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로 자란 내 첫 조카는 누나가 낳은 딸이었는데,
그 조카와는 물론 같이 살았던 적은 없다.
같은 성씨로써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첫조카는
큰형의 큰 딸이었다.
그 조카가 올해로 48세가 됐다.
아직은 처녀인데, 언제 시집을 갈지 잘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갈지 안 갈지 조차도 모른다.
거의 비슷할 때 태어난 두 조카는
시누이 올케 간의 숙명적 갈등에 힘입은 바 늘상 비교가 됐었다.
누나네 조카는 발육도 빨랐고, 말도 빨랐다.
그러나 형네 조카는 발육이랄 것도 없었고, 말도 못했다.
누나네 조카가 10개월 정도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형네 조카는 18개월이 돼서야 겨우 뒤집었다.
누나네 조카는 돌이 지나자 마자 “옛날에.....‘하며 조잘댔지만
형네 조카는 늘 바보같은 객쩍은 표정으로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때는 1960년대 중반, 무식하고 과문했던 시절......
나중에 알고 보니 형네 조카는 뇌성마비였다.
출산 때 산소공급이 제대로 안되어
뇌의 산소부족으로 뇌성마비가 됐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조카를 나는 물고 빨고 핥고 안고 살았다.
나와는 불과 열살 차이였으니 마치 형제 같기도 했다.
그 조카는 언제나 나와 같이 놀았고, 자랐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다닐 때도
그 조카는 늘 바빴던 엄마 아빠보다는 나를 따랐다.
처음엔 주로 학습지도를 하는 편이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멘토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의 한 가닥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나는 그 조카를 상대로 예습 복습도 했고
신간이나 고전이나 독후감 낭독의 대상이기도 했다.
세미나 리허설, 강의, 강연 준비도 했는데
내가 결혼할 때인 1986년까지 계속됐다.
조카는 장애학생의 엘리트 코스?라고 볼 수 있는
연세재활학교-삼육재활중.고등학교-대구대 사회복지학과를 다녔다.
졸업하던 해(몇년돈지 잘 모르겠다)에 오랜 만에 나를 찾았다.
-담툰, 나 유학가고 딮은데 엄마 아빠한테 말해 도.
-유학? 필요하면 해야지. 그렇지만 먼저 진로 프로그램이 있어야 될텐데...
-하여간 유학 갈 수 있게 도와 도.
-프로그램이 명확치 않으면, 특히 중증장애일 경우 학교가 도피밖에는 안된다.
-꼭 가고싶어......
생각이 많은 건지, 없었는지....
큰형은 내 말만 듣고 1급 뇌성마비 딸을 미국으로 보냈다.
조카는 Univ. of Minnesota 대학원에서 특수교육 중 놀이치료를 공부했다,
5년동안의 석사과정과 인턴쉽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직장은 없었다.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에서
장애당사자가 장애관련 임상전공으로 석사학위는 처음이었지만
여러가지 그런 식의 의미는 있을지언정
당장 언어장애가 심해 소통이 거의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끝발?을 이용해서 정립회관, 서대문장애인복지관 등
관련 기관.시설에 취직 시켜봤지만
사람이든 환경이든.....어떤 이유로든 적응이 쉽질 않았다.
심한 언어장애로 인한 동료들 간의 소통부재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결국 담당 업무도 번역 등
남들과 부딪치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로 국한되었다.
또 그만 뒀다.
몇 달 간을 집에서 빈둥대며 안씨답게 술을 마셨다.
놀랍게도 술은 잠깐이나마 1급 뇌성마비의 스탭과 언어를 멀쩡하게도 했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카를 만났다.
-일을 해야지 빈둥대고 술이나 마시면 어쩌냐?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싶어. 모른게 뒤죽박죽이야
-공채 공고 나와 있는 걸 뽑아왔으니 참고하고 준비해봐라.
-어디든 가봤자. 곧 왕따에 고통인데......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 공채이니 좀 다를 수도 있다.
-뭐가 다를라고
-하여간 봐라. 결국 사람은 일로써 직업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거다.
어쨌거나 조카는 50대 1의 높은 경쟁을 뚫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5급)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출근을 했으나
한국에서 1급 뇌성마비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어디서나 같았다.
소통의 부재 속에서 하루하루가 다툼과 소외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시 나를 `찾았다.
-담툰, 나 인권위원회 다니면서 대학원 박따과정 가고 디퍼
-전에도 말했지만, 학교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별 수 없는 거 알잖아.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
-계속되는 도피를 다시 하고 싶나? 점점 못올 길로 가는 거야.
-공부를 하겠다는데 왜 담툰은 막아
-네 경우는 공부가, 공부 그자체가 딜렘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趙교수하고 裵과장에게 말이나 해줘.
-그거야 하겠지만, 국가공무원법 위반인 거나 알고 있어라. 권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말 좀 해달라는 것 아니야
-일과시간 중 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은 나라에서 보내주는 길 뿐이야
-하여간 말해 도.....학교 다니고 싶어.
언어장애의 1급 뇌성마비가 박사과정을 다니던 말던
그것이 위법이든 아니든
직장동료들은 눈앞에 안뵈는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조카는 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니게 됐다.
세월이 흘러 이젠 코스웍이 모두 끝나고 논문만을 남겼는데,
얘의 고민은 계속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조카가 무엇을 원하는지, 꿈이 뭔지도 알고
꿈이든, 원하는 무엇이든 전부 쉽지 않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좌절하고 서럽고 외로워지는 것도 안다.
그러니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
순간순간 충실하고 순간순간 삭히며 생활인이 되랄 밖에 없는데
그 소리도 나는 차마 못하겠다.
그러니 조카가 전화를 하는 것도, 집안 행사 때 만나는 것도 내겐 힘든 일들이다.
어제는 그 조카의 48세 생일이었다.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겠지만 생일이래 봤자 변변하게 만날 누구 하나도 없다.
문자 메시지나 페이스북 담벼락에다 공허한 해피 버스데이를 남길 뿐이다.
어제 조카의 생일을 맞아 조카를 떠올리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평생을 힘듬과 외로룸 속에서 사는 조카에게
도무지 해 줄 말도 없으니 그저 답답한 것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책을 찾느라 서가를 뒤지는데
오래된 책 갈피에서 흑백사진 몇장이 떨어졌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1967년 2월 어느날.
머리를 밀어내기 직전,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출근 병력이 빠진, 집에 있었던 식구들만의 사진이었다.
23년전에 세상을 떠난 당시 51세된 엄마가 조카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무심코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사진이지만,
당시 조카 나이는 세 살.
세 살이라면 그에 합당한 덩치와 발육이어야 했는데,
가슴 아프게 조카는 돌이 채 안된 몸크기에,
왜소하고 비쩍 마른 채 손가락만 빨고 있는 모습이었다.
천진난만한 나의 표정이나 조카의 표정이나
앞으로의 인생이, 앞으로의 세계가 어찌 가든 관계없을 것이었는데,
단 한가지의 일도 해결하지 못하고 늘상 델렘마의 빠져 있는
우리네 인생이 그냥 안타깝다.
실은 2~3년전에 조카를 한기준에게 보냈던 적이 있었다.
잇슈가 있어서였는데, 잇슈는 잇슈대로 해결하고 나서
기준은 내 조카에게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현실적이며 성의가 충만한 멘토링을 한 것이다.
조카 생일을 맞아 조카 생각을 하다가
기준이에 대한 그때의 감사를 은근슬쩍, 새삼스레 지금 보낸다.
지푸라기
첫댓글 그래도 안희진과 같은 멋진 멘토가 있는 그 조카는 다행이고 큰 기둥이겠네...
내가 세월 때문에 잊어서 그렇지 오래전 재활원 시절부터 상희를 알고 있었는데... 어린 모습이 인상적이다~~~
감사 표시를 확실하게 하시게. 적어도 멋진곳에서 식사 초대정도는... ㅎㅎㅎ^^
4월 10일 오후1시에 IP호텔 7층에서 만나기로 했네......그쯤이면 한국 최고로 멋진 곳 아닌가?
웬지 가슴이 찡~~하네요.....그래도 그 조카 좋은 작은아빠를 두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