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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오늘의 역사
2019년 인권운동가·여성운동가·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세상 떠남(97세)
2019년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60세) 삼성 사옥 앞 철탑(25m)에서 고공농성 시작, 355일만인 2020.5.29 땅으로 내려옴
2015년 ‘구원왕’ 리베라 아들도 MLB 마운드에 서
메이저리그 개인 통산 최다 세이브에 빛나는 마리아노 리베라(46)의 아들이 미 프로야구(MLB) 무대를 밟는다. 마리아노 리베라 주니어(21)가 10일 실시된 2015 MLB 드래프트 4라운드 전체 134번째로 워싱턴 내셔널스의 지명을 받은 것.
아이오나대 3학년인 리베라 주니어는 지난달 미국대학야구 메트로·애틀랜틱 애슬레틱 콘퍼런스 ‘올해의 투수’로 꼽힌 유망주다. 최고 시속 150㎞ 중반대의 강속구와 예리한 커브가 주무기로 꼽힌다. 작년 드래프트 24라운드에서 아버지가 뛰었던 뉴욕 양키스의 선택을 받았던 그는 입단을 거부한 뒤 대학에서 1년간 실력을 더 키워 올해 지명 순위를 끌어올렸다. 리베라 주니어는 19년간 양키스에서 뛰면서 통산 652 세이브를 올린 아버지처럼 내셔널스의 불펜 투수로 뛸 전망이다.
2015년 전몰군경 미망인회 19명 선정… 어머니들이 뽑은 ‘장한 어머니’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는 2015년6월10일 서울 중앙보훈회관에서 구양숙(88)씨 등 19명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수여했다. 조국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남편을 대신해 자녀를 동량지재(棟梁之材)로 키워낸 어머니들에게 주는 상이다.
구씨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남편 김만홍씨와 결혼해 아들 둘을 뒀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남편이 입대하면서 생이별했다. 남편은 1951년 전사했다. 구씨는 작은아들을 업고 서울·천안·정읍·밀양 등을 돌며 잡곡 행상을 했고, 이후 식당을 열어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장남 김창석(69)씨는 동국대를 졸업한 뒤 한국보훈복지공단에 입사해 한국보훈원장을 지냈다. 차남 김창범(66)씨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성균관대 교직원으로 근무했으며 베트남에서는 고엽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장을수(81)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7세에 김덕기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남편이 입대하며 젖먹이 아들과 둘만 남게 됐다. 남편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장씨는 대구의 양말 공장에 다니며 살림을 일궜고, 아들 진태(62)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검사가 됐고, 현재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이다.
6·25 직전 18세 나이로 결혼해 아들을 둔 전정녀(84)씨의 남편도 1951년 강원도 양구 피의능선 전투에서 별세했다. 시조모·시어머니와 시누이 셋, 그리고 아들을 책임지게 된 전씨는 농사와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시누이를 모두 출가시켰다. 아들 김창기(63)씨는 전북대를 졸업해 한국전력에서 30년 근무했다. 전씨는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간호해 지역 단체로부터 경로효친상과 열녀상도 받았다.
2014년 이슬람 수니파 무장조직 IS(이슬람국가) 이라크 북부 모술 전투원 300명으로 점령, 건국일로 자축
2013년 박인비 LPGA 웨그먼스 우승 메이저대회 3승.
201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인공위성 과학기술위성 2호가 탑재된 나로호가 5시 1분에 발사되었으나 137초후에 통신이 두절되고 페어링 분리 전에 추락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 반대 시위 최고조. 서울 광화문 일대에 약40만명 이상
2005년 한미 정상회담(한국시간 6월 11일) 워싱턴서 개최
2004년 흑인 음악의 거장 레이 찰스 사망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가수였던 찰스는 솔(soul)을 기반으로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R&B, 가스펠, 재즈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음악에서 빛을 발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레이 찰스 뮤직’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그의 작곡과 연주력보다 반짝인 것은 블루스풍의 강하고도 독특한 노래 솜씨였다.
그가 부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 같은 노래들은 지금껏 사랑받고 있다. 이런 음악들로 찰스는 그래미상을 12회나 받았고 엘비스 프레슬리, 어리사 프랭클린, 스티비 원더, 밴 모리슨, 빌리 조엘 등 숱한 뮤지션에게 영향을 미쳤다.
찰스는 녹내장으로 일곱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피아노를 비롯해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학교를 그만둔 뒤 뮤지션으로 나섰다. 본명 레이 찰스 로빈슨에서 ‘로빈슨’을 뗀 것도 이때였다. 권투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달에 공연을 앞두고 있었으나 간질환에 따른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2004년 식약청,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명단 발표
2004년 6월 온나라를 ‘쓰레기 만두’ 열풍으로 내몰았던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및 유통업체가 6월 10일 적발돼 명단이 공개됐다. 식약청은 이날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쓰레기만두 사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불량 만두소를 사용한 18개사와 조사를 끝내지 못한 7개사 명단을 공개했다. 이 중에는 CJ와 동원F&B 등 5개 대기업도 납품받을 것으로 밝혀져 국민의 분노를 더했다.
쓰레기 만두는 몇몇 양심없는 식재료 납품업체 등에서 단무지 제조업체에서 쓰고 버린 자투리나 썩은 무 등을 공짜로 받아 만두소 재료로 만들면서 시작됐다. 게다가 이 때 사용된 물 또한 폐우물 등에서 퍼올린 비위생적인 물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불법 제조한 만두속을 20kg과 4kg 포장용기에 담아 kg당 400~800원에 팔았다. 이들이 사용한 물과 완제품 등을 국과수에 의뢰한 결과, 식중독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대장균 등이 다량 검출됐다.
200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 50주년, 천안서 ‘새역사 희년대회’ 개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진보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2003년 6월 10일 오전11시 창립 50주년을 맞아 충남 천안종합체육관에서 1만 5000명의 신도가 모인 가운데 ‘새역사 희년대회’가 열렸다.
기장은 1953년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갈등을 빚던 장공 김재준(1901~1987)목사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세력이 독립하면서 시작돼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2년 은명기 목사가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설교를 한 혐의로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박형규 목사가 학생들과 함께 반독재 전단을 배포해 구속되는 등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이어 1980년대에는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선언’(88선언) 발표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2003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선 ‘스피릿(Spirit)’ 발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 탐사 로버(MER)’ 2대 중 1대를 10일(현지 시각)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보잉 델타 Ⅱ 로켓에 실어 발사했다.
‘스피릿’이란 이름의 이 탐사 차량은 내년 1월 화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NASA는 폭풍 때문에 이 탐사 차량의 발사를 이틀 연속 연기했다. 두번째 탐사 차량은 이달 말쯤 발사된다.화성 탐사 차량은 바퀴가 6개 달려 있으며, 화성의 하루(지구의 24시간 39.5분)당 약 40m를 전진한다. 이 탐사 차량의 값은 두 대 합쳐 8억 달러(약 9600억 원). 탐사 작업이 끝나면 그대로 화성 표면에 남게 된다.
2003년 `전설의 섬`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 완공
소설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섬’ 이어도(離於島)가 해양환경·수산물 연구와 태풍 예방을 위한 해양 과학기지로 바뀌었다. 해양수산부 허성관 장관은 2003년 6월 10일 “남제주군 마라도에서 149km 남서쪽에 위치한 이어도에 지난 95년부터 212억원을 들여 종합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했다”고 발표했다.
이어도는 실제 섬이 아니라 바다 속 4.6m에 감춰진 암초로, 파도가 심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예부터 제주도에서는 바다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산다는 ‘전설의 섬’으로 불려왔으며,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Socotra)호에 의해 처음 실체가 알려졌다.
과학기지는 이어도 남측 경사면에 설치된 철골 구조물을 기초로 수면 위 36m 높이에 400평 규모로 만들어졌다. 기지는 무인(無人)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첨단 장비를 이용해 해양 기상과 환경·해류·생물자원을 관측한다
1999년 북한 경비정 6척, 북방한계선(NLL) 침범
1999년 유고 연방군 코소보서 철군
유고 연방군이 1999년 6월 10일 코소보에서 철군을 시작하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지난 3월 24일 이래 계속해 온 공습을 중단했다. 유엔 안보리도 코소보 평화 결의안을 채택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난민촌에서는 코소보에서 쫓겨온 알바니아계인들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고, 평화유지 임무 수행을 위해 코소보에 파견될 나토 군은 마케도니아의 기지에서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코소보 독립을 추구하는 알바니아계 무장세력의 도발과 이에 맞선 세르비아계의 인종청소가 노골화된지 1년 5개월, 나토가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응징하기 위해 전투기와 미사일을 동원한지 78일 만이다. ‘코소보 전쟁’ 종식은 외형적으로 나토, 특히 미국의 승리를 상징한다. 유고 땅 코소보가 나토의 수중에 넘어왔고, 나토의 요구사항이 관철됐다. 밀로셰비치는 전범으로 기소됐을 뿐 아니라 그의 권좌도 위태로워졌다.
반인류 범죄 응징이라는 명분으로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이 정당화되는 새로운 ‘국제규범’이 확립됐다. 그러나 코소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처뿐인 전쟁이었다. 지상군 투입을 배제한 공습 일변도의 작전은 인종청소를 오히려 격화시켰고 한 국가의 국토와 기간시설을 초토화시켰다. 오폭으로 인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으로 나토 작전의 정당성은 훼손됐다.
1998년 제16회 프랑스월드컵 개막
20세기 마지막 월드컵경기 98프랑스월드컵 축구대회가 1998년 6월 10일(한국시각)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브라질과 스코틀랜드의 대결을 시작으로 33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프랑스가 이번 대회를 위해 신축한 생 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개막식은 전세계 1백60여개국 10억명 이상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됐으며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재프 블래터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회장 등 세계 정치-문화-스포츠계 주요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번 대회에는 1994년 미국대회 우승팀인 브라질과 개최국인 프랑스, 아시아대표 한국을 비롯한 예선통과팀 30개국 등 모두 32개국이 참가했다. 이들 대표팀은 파리,리옹,마르세유 등 10개 도시 경기장에서 조별 예선(8개조)을 벌여 각조 1, 2위가 16강에 오른 뒤 토너먼트로 8강전, 4강전, 준결승전을 거쳐 7월13일 생 드니 구장에서 왕중왕을 가리는 결승전을 가졌다. 결승전에서는 프랑스가 브라질을 3대0으로 대파,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을 품에 안았다.
1997년 한국 최초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 별세
한국 최초의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58)씨가 1997년 6월 10일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사망 10개월 전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씨는 한국 프로복싱사를 일궈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였다. 그는 국내 프로복싱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얻었고 착실한 인생여정 속에 부를 쌓아 가장 성공한 체육인이라는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였다. 태어나기 3일 전에 아버지가 사망해 유복자로 세상의 빛을 보았고 6·25때 월남, 이 사회의 밑바닥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 2학년 때 동경아시안게임 웰터급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인 그가 아마 때 남긴 기록은 87승 1패. 프로 데뷔 후 그는 동양챔피언을 거치며 착실히 전적을 쌓다가 1966년 6월 25일 벤베누티(이탈리아)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등정했다. 마징기(이탈리아)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준 후 조용히 링에서 물러난 그는 링에서 얻어맞으며 번 돈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명동서 챔피언다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어 빌딩을 소유하는 등 탄탄한 재력을 축적했다. 그는 1996년 말 간암선고를 받기까지 골프 싱글수준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병마와의 마지막 승부에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1997년 중국 최초 정지기상위성 FY-2호 발사
1996년 기아자동차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 `엘란` 시판
1994년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 북한 방문(-18일까지)
뒤늦게 9월에 알려짐, 김 회장은 7월초에도 북한방문, 방북시기가 남한정부가 북한에 의한 전쟁도발의 위험을 강조하던 때와 김일성 사망 때라 관심 쏠렸으나 목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음
1994년 전쟁기념관 개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은 한국에서 발발했던 전쟁과 호국정신에 대한 기록, 자료가 전시된 곳이다
1990년 9월28일 전쟁기념사업회가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이후 4년여의 공사를 거쳐 1994년 6월10일 개관했다
전쟁기념관의 건립 목적은 전쟁의 교훈을 일깨워 전쟁을 예방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 하기 위함이다
1993년 북한, 동해안에서 사정거리 1,000km 미사일발사실험 실시
1993년 경기도 연천 예비군 부대 폭발사고
1993년 6월 10일 오후 4시5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군단 포병훈련장 8진지에서 동원예비군 포사격훈련중 포탄4발이 폭발, 예비군과 현역 장-사병 등 20명이 사망하고 5명이 크게 다치는 대형참사가 발생했다.
포사격 연습도중 1백55㎜ 포탄의 장약에 불이붙어 포탄4발이 연쇄폭발하여, 19명(현역 3명, 예비역 16명)이 숨지고 5명이 크게 다쳤다. 당시 훈련장에는 포 12문이 있었고, 포탄 4발이 터졌는데 이중 3발은 조명탄이었고 1발은 고폭탄이었다. 사고를 당한 예비군들은 967포병대대 소속으로 8일부터 11일까지 동원예비군에 소집돼이틀간 주둔지 훈련을 끝내고 10일 새벽 5시쯤 포병훈련장에 도착, 포사격 실습을 하던 중이었다.
사고 직접적인 원인은 포수요원에 의한 취급부주의 또는 비정상적인 조작이었으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미숙한 교관들의 무리한 훈련진행과 안전관리 소홀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포사격 훈련조교가 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있지 못했고, 중위계급으로는 예비군 지휘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 부대에 부임한지 2주일도 채 안된 중위가 대위계급장을 달고 예비군 지휘업무를 수행했으며, 적정인원보다 2~3배나 초과해 편성한 훈련조와 훈련일정 등의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방부에서는 사망자는 현역-예비역 구분 없이 19명 전원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92년 아난 판야라춘, 태국 신임 총리에 선임
태국 의회는 1992년 6월 10일 아난 판야라춘 총리를 임명했다. 이날 태국의 제20대 총리에 임명된 아난은 1991년 2월에 이어 두번째로 위기상황에 처한 정치를 이끌 책임을 짊어지게 됐다. 외교관-기업인 출신인 그는 1991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차티차이 춘하반 총리의 민간정부를 전복시킨 군부가 그에게 과도총리직을 맡기자 13개월 간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다.
주로 테크너크랫(기술관료)들로 구성된 아난의 과도정부는 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유능하고 정직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실시한 대부분의 개혁은 경제분야에 집중돼 많은 통제가 해제됐고 금융자유화 조치가 취해졌다. 1932년 방콕 출생으로 방콕기독대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했으며, 케임브리지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25년 간을 외무부에서 보낸 고참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와 주유엔 대사를 지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월남전이 끝난 1976년 외무부의 고위 관리로서 미군의 태국 철수와 중국과의 외교관계 재개협상에서 수완을 보였다
1991년 한국-루마니아, 뉴스교환협정 체결
199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당선
일본계 이민 2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51)가 1990년 6월 10일 실시된 페루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후보를 누르고 남미사상 최초의 동양계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지모리후보는 1989년 정치초년생들의 개혁운동 단체인 캄비오(변혁) 90운동을 조직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했다. `국민생활을 망쳐온 이데올로기와 파당적 정치구조 및 진부한 정치적 행태`의 타파가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후지모리는 리마국립농업대학의 학장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이 대학을 수석졸업한 뒤,미 위스콘신대학 등에서 농업학을 공부한 농학자인 그로서는 정치란 별개의 문제였다. 사회생활이라곤 1980년중반 전국대학협의회 회장과 국영TV 대담프로의 사회자를 맡은 것이 전부였다. 정치문외한인 후지모리가 대통령선거에까지 뛰어들게 된 것은 높은 인플레율과 실업률,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의 부패가 주된 이유였다.
1989년 건설부, 일산 등 전국 22곳 738만평을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고시
1987년 `6ㆍ10 민주화항쟁`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5공 정권은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로 맞서 학생시위를 잠재우려 했으나 민심은 오히려 정권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간선제 선거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 대표가 선출됐다. 같은 시각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서울의 시위대들 중 일부는 최루탄에 쫓기다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을 이끌어냈다.
‘6ㆍ10 민주화항쟁’ 결과 집권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8개항의 ‘6ㆍ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4ㆍ13 호헌조치‘ 또한 철회됐다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986년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위한 제3차 남북체육회담(스위스 로잔느) 열림
1985년 이스라엘군 3년만에 레바논 철수완료
1984년 미국 육군 요격기, 태평양 상공서 목표 미사일 격추
1984년 비구니 1천2백여명, 영화 비구니 제작 중지 요구
1984년 미국 국방성 ICBM을 대기권 밖에서 파괴하는 실험성공 발표
1984년 인도, 시크교 군인 무장 반란
1983년 중국항로, 한국비행구역 통과 허용 발표
1982년 이라크, 대 이란전에 일방적 휴전 선언
1982년 독일의 영화감독 파스빈더 사망
1979년 팔레비 전 이란국왕 멕시코로 망명
1975년 박동명 사건
1975년 남대문시장 화재 8백여점포 전소
1974년 닉슨, 중동5개국 순방 등정
1973년 북한, 휴전선서 대남방송 재개
1970년 북아일랜드에 종교 폭동
1969년 베트콩 임시혁명정부 수립 발표
1969년 교황 바오로6세, 5세기만에 신교 연합체인 세계교회회의에 참석
1967년 서울대 법대생 6.8부정선거 규탄 데모
1963년 베트남 틱꽝득 스님 응오딘지엠 정권의 독재와 불교탄압에 항의 분신
1962년 10환을 1원으로…2차 화폐개혁
1962년 6월9일 밤10시, 5ㆍ16군사정부가 중대 발표를 했다. `긴급통화조치법`에 의거, 10일0시를 기해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50환 이하의 소액 은행권과 주화를 제외한 모든 환화(圜貨)의 유통을 전면 금지시키되 예상되는 불편에 대비해 세대당 500원까지는 새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환`으로 바뀌었던 화폐단위가 9년 만에 다시 `원`으로 되돌아왔다. 시행 첫날인 10일은 일요일인데도 은행은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고, 시장 일부에서는 생필품을 사두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영국 화폐회사에 급히 인쇄를 의뢰하는 바람에 `독립문`이 `득립문`으로, `조폐공사`가 `조페공사`로 잘못 인쇄되기도 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재원을 마련하고 부정축재 자금을 회수하며 고리채를 일소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지만 부작용이 속출했다. 물가는 뛰었고 기업활동도 날로 위축돼 사회 불안까지 가중됐다. 장롱 속에 숨어있을 것이라던 검은 돈의 규모도 미미한 것으로 밝혀지자 결국 군사정부는 1개월 만에 봉쇄예금의 완전 해제로 백기를 들어야 했다.
1961년 영국 런던에서 소련으로 첫 TV 생방송
1961년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공포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5·16 쿠데타의 성공 여부가 아직 불투명하던 1961년 5월 18일, 쿠데타 감행의 주역인 김종필 예비역 중령이 육사 8기 동기생들을 서울 정동의 하남호텔로 불러 모아 중앙정보부 설치를 논의했다. 김종필이 구상한 조직은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국가정보기관이었다.
이들은 5월 21일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의 직속으로 있던 중앙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중앙정보위의 업무 일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중앙정보위는 자유당 시절이던 1959년 1월 이후락 소장이 김정렬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창설한 일종의 정보기관으로, 미국의 CIA가 넘겨주는 방대한 양의 정보문서 정리를 주요 임무로 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군의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 등의 수사기관에서 불러들인 사람들로 채워졌다. 요직의 김종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김종필은 5월 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가져가 장도영 의장의 결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도영 의장이 결재를 보류하자 김종필은 장도영이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법적 절차를 밟기도 전에 사실상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던 김종필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6월 1일 장도영의 측근이자 육사 5기인 김일환 대령 등 3명을 구속했다.장도영도 6월 6일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직만 수행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사실상 실권은 모두 빼앗기고 실권이 없는 자리만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장도영이 이처럼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 가운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법률 제619조로 공포해 중앙정보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정식 발족시켰다. 중앙정보부법은 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이긴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한을 담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북한 및 해외 관련 정보 업무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 군을 포함한 정부의 정보 수사활동을 조정·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김종필의 독주와 주요 보직을 사실상 독차지한 육사 8기의 전횡에 육사 5기가 반발하면서 혁명주체 간에 서로 등을 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59년 잡지 `야화` 7월호. `하와이근성(根性)시비` 필화로 판금
1959년 월간잡지 `야화` 7월호에 호남 사람들의 성격을 비난하는 `하와이 근성(根性) 시비(是非)`라는 기사가 실리자 전라도 사람들이 크게 반발, 잡지 발행인 최상덕과 편집책임자 이종열, 필자 조영암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문제의 기사는 찬반 두 필자가 원고를 썼는데 호남인들의 근성을 비판하는 글은 시인인 조씨가 쓰고 이를 반박하는 글은 호남출신 시인인 유엽씨가 썼다.
잡지가 발매되자 광주시민 5만여명이 규탄결의대회를 열었고 전남·북 도의회가 규탄결의안을 채택했으며 호남출신 국회의원 50여명이 공보실장을 상대로 정부책임을 추궁하는 등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전개됐다.
`야화` 7월호는 즉시 판매금지되어 회수됐으며 발행인·편집인·필자는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되어 전주지검으로 압송됐다. 1심 재판결과 편집인과 필자에게는 2년형이 언도되고 발행인은 무죄석방됐다. 편집인과 필자는 상고심에서 6월형으로 감형됐다.
1957년 캐나다 총선거, 22년 만에 정권교체
1957년 6월 10일 캐나다 총선에서 보수당 당수 존 디펜베이커가 캐나다 수상에 당선됨으로 22년 만에 우익정권이 탄생했다. 자유당의 지도자이며 캐나다 정치계의 거물원로인 75세의 루이 생 로랑 수상은 선거결과를 수용, 사임했다.
로랑 수상의 사임은 자유당과 보수당 모두 과반수 의석에 미달하기 때문에 법적인 사임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각에 참여하고 있는 각료들 가운데 다수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9명의 각료들의 동료와 내각에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수당은 265석의 하원의석중 단일 세력으로는 최대인 109석을 확보했지만 어느 당도 우익인 사회신용당과 온건좌익인 연방연합당과 같은 소수당의 지원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했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진압
1952년 5월 거제도에 수용중인 친공포로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고 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을 72시간 납치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이 1952년 6월 10일 유엔군에 의해 진압됐다.
신임 소장 보트너 준장이 이끄는 유엔군은 거제도의 친공포로들을 무력으로 진압 공격하여 30명의 사상자와 85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1시간 반에 걸쳐 6천여명의 미군들과 탱크는 제76포로 수용소로 돌진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을 생포했다.
공식 보도에 따르면 포로 지도자들은 유엔군의 명령에 따르는 자들은 죽였고, 또한 그들중 많은 수가 자살했다. 이 사건 이후 도트 준장은 종신대령으로 강등됐고, 후임 수용소장으로 보트너 준장이 임명됐다.
1950년 북한, 조만식선생과 간첩 김상용 교환 제의
1949년 노르웨이의 소설가 운세트 사망 - 1928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49년 권농일 제정
1947년 조선신문기자협회 발족(위원장 고재욱)
1946년 이탈리아, 공화제 선언
1943년 코민테른 해산
1940년 노르웨이 독일에 항복
1940년 이탈리아,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
1934년 영국 작곡가 딜리어스 사망
1932년 장개석, 여산회의에서 제4차 소공전(掃共戰)을 결정
1926년 건축가 가우디 사망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로 불린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1926년 6월 10일 저녁 기도를 하러 가다 전차에 치여 74세로 숨졌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가우디의 작품이 3개나 지정될 정도로 그의 건축은 독보적인 것이었지만 그중 2개 건축물에 후원자의 이름이 새겨질 만큼 40여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과 우정은 각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가우디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120년 전인 1883년 착공했으나 난해한 설계로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바르셀로나의 성(聖)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때문이다.
옥수수 모양의 첨탑,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만 사용한 독특한 조형미… 사람들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 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1926년 6.10만세운동
조선공산당은 '6·10운동투쟁지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분산된 투쟁을 결집하려 전국 도시에 연락망을 완성하고 학생들을 조직하고 투쟁 지도부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투쟁 지도부가 검거되었음에도 6월 10일 일본 경찰의 경계를 뚫고 8차례 이상의 시위를 벌어졌고 전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이 투쟁으로 전국에서 약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7, 8월에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확대되어 약 100여 명이 대거 검거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결합 경험은 이후 신간회를 창설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일제 한국서 치안유지법 실시
1923년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사망
1915년 영국, 독일식민지 카메룬을 점령
1914년 총독부, 각급학교에 교련과목 신설
1914년 박용만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 조직
1911년 이회영 6형제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독립운동의 산실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 바꿈) 창립
1909년 영국 기선 슬라보니아호 조난중 최초로 SOS발신
1907년 프랑스 일본 조약 조인(중국의 영토보전)
1907년 프랑스 류미엘 형제, 칼라사진방식을 발표
프랑스의 화학자 류미엘 형제(오거스트와 루이)가 1903년에 발명한 오토크롬 건판(乾板)이라는 칼라 사진방식을 1907년 6월 10일 발표했다. 적색,녹색,청색의 3색 필터로 피사체를 분해기록하고 현상후 3색 필터 스크린을 통하면 화상이 재현되는 것으로 1장의 건판에서 색의 분해, 합성이 모두 가능한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는 고감도 흑백감광사진에 비해 60배정도의 노출시간이 필요하지만, 상업이나 예술에 널리 이용됐다.
류미엘 형제는 1895년 촬영기 겸 영사기도 개발해 `영화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1907년 북경-파리간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레이스 스타트
1903년 세르비아 군대 혁명
1901년 중국의 쑨윈 일본으로 망명
1898년 친위기병대 창설
1894(조선 고종 31) 동학농민군 전주성에서 물러남
1871(조선 고종 8) 미군 강화도 초지진 점령(신미양요)
미국 상선 셔먼호가 평양 관내까지 들어와 무역거래 요구하다 평양시민과 충돌, 불태워진 진상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콜로라도 호를 이끌고 쳐들어옴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광성진까지 점령. 백병전까지 벌인 치열한 싸움으로 중군 어재연 등 53명 전사 24명 부상,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
1868년 미국의 제15대 대통령(1857-61 재임) 뷰캐넌 사망
867년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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