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2019년 다해, 9월 매일 미사책 135쪽에서 옮겨 적음 -
오늘은 음력으로 팔월 스무 닷새날로써 아버님 사도 요한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일이다.
100년 전 아버님께서는 경북 영천시 조교동 394번지에서 윤산공 경주 최씨 영필 토마스 님과 영천 이씨 두리 말지나 님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장엄한 역사적인 사실일 것인가, 머리 숙여 천상에 계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기 기도 바친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영면하시오소서. 아멘.
오전 중 좀 늑장을 부리다가 센터로 나가 월요일 조회에 참석하였다.
보상 플랜이랄까, 사업자로서 꼭 알아 둬야 할 만한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마치 나를 위한 자료 제공인 것처럼 보이는 PPT로 자세한 설명이 있어서 좋았다.
조회를 마친 후 H 본부장과 티타임을 가지며 전반적인 사항에 대하여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여성 구성원들이 정성껏 지어 주는 집밥과 같은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청 옆 프레스센터로 출발하였다.
오후 2시 부터 북한 탈북민들을 돕는 "사단법인 물망초(박선영 이사장, 전 국회의원이며, 전 MBC 아나운서)"가 주최하는 제64차 인권 세미나 - " 두고 온 내 고향"이라는 주제로 100세 교수 김형석 선생의 특강 - 와 그에 앞선 현강석 작가가 지은 "시간 전당포"라는 장편소설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종종 걸음으로 지하철 7호선과 6호선 그리고 1호선을 갈아 타가며 시청역에 하차, 프레스센터 20층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오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고, 입구에서 접수와 15,000원을 주고 책 한 권을 구입한 후 안에 들어 서니 대부분 탈북민 또는 이들을 돕는 분들로 자리가 가득차 보였고, 약 30분 정도 티타임 등 담소를 나누다가 2시 반경 행사는 시작되었다.
오늘의 행사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4:00-14"30 등록 리셉션
14"30-14"40 식전 행사 : 그리운 금강산 외 1곡 최필남 서울평화로터니 3640 지구 회장
14"40-14"45 개회사 발행인 구충서 변호사
14"45-14"55 축사 1 박관용 전 국회의장
축사 2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
14: 55-15:00 감사 인사 한재복 탈북국군포로 대표
15"00- 15"30 출판기념회 "시간전당포" 사회 차인태 아나운서
작가의 辨 등 현강석 작가
15:30-15:40 축가 어느 꽃제비의 노래 외 1곡 김려원(영화 "사랑의 선물" 중)
15:40-15:55 Q & A 사회 차인태 아나운서
15:55-16:00 기념 사진 촬영
바로 이어서 물망초 제64차 인권세미나 김형석 교수의 "두고 온 내 고향" 강연이 이어짐.
하기사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김형석 100세 교수의 특강은 참으로 깊은 의미심장함과 가슴 뭉클함의 연속이었지 싶었다.
김형석 교수는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로 지내고 계시는데,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와 평양제3공립중학교 그리고 일본 上智大 철학과를 졸업하셨다.
저서로는 <역사와 이성>,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백년을 살다 보니> 등 다수가 있다고 나눠 준 팜프렛에 기록되어 있다.
이 팜프렛 3면에는 지난 5월 24일(토)자 조선일보 <김형석의 100세 일기>란에 게재하였던 칼럼의 일부를 발췌해 놓았는데, 그 전문은 이러하다.
<꿈에서 깨어났다. 아무도 없었다.........................
꿈에서 나는 종종 北의 고향을 목숨 걸고 다시 탈출한다.
여행하는 사람은 저녁때가 되면 집 생각을 한다. 귀소본능이다.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짐승들은 잠들 곳으로 간다. 외국에 가 머무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고향을 생각한다. 나 같은 늙은이는 고향에 가 잠들기를 원한다. 내 모친도 북녘 땅 가까운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나는 70여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 탈북할 때부터 반공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있어서 고향을 찾아볼 뜻은 포기하고 지냈다. 그런데 10여 년 전 두 차례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명예이사로 있기 때문에 평양지부의 초청을 받았다. 비행기 좌석까지 배정돼 있었으나 갑자기 독감에 걸려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평양 과학기술대학 개교식에 VIP 중 한 사람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제자인 김진경 총장이 청해 고랴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평양의 정치적 사정으로 행사가 연기되면서 그것도 놓치게 되었다. 그 뒤로는 고향을 찾아보는 소원은 갖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꿈을 꾸곤 했다. 어찌어찌 북한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고향에 찾아가지는 못했다. 어떤 꿈에서는 겨우 뒷산까지 올라가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간첩이나 불순분자로 몰려 처벌받을까 봐 들어가지 못했다. 가족과 친지는 고향에서 추방된 지 오래고 나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몇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해도 공산주의자들이어서 나를 보안서에 고발할 것이다. 그런 때는 다시 목숨 걸고 탈출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한편, 장편소설 <시간 잔당포> 소개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강영철" 시우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재희와 시우, 그리고 신문기자한테 닥친 시간의 함정은..............................
포장마차 주인과 투명인간의 정체는.......................
갑작스런 납치와 이별이 가져온 이 두 연인의 운명,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그리고 70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국군포로들의 우정과 집념.
젊은이들은 10년 세월을 저당잡혀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을 일궈냈고, 90세 노인들이 저당 잡혔던 70년 세월은 바람 속에 양귀비로 태어났다.
현강석 작가는 종로구 내자동에서 출생, 한국전쟁과 월남전 참전 등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전남 해남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영화, 드라마, 에니메이션 등 한국 최고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 출판기념회의 사회를 맡은 차인태 전 MBC 아나운서는 평안북도 벽동 출신으로, 現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을 맡고 있고, 前 제9대 평안북도 도지사, 前 KBS, MBC 아나운서로 지냈으며, 연세대 신문방송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김형석 교수의 특강이 시작되기 직전, 현강석 장편소설 <시간 전당포>의 표지 그림 양귀비를 그린 작가 김양명(울산 거주, 복합갤러리 "생그리라 운영 중)의 소회 발표도 있었다.
어찌튼 오늘의 아주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인 100세 교수 김형석 선생의 강의는 단연 압권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주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분의 강의 요지는 대충 이러하였다.
<25세 때에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고향에서 아무 생각없이 잠을 청하던 중 꿈을 꾸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진남포 바닷가에서 외국인 선교사(마오리? 목사)를 만났다. 꿈에서 해가 동쪽으로 지는 꿈 이야기를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낮에 평양 시내에서 전차를 탔는데, 중요한 방송이 나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다. 그것이 바로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던 것인데,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본의 37년간 압제에서 드디어 해방이 되었던 것이다.
10월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일성 장군 환영식을 평양 시내에서 한다고 알려졌으나 그 곳에 가지는 않았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자신의 고향인 만경대 출신의 동연배의 김성주임을 알게 되엇고, 이는 소련이 젊은 김성주를 독립운동가 김일성으로 둔갑시켜 상징화 작업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엇다.
김일성이 집권하자 첫 번째로 한 일이 친일파 숙청이었다. 오늘날 북한이 민족의 순수성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바가 바로 이 점이라면, 자유 대한민국은 이승만 박사가 수립한 정부는 외국에 유학을 다녀 왔거나 반공을 해야 했기에 친일을 한 인사들과 같이 협동하여 정부를 수립할 수 박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친일파 인명부"를 제작하였는데,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김성태씨는 자신의 100세 잔칫날에 제자들과 기자들 앞에서 "아, 이제 나는 친일파가 아니야. 젊은 시절 항일 운동 경력이 인정되어 그 명단에서 빠졋어."라고 했다는 후문을 들려 주시면서, 안익태 선생은 대한민국에 살앗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어 버렷고, 무용가 최승희는 북한에 살았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니게 되엇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엄연하고 똑같은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거는 옳지 않다.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박정희 전 대통령 등등 모두가 친일파로 분류하는 정치적인 편견은 인도적인 사실과는 달라 보인다.
고려대 한배호 교수(정치학, 고려대 대학원장 역임)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영도하는 나라로 크게 성장한 것은 독재나 공산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온 유럽의 유능한 지성인들, 즉 학자나 과학자들이 신생 미국으로 망명 와 미국 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했기 때문에 훌륭한 국가가 되었다.나 역시 1961년 이후부터 자주 미국을 다녀 봤는데, 우명 대학의 유명 교수들 대부분이 유럽파이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갑자기 큰 나라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본다면, 내가 잘 아는 독일인 교수 중 한 사람은 미국이 독일을 따라 오는데 150년이 걸려도 따라 올 수 잇을까 싶었으나, 지금은 모든 면에서 미국이 독일을 앞지르고 있다고 말했다. 즉, 대학간 경쟁에서 독일이 미국에 진 것이라는 게다. 미국은 사립대학의 나라이다. 그에 비하여 독일은 대부분 공립대학이어서 나라 발전이 더뎠는지 모른다.미국 만큼 사립대학이 많은 나라는 없다. 유럽 최고 수준의 교수들이 죄다 미국으로 건너 왔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북한에서는 종교 지도자가 살아 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월남하게 되었고, 지주와 기업하는 사장들 그리고 지적 수준이 나름 높고 우수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 대한민국으로 넝어 온 것이다.이런 수준 높은 사람들은 일제나 북한 공산 치하에서 도저히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안병욱 교수도 나와 동갑내기이며 북한 출신인데, 자유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며, 여기에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고 늘 말해 왔었다.
고랴대 김성식 교수(역사학, 서양사 연구)는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후에 러시아-이 관여하는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고 부산으로 피난갔으나, 당시 현상일 고려대 총장은 비록 전황이 힘든다 하더라도 피난 가지 않는다고 서울에서 버티다가 결국 피납되어 북한으로 끌려 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산주의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간의 차이였을 것이다.
지난 100년간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었다가 그 대부분이 몰락하거나, 아주 일부만 남아 있지만, 이 현상 역시 몇 십년 안에 사라질 전망이다. 냉전시대의 정의, 전쟁을 겪지 않고도 냉전의 시대를 맞는 터키 같은 나라가 있는 반면, 6.25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간 치열한 전쟁이엇다.
죄는 진보라는 사상, 우는 보수라는 사상이라 표현들을 하는데, 이는 유럽이 그러하듯 공존이 가능하다.
열린 사회로 가느냐, 닫힌 사회로 가는가가 21세기 이후의 세계이다. 러시아는 폐쇄사회이다 보니 무너졌다. 레이건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러시아를 무너뜨린 공로가 크다. 21세기 들어 개방 사회는 살아 남고, 폐쇄 사회는 자연히 무너진다. 러시아,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가 보여 주고 있지 아니한가.유일하게 남은 곳이 북한인데, 그러나 끝내 오래 남지 않을 것이다. UN은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라도 붕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다원 가치 사회를 구축하고 있고, 열린 사회를 만들고자 유럽연합이 태동하였다. 온 세계가 다원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북한만 고집을 부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게?
이승만-전두환 정권 때 까지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1987년 6.29 선언 이후 사회는 변화했으며, YS 시대 부터 이후 복지사회화 되어 왔다. 반면에 북한은 선군정치를 한다고 호언장담하였는데, 이는 바로 후진국임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즉 권력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자인한 셈이다. 선진국이 되려면 복지사회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는 질서사회가 되어여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가 있다.그런 나라는 실제로 지구 안에 많다. 미국이 그렇고, 캐나다가 그런데, 헌법이 잇는지 큰 관심이 없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 질서 국가인 것이다. 스위스에 61년 전에 방문한 바가 있었다. 당시 교도소가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하면서, 수감자가 한 명도 없을 때는 흰 깃발이 올라 오곤 한다는데 1년에 몇 달 동안은 흰 깃발이 올라 갓다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잘못을 저질러 죄수가 될 뿐이다. 반면에 미국은 죄수가 많아 후진국이라는 말도 들었다. 법 보다는 질서가 우선시되어야 선진 사회이다.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려 하면 질서 국가가 될 수가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
평등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나라, 규제하지 않아도 정상 작동이 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질서 사회이다. 미풍양속과 같은 전통, 불교, 유교, 기독교적 가치관, 윤리사회,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회, 평등, 자우 박애 정신이 팽배해지는 나라, 그것이 바로 선진 질서 사회일 것이다.
권력으로만 통치하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소련이 그러햇고, 중국이 7-80년 후이면 그리 될 것이다. 자유중국(대만)이 더 잘 살고, 모든 면에서 생활 수준이 높은 반면, 중국은 가난하고 못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나라인 자유 중국이 저 큰 나라인 중국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이다. 21세기 중반 정도에 가면 대부분의 공산주의는 몰락하리라 본다. 그래야 행복하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라가 달라진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가나 민족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역사를 깊게 바라 봤으면 좋겟다. 내가 죽더라고 7-80년 후쯤에 다시 와서 대한민국이 행복해졌구나 하는 것을 다시 보고 가는 것이 나의 꿈이다.(박수)
스탈린의 딸이 미국으로 망명 와서 한 말, 책으로 공부하면 공산주의자이지만, 몸으로 하면 자유주의자이다. 라고 했다는 말을 인용하며 약 1시간 40분 여에 걸친 특강은 마침표를 찍었더.>
이어서 질의 응답 시간.
그 첫 번째로, 지금 세상이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세계 5대 강국으로 까지 성장, 발전한 이 나라를 현 집권 세력은 망치려고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老 교수는 명쾌하게 답해 주었다.
즉, 국민 다수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이 모두를 다 할 수는 없다. UN 에서 북한을 보는 시각, 김정은 정권을 더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고, 이를 위해서는 핵을 없애야 하고, 정권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라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역시 동포에 대한 사랑의 시선이 있기에 현 상태의 북한 정권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라. 대학에 있어 봐 알고 있지만, 언제인가 운동권이라 할 386세대에게 기회가 올 줄 알앗다. 자유와 인간애. 어려움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격어 이겨 낸 민족이 선택받은 민족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일간지에 기고하시는 교수님의 글을 잘 읽고 있다. 최근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가 4.19 직전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다고들 말하고 있다.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줄을 잇고 있는데, 일반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위 시국 선언에 동참하거나 할 의향이 게시는가?
이에 대하여서도, 어디에 서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 가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일간지에 기고하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누가 역사를 만드는기?" 에 대한 물음을 지속하며 더 크게 세상을 바라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선택은 다양하다.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특강을 마친 후 단체로 기념 사진 촬영을 하였는데, 직전에 단상으로 올라 가 대학 제자이신 신부 형님의 근황을 말씀드리며 내 소개를 하였더니 귀담아 들으시며 반겨 맞아 주셔서 감사하였다.
그리고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해 준 전 MBC 아나운서 출신의 지인 P 여사를 만나 물망초 박선영 이사장을 소개받고 기념 사진 촬영도 한 다음, 김형석 교수와 단체 사진 한 장, 단독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올 수 있어서 좋고 감사하엿던 것이다.
그 사이 작가 현강석님으로 부터 <시간 전당포>라는 자신의 책에 친필 서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 사이 향우회 원로이신 H 회장의 부재 중 전화가 찍혀 있길래 전화를 올렷더니, 정릉 푸줏간 식당으로 오라ㅣ는 말씀.
아니엇으면 아버님 탄신 100주년 본날을 맞아 명동성당으로 가 6시 미사에 참례하려던 계획을 접고 지하철을 타고 그 곳으로 이동해 갔던 것.
오늘 경청한 김형석 교수의 강의 내용을 일부 요약하여 소개를 드린 후, 최근 불거지고 잇는 향우회 내 여러 잡음에 대하여 의견 교환읋 하며 된장 찌개에 창하 술 각 1명씩을 마시며 만찬을 하였다.
오늘도 밥값을 회장님께서 부담해 주셔서 대단히 송구하였던 게다.
식사 후 바로 귀갓길.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스러져 누웟다가 11시경 일어나 용변 해결 후 아파트 단지 안을 걸으며 묵주 기도 20단을 바치고 들어 와 오늘의 일지를 정리하고 잇는 것이다.
카페의 <최신 글 보기>란에는 오늘 아버님 탄신 100주년 본날에 내려 간 누님 내외분과 요안나와 권서방,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다는 조카 지혜 마리아 등이 우리 신부 형님이 집전하신 감사 미사에 참례하는 장면과 하늘자리 방문, 그리고 동대구역에서의 이별 장면 등이 담긴 야고보가 찍은 사진들을 신부님이 올려 놓으셔서 일별하엿다.
그리고 내가 오후에 보내 드린 김형석 교수의 특강 장면도 오롯이 남게 되어 대단히 뜻이 깊고 감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임에랴 싶었던 게다.
어느새 새벽 3시가 넘어 서고 있다. 이제라도 잠을 더 자야 하리.
아버님 사도 요한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일 본날에 만 99세, 우리나라 연세로 100세가 되시는 김형석 교수의 생생한 육성의 특강을 직접 경청할 수 있었던 오늘은 정녕 은혜롭고 복된 날.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기도를 바친다.
천주님께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