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5回 全國漢詩 紙上 白日場 開催 要綱
1. 時下 初夏之節에 尊體錦安하심을 仰祝하나이다.
2. 山南義陣 發祥의 古場이며 제3대 崔世允義兵大將의 出生地 浦項 興海에서 우리의 護國文化를 繼承 發展하기 위하여 第5回 全國漢詩 紙上 白日場 大會를 아래와 같이 開催하오니 漢詩 同好人과 漢學者, 市民 여러분의 많은 參加를 바라오며 아울러 隣近의 漢詩 同好人에게 連絡하여 同參하여 주시면 感謝하겠습니다.
--募 詩 要 綱--
1) 詩 題: 仰 崔世允義兵大將一家三絶
2) 押 韻; 天. 先. 連. 筵. 傳.
3) 投稿磨勘: 2024年 7月 12日(金曜日)(期日嚴守當日消印郵便接收 分에 한함)
4) 投 稿 處: 浦項市 北區 아치로 69, 101동 202호. 우편번호 : 37643
崔 奇 出(010-8577-8292).
5) 作詩問議: 李煥植 (연락처010-3532-4095)
6) 考選基準: 違題.違簾.對不定.疊字.疊意.鶴膝.蜂腰.等 先例에準함
7) 考選委員: 斯界大家3人委員
8) 賞金內譯: 壯元 1人 70萬원(국가보훈부장관상). 次上 1人 50萬원(포항시장상).
次下 1人 50萬원(포항시의회의장상, 參榜 10人 各10萬원. 佳作 30人 各5萬원.
9) 施賞日程: 2024年 8月 9日金曜日 14:00
施賞場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한동로 52. 흥해종합복지문화센터(3층)
10) 後 援; 興海鄕志會 興海鄕土靑年會, 興海崔氏大同宗親會.흥해경희요양병원.
11) 詩集發刊및送付: 詩稿 提出者에 限하여 送付합니다.
* 接受된 詩稿는 一切 返還하지 않습니다.
* 歷代 壯元 受賞者의 詩는 贊助詩로 記錄 編冊합니다.
添 附: 1) 漢詩作詩參考資料 1部, 2) 漢詩作詩詩紙 1部. 끝
* 의병대장 자료는 홈폐이지choiseyoon.org로 이용바랍니다.
西紀 2024 年 6月 01 日
崔世允義兵大將 行蹟과 精神
1) 出生과 氣像
崔世允의 字는 聖執, 號는 農皐, 貫鄕은 興海이다, 始祖의 諱는 湖이니, 高麗 檢校大將軍曲江府院君이다, 高祖의 諱는 弘晋, 曾祖의 諱는 昌憲, 祖의 諱는 宅奎다, 考의 諱는 再淳이니 草溪 鄭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시 月城崔氏를 맞이하여 그 사이에서 世允은 1867年11月10日 興海曲城里에서 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氣像이 뛰어 났으며 일찍이 孫吳의 兵書를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天文, 地理, 陰陽 卜筮의 術을 窮究하고 治亂興亡의 自取를 推理하였다, 일찍이 學文을 익히고 선비정신을 追求하며 文武兼全의 姿勢를 見地하였다. 弱冠 以後부터는 敎育에 뜻을 두고 傍 先祖인 農叟先生 鶴林講堂에 地方 子弟들을 모아놓고 經史諸篇의 學問과 敎養을 가르쳐 일대에 名望이 높았다, 그러한 가운데 興海郡의 鄕吏를 歷任하였다, 平素“百姓은 나라의 根本이 되고 선비는 나라의 元氣가 된다”라고 하며 선비의 道를 밝혔다.
鶴林講堂에 있으면서 고을의 秀才들을 敎導하면서 天運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며 族兄인 洪植으로 더불어 傍祖되는 農叟 公의 散逸된 遺稿들을 收集하여 續集을 刊行하였다. 한 때의 文士인 朗山 李垕, 耆石 黃鎭燮, 復齊 張泰欽, 石儂 鄭鎭伯, 梅下 趙性穆, 進士 崔浩然등과 함께 志氣가 相通하여 唱酬하였다.
2) 處變三事의 具現
(1) 前期義兵 參加: 興海 에서 鄭來義 등 義兵 수백명으로 擧義 하여 安東義陣 金道和 義陣에 參與하여 亞將의 職責(安東義陣 左翼將)을 맡아 活動 하였으며 禮安의 義兵將 香山 李晩燾와 連結되어 軍務를 議論하여. 信任을 받기도 했다.
(2) 中期와 後期義兵 參加 : 崔世允은 山南義陣의 興海地域 活動責任者로 活動, 卓越한 戰術로 數次의 戰鬪를 勝利로 이끌어 山南義陣의 威勢를 크게 振作 하였으며, 특히 1907年 9月과 10月의 2次 興海 戰鬪에서 100여명의 義兵을 거느리고 興海 分派所를 攻擊하여 敵을 砲殺하고, 武器를 押收하고, 分派所를 燒却하는 큰 戰果를 거두었다.
(3) 第3代 義兵大將 就任
1908年 2月 3日(陰曆 1月 2日) 永川郡 紫陽面 普賢山에 있는 巨洞寺에서 只今껏 義兵鬪爭을 하다 殉節한 英靈들의 慰靈祭와 함께 崔世允을 새로운 山南義陣 3代 大將으로 推戴되어 이로써 第4次 義陣이 구성된 것이다. 崔世允은 地域事情에 밝고, 地形의 利點을 十分 活用할 수 있는 該當 地域出身 義士를 中心으로 組織을 改編 當初 目標인 關東으로의 北上作戰을 修正 慶尙道一帶만으라도 據點을 確保해 持久戰을 펼치기로 作戰을 變更, 주로 本部로 利用한 北東大山, 普賢山 一帶에서 本部는 南東代山을 中心으로 慶州, 蔚山, 興海, 浦項地域을 擔當하면서 各 地帶를 總括하고 各 地帶는 責任者를 選定하여 本部와 連絡하며 遊擊戰을 펼치는 計劃으로 變更하였다,
(4) 義兵大將의 殉國 : 1911年 9月 長鬐 龍洞에서 잡혀, 1911年 大邱地方裁判所에서 10年刑의 言渡를 받고 서울 西大門刑務所에서 5年의 獄苦와 11日間의 斷食 鬪爭 끝에 1916年 8月 9日에 殉國.
(5) 輓 詩
顔張班列魯田隣(안장반열노전린)
안고경(顔杲卿) 장순(張巡)의 반열에 노중연(魯仲連)과 전횡(田橫)을 이웃하였으니
義擧東方首倡人(의거동방수창인)
동방에서 창의한 사람 중에 으뜸일세.
誓死心何同草朽(서사심하동초후)
죽음을 맹세한 마음, 어찌 초목과 함께 썩으랴!
旌忠典應自天臻(정충전응자천진)
충의로 보상받은 은전은 하늘에 이르렀네.
知音荷字初逢日(지음하자초봉일)
知音(知己之友)은 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에 그대에게 받았고
家事付吾再見春(가사부오재견춘)
나에게 남은 일을 부탁한 게 두해 봄이 지났구나.
疆土三千猶未復(강토삼천유미복)
삼천리강토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靑山幾處埋君身(청산기처매군신)
청산 어느 곳에 그대를 묻어야 하나.
黃猿暮春 義弟 曲江 崔世翰 哭輓
의병동생 곡강 최세한(세윤)은 哭하고 만장하다.
※(崔世允이 親筆로 쓴 李漢久의 輓章은 獨立紀念館에 所藏 됨)
(6) 逮捕되어 靑河憲兵 分隊로 押送되는 途中에 다음과 같은 詩 한 수 지음
國破家亡已有年
나라가 파하고 집이 망한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尙存一縷愧蒼天
아직도 실 날 같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늘에 부끄럽도다.
丈夫自此知歸所
대장부 이로부터 돌아갈 곳을 알았거니
殷有夷齊齊有田
은나라에 백이숙제가 있고 제나라에 전횡(田橫)이 있었네.
(7) 處變三事 具現(倭敵의 侵入 등으로 나라가 危急할 때 선비가 해야 할 세가지 使命)
①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움
②去而守之: 절개를 지키기 위해 망명
③自靖致命: 스스로 목숨을 끊음 中 (1)과 (3)을 具現.
3)天下三絶 : 忠. 烈. 孝) 實現
(1) 崔世允大將의 忠, 婦人 尹英德 女史(1868 - 1912)의 烈,
큰 아들 山斗(1888 - 1912)의 孝.
(2) 1968年 3月1日 建國勳章 國民章을 追敍하였으며 1976年 10月 興海
松鶴洞(現鶴田里)의 崔世允 義兵大將과 婦人 尹氏의 墓를 함께 서울 東雀洞 國立墓地로 옮겨 安葬하였다.
(3) 어린아이를 업은 채 大邱와 西大門刑務所 周邊에서 품팔이 하 여 私食을 올렸고, 남편이 殉國하자 손수 염습하고 屍身을 머리에 여서 千里 길을 露宿하면 서도 잠시도 땅에 내려놓지 않고, 간신히 故鄕에 返葬하고 나서 얼마 후 男便을 위해 魂神의 뒷바라지를 한 부인 尹英德 女史도 男便이 죽은 이듬해 7月1日 死亡하였다.
(4) 큰 아들 山斗 역시 義兵活動으로 檢擧되었다, 當時 21세였던 山斗는 어린 나이임에도 義陣의 軍資金 募集 活動을 擔當하였다, 崔山斗는 日軍警의 審問에도 屈伏하지 않고 아버지 崔世允의 所 在를 緘口하다가 1908年 9月30日 大邱地方裁判所에서 終身 懲役刑을 받고 1912年 9月9日 끝내 大邱監獄에서 殉國하였다. 2017年 11月 17日 建國勳章 愛國章을 追敍하였다.
(5) 이러한 崔世允 義兵大將 一家의 天下三絶의 具現은 浦項精神의 師表로
서 子孫萬代의 貴敢이 되고 있다.
* 其他 參考資料
周邊地域 山: 北東大山, 普賢山, 南東大山, 飛鶴山, 禱陰山(鶴林講堂),
寺刹 : 巨洞寺(山南義陣 3代 義兵代將 就任地). 江 : 兄山江 . 曲江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