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넷째 이야기, 다시 사월의 하늘 아래(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09)
[삽화-백소(白笑)]
11시 반에 시작되는 기자회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취재를 위해 온 언론사도 상당히 많았다. 요즘은 기자회견이 주요한 투쟁방식이 되어서 수도 없이 많이 하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경우는 별로 못 본 것 같다. 국회의원들이 함께 해서 국회 계단 앞에서 하는 경우에는 참가자들이 많았고 언론사 취재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참가자도 적고 어떤 경우에는 기자는 없는데 기자회견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기자회견은 무엇하러 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기자회견들이 지속되면서 조직적인 힘으로 되어 간다는 견해도 있었다.
기자회견이 열린 장소는 신돌석씨에게 굉장히 익숙한 곳이다. 이곳은 이전부터 안국동 사거리 혹은 오거리라고 불렸다. 신돌석씨는 그 근처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 앞을 자주 다녔었다. 지금은 탁 트인 광장이 된 송현열린광장은 이전에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서 신비스럽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들리는 바로는 미군들의 숙소라고 하였다. 혹은 미대사관 직원의 숙소라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식산은행의 사택으로 쓰였다고 한다.
길 건너에 한국일보사가 있었는데 사장집이 그 안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친구들 중에 누가 지나가다 당시 사장 며느리였던 유명 여배우를 자기가 봤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이야기들이야 사실인지 아닌지 신돌석씨로서는 확인할 길도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미국 소유이던 대부분의 땅이 1997년에 우리 정부에 반환돼 비로소 다시 돌아왔지만, 이후 쓰임 없이 폐허로 방치됐다. 그러다가 소유권이 대한항공에서 한국도시주택공사로 변경됐으며 지금은 서울시로 넘어 왔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그 부지에 녹지공원을 조성해서 2년간 운영한 뒤 이건희가 기증한 미술작품들을 포함하는 문화공원을 만들려고 한단다. 그런데 오세훈 서울시장이 거기에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해서 논란이 시작되었고, 오늘의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이다. 열린송현광장이라고 하는 부지는 서울광장의 세 배가 넘는 면적이라고 한다. 그곳에 꽃을 심고,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갑자기 이승만 기념관을 거기 세우겠다는 의도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열린송현공원 건너편에 일본대사관이 있는데 그 부근에 한국일보사가 있었다. 그 부근에 있는 막걸리집에 친구들과 자주 갔었다. 석벽을 뚫어서 공간을 내서 만든 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 2월에는 거의 매일 갔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친구들은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하게 되고, 신돌석씨는 공장에 들어갔다. 3월 이후에도 매주 보기로 했는데 신돌석씨는 성남에 있는 공장에 다녔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신돌석씨 나름으로는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그 집은 부부가 운영했는데 아저씨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던 것 같고, 거의 아줌마가 주도했던 듯하다. 말이 좀 걸지만 인심은 꽤 좋았다고 기억한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를 도와서 술과 안주를 나르는 일을 했다. 여고생인 딸을 그런 데서 일하게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친구들끼리 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대차고 손님들이 농담이라도 했다가는 매몰찬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신돌석씨 친구들은 숙맥이라 그런지 별로 작업을 하려고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술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안국역 쪽으로 나 있는 입구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 옆으로 작은 길이 있다. 거기에 여고가 둘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이전하고 지금은 공예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여고에 다니던 1년 위 사촌누나가 있었다. 어머니의 사촌언니의 딸이니까 정확하게는 육촌누나가 맞다. 누나라고 하지만 사실 그때는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외하기까지 했다. 신돌석씨가 살던 망태산에서 큰길로 내려가서 몇 정거장 지나는 곳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누나가 이곳에 오니 생각이 나기도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한 번은 아침에 버스를 탔는데 아마 신돌석씨가 중학교 3학년이고, 그 누나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것 같다. 학교가 같은 방향이다 보니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탔다. 신돌석씨가 먼저 타고 옆자리에 누나가 앉았다. 둘이 내외했으므로 모르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날 따라 신돌석씨는 1원짜리 동전으로 차비를 가지고 나왔다. 차비가 부족해서 동전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함께 내리면 창피할 것 같아서 한 정거장 먼저 내리려고 옆자리에 앉은 누나가 비켜주기를 기다려 나왔는데 그만 동전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허겁지겁 주워서 안내양에게 주는데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못 봤는데 누나는 어느 여자대학에 들어갔다. 누나가 4학년이 되던 해에 다니던 대학이 남녀공학으로 바뀐다고 해서 반대 데모를 한다고 하던 때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내외하지 않고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누나는 남녀공학 반대 시위에 주동자급이 되는 듯하였다. 신돌석씨에게 이야기를 하고는 뭔가 의견을 구하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 신돌석씨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누나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왜 갔는지 거기서는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신돌석씨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누나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한 번 왔을 때 장례식장에서 잠깐 봤는데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관심 있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다. 누나도 미국에서 한국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 오니 그런저런 과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여고의 사이에 있는 길에 많은 여학생들이 걸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여는 말씀은 재야원로 신부님이 하였다. 신부님은 4.19혁명 당시에 신학교 1학년이었다고 한다. 그때 신학교 교수님이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불의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였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그런 사람을 시내 한복판에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신돌석씨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이 놈들은 도둑놈들이고, 강도들이다’라고 딱 잘라서 규정하던 이 신부님의 모습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부끄럽다는 말씀이었다.
신돌석씨는 이승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하야했을 때 신돌석씨는 세는 나이로 세 살이었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에 대한 첫 기억은 그가 죽은 뒤 시신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동네 아줌마들이 텔레비전이 있던 집에 모여서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게 기억이 났다.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서 동작동 국립묘지로 가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생중계해 주었다. 당시에는 마포대교가 없었으니 제2한강교로 불리던 양화대교를 건너가서 용산 쪽으로 가서 인도교를 건너갔으리라.
항일유족단체 대표라는 분이 다음 발언을 하였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최악의 죄는 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산시키고 친일파를 중용한 점이라고 하였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내세우는 독립운동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신돌석씨는 이 말을 들으면서 ‘백년전쟁’이 생각났다. 요즘 ‘건국전쟁’이란 것으로 그를 미화하려고 애를 쓰지만 사실 그의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외교, 그것도 미국에나 잘 보이려고 하는 허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노선도 독립운동의 방략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 이외에는 모두 잘못된 독립운동노선이라고 하면서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열이 생겼다. 지난 달 현충원 역사산책을 갔을 때 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홍범도 등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그가 재임하는 동안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는 훈장을 받지 못했다. 자신과 부통령을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들뿐이었다. 그것도 자기와 친한 사람들이다. 이런 자가 어떻게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했겠는가?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해체시킨 것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죄악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에서 이 대목을 읽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말하였다. 신돌석씨 역시 이걸 처음 읽고, 강의를 들을 때 분노가 치솟아서 참기 힘들었다. 결국 친일파는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그것이 이후 엄청난 부담으로 우리 민족에게 남은 것이다. 오늘날 윤석열 정권의 친일행각, 그것을 논리화하면서 옹호하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들의 행태도 모두 여기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이어서 시민단체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대파 사건을 거론하며 이승만 역시 서민들 물가를 체크한다면서 매일 아침 두부, 콩나물 등을 경무대로 들여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반찬거리들의 가격이 전부 조작되어서 보고되었다. 그런데도 그걸 모르는지 아는지 서민들 물가가 안정되었다고 떠들었단다. 대파 한 단 875원이라면서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한 윤석열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눈과 귀가 가리워진 채 아부하는 놈들과 거느리고 있는 ‘벌거숭이 임금’과 같은 한심한 작자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이종섭의 호주 대사 임명을 거론하면서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고 꼬리자르기로 관련자를 대사로 도피시키는 것도 윤석열과 똑같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이 저지른 죄악은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나 국민방위군 사건은 정말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하였다.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그의 학살은 전국방방곡곡에서 자행되었다. 그런데 거창양민학살 사건으로 그 범죄가 드러나고, 국민방위군 사건이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는데도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를 감싸주다가 해임한 뒤 일본대사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대사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직책이다. 그런 일을 범죄 피의자가 될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욱이 그 범죄가 자신의 책임으로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말 후안무치한 인간이다. 결국 그 사건들에 대한 이승만의 책임을 묻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종섭을 호주대사로 임명한 것 역시 윤석열의 후안무치한 행위인데, 다행스럽게도 일단 그를 귀국시키고 대사직 사퇴까지 하게 하였다.
발언자는 여기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상기하자면서 약간의 설명을 붙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과 1951년에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보급을 받지 못해서 굶어 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규명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는 1-2천 명으로 말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나 언론은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9만 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군측에서 전쟁 기간 중 한국군 사망자 수를 14만 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국민방위군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알 수 있다.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집해서 그 중 수만 명이 무기도 식량도 의복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 채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굶어서 얼어서 죽게 만든 것이다. 고 리영희 선생은 이 사건을 목격하였는데, 그는 증언을 통해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하였다. 그는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만큼 처참한 사건인데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은 군인도 아닌데 별을 단 김윤근으로 신성모의 사위였다. 그러니 그 횡령한 것이 신성모에게, 그리고 이승만에게 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이승만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이르게 하도록 한 엄청난 범죄자이거나, 아니면 그런 짓이 횡행해도 전혀 어쩌지 못하는 무능력자이다. 둘 다 가능성이 있는데, 어쨌든 그의 무책임과 무능에 의해 아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신돌석씨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는 정말 치를 떨었다. 어떻게 이렇게 파렴치하고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이런 범죄 연루자, 무능력자, 그리고 자신의 연루를 은폐 조작하려고 하는 자를 국부로 추앙하고 기념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떤 이들은 이념 대결로 정국을 몰아가려는 의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신돌석씨는 언젠가는 이런 것은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이승만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의 죄악을 밝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하고 있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