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모님께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의 의무를 요구한다
이 교본의 다른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것도 우리의 임의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통과 박해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로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맞아들일 수 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어질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한다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찾아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다 보면 때때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은 이처럼 서로 반대되느 요소가 섞여 있어서 분리될 수 없은 것이다.이를테면
고통 없이 승리가 없고, 가시관 없이는 왕좌가 없으며 쓰라림 없는 영광이 없고, 삽자가 없이는 왕관이 있을 수 없다.
하나를 얻고자 손을 뻗으면 다른 하나도 함께달려 오게 된다. 이 원리는 우리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모님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그중 우리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골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모님이 겪으시는 고통을 함께 하지 않으면서 성모님이 누리신는 기쁨만을 함께 나눌 수 는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 성인이 했던 것처럼 성모님을 모시고자 한다면(요한 19.-,27 참조)
성모님의 모든 면을 바아들여야 한다.
그럼으로 만일 우리가 성모님의 어느 한 면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성모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성모 심심이란 성모님의 고귀한 성품과 사명의 온갖 측면을
우리 삶 안에서 재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주된 관심을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볻받아야 할 최상의 모범으로서 성모님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값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노력으로 성모님을 따르려고 힘을 쏟지 않는다면, 결국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완전해질 수 없다
성삼위께서 성모님을 맞아 그느리시고 성모님 안에 뜻을 세우시고 성모님으로 하여금
그 뜻을 드러내도록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아듣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모님은 모든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지만, 그러한 우리의 찬미는 성모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몫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성모님과의 일치만이 성모님께대한 신심을 완성하는 것이다.
일치란 성모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데 성모님의 삶은 찬미를 받는데 있지 않고 은총을 전달하는데 있다
성모님의 한평생과 사명은 먼저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 다음으로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었다.
아구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의 말처럼 성삼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깊이 생각하신 끝에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쓰시려고 성모님을 준비하시고 창조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주님을 잉태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부터 놀라운 일에 발을 들여놓으셨고 그 후로 줄곧 집안 살림을 맡아 돌보는 바쁜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의 맡으신 이 일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나자렛 마을에 국한 되었으나 이 작은 집은 곧 오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당신의 아드님은 인류 안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을 돕는 성모님의 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나자렛으로부터 크게 번창한 구속 사업은 성모님 없이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돌보아 드린다는 것은 단지 성모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 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직은 바로 이렇한 성모님의 어머니 역활을 거들어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로다' 하고 말씀하시 것과 같은 의미로
'나는 사도직이로다' 하고 선언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혼들을 돌보는 어머니 역활은 성모님의 본질적 임무이고 성모님의 삶 자체이므로 우리가 성모님의 어머니 역활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성모님과 참으로 일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는 영혼들을 위한 봉사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미 역활을 하지 않는 성모님'과 '사도직 활동을 하지 않는 신자'는 일맥상통한다. 이 두 경우는 모두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며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레지오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님과 사도직이라는 두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라는 단일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원리 안에 신자 생활의 모든 본질이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떠한일을 이루고자 할 때 행동는 전혀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아무가치도 없다.
이와 마찬기지로 성모님께 말로만 봉사를 드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사도직 임무가 '내게도 일이 주어지겠지" 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저절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태만한 신자들은 아무 일도 맡지 못하는
상태가 계쇡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가 되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은 사도직 활동을 착수하는 것이다.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성모님은 곧 우리의 활동을 당신 품에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어머니 역할 안에 넣어 주신다.
더욱이 성모님은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실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성모님처럼 큰 힘을 지니신 분이 나약한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하느님 섭리의 한 부분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 사업을 하지 않으신다.
성모님이 간직하고 계시는 은총의 보화는 넘쳐흐로고 있지만 우리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은 그 은총을 나누어 주지 못하신다. 만일 성모님의 바라시는 대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신다면 온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회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들이 협력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한다. 따사서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이 어머니의 역활을 다 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영혼들은 굶주려 죽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내맡기는 사람들을 성모님은 누구라도 열렬히 환영하시며 거룩하고 알맞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약하고 부적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활용하실 것이다.이와 같이 어떠한 사람들이라도 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가장 미약한 사람이라도 성모님의 지니신 힘을 영혼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사람을 통하여 성모님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햇빛이 맑은 유리창으로는 눈부시게 들어오지만 때가 잔뜩 낀 유리창으로는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조상이 범한 죄를 기워 갚기 위해서 십자가 나무를 고통과 사랑 속에 함께 지고 가신 새로운 아담과 하와가 아니신가? 예수님은 샘이시고, 성모님은 그 수로이시다. 이 은총으로 우리는 영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우리의 천상 보금자리를 되찾게 된다."
"주님께서 어머니를 받드셨듯이 우리는 자비로운신 성모님을 우릐의 모후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하느님 은총의 중재자로 하느님 보화의 분배자로 높이 받들자. 성자께서는 당신 왕국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으로 어머니를 빛나게 해 주신다.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업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협조자로서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님과 일치하셨다.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구원사업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성모님의 왕국은 성자의 왕국처럼 넓다. 따라서 성모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황 비오 12세 / Pope Pius Ⅻ : 1940년 4월 21일 및 1940년 5월 13일 강론)
4.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구실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조직에 결함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돕기 위해서 성모님과 더불어 완벽한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성모님께 드리는 봉사의 선물은 가장 최고의 품질이여야 한다.
언제나 힘차고 능숙하며 꼼꼼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통상적인 레지오 활동이나 확장 사업 또는 단원 모집 등에서 층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저지른 쁘레시디움이나 단원들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해서 때때로 단원들은 '나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성모님이 뜻하시는 대로 좋은 성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립니다." 하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변명은 대개 자신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일종의 미덕로 돌리려고 하는 신자들로부터 듣는다.
이들은 단체가 세운 규칙에 따라 자신의 노력을 바치는 일은 마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하 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우리가 큰 힘을 지니신 성모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으므로 하찮은 우리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는 크든 작든 별로 문제게 되지 않는다는 식의 인간적이 해석을 하거나 잘못된 결론을 내릴 위험성마저 있다.
이는 마치 백만장자와 동업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 "무엇때문에 내가 이미 넘쳐 흐르는 공동 기금에 몇 푼 더 보태려고 기를 써야 하는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제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에 나설 때 그들의 자세를 좌우하는 기본 원리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즉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이 쓰시는 단순한 도로만이 아니라 인류의 영혼을 영신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성모님의 참된 협력자라는 점이 이 원리의 핵심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에서는 한쪽에서 모자라는 것을 다른 쪽이 보충해 준다.
단원은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모든 것을 성모님께 내어 드리고 성모님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모든 것을
성모님께 내어 드리고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순결과 능력을 당신 자신과 함깨 단원에게 내어 주신다.
성모님과 레지오 단원은 양쪽이 서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단원 쪽에서 이러한 동반자 정신을 준수하면 성모님은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활동 사없의 성패는 오로지 레지오 단원 쪽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단원은 모든 지능과 능력을 세심한 방법과 인내심으로 가다듬어,
이 협동 사업에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가령 단원들이 활동에 쏟는 노력과는 별도로 당신이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뜻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레지오 단원들은 모든 일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여기며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끝없이 신뢰하고 언제나 최고도의 노력을 쏟아야 하며 성모님을 신뢰하느느 마음이 크면 클수록 단원들의 정성과 노력도 그만큼 깊어져야 한다.
이 말은 온전한 마음과 열성에 찬 조직적 활동이 서로 뒷받침이될 때 매우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이 원리에 대해서 성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기도드릴 때에는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바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며 또한 우리가 활동에 나설 때에는 마치 모든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하면서 활동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활동이 쉽고 어려움을 스스로 가늠하여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를 판단하는 등의 생각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세속의 일을 다루는 데도 그런 타산적인 정신으로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영신적 사업에 그런 약삭빠른 정신이 스며들면 활동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은총을 잃게 되므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더욱이 인간의 판단은 믿을 수 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일이 일시에 무너지는가 하면,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열매를 끝내 손안에 넣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마는 경우도 있다.
영신 세계 안에서 이기적인 영혼은 점점 보잘것없이 작어져서 마침내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끝없는 노력뿐이다.
레지오 단원은 모든 임무에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가볍게 해낼 수 있는 활동거리인 경우 그 일을 끝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적은 노로력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시인 바이론(Byron)의 말처럼 '모기 한 마리 잡는 데 헤라크레스의 몽둥이를 휘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그들의 활동이 직접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단원은 일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서 맡은 일이 크든 작든 성모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모님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 내 필요하다면 기적까지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온갖 정성을 쏟는다면, 성모님은 큰 힘을 보태 주시어
우리의 미약한 활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신다.
만일 단원이 할 수 있는일을 다 하였는데도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면 성모님은 그 남은 부분을 채워 주시어 단원과의
공동 사업이 이상적으로 끝나도록 해 주실 것이다.
레지오 단원이 임무를 완수하는데 팔요한 것보다 열 배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 노력은 조금도 허비된 것이 아니다.단원들의 모든 활동은 성모님을 위하여 또한 성모님의 거대한 계획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 아닌가?
성모님은 이렇게 남는 노력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크게 불리시어,
그 은총을 주님의 가족 가운데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나지렛의 성실하신 주부의 손에 맡겨진 것은 무엇이든 조금도 유실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레지오 단원의 노력이 성모님께 마땅히 바쳐야 하는 정도에도 비치지 못한다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시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손은 묶이고 만다.
그리하여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독특한 은총의 계약은 단원의 무성으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이 단원의 능력에만ㄴ 의존하게 되므로 영혼들은 물론 단원 자신에게도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이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단원이 자신은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자신의 불충분한 노력이나 허술한 활동을 정당화한다 해도 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일이다.
또한 그러한 잘못된 방식으로 성모님께 의탁하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노력마저 위축시킨다면 이는 나약하고 떳떳하지 못한 태도이다.
그러한 단원은 자신이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짐조차 성모님이 어깨에 떠넘기려 하는 것이다.
기사도 정신을 어느누가 그런 이상한 태도로 귀부인을 모시려 하겠는가!
따라서 레지오 단원과 성모님의 협동에 관한 근본 원리에 대해서 마치 새로운 주제를 다루듯이 한 번 더 설명하고자 한다.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성모님께 바쳐야 한다. 성모님은 단원이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있는데도 그것을 보충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레지오 단원이 하느님의 은총의 보고에 바쳐야 하는 노력과 방법과 인내심 등을 성모님의 면제시켜 준다면,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은총을 아낌없이 베풀고자 하시지만 오직 정성을 다하는 영혼들에게만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레지오의 자녀들이 당신이 간직하고 계신 무진장한 은총의 보화를 마음껏 꺼내 가기를 바라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봉사하라 하신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빌려 단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계신다.
레지오 단원은 오로지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고 순화하며 완덕을 위해 노력하고 인간 본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위대한 힘이 된다. 이 힘은 결국 송두리째 산을 드어내어 바다를 메우고 온 땅을 평탄하게 고르며, 곱은 길을 바르게 펴셔 곧장 하느님 나라에 어어지도록 한다.
"우리는 모두 쓸모없는 종들이지만 매우 알뜰하신 주인님을 섬기고 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 한 방울로부터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에 이르기가지 아무것도 낭비하시는 일이 없다. 나는 이 책이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될지 알지 못한다. 내가 이 책을 다 마칠수 있을는지, 아니면 나의 펜 밑에 펼쳐져 있는 이 한쪽만이라도 끝까지 다 쓰게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남은 힘과 여생을 많든 적든 이 책을 마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프레데릭 오자남 / Frederick Oza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