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6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제가 중국에 있을 때 2006년 WBC즉 월드 베이스볼 크래식을 TV로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시아 A조 예선 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 앞서 일본의 국보급 타자로써 '이찌로 스즈끼'라 하는 선수가 한국 선수들을 자극했습니다. “한국이 앞으로 30년간은 일본을 이길 생각을 못하도록 해 주겠다.”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물론 통계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일본 야구입니다. 46년이나 먼저 프로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일본 야구는 세계적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3일에 대만과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고, 4일 중국과의 경기에서는 10: 1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대만을 10: 3으로 이기고, 중국을 11:4로 이기므로 양팀 모두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과 일본의 국민은 이 경기에 민족의 자존심을 걸게 된 것입니다.
결국 경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본국민이 긍지를 갖는 도쿄 돔에서 더구나 황태자가 직접 참관하는 앞에서 경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텔레비전을 본 것이 5회 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이 2:1로 지고 있었습니다. 경기의 진행 상황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본을 이기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두런거렸습니다. “야구는 모르는 거야! 오래 전에 일본에서 일본과 한판 붙었는데 우리가 지고 있던 상황에서 9 회말 2아웃에 한대화 선수가 만루 역전홈런을 때렸잖아” 라고 했지만, 사실 그때의 분위기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이승엽 선수가 한 방 날려 버리면 끝나는 거야!”라고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식당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배웅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한국이 일본에게 3:2 역전승을 한 것입니다. 너무나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한국인 특유의 포기하지 않는 투지와 강인한 정신을 사랑합니다. 중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무엇을 하던 초반에 한국 사람을 이겼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어떤 역경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국민이 세계 9위의 국력을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이 경기에 앞서서 일본의 감독이자 영웅인 ‘왕 정치’ 감독이 한국의 ‘Fighting Spirit’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선수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이종범 선수가 최고참으로 이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경기 전에 기자들에게 야구공을 들고 “투수가 던지는 공에 맞으면 아프겠지요?”라고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요. 아프기만 하겠어요?”라고 답하자 그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경기를 보면서 기자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종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는데 홈 플레이트 앞으로 바짝 서서 타격 위치를 잡은 것입니다. 자칫하면 투수가 던지는 공에 맞기 십상인 위험한 위치입니다. 투수가 자유롭게 던지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3회에 한번, 그리고 5회에 한번, 두 번이나 투수의 강속구를 피하지 않고 넓적다리에 맞아 출루했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이렇게 몸을 던지는 한국 선수들의 애국심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일본의 프로야구에 진출해서 1998년 일본 ‘주니치 드레곤’의 선수로 출전했을 때 ‘한신 타이거스’와 경기 도중 상대의 ‘가와지리’ 투수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아서 커다란 부상을 당해 결국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몸을 던져서라도 한국이 이기게 하려는 이종범 선수의 애국심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라면, 한국인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몸을 던질 줄 아는 것이 우리 국민의 특성입니다. 결국 아시아 최다 홈런왕 이승엽선수가 8회 초에 멋진 투 런 홈런을 날려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운동 경기는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특히 야구는 우리의 인생과 흡사합니다. 다 끝난 것 같지만 한방에 대량 득점이 가능하고, 끝까지 가 봐야 그 결과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탈했습니다. 그토록 기대했던 예수님이 허망하게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참담한 결과를 보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생업으로 쓸쓸히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9회 말, 2아웃, 2스트라이크, 3 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전 만루 홈런을 날려 버린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들을 꼬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하였으므로 영원히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만들려 했던 그 음흉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첫째는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한에 사무쳐서 인간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도리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죽으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분명히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역전 만루 홈런을 날렸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으므로 이제 끝났구나 생각하며, 비겁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밤바다에 그물을 던졌지만 공교롭게 빈 그물만 건져 올리고 있을 때, 뜻밖에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먼저 말을 거시고, 고기를 몽땅 잡게 해 주시므로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자신과 대화를 하시며, 배반자라고 추궁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므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그리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 너와 같은 사람들, 너보다 잘난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 하 반절에 “나를 따르라” 그리고 22절 하 반절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베드로에게, 그리고 베드로와 같았던 우리에게 과연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섬기는 삶,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신학자 ‘지오반니 빠삐니’가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책 속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넓은 천지에서 왜 하필이면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셨는가?” 그리고 스스로의 질문에 이렇게 스스로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외양간에 태어나신 것은 그곳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외양은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짐승의 외양간 보다 더 더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깨끗한 물을 마시고 얼마나 많은 소변을 만들었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는 얼마나 많은 대변을 만들었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세상보다 짐승의 외양간이 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만큼 더럽혔으니 이제는 이 세상을 나의 봉사와 섬김으로 정화 시켜야 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져서 엉엉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정말 반장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학년 때에 출마했으나 부반장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서 3학년 때 드디어 반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장 되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려 16명이 출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명이 나름대로 연설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아들만은 아주 특이한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시면 저는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 그 결과 몰표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걸레입니다. 우리의 죄를 닦아 주시고, 추한 허물을 훔쳐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몸을 걸레로 만드시고, 자신의 보혈을 적시어 우리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닦아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세상의 더럽고 추한 곳까지도 주님의 몸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영적인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닦아 주는 걸레가 되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걸레가 될 것을 기대하는 반면 정작 나 자신은 걸레가 되기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디를 가서도 왕자와 공주로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습관이 되면 영적인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진해서 걸레가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섬기는 삶, 봉사하는 삶은 주님께서 살았던 삶이며, 우리에게 따르라고 하는 삶입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정직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5편 8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정직하시니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도다.”
아주 오래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제가 사업을 할 때 미국 대사관에 미국 방문비자를 신청했습니다. 목적에 찬양 선교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미국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오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두가 한국 목사들 때문입니다.
맨 처음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방문비자를 기분 좋게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잠깐 미국을 방문한다고 했던 한국 목사들은 미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눌러앉아 불법체류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는 목사들만 해도 몇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기껏 집에서 놀려면 뭐 하러 미국까지 갑니까? 그리고 그 힘든 신학 공부는 왜 합니까?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입니까? 그러니 목사나 선교사 이야기만 하면 미국의 영사들이 ‘콧방귀’를 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에 결국 받아냈습니다. 그냥 ‘여행 간다.’고 했더니 인터뷰 없이 10년 기한의 비자를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 중심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거짓말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거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좇는다면서 윤리마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윤리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를 좇겠다는 것은 그저 자기 착각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목사’가 ‘먹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집사’도 ‘잡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윤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 마땅히 진리도 좇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갑과 통장 속에는 얼마만큼의 돈과 재산이 들어 있습니까? 그것은 과연 정직하게 번 돈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할 것 때문에, 우리가 죽게 되면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할 나의 머리로 했던 일, 나의 손으로 했던 일, 나의 다리로 걸어갔던 곳, 그렇게 일생 동안 내가 살아왔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드릴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잘사는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잘사는 것은 “바르게, 정직하게 주님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하므로 예수님께 용서받았음을 확인한 베드로는 금방 우쭐대기 시작합니다. 자기와 요한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요한을 내가 다시 재림할 때까지 살게 한다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고 겸손하게 나를 따르기나 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을 영어로 'humility'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휴무스’(humus)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아니하면 결코 주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겸손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지만 사양하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 교만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흙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어른이건, 어린아이건 흙을 밟고 서 있습니다.
물론 천한 동물도 밟고 섭니다. 그러므로 흙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도 불평 없이 수용합니다. 뿐만아니라 엄청나게 무거운 것도 자기의 몸 위에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 뜻을 온전히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더 큰 그릇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도구로 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에 청지기일 뿐이고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겸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저를 도구로 써 주시되, 선한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이제 영 죽었구나 하고 절망하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역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만루 역전홈런을 시원하게 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종노릇하던 우리, 도저히 가망이 없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셨으므로 우리도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다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나머지 그의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었습니다. 역전 후의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 주님을 배반하던 비겁자의 삶을 두 번 다시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극적인 역전을 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를 따르라”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며 살아야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까?
섬기고 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부인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라 살게 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죄를 짓고 사람됨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을 찾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담’(Adam)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참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참사람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사람이 되라고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참사람으로 회복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서 ‘참사람’이 되십시다.
이것이 참사람의 삶이고, 내 속에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참된 크리스천이라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