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정신분석 강의 9> 생물학적 죽음과 심리적 죽음: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2019. 11. 26. 23:20
생물학적 죽음과 심리적 죽음
―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다시 읽기
I
나는 개인적으로 1920년에 출판된 프로이트의 이 문제작과 인연이 깊다.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기획한 프로이트 전집 번역에 참여하여 제14권: 『쾌락원칙을 넘어서』(1991)를 냈고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포럼에서 “라캉의 시선으로 본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강론했고 이것이 글로 쓰여 『고전연구 4: 근대정신과 비판』 (민음사, 2018)에 실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매혹적이고 당혹스런’(fascinating and baffling, Boothby 97) 이 문제작과 씨름해야 했고 특히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나 나름의 결론을 내야하는 이 단계에서 죽음본능(Todestrieb)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을 다시 한 번 떠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이트 자신이 ‘투기적 사색’(speculation)의 산물이라고 이름 붙인 이 정신분석 이론서는 그 제목에서부터 문제성을 배태하고 있었다. 정신분석학을 떠받치고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쾌락원칙(Lustprinzip/Pleasure Principle, 이하 PP로 약칭함)이 아니고 그 무엇일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과연 이 원칙, 혹은 원리를 바탕으로 지난 25년 동안 정신분석 ‘장사’를 톱톱히 잘했고 그의 이름 두자 ‘Sigmund Freud’가 인류의 지성사에 기록될 수 있는 지점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그는 자신을 거슬러 읽는(reading against the grain) 용기 있는 결단을 했고 그 결과는 그가 그처럼 금과옥조로 신봉하던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Jenseits/Beyond) 초월적 도약이었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만약 프로이트가 전반기의 성(性) 이론과 쾌락원칙에 안주했다면, 그래서 인간의 대소사가(大小事)가 쾌(快)를 취하고 불쾌(不快)는 버리는 쪽으로 이루어진다는 단순구도로 논리를 전개했다면, 그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이 이처럼 한 세기를 버티며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매혹적인’(fascinating) 측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것의 ‘당혹스런’(baffling) 측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데리다 같은 해체론자는 프로이트가 이 책에서 PP를 취했다가 버리고 버렸다가 다시 끌어안는 모습이 그의 손자 에른스트(Ernst)가 그의 어머니의 부재와 존재를 상징화하기 위한 fort(갔다)/da(왔다) 게임과 같다고 해서 또 한 번 우리를 당혹시킨 바 있다(Derrida 1978, 115).
거두절미하고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혼란과 당혹감은 프로이트가 이 책을 통해서 ‘심리적’ 관점과 ‘생물학적’ 관점,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글의 제목대로, 심리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지향점은 이러한 넘나듦이 논지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극복되어야 할 프로이트의 ‘실수’였는가, 혹은 잠재적이든, 명시적이든, 프로이트의 의도된 필연성의 반영이었나를 밝히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프로이트의 찬/반 이론가들의 대부분이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나는 후자 쪽에 서겠다. 프로이트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심리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의 경계선에 선 야누스(Januβ)적 양면의 이론가임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주안점이다.
프로이트의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책임을 잊지 말자. ‘쾌락원칙’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죽음원칙’ 즉 ‘죽음본능’(Todestrieb)이다. 프로이트는 그 때(1920)까지 불쾌를 피하고 쾌를 택하는 쾌락원리에 따라 인간의 정신계가 운용된다는 믿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예컨대 그의 출세작 『꿈의 해석』(1900)을 지배하고 있는 대전제가 꿈은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a disguised fulfillment of a repressed(suppressed) wish, SE4: 160)라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 ‘욕망’ ‘위장’ ‘성취’라는 단어가 다 중요한 말이지마는 여기서는 ‘소망성취’(wish-fulfillment)라는 두 단어만 부각시켜 보겠다. 꿈이 소망성취라는 표현은 쾌(快)를 좇아 움직이는 ‘쾌락원리’의 기본 속성을 말함이다. 이 pp를 가지고 프로이트는 그의 전반기 저술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던 프로이트의 사유체계에 틈새를 벌린 ‘작은’ 사건이 ‘외상적(traumatic) 꿈’에서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병사들의 외상적 꿈에서는 『꿈의 해석』에 열거된 평상시의 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프로이트는 ‘당혹’했다. 소망, 욕망의 성취하고는 거리가 먼 악몽(nightmare), 즉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을 꿈속에서 되풀이하는, 전에 목격하지 못한 사건이 이들 병사들의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었다.
여기에 프로이트는 ‘반복강박’(Compulsion to Repeat)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강박관념의 죽음성을 가미하여 ‘죽음본능’(Todestrieb/Death Drive, 이하에서 DD로 약칭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이 죽음본능이 바로 ‘쾌락원칙’의 ‘너머’에 존재하는 본능이며 그것은 PP의 지배를 받는 생명본능(Lebenstrieb), 즉 에로스(Eros)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PP와 DD는 대척적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후반부에서 “쾌락원칙은 실제로 죽음본능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SE18: 63)는 프로이트의 멘트는 또한 무엇인가? PP와 DD가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다는―앞의 진술을 뒤엎는 역(逆)진술이 아닌가? 이런 모순어법(oxymoron)적 표현과 논리전개는 이 책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의 단초를 제공하는 사건은 프로이트가 사용한 ‘긴장’(Spanning/tension)이라는 용어의 애매성, 양가성에서 비롯된다.
일견 당연하게도 프로이트는 쾌(pleasure)를 정신적 긴장의 감소로, 그리고 불쾌 (unpleasure)를 그것의 증가로 보는 데서 그의 이론화 작업을 시작했다(SE18: 7). 따라서 죽음본능은 자연스럽게 긴장의 증가와 연결되었고 그것은 또한 DD를 말하기위한 이 책의 제목 “PP를 넘어서”와도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이 책의 끝부분에서 이러한 논리가 뒤바뀌는 것을 보고 일반 독자들이 놀랐고 해체론자 데리다도 놀랐다. 프로이트가 PP를 들고 fort-da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반대 논리, 즉 DD가 긴장의 감소와 연결된다는 반(反)논리는 사실 프로이트의 DD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배태된다: “사물의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고자 하는, 유기체에 내재하는 충동”(SE18: 36)으로 정의되는 본능의 과거 회귀적 ‘보수적’ 성격은 특별히 죽음본능에 해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말년에 본능의 보수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최종적으로 에로스, 즉 생명본능(Lebenstrieb)의 경우는 본능의 보수성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이전의 상태’(earlier state of things)는 비유기체적(inorganic) 무생명, 무생물의 상태, 즉 죽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죽음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태는 정신적 긴장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감소, 혹은 그것의 제로(0)화까지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이다. 죽음본능을 긴장이 제로상태인 열반원칙과 동일시하게까지 ‘투기적 사유’를 진행한 프로이트는 급기야 “PP는 DD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SE18: 63)라고 선언하고야 말았다.
불교에서 열반(涅槃)이란 무엇인가? 지고(至高)한 죽음, 거룩한 죽음, 성스러운 죽음―하나의 축복이며 데리다의 표현으로 하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죽음이다. 여기에 죽음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인 함의는 없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서의 현존재((Da-sein)가 ‘앞으로 달려가 맞아야 할 그 어떤 것’(Vorlaufen)이 죽음이 아닌가 싶다. 죽음에 관한 이런 긍정적인 관점은 뒤에서 말할 ‘생물학적 죽음’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결국 프로이트는 “삶의 목적은 죽음이다”(The aim of life is death, SE18: 38)라고 선언하고 말았다. 다만 여기서는 프로이트가 왜 처음에는 DD를 긴장의 증가와 연결시켰고 뒤에서는 그것의 감소와 연결시켰는지 그냥 놀라는 선에서 끝내기로 하자.
왜 프로이트는 이처럼 논리적 모순까지를 범하면서까지 이러한 투기적 사고를 진행시켜야만 했는가? 데리다의 지적처럼, 그는 그가 그처럼 아끼는 PP를 에른스트의 실패처럼 과감하게 집어던졌다가 아까운 듯 다시 끌어안기를 반복한다. 그가 이 책에서 이론화하고 있는 ‘반복강박’은 바로 그의 이러한 죽음본능의 fort-da 게임에서 실천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재현은 무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프로이트는 이러한 전복적 재현성에 ‘불투과적’(opaque) 상태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모르고 했으면 ‘무의식적’(unconscious)이다. 밑에 깔린 그의 ‘무의식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쇄는 R. 부스바이가 말하는 ‘양자택일적 독서’(alternative reading, Boothby 1991, 78), 혹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글읽기를 병치시켜 놓기의 전략을 통해서이다. 이른바 죽음에 관한 ‘심리적’ 관점과 ‘생물학적’ 관점의 차이에 대한 고려가 그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문제작에서 연출하는 진정한 fort-da 게임은 바로 이 두 관점 사이에서 일어난다.
우선 죽음에 관한 정의에서부터 다시 출발하자. 앞에서 본대로 죽음본능은 무엇보다도 현 유기체의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본능적 충동이라고 정의되어(SE18: 36), 과거회귀적인 그것의 보수적 성격을 강조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마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읊은 천상병 시인의 귀거래사 <귀천 歸天>처럼 죽음본능의 과거 회귀적 보수적 성격은 프로이트가 역설(力說)하는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한 특성을 형성한다. 남대천(南大川)에서 방류한 연어의 치어들이 강과 바다로 나가 성어(成魚)가 된 다음 역류(逆流)의 온갖 역경과 고통을 뚫고 남대천 원류, 본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바로 죽음을 맞는 이 처연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반복강박적 죽음본능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유기체의 ‘이전의 상태’(an earlier state of things)는 비유기체(the inorganic), 즉 죽음의 상태이고 이 무생물적 죽음의 상태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에 관한 생물학적 관점이 싹튼다. 연어들의 일대기―그렇게 힘들게 역류를 거슬러 올라와 알 낳고 죽어가고 죽은 다음 다른 물고기들의 밥이 되도록 즐겨 자신의 몸을 맡기는 자연의 정연한 질서 속에서 무슨 ‘나쁜’ 부정적인 요소를 찾기란 힘들다. 자연(自然)―스스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죽음관은 하이데거의 그것처럼 죽음을 향한 존재가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좋은 경우, 앞으로 달려가 그것을 껴안는 행복의 미학으로도 연결된다. 데리다의 표현으로는 죽음이란 하나의 ‘선물’로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죽음본능은 결국 쾌락원칙에 봉사한다”(SE18: 63)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책 제목은 ‘쾌락원칙을 넘어서’가 아니고 ‘쾌락원칙을 위하여’로 바꿔 써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서 죽음본능을, 긴장의 상태가 제로 수준으로 떨어지는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과 연결시키는 프로이트의 태도에서 생물학적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열반(涅槃), 그 얼마나 고귀하고 화려한 이름인가? 나로서는 어느 고승(高僧)이 열반하여 그의 다비식에 참석한 것을 지금까지도 하나의 성(聖)스런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삶의 목표는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보다 더 죽음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말은 없다. ‘Pharmacy’의 해체론적 2중어 독(毒)/약(藥)을 먹고 영생(immortality)의 길로 들어간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비견 할 만 하다.
과학의 신자(信者) 프로이트는 과학적 세계관, 과학적 생명관을 선호했다. 나르시시즘에 관한 한 글에서 “우리의 심리학적 잠정적 가설들이 언젠가는 유기체적 하부구조에 기반 하는 날이 올 것이다”(SE14: 78)라고 한 말은 그의 과학, 특히 생물학에 대한 믿음을 표명한 대표적인 진술로 꼽힌다. 자신이 인간심리/정신 문제의 전문가이면서도 기어이 생물/생리학적 통찰력에 의존하는 그의 태도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생물학은 ‘진정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a land of unlimited possibilities)으로’ 남을 것이다(SE18: 60).
II
다음은 작가 최인호와 선승(禪僧) 법정과의 산방대담에 나오는 죽음 담론이다.
최인호: 스님께서는 어느 책에나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법 정: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주의 질서처럼, 늙거나 죽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지요, 죽음은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육신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소유물이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편안히 눈을 못 감는 것이지요.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 ·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기량이,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표면을 통해서 심층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 · · 죽음이란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 · ·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175-77)
이것은 물론 상징적 죽음이나 ‘메타포로서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죽음, 즉 실제적 죽음에 대한 말이다. 여기서 피력한 선승 법정의 죽음관은 거의 열반원리까지 추적한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죽음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삶의 목적은 죽음’이고 따라서 죽음은 자연현상의 질서 속에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불안, 걱정, 초조하거나 공포심을 드러내는 것은 ‘반자연적’(反自然的) 태도에 다름 아니다. ‘ 그 때까지의 삶에 소홀했던’ 결과다.
이 산방대담은 2003년 길상사 요사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당시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역정에서 한참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최인호는 문학계에서, 법정은 불교계에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가 당당하던 호시절이었다. 두 사람 다 신체적 건강도 담보되었다.
그러다가 이 대담이 있고 얼마 후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다 같이 암이라는 불치병에 걸리고, 법정은 2010년에, 최인호는 2013년에, 각각 폐암과 침샘암으로 사망한다. 본 에세이가 추적하는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 그것을 멀리 두고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사람의 의식차이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잠시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프로이트의 죽음관에 관한 두 개의 독서 중 ‘심리적’ 관점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III
앞에서 논의한대로 프로이트의 죽음에 대한 ‘생물학적’ 관점이, ‘반복강박’ 즉, 유기적 생명체가 현재의 상태를 버리고 과거의 비유기적 무생물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내적 추동력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면, 그것의 ‘심리적’ 접근법은 정신분석사상 중요한 두 단어, ‘결합’(Bindung/binding)과 ‘해체’(Entbindung/unbinding)에서 찾고 있다.
프로이트는 명시적으로 에로스(Eros), 즉 생명본능(Lebenstrieb)을 결합의 메커니즘에, 그리고 타나토스(Thanatos), 즉 죽음본능(Todestrieb)을 해체란에 연결시키고 있다: “에로스의 목적은 더 큰 통일체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것, 즉 함께 묶는(to bind) 것이고, 반대로 파괴적 본능의 목적은 관계를 해체하고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SE23: 148). 다시 말해서, 결합=생명본능, 해체=죽음본능의 등식이 성립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결합과 해체과정이 생물학적 법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논리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묶기의 결합과정은 심리적 자아(Ego)의 형성과정과 맞물려있다: “결합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탄생과 기능에 관한 것이다”(Boothby 1991, 81).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가 결합과 해체를 논할 때는 정신분석적 자아(Ego)의 탄생과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런 심리적 관점은, 반복강박을 통해 생명체의 소멸과 죽음을 말하던 그의 생물학적 관점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자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논의는 정신분석학의 핵심 논제다. 어느 학파의 정신분석학이든, 자아의 형성과 기능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정신분석학이 주체에 대한 물음이라면 자아의 문제를 배제한 어떠한 주체의 논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 이후 곧바로 출판한 책이 『자아와 이드』(1923)이었고 “그것이 있었던 곳에 자아가 들어서게 하라”(Wo Es war, soll Ich werden)는 프로이트의 분석지침도 ‘자아를 통한 이드의 접수’라는 쪽으로 방향이 잡힌다. 융의 이른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도 비슷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출발은 언제나 자아이고 그 자아가 ‘지하로의 밤 여행’(nekyia)이라는 고난행군을 끝내는 지점에 신의 이마고(Dei imago)로서의 자기원형(Self-archetype)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은 개성화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것은 곧 ‘자아’가 ‘자기’가 되는 주체화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라캉의 주체화과정(subjectification)도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타자(the Other)와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자아가 탈(脫)타자화의 분리과정을 통해, 모세의 하느님처럼 “나는 곧 나다 I am that I am”의 오롯한 주체로 재탄생하는 것이 라캉의 주체화과정이다.
정신분석학의 세 대부들이 하는 소리가 하나같이 출발점은 자아라는 것이다. 자아의 형성과정이 심리적/정신분석적 묶기 과정 즉 결합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환경과 타자의 영향 속에 제대로 ‘묶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아의 탄생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제대로 묶인/결합된 자아라할지라도 그것이 주체의 중심이 아니라는 데 정신분석학의 대부들은 동의한다. ‘탈중심화’(excentricity)는 자아의 운명이다. 중심을 찾아 ‘버리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것이 주체화과정이고 이 자아→주체로의 주체화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해체’(Entbindung) 작업이다. 이 해체과정은 또한 필연적으로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고 이 자아의 죽음이 심리적 관점으로서의 ‘죽음본능’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죽음은 ‘좋은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변방의 자아가 중심의 주체(subject), 혹은 자기(Self)로 화려하게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메타포를 빌면, 십자가의 죽음(Crucifixion)을 통해 부활한 성육신(成肉身),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데리다의 말처럼, 하나의 ‘선물’이다. 그것은 주저함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서 받아야하는 기쁜 선물이다(하이데거). 프로이트의 말로는 ‘삶의 목적이 죽음이다’라는 역설적 논리가 여기에 작동한다. 앞에서 본 법정의 말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면[주체화를 완성하면] 사람의 기량이, 폭이 훨씬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지는” 은총을 선물로서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에 소홀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해체적 죽음을 통한 주체화과정의 성취에 실패한 사람은 실제적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적 죽음은 ‘심리적 죽음’의 다른 말이다.
죽음에 관한 심리적 관점과 생물학적 관점이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자아의 통일성과 유기체의 통합성 사이에 어떤 ‘아날로지’(analogy)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SE18: 50). 생물학적 인간 개체가 하나의 통일된 전체성으로 기능하듯이, 라캉이 말하는 ‘상상적 자아’(the Imaginary Ego)는 어떤 통합된 형상, 게슈탈트(Gestalt)를 형성한다.
이 둘 사이의 아날로지는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동’(Trieb)의 정의개념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욕동(慾動)이라는 번역어를 쓴 것은, 이 학술용어에 대한 숱한 갈등과 관련된다. 제임스 스트래치(Strachey)가 표준판 영역본에서 프로이트의 그 단어를 ‘본능’(instinct)으로 번역했고 이에 라캉이 문제를 제기하여 동물적 본능과 구별되는 인간적 본능이라는 뜻에서 ‘욕동’(pulsion)으로 번역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Trieb>에 대한 프로이트의 뜻매김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욕동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경계개념으로서, 유기체 내에서 시작되어 마음에 이르는 자극의 정신적 재현체로서 드러난다. (SE14: 121-22)
욕동이 정신적인 것(the psychic, mental)과 육체적인 것(the somatic) 사이의 경계개념이므로 죽음욕동(Todestrieb)도 ‘심리적’ 측면과 ‘생물학적’ 측면을 공유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이 추론은 바탕으로 우리는 두 영역 사이의 ‘아날로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죽음과 심리적 죽음 사이의 아날로지는 두 죽음을 하나의 메타포로 연결하는 효과를 낳는다. ‘메타포로서의 죽음’(Death as metaphor)이다. 이것은 수전 손탁(S. Sontag)의 ‘메타포로서의 병’(Illness as Metaphor)에서 유추한 것이지만 이 표현이 죽음에 관한 두 관점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은유적 죽음’이란 여기 말하는 심리적 죽음에 다름 아니고,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상징적 죽음’의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은유적 죽음은 생물학적 실제의 죽음이 아닌 비유적 의미로서의, 아날로지로서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은유적 죽음이 정신분석적 죽음의 전부를 대변하고 있다는 데 이 개념의 중요성이 존재한다.
정신분석적 죽음은 라캉의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라는 개념으로 대변된다. 프로이트가 실제적 거세의 개념을 떠올렸지만 정신분석적 실천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상징적, 은유적 거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라캉은 『에크리』의 노톤 번역본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거세’를 정의했다.
거세란, 주이상스가 욕망의 법의 거꾸로 된 사다리의 다른 편에 닿을 수 있도록 주이상스를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É, 324)
라캉답게 난삽하고 ‘삐딱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의 요지는, 거세란 욕망을 위해 주이상스를 죽이는 살해행위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심리적 죽음이니까 상징적 거세, 은유적 거세라는 비유적 언어가 동원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라캉의 유명한 ‘L 도형’에 표시되었듯, 상징의 축에 의한 상상의 축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상의 축에는 ‘실재의 상상화’(imaginarization of the Real)의 논리에 따라 실재의 속성이 투여되어 있으므로 이 거세적 죽음에는 필연적으로 실재의 아바타, 주이상스가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R. 부스바이가 그의 중요한 저술 『죽음과 욕망』(1991)에서 강조했듯이, ‘상상적 자아’(imaginary ego)에 대한 ‘죽임’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심리적 죽음’의 전형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모든 죽음의 정신분석적 치료는 반드시 이러한 심리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죽어야 산다’ ‘사중생’(死中生)이라는, 정신분석 담론 도처에 산견되는 평범한 말들이 평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다수의 종교적 담론에도 이 죽음의 구원적 논리는 줄기차게 제시되어 있다. 예컨대, 성경 「갈라디아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2: 20)는 명언을 담고 있다. 이 성경의 교훈에 따라 우리나라 어떤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날마다 죽어라’ ‘죽어야 산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다(「조선일보」 2018, 3. 18).
융의 유명한 에세이 「종교와 심리학」에서 강조되어 있듯이 종교와 정신분석학은 그 해탈과 구원의 방법이 여러모로 닮았다. 그 닮음의 핵심은 어떻게 해서든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더 크고 빛나는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죽음에 대한 심리적 접근법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정신분석과 종교는 다 같이 죽음에 대한 물음을 그 존재이유로 삼고 있는 듯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메타포로서의 죽음인 ‘심리적’ 죽음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생물학적’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과 방법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법정 선사의 사관(死觀)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앞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죽음을 뜻하고 <지금까지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한 평생, 즉 살아서 상징적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현실적으로 ‘사중생’(死中生)의 ‘죽음연습’을 할 수 있는 ‘심리적 죽음’ 단계를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죽음연습과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만이 생명의 끝에 오는 실제적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지’(fear and trembling, Kierkegaard) 않고 의연하게 자연의 순리로서의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작가 최인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돌직구성 질문에 선사 법정이 제시한 답변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이나 종교가 하는 일은 살아서 하는 죽음연습이요, 이 죽음은 실제적 죽음을 예비하는 상징적, 은유적 죽음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IV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내 영혼 속에 전율을 불러일으킨다”는 파스칼의 침묵론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그것과는 중요한 의미에서 변별적 차이를 보이는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가 현대의 이론가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에 의해서 출간된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저자 자신이, 이 책의 서문을 쓴 가브리엘 마르셀과 같이 기독교(카톨릭) 신자였던 터라, 수도원 수사(修師)들의 침묵의 세계를 다룬 「위대한 침묵」(Die Gross Stille)이라는 영화와 ‘침묵’이라는 낱말이 겹치면서(독일어로 ‘Schweigen’과 ‘Stille’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세간에 침묵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듯하다. 나는 여기에 최근에 개봉된 불교계의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종교적 영화도 추가하고 싶다. 여기서 선사(禪師)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벽면대좌하고 3년 동안 수행하는 '묵언수행‘(黙言修行)은 입소하면 평생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는 ’위대한 침묵‘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피카르트의 침묵의 개념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이 책의 헌사로 앞에 제시한 괴테의 명언,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에서와 같이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근원적 바탕으로서의 어떤 큰 테두리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사유는 일정한 지평(地平) 위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의 이 현상학적 지평, 그리고 “존재의 열림은 무(無)의 심연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의 이 하이데거적 무(Nichts)의 개념 등이 피카르트의 침묵의 개념에 가깝게 접근하지 않는가 싶다. 그리고 정신분석적 무의식, 특히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의 개념도 그것과 일정한 친화성이 있어 보인다. 언어가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하듯이 인간의 의식도 그것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원형적 집단무의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에 있는 김우창교수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도 이것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자연의 침묵’ ‘대지의 침묵’ ‘신의 침묵’ ‘죽음의 침묵’ 등 침묵이라는 명사 앞에 어떤 관형어를 붙여도 통할 정도로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한 생각은 포괄적이고 심원하고 근원적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성 속에서 그 모습을 현현하는 특징을 가진다.
침묵은 이름 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 있는 나무들 속에, 남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없는 계절들의 변화 속에, 침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달 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속의 침묵 속에 · · ·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 세계는 없다. (『침묵의 세계』, 29면)
이것은 정확하게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 나오는 여러 미학적 소도구들을 연상시킨다. 그것들, 이름 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들 속에 피카르트가 생각하는 침묵의 숨결이 스며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해서 말 할 때 “그가 이야기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G. 마르셀의 서문, 7면)을 놓쳐서는 안된다. 침묵이 수동적 무위(無爲)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힘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인간 정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밑으로부터의 자양분과 같은 잠재성으로서 자신을 현현한다. 여기서 우리가 침묵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높이 사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앞에서 추구해 온 죽음의 문제와 어떤 관련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침묵의 세계』 뒤편에 위치한 ‘병, 죽음 그리고 침묵’이라는 표제어 하의 글에 주목한다.
여기서 피카르트는 죽음과 침묵, 혹은 침묵과 죽음의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첫째로 침묵에서 죽음으로의 방향을 추적해 보자. 이 경우,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벌써 죽음의 나라에서 내다보듯이’ 현실적 ‘꽃들과 풀들과 나무들을’ 바라본다. 그런데 보는 시점이 죽음의 나라에 있으니 ‘망원경을 거꾸로 해서 사물을 볼 때처럼’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풍경들은 ‘멀고 작게 보였으며, 장난감들 같았고, 가물가물 보였다.’ 그런데 놀랍고 반가운 것은 그 풍경들이 <난생 처음 본 듯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천상병의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칸트도 죽으면서 “참 좋다”(Es ist gut)라고 말했다 하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다음에 이어진다: “이 사람에게서 일어난 그 영혼의 움직임, 아직 살아있는 자로서 현재를 · · · 죽음으로부터 바라다보는 그러한 영혼의 움직임은 그 사람의 내부에 <크나 큰 침묵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침묵의 세계』, 253-54). 여기서 피카르트는 침묵의 존재가 죽음에 선행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존하는 ‘크나 큰 침묵’이 뒤를, 혹은 밑을 든든히 받쳐 주고 있을 때만이 죽어가는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꽃들, 들판, 산들’이 ‘난생 처음 본 듯이 아름답게’ 비춰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침묵이 단순한 결핍이나 무위가 아니라 적극적 능력, 능동적 힘, 혹은 내적으로 쌓인 내공(內攻)과 같은 그 어떤 것이란 정의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내공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물론 침묵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피카르트는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추론은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문제는 파카르트가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정신분석적 접근을 통해서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분석적 죽음은 상징적 죽음이고 메타포로서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거세’행위로써 실현되고 이 거세행위는 무엇보다도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정신분석적 장치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런 정신분석적 통과의례를 거쳐 주체의 ‘내부에 크나큰 침묵의 존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읽은 피카르트의 침묵의 담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의식은 무엇이며 무의식의 의식화는 또한 무엇인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라캉이론가 부르스 핑크가 제시한 실천적 방법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A Clinical Introduction to Freud, 49-50). 그에 의하면, 우리의 막연한 근심, 걱정, 불안, 공포의 밑바닥은 반드시 <무의식적> 생각(thought)이나 욕망(wish)을 품고 있기 마련이니 현실계에 드러나는 그 무의식적 생각과 욕망의 기표들(signifiers)을 의식화하여 주체에게 돌려주는 과정이 분석적 치료라는 것이다. 물론 이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는 고도로 전문화된 정신분석적 기교와 장치가 동원된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이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감정도 그것이 ‘의미를 배태한’ 무의식적 기표로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오랜 숙련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의 의식화가 지향하는 분석적 치료행위는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정신분석 사회에서 일종의 금기(禁忌) 사항으로 되어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안과 밖」 포럼에서 ‘라캉의 시선으로 본 프로이트’를 발표하고 났더니 이 포럼의 주관자인 김우창교수가 다가와 ‘과연 치료가 되는지 몰라?’라고 혼잣말처럼 한 말이 나에게는 큰 울림으로 와 닿았다. 나는 물론 ‘NCND'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전략으로 정신분석계의 금기율을 지켰다.
왜 그랬을까? 내가 B. 핑크교수로부터 11년 반 동안 분석을 받았고 나 자신 피분석가들에게 분석치료를 실시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치료가 된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인간의 정신과 심리, 영혼을 다루는 학문이라서 그런 것 같다. 플레밍이 발명한 주사 한 방으로 1차 세계대전의 부상병들의 신체적 외상(外傷)을 말끔히 치유해주는 치료법과는 달리 정신분석은 ‘정신적’ 외상(Trauma)을 치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time-consuming) 100% 치료 인증서도 받을 수 없다. 영혼의 훈련에 무슨 졸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을 좀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정신분석치료에는 ‘절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99.99...’라는 ‘상대적’ 표현만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신분석의 ‘심리적 죽음’이 내포하고 있는 상대성을 극복하고 헤겔의 ‘절대적 의미화’(absolute signification)의 경지인 ‘생물학적 죽음’의 절대성을 추구한 문제작이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이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는 프로이트가 이 문제작에서 제시했던 심리적 죽음의 문제에서 생물학적 죽음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피카르트가 ‘병, 죽음 그리고 침묵’란에서 제기했던, ‘죽음이 전쟁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죽음에 관한 관점으로 옮아감을 뜻한다.
피카르트는 ‘전쟁의 공포가 침묵을 가져오게 된다’는 말과 함께 오버베크의 죽음선언을 덧붙이고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반대로 삶을 더 무게 있는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최후의 것일 수밖에 없다. 죽음이 공동의 운명으로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어쩔 수 없이 드리워놓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우리의 공동성의 분명한 상징으로 존중하도록 하자” (『침묵의 세계』, 255).
법정선사의 죽음관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진술에서 분명한 것은 <죽음이 침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전쟁의 공포가 침묵을 가져온다는 진술 속에 드러난 전쟁의 공포는 죽음의 동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침묵을 가져온다는 논리는 침묵이 죽음을 선도한다는 앞의 논리하고는 정반대다. 앞에서는 “침묵이 그의 영혼을 현재로부터 멀리 죽음으로까지 데리고 간다 · · · 영혼은 침묵의 벽을 따라서 걸어가고, 침묵의 벽에 의지하고 서 있다”(254)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크나큰 침묵’의 위력이 죽음을 선도한다는 피카르트의 제1의 죽음관은 프로이트의 심리적 죽음관에 조응하고 ‘죽음이 침묵을 가져온다’는 그의 제2의 죽음관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죽음관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에서 이 둘 사이에 어떤 은유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한대로 상징적 죽음과 실제적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음>의 변증법적 관계 같은 것이며 ‘메타포로서의 죽음’이라는 말 속에 내포된 의미의 병치현상과 비슷한 것이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한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죽음본능의 전형적 정의는, 앞에서 본대로,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유기체적 충동”이다. 이런 과거회귀적 본능의 보수적 성격은 또 다른 곳에서 “생명체 이전에 무생명체가 존재했었다”(박찬부역, 『쾌락원칙을 넘어서』, 53면)는 말로 더 강조되었다. 여기서 ‘무생명체’(the inanimate)는 앞의 정의에서의 ‘이전의 상태’(the earlier state)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생명체 이전에 무생물적 비생명체가 존재했고 현재의 생명체는 바로 과거의 비생명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뜻과 함께 따라서 죽음본능이 시도하는 과거회귀적 귀거래사는 생물의 무생물화, 즉 육신은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물학적 죽음이론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것은 프로이트의 표현으로, 긴장의 상태를 제로상태로 떨어뜨리며 영면(永眠)하는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이 열반원칙은 “죽음이란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법정선사의 자연 순응적 죽음관과도 일치한다. 이것은 또한 독배를 마시면서 동시에 영생불멸(immortality)의 약을 먹는 소크라테스의 독(毒)/약(藥) (Pharmacy)이 갖는 언어의 해체론적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에서 발단한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어떤 부정적인 함의도 발견할 수 없다. 자연 질서의 일부로 편입되어 마땅한 사건이다. 특히 피카르트에게는 이 ‘시원의 침묵’(271)이 떠받치는 의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이 ‘시원’(始原)이라는 말은 프로이트의 ‘이전의 상태’ ‘무생명적 상태’와 거의 동의어적으로 겹친다. 이런 맥락에서 피카르트의 죽음은, 죽음이 시원의 침묵을 만들어내고 이 ‘크나큰 침묵’은 어떤 ‘가능의 힘’으로서 영혼불멸의 가능성까지를 떠올리게 하는 종교적 포스(force)를 지닌다. 영화 「무문관」의 묵언수행에서 고통스럽게 얻으려했던 것도, 그리고 1,300m 알프스 계곡 ‘그랑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수사들의 「위대한 침묵」에서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것도 모두 피카르트가 말하는 ‘가능의 힘’으로서의 이 ‘크나큰 침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의 ‘은총’(grace)이나 선물(gift)로서 오게 된다. 선물로서의 죽음의 의미는 데리다가 『죽음의 선물』이라는 해체론적 글쓰기를 통해서 통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데리다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주체가 떠맡아야하는 책임감―양도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그 주체에게만 고유한 책임감(responsibility)이라는 관점에서 ‘죽음의 선물’을 논한다.
책임감은 모든 경우에 ‘자신에게 죽음을 주는’ 형태로 정의된다. 설령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해도 내가 그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 자신의 죽음은 내가 떠맡아야 하는 대체불가능성(irreplaceability)이 된다. <만약 내가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에 접근하기를 바란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임감, 그리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욕망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는 일을 나와 연관시켜주는 책임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러한 고유성(Eigentlichkeit)이 현존재(Dasein)의 책임과 자유로서의 나 자신의 책임감을 나 자신과 의미있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존재와 시간』의 핵심 주체는 이러한 죽음의 대체불가능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 · · “죽는다는 것은 모든 현존재가 그 순간에 스스로 떠맡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Derrida 1995, 43-45/ 두 번째 강조: 필자)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 나타난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서의 현존재의 죽음에 관한 하이데거의 긍정적 접근에 공감을 표하면서 데리다가 강조하고 있는 대목은, 죽어가는 주체가 고유하게 떠맡아야하는 절대적 책임감, 그리고 이 책임감을 필수불가결한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주체의 ‘대체불가능한 단독성’(irreplaceable singularity)이다. 이 절대적 단일성 개념은 위인용문 중 내가 강조한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죽음 앞에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에 접근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다. 나는 데리다의 이 말 속에서 정신분석 담론의 염결성, 특히 라캉의 극단으로 엄격한 말투를 보는 듯하다.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은 절대적 주체론으로서 타자의 영향 하에 형성된 모든 것을 사상/거세하고 오롯한 주체로서 우뚝 서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타자론(脫他者論)은 헤겔적 절대적 의미화(absolute signification)로서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이란 표현은, 『출애굽기』의 하느님이 이름이 무엇이냐는 모세의 질문을 받고 ‘나는 곧 나다’(I am that I am)라고 한 답변을 연상시킨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주체성의 절대적 완성>을 뜻한다. 앞에서 본 정신분석 담론의 궁극적 지향점이 주체성의 완성이다.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을 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책임 있는 주체―그것의 실현을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이 정신분석 현장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주체의 완성을 위해서.
그런데 데리다의 깊은 뜻을 따라가 보면, 죽음의 선언이 이러한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을 위한 확실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도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은,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앞으로 달려가 맞아야 할(Vorlaufen) 그 어떤 것이라고 긍정적 발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들은 죽음을 피해야 할 어떤 나쁜 것이라는 통념과는 대치된다. 피카르트도 죽음의 고지는 영혼의 안내역을 자임하는 위대한 침묵, ‘크나큰 침묵’의 길로 인도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여기에 영생불멸(immortality)의 가능성까지를 점지해주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더한다면 죽음에 대한 부정적 회의론은 상당히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 앞의 분류표에 따르면 생물학적 죽음, 즉 실제적 죽음이다. 이것은 또한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심리적 죽음, 즉 상징적, 정신분석적 죽음하고는 어떤 관련성을 갖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후자의 경우는 <살아서> 맞는 죽음행위다. 따라서 그것은 ‘als ob/as if’의 영역, 즉 살아 있으면서 마치 죽는 것같이 행동하는 가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실제적 죽음에 맞서, 상징적 죽음, 혹은 메타포로서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문제는 효과에 있다. 앞에서 비췄듯이, 이 정신분석적 상징적 죽음/죽임이 가져오는 치료적 효과에 대해서 100% 장담할 수 있는 발언을 내놓기가 어렵고 그것은 그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여기서도 같은 논리로 답할 수 있다. 정신분석 치료는 살아서하는 죽음연습이므로 실제적 죽음을 앞두고 하는 룰렛게임과는 차이가 있다. 둘 다 그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하나의 큰 차이는 심리적 죽음이 상대성에 빚지고 있는 반면 생물학적 죽음은 절대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죽을 것 같이’와 ‘실제로 죽는 것’과의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는 지워버릴 수도 없고, 지워버릴 필요도 없다. “내 연인은 한 떨기 장미꽃이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을 때 전자는 ‘장미꽃’(A)을 택했고 후자는 ‘내 연인’(B)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A≦B라는 부등호가 존재한다. 그것은 ‘메타포로서의 죽음’(death as metaphor)의 논리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다.
그리고 A와 B 사이의 이 선택은 라캉이 말하는 ‘강요된 선택’(forced choice)이 아니다. 강요된 선택은 생명체가 끝나는 순간을 대변하는 생물학적 죽음에서만 일어난다. 나는 이런 말을 다른 곳에서 한 적이 있다.
죽음은 라캉의 표현대로 <절대적 의미화>이다. 그것의 막강한 하중은 모든 생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재울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선언을 듣는 순간 에로스적 욕망의 역사를 죽음의 관점에서 탈욕망의 역사로 다시 쓰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또 다른 강요된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삶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에로스와 죽음』, 402)
나는 말기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내 대학 동기 K에게 나의 신간 『에로스와 죽음』(2013)을 보내주었고 그것을 읽어본 K가 보내온 답신 중에 위의 인용문 대목이 죽음을 앞둔 자신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되어 그의 가족으로부터 그가 부산의 어느 한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여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나는 그 병원으로 달려갔다. 첫 눈에 보아도 그가 죽어가고 있음이 명백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몸에는 ‘두 개의 전선’(암과 파킨슨병)이 형성되어 있는 터라 전황이 매우 나빴다. 일주일 전부터는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죽기로 작심한 듯하다’고 그의 아들이 전언해 주었다. 나는 앙상한 그의 손을 잡고 “자네는 우리 세대에 나타난 최고의 철인이었다”라고 말하자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고 고개를 저어 부정의 몸짓을 하면서 “막스 피카르트, 침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라는 말을 들릴 듯 말 듯, 그러나 또렷하게 발음하고―이내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그 표정이 그렇게 여유롭고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에 대한 앎이 필요했으므로 그 친구에게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생각이 나느냐? 죽음이 무섭지 않으냐?” 등등의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위의 메시지를 얻어낸 것만도 나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그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는 ‘참 좋다’라고 말하면서 임종했다는 칸트의 그것에 비견할만한 했고, 죽음의 선언이 위대한 침묵을 낳고 “영혼의 침묵의 벽을 따라서 걸어가고, 침묵의 벽에 의지하고 서 있는”(『침묵의 세계』, 254)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보는 듯 했고,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죽음이다”(SE18: 38)라는 프로이트의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을 실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것에는 내일이면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예수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냈던 운명의 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 39)라는 가슴을 후벼파는 처연한 메시지, 위대한 주체적 결단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떨림이 있었다. 또한 이 떨림은, 나의 죽음은 나 외의 누구도 떠맡을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책임과 자유로서 나에게 부하되는 신의 은총, 데리다적 죽음의 선물과 연결되면서 진한 감동으로 남았다.
V
죽음의 다른 이름인 침묵의 화두를 손에서 놓기 전에 그것의 친족어, ‘고독’을 다시 화두로 올려보자.
지난 세기에 한반도에 나타난 걸출한 고독의 시인은 김현승이었다. 그는 세 번째 시집을 『견고한 고독』으로, 그리고 네 번째 시집을 『절대고독』으로 표기할 정도로 평생을 고독의 문제와 씨름했던 시인이었다.
전자의 시집과 같은 이름의 시에서, 시인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흰 얼굴” 그리고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로서의 ‘견고한 고독’을 노래하다가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발 딛지 않는/ 피와 살”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이어지는 연(聯)에서 ‘굳은 열매’라는 견고한 고독의 이미지를 걷어 올린다.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김현승 시인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 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여기서도 그런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나 보인다. 화려한 봄의 유혹과 성하(盛夏)의 계절이 내뿜는 열기를 뒤로하고 여기 내면의 결실을 꿈꾸는 가을의 성숙으로 달려온 목관악기―그 견고한 고독의 목관악기는 휘지도 않았고 ‘마를 대로 마른’ 견고함을 보여준다. 그 견고함은 가을의 높은 언덕에서 떨어지는 ‘굳은 열매’로 승화되어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어지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 · · /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으로 연결된다. 이 시인에게 고독―견고하고 절대적인―이 주는 맛은 달거나 쓴 맛이 아니라 ‘쌉쓸한’ ‘생명’의 맛이다. 그것은 성(聖)스런 종교성까지를 느끼게 하는 맛이다. 이 시인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는 객관적인 이유 말고도 그의 내면의 세계는 ‘쌉쓸한 자양’의 원천인 생명/죽음의 세계, 종교적 초월의 차원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향점은 그의 견고한 고독, 절대적 고독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고독이 쌉쓸한 맛의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생명원리라는 관점은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의 침묵에 대한 피카르트의 정의하고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둘은 다 같이 죽음 속에 포함된 모순어법적 생명원리라는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독(孤獨)의 경우, 그것은 원래, “어린 아이가 부모가 없거나, 늙은이가 자식이 없거나, 남녀가 짝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사전적 의미에서도 외로움이라는 부정적 의미 못지않게 ‘홀로 선다’는 독립심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주체화, 개성화,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들어서는” 분석적 행위 등이 모두 주체의 홀로서기 운동에 다름 아님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되풀이됨을 무릅쓰고 라캉의 주체론을 다시 한 번 언급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타자결정론이다. 지나가는 행인이 경찰의 부름을 받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주체로 태어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알튀세르의 주체론과 마찬가지로 라캉의 주체도 타자(the Other)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이다. 2차적으로 진정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타자로부터 벗어나는 ‘탈(脫) 타자화’의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러한 주체의 ‘홀로서기’ 운동에 관여하는 것이 ‘분리’와 ‘거세’에 함축된 죽음의 개념이다. 죽음을 통해 두 다리로 홀로 설 수 있는 독립된 주체로 화려하게 탄생한다는 것이 라캉의 주체론의 핵심이다.
앞에서 본 대로, 데리다의 경우도, 죽음 앞에 선 주체의 ‘절대적 단독성’(absolute singularity)과 ‘절대적으로 나만의 것’을 강조한다. 홀로서기의 극치다. 죽음 앞에서가 아니고서 어디 감히 ‘절대적’이라는 최후 통첩성 관형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적 의미화’(absolute signification), 그리고 김현승 시인의 ‘절대고독’도 모두 이 불투과성의 죽음을 전제로 한 말들이다. “죽음은 돌연히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 다시 나타나고 삶이란 다만 그 세계의 전경(前景)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침묵의 세계』, 255면)는 피카르트의 진술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로서 기능한다.
VI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복선을 깔아왔으나 아직 처리하지 못한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이 에세이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바로 법정선사와 최인호 작가의 생사관에 관한 문제다. 이 둘에 관한 나의 관심은 그들이 나눈 ‘산방 대담’이라는 것이 2003년 어느 봄 날, 길상사 요사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의 출판은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라는 이름으로 2015년 3월 1일에야 성사되었다는 사실에 의아심을 품으면서다. 두 사람 다 빼어난 문필가로서 불교계와 문학계에서 명망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인기도 하늘을 찌를 때라 그들의 특별한 ‘산반 대담’을 이리(利理)에 밝은 출판사가 13년 동안이나 아무런 이유없이 그 출판을 지연시켰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이 두 사람의 운명이 그 산방 대담 이후 급반전하는 데서 찾기로 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법정 승은 폐암에 걸려 산방 대담 후 7년만인 2010년 3월에 78세의 나이로 열반했고 최인호 작가는 침샘암에 걸려 2008년 첫 수술을 받은 후 산방 대담 10년만인 2013년 9월에 6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나는 이 글에서 심리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말했고, 살아서 하는 죽음 연습, 즉 메타포로서의 죽음은 저승사자의 호출을 받은 실제적 죽음과 의미있는 차이가 있음을 역설했다. 산방 대담에서 나눈 이들의 죽음담론은 전적으로 전자에 속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음의 공포’가 남의 일인 것처럼 물어오는 최인호의 질문에 법정은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역시 죽음이 남의 일처럼 일반론을 펼친다: “우주의 질서처럼, 늙거나 죽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지요. 죽음은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육신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소유물이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편안히 눈을 못 감는 것이지요”(『산방 대담』, 175). 아마도 끝부분에 나오는 ‘소유물’이라는 단어는, 1976년에 출간되어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수필집 『무소유』를 마음에 두고 한 말 같다.
그러나 그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의 사신이 그의 주위를 어른거릴 때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을 지에 관심을 가졌듯이 죽음을 앞둔 법정선사의 ‘의식의 흐름’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전문하기로는, 길상사에서 투병 중 옆에서 보좌하는 상좌들이 “스님, 아프십니까?”하고 물으니 “이놈아, 그럼 아프지 않고?”라고 ‘할’했다는 얘기와 암 치료차 미국의 저명한 병원에 다녀왔다는 말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법정은 죽음이 임박한 어느 날 상좌들을 불러놓고 청천벽력 같은 유언을 발표 한다: “나에 관한 모든 출판물을 출판 정지시켜라.” 상좌들의 만류도 있었겠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고 곧 바로 입을 꽉 다문채로 그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역사적으로 과거에도 카프카같은 유명한 저술가들이 사후에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다는 말은 있지만, 법정의 경우, 그의 저작물에 대한 출판정지 명령은 아무리 봐도 충격적이다. 상식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왜였을까?
「무소유」로 대변되는 그의 저작물들은 출판될 때마다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고 거기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하나같이 범속한 것이 섞이지 않은 ‘맑고 향기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종교적 차원을 넘어 각계각층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던 터라 그 충격은 더 컸다. 사정이 이런데도 죽음을 앞둔 법정선사가 그렇게 출판정지 명령을 내린 것은 그 나름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본다: 그는 ‘무소유’ 장사를 너무 잘해서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들어오는 인세만도 청빈을 요구하는 출가승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고,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아 강연할 때마다 몰려드는 이 청중, 중생들은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쇼맨(showman)인가? 아서라, 그것은 그가 일생의 신조로 삼아 온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의 정신에 어긋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그의 주옥같은 수필집들도 역사에 길이 남아 그의 이름을 빛내주리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분석에서 강박증 환자의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죽고 죽이자. 출가승의 보석같은 언약을 배반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자―그것이 그가 그의 출판물에 가하는 죽음/죽임 행위이고 언어에 대한 타살이다. 법정은 이런 행위를 통해 “언어는 성스런 침묵에 기초한다”는 괴테의 말을 거꾸로 실천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언어에의 타살을 가한 다음, 프로이트가 말하는 열반원리(Nirvana Principle)에 따라 ‘위대한 침묵’ 속으로 영면한 것이다.
한편, 작가 최인호는 한 때 ‘한국문학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농업과 공업, 근대와 현대가 미묘하게 교차하는 시기의 왜곡된 삶을 조명한 그의 작품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문학으로서,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서 한 시대를 담당해 왔다”(까치 출판사의 작가 소개에서)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관점도 있다. 럭키보이 서울 머슴아의 번뜩이는 재치와 패기는 있으되 삶의 인식에 대한 깊이와 넓이에 문제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항상 주홍글씨같이 그에게 따라 붙었다. 한마디로 ‘철’이 좀 덜 났다는 평이었다. 나는 이런 흔적을 그가 잘 나가던 시절에 행한 법정과의 산방 대담,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법정이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기량이,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표면을 통해서 심층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176)라고 대답했을 때 이 작가가 그 선승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암 선고를 받은 후 최인호는 바로 법정이 말한 죽음의 미학을 철저히 실천한다: 사물을 보는 그의 눈이 훨씬 깊어지고 삶의 ‘기량과 폭’이 훨씬 커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변신의 체험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발표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2011, 여백)에 절절히 녹아있다. 이 소설은 2010년 10월-12월, 정확히 두 달 만에 씌어졌는데, “두 달동안 나는 계속 항암 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4)라고 작가의 말에서 회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유체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준 ‘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며 계속한다: “암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내가 듣는 모든 소리와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느님과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학문이 실은 거짓이며, 겉으로 꾸미는 의상이며, 우상이며, 성 바오로의 말처럼 사라져가는 환상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헛꽃[幻花]임을 깨우쳐주었다”(6).
나는 최작가의 빠른 호흡과 넘치는 정열이 느껴지는 이 글발을 접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나도 어느 곳(『에로스와 죽음』, 402)에서 죽음을 절대적 의미화로, 죽음의 선언은 자신의 삶을 탈욕망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는 ‘강요된 선택’의 문제라고 역설한 바 있지만, 어떻게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 믿어왔던 모든 것―하느님까지를 포함해서―이 <실은 거짓>이더라고 토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다는 천문학적 대전환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언이 아닌가?
죽음의 선언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원래 서 있어야 하는 자리를 일깨워주는, 주체화의 완성을 위한 비원(悲願)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최작가의 달라진 작가 의식에서 발견된다: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7)는 D,H, 로렌스의 소설, 『아들과 연인들』Sons and Lovers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묘사와 많이 닮았다. 여기서 주인공 폴(Paul)이 자기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그것을 극복하고 독립된 주체성을 선언하면서 두 주먹을 꼭 쥐고 입을 꽉 다문채로 휘황찬란한 런던의 밤거리를 향해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것이 주체성의 완성을 선언한 최작가와 작중 주인공 폴이 취하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 헌사로 제시된 『탈출기』의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된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Exodus 3: 13-14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영어로 ‘I AM that I AM’을 번역한 것이다. 어떤 번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되어 있고 E. 프롬같은 사람은 ‘나의 이름은 이름 없음이다’(My Name is NAMELESS)라고 번역하여 우상타파론(Icnoclasm)과 연결시켰지만, 본 에세이의 문맥으로 봐서는 ‘나는 곧 나다’라는 번역이 제격이다. 이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소설을 쓰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를 위해 작품을 쓰는 단 하나의 작가 최인호의 작가 정신을 성서적으로 은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곳(「데리다의 『죽음의 선물』 다시 읽기」)에서 최작가의 마지막 소설을 문학비평적으로 꽤 상세하게 분석한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에서 흔히 나오는 ‘자아의 탐색’(In Search of the Self)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나는 곧 나다’로 대답하는 형식적 구조의 설정이다. K로 분하고 나오는 작가의 분신, 주인공은 현실적 자신을 K2로 자리매기고 그것의 영원한 짝 K1을 찾아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의 창세기에 존재했던 온전한 자아를 향해 ‘어두운 지하로의 밤 여행’(『오딧세이』의 nekyia)을 감행한다.
천신만고 끝에 K1-K2의 결합에 성공한 K는 “나는 곧 ‘나’가 되었으며, K1과 K2는 합체하여 온전한 하나의 ‘K’가 되었다”(378)라고 선언한다. 그러자 현실적 자아인 “K2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K2는 그 순간 독존(獨存)이자 독존(獨尊)이었다”(340).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의 주체가 느끼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경지다. 이 상태에서 “K2는 곧 죽음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340). 이 말은 정확하게 최인호가 묻고 법정이 대답한 말, “죽음 앞에서 두려워 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에 소홀했던 것입니다”라는 멘트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삶에 소홀하지 않고 진지하게 자기 탐색의 모험을 감행한 결과 K2―현실적으로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작가 최인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논리의 아이러니는 죽음의 선언이 이런 큰소리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K의 분신 최인호는 죽음의 선고를 받고서야 정신적 ‘네키아’를 감행했고 그 결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죽음에 감사하자. 나는 곧 나라는 역설을 가능하게 해준 사신(死神)의 부름을 받고 철이 들대로 들은 인기 작가 최인호는 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법정선사와 나눈 산방 대담이 ‘철이 덜 든’ 상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2015)의 출판을 그의 사(死, 2013) 후로 미뤘던 것일까?
Works cited: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김영사, 2014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역. 서울: 까치, 2017.
박찬부. 『에로스와 죽음: 실재의 정신시학』.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3
박찬부 외. 『고전연구 4: 근대정신과 비판』. 서울: 민음사, 2018.
법정/최인호.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산방대담. 여백, 2015
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역. 『프로이트 전집 14』. 서울: 열린책들, 1997.
최인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여백, 2011
Bruce Fink. A Clinical Introduction to Freud: Techniques for Everyday Practice. NY: W.W. Norton, 2017
Jacques Derrida. “Coming into One's Own” in Psychoanalysis and the Question of the Text. Ed. Geoffrey Hartman. Baltimore: Johns Hopkins UP, 1978. pp. 114-148
______. The Gift of Death. Tr. David Wills. Chicago: U of Chicago P, 1995
Richard Boothby. Death and Desire: Psychoanalytic Theory in Lacan's Return to Freud. London: Routledge,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