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만들어낸 관치 금융 상품들이 시장의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다. 현 정부의 대표적 관치 금융 상품은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다. 이 두 금융상품은 거의 모두 가입자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다. 투자자가 외면하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입한 사람들조차 이 두 펀드에 더는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들이 운용에 어려움을 겪으며 기대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가입자들이 낸 투자금에서 수수료만 갉아먹는 상태로 전락한 못난이 펀드들이 부지기수다. 투자자도 거의 없고, 투자금도 유입되지 않으면서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는 자산운용사들에도 비용만 나가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다.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는 모두 서민들의 재산 형성과 장기투자를 지원한다는 취지로 금융위원회 등 정부가 주도한 금융투자 상품이다. 관치 금융 상품인 것이다. 재형저축펀드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한 달 후인 2013년 3월 등장했다. 총급여 5000만원 이하(또는 종합소득 3500만원 이하 사업자)를 가입 대상으로, 7년 만기(1회 연장 가능, 최대 10년 만기) 투자 상품이다. 이 펀드에 대해 당시 정부는 이자와 배당 소득세(주민세 포함 총 15.4%)를 면제해 주는 절세용 투자 상품으로 홍보했다.
소득공제 장기펀드는 재형저축펀드보다 1년 뒤인 2014년 3월 시장에 나왔다. 역시 총급여 5000만원 이하 근로자만 가입할 수 있다. 최소 5년 이상 이 펀드에 투자하면 매년 펀드에 납입한 돈 중 40%(최고 240만원까지)를 연말정산 때 공제해 준다.
‘세금면제’와 ‘소득공제’라는 ‘절세투자’를 장점으로 내세운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의 현실은 어떨까. 현재 3~4개 자산운용사를 빼면, 거의 모든 자산운용사의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 설정액(사실상 투자금을 의미함)이 100억원도 안 된다. 심지어 이 두 종류의 펀드 설정액을 채 1억원도 확보하지 못한 자산운용사까지 수두룩하다.
기자가 재형저축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 27곳의 상황(4월 1일 기준)을 조사해 봤다. 이 자산운용사 27곳 중 재형저축펀드의 설정액이 100억원을 넘는 곳은 한국밸류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4곳에 불과하다. 총 설정액이 10억~100억원인 자산운용사는 8곳이었다. 나머지 15개 자산운용사는 채 10억원도 안 되는 설정액으로 재형저축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이 중 알리안츠자산운용과 KDB자산운용, 대신자산운용 등 무려 7개 자산운용사의 재형저축펀드 총 설정액은 1억원도 안 된다. 어떤 형태나 종류의 펀드든 1억원도 안 되는 설정액으로는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가 여의치 않다. 자산운용사나 펀드매니저가 제대로 된 펀드 운용을 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기자는 각 자산운용사가 운용하고 있는 60여개 개별 재형저축펀드(멀티클래스 펀드는 대표 펀드 기준)의 설정액 현황도 확인해 봤다. 놀랍게도 60여개의 재형저축펀드 중 설정액이 100억원을 넘는 펀드는 한국밸류10년투자재형저축(채권혼합형)펀드와 KB재형밸류포커스30자(채혼)펀드, 단 두 개뿐이었다. 이 두 펀드를 제외하면 총 설정액이 100억원은 고사하고 50억원을 넘는 재형저축펀드가 하나도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설정액이 불과 1억원도 되지 않는 재형저축펀드가 20여개나 된다는 점이다. 전체 재형저축펀드 중 3분의 1이나 되는 수치다. 동양과 키움투자자산운용 등 몇몇 자산운용사에서 운용하고 있는 재형저축펀드 중에는 설정액이 1억원은 고사하고 2014년 1년 동안 투자자로부터 채 1000만원의 투자금조차 유치하지 못한 펀드까지 있다. 현재 3~4개 펀드를 뺀 거의 모든 재형저축펀드가 ‘실제 운용되고 있는 펀드’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다.
소득공제 장기펀드도 재형저축펀드와 똑같은 상황이다. 기자가 소득공제 장기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27개 자산운용사의 소득공제 장기펀드 상태를 조사(4월 1일 기준)해 봤다. 이들 중 소득공제 장기펀드의 총 설정액이 100억원 이상인 곳은 한국밸류자산운용·신영자산운용·KB자산운용, 단 세 곳뿐이다. 총 설정액이 50억원을 넘는 곳도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불과 세 곳이다. 동양자산운용과 한화자산운용 등 11곳은 운용 중인 소득공제 장기펀드의 총 설정액이 10억원도 안 됐다. 특히 유진자산운용과 GS자산운용 등 6개 자산운용사는, 소득공제 장기펀드의 설정액이 채 1억원도 안 되는 심각한 상태였다.
개별 소득공제 장기펀드들의 상황은 어떨까. 현재 각 자산운용사가 운용 중인 약 60개의 개별 소득공제 장기펀드(멀티클래스펀드는 대표 펀드 기준)의 설정액 상황도 확인해 봤다. 설정액이 100억원을 넘는, 펀드다운 펀드는 6개밖에 안 됐다. 반면 설정액이 10억원이 안 되는 소득공제 장기펀드가 30여개나 됐다. 특히 설정액이 채 1억원도 안 되는 초소형 자투리 펀드가 15개나 됐다. 현재 소득공제 장기펀드의 25% 이상이 설정액 1억원도 안 되는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수익률 확보를 위한 정상적 펀드 운용은 고사하고,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투자 포트폴리오조차 제대로 짜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면세와 소득공제 등 절세 효과라는 장점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이들 상품은 왜 투자자들로부터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걸까. 취재에 응한 상당수 시장 전문가들은 금융과 투자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와 금융 당국의 일방통행을 문제로 꼽았다. 이들 대부분은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는 투자자와 시장의 요구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부 당국과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등장했다”라며 “관치 상품의 문제점과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금융사 관계자는 “시작 때부터 투자자와 금융사의 의견들이 배제되면서 시장에서 눈길을 받지 못했다”라며 “연간 총급여 5000만원 이하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게 한 것이 두 펀드가 애물단지가 된 시작점”이라고 했다.
“총급여 연 5000만원이면 세금과 각종 공과금 등을 뺀 실질소득이 3000만원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정도 소득계층의 연령대라면 20~30대입니다. 이들은 이미 소득공제 등 세금 혜택이 매우 큰 연금과, 청약 같은 주택장만용 투자 상품, 각종 보험 등 필수 금융 상품에 소득 상당액을 빡빡하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결혼과 육아비용 부담도 큰 계층입니다. 현실적으로 투자 여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투자 여력이 없는 계층에만 투자 상품을 만들어 준 겁니다.”
다른 금융사 관계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총소득 5000만원 이하 계층의 투자 형태를 분석하면 이들은 장기투자 상품으로 연금과 주택마련 상품을 선택한다”며 “이들이 투자 여력도 부족한데 최소 5~7년 이상 환매(해지)할 수 없는 장기 상품인 재형저축펀드와 소득공제 장기펀드에는 투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두 시장 관계자는 공통적으로 “두 투자 상품이 나오기 전 금융사들이 ‘연소득 8000만원 이하 층까지 대상을 넓히자’는 것과, ‘3년 이상 투자하면 최소한의 세금 혜택이라도 받게 해주자’는 의견을 관계 당국에 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 같은 현장의 목소리와 의견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상품이라고 했다.
또 다른 시장 관계자는 “절세 상품으로 알려졌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절세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며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했다. “펀드들 중 이자소득세 면세 같은 절세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채권형 펀드’입니다. 주식 투자로 수익을 올렸다 해서 소득세가 부과되진 않습니다. 즉 펀드시장의 주력인 ‘주식형 펀드’는 배당금에 부과되는 세금을 빼면 이미 사실상 비과세 상품인 셈이지요. 높은 수익으로 검증을 마친 주식형 펀드에 투자해도 어차피 사실상 비과세인데, 세금 혜택 보겠다고 굳이 5~7년 이상 돈을 넣어야 하는 새 펀드에 투자하겠습니까?” 이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투자 상품을 구상하고 기획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이 두 펀드가 처음 공개됐을 때 금융위원회 등 금융당국이 홍보했던 절세 효과가 기존의 다른 투자 상품들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은 취재 중 만난 금융사 관계자 상당수가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금융사 관계자는 “연금과 IRP(개인형 퇴직연금), 저축성 보험이 이 두 종류의 펀드보다 실제로는 소득공제 비율과 비과세 효과가 더 크다”며 “굳이 절세 혜택에 초점을 맞춰 투자하는 사람에게 이 두 펀드는 처음부터 투자 우선순위에 들기 힘들게 만들어진 상품이었다”고 했다.
취재에 응한 대부분의 시장 관계자들은 “정치권과 정책 당국의 권한과 역할이 큰 한국 시장의 특수 상황에서 정책 금융 상품이 없어지긴 힘들다”며 “정책 금융 상품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 투자자와 금융사 등 현장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더 반영해야 한다”는 공통된 의견을 말했다. 그들은 이 같은 노력 없이는 관치 금융 상품의 실패가 계속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