 찍고, 앞모습 찍고, 뒷모습 찍고,
둘이 찍고, 셋이 찍고, 시간이 되어 가려고 하니 미련이 남아서 다시 헐레벌떡 달려가서 찍고,
(사곶해변)
이렇게 등대해안의 신비를 카메라에 가득 담아서 두 번째 코스인 사곶해변으로 왔다.
사곶해변은 등대해안과 정반대로 사방이 탁 트여 하늘은 높고 바다는 끝이 없다.
바닥은 부드럽기가 비단같고 모래가 얼마나 촘촘한지 두발로 쾅쾅 굴려도 꺼지지 않는다.
조용히 감상하며 보는 기암괴석에서 온몸으로 뛰고 노는 체험까지 더해 완전 신바람 났다.
(사곶해변. 천년기념물 제391호)
사곶해변의 사빈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대한민국 백령도에 있는 사곶해변 두 곳 뿐이라고 하며,
특수한 지형과 지질성을 가지고 있어 비행기가 이·착륙 할수 있어 천년비행장이라고 한다.
6.25 전쟁 때부터 최근까지 군사비행장으로 사용했으며, 1989년 초까지 군사 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통제되었다가 해제되면서 하계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지금은 해수욕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바다의 도시 부산, 그 부산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처음 봤나, 그러나 부산바다와는 다르다.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모래밭에 바닷물이 바람을 타고 철석 밀려오면 가슴이 쿵 하고 뛴다.
물이 물을 밀고 오다가 바람이 불면 옆으로 확 퍼져 모래밭에 하얀 선을 그으면서 생기는 포말.
포효하듯 펄쩍 뛰어올랐다가 푹 꺼져 부서지는 부산 해운대와는 파도의 성질부터 천지차이다.
높은 하늘, 넓은 바다, 부드러운 모래, 선을 긋고 달리는 색다른 파도에 우리들은 흥분되었다.
그저 좋기만 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하여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말들은 다 내뱉았다.
그러다 카메라맨을 불러서 그나마 힘이 있을 때 뛰어봐야 된다면서 일명 점프사진을 찍었다.
마음만큼 높이 뛰지는 못했지만 짧은 그 순간에 뛰면서 느끼는 그 공기가 황홀경에 빠트렸다.
(서해최북단백령도)
등대해안에서 마음 풀고 사곶해변에서 몸까지 풀고 '서해최북단백령도비석'까지 왔다.
"야! 내가 서해 최북단까지?" 서해 최북단이란 말에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약간 울적했다.
이제 서해에서 북쪽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아쉬운 생각에 감정이 요동쳤었나 봐.
혼잣말로 "서해최북단백령도" "서해최북단백령도" 하면서 비석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와는 감정도 느낌도 생각도 아주 딴판인 것 같더라.
서해최북단이란 비석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데,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매 같았다. 사진같은 건 안 찍는다고 고개 살래살래 흔들던 사람도 번개같이 올라 사진을 찍고,
인물이 뒤섞이고 가려져서 조금만 비켜달라는 신호를 보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찍어대었다.
아니,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렇까? 차를 타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오기 힘든 곳이어서 그렇지 싶었다. 부산에서 백령도까지 오는데 이틀이나 걸렸으니까.
그리고 서해 최북단이라는 의미에 꼭 인증을 남겨두어야 되겠다는 민족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해최북단 비석앞에서는 일행 모두가 단독 인증사진을 다 찍었으며 모두 흡족해했다.
그렇게 대부분 독사진을 원하고 인증사진 남기기를 원하는 가운데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나는 일행 모두가 나오는 단체사진이 좋고, 자신도 모르게 찍힌 자연스런 사진이 좋다.
그래서 항상 어디가면 걷는 모습, 먹는 모습, 감상하는 모습 등, 자연스런 사진을 많이 찍어주고,
혼자 무슨 글자앞에서 어색하게 폼 재지 말고 단체로 찍어 그날의 추억을 간직하자고 외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