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동물적 상상력ㆍ정유화
한국 현대시의 동물성과 생태시학적 가능성ㆍ김익균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동물적 상상력
정유화(시인,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
1. 동물적 상상력의 시적 영향
동물적 상상력이 한국 현대시에 미친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다. 그것은 먼저 시적 소재의 범주를 다양하게 넓혀 놓았다. 서정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식물적 상상력은 주로 지상에 붙박여 있는 나무, 꽃, 풀 등을 주된 소재로 사용해 왔지만, 동물적 상상력은 그러한 범주를 넘어서 다양한 동물들을 시적 소재로 등장시켜 왔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공중을 나는 각종의 새들, 땅 위를 달리거나 기어 다니는 각종의 동물들, 땅속에 서식하는 각종의 동물들을 시적 소재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예의 이러한 시적 소재의 확장은 정적인 시의 공간을 동적인 시의 공간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물로 상징되는 식물적 이미지를 피로 상징되는 동물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물과 대립하는 피의 이미지가 시적 공간에 생성됨으로 해서 형이하학적인 육체성과 생명성의 주제가 산출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시적 비유와 시적 장치의 풍성함을 더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식물적 상상력은 주로 직유나 은유를 즐겨 사용해 왔다. 예컨대, “앵두나무의 키와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1)”나 “눈, 눈은, 그만// 꽃이었다.”2)라는 비유를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직유로서 앵두나무를 소년에 비유하여 그 의미를 산출해내고 있고, 후자는 은유로서 꽃망울을 인간의 눈에 비유하여 꽃의 의미를 산출해내고 있다. 이 외에도 손에 잡히는 대로 한국 현대시에서 나타난 식물적 상상력을 살펴보면 대개의 경우,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직유와 은유가 다반사로 나타난다. 물론 동물적 상상력도 식물적 상상력처럼 직유와 은유를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동물적 상상력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풍유와 우화, 상징, 의성과 의태, 아이러니와 역설 등의 여러 기법을 개성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시의 형식과 내용, 시의 미적 구조와 의미가 매우 다양한 나타나게 되었다. 가령, 쥐나 개, 파리 등의 생태적 특성을 이미지화하여 부조리한 세상을 풍자한 경우, 비둘기나 까마귀, 소 등의 기호를 사용하여 평화나 죽음, 농촌 등을 상징하게 하는 경우, 각종 동물의 모양이나 소리, 성질이나 냄새를 이미지화하여 비판과 야유, 아이러니와 역설 등의 의미로 사용한 의성어, 의태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물적 상상력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본능적이고 공격적이고 탐욕적인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성과 대립하는 육체성의 세계, 이성과 대립하는 감정의 세계를 폭넓게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예의 형이상과 대립하는 형이하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연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물적 특징에 기인한 소산물이다. 식물적 상상력에 의하면, 식물은 부동성(不動性)의 존재요, 자연적 원리를 따르는 수동적 존재이다. 이에 비해 동물적 상상력에 의하면, 동물은 유동성, 이동성의 존재요, 인간적인 원리를 따르는 능동적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물이 생명력의 바탕이 되고 있지만 동물은 피가 생명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 동물적 상상력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동물적 기호들은 본능의 성적(性的)인 세계를 비롯하여 물욕과 소유, 권력과 지배 등의 세속적 욕망을 한없이 드러내는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명상과 관조, 탈속으로 대변될 수 있는 식물적 상상력과 대극을 이루는 셈이다. 이처럼 동물적 상상력은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창조적으로 넓혀 왔다. 그런 만큼 한국 현대시에서 동물적 상상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동물적 상상력으로써 개성적이고 감흥적인 시를 써온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서정주, 황지우, 최승호, 송찬호의 시를 중심으로 그 시적 코드와 의미를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한다.
2. 천지와 상하의 시적 코드 : 육체성(본능)과 정신성(탈속)의 대립
주지하다시피 서정주 시인은 동물적 상상력을 구사해온 대표적인 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것을 예증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첫 시집 <화사집>이다. 한국문단에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게 한 시집 <화사집>은 온통 동물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동물적 상상력을 제공해주고 있는 동물기호로는 뱀, 닭, 능구렁이, 산돼지, 노루, 개구리, 머구리, 부흥이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동물의 종류는 다르지만, 그 동물들이 산출해내는 시적 의미는 대부분 하나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피’의 이끌림, 곧 생명의 본능에 대한 이끌림이라는 사실이다. 예의 동물성의 피는 본능적인 육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육체성은 곧 성적 본능과 성적 욕망을 낳는다. 이에 따라 서정주는 동물성의 피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성적 본능과 성적 욕망을 유감없이 분출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정신과 이성에 의해 그 동안 억압되어온 육체적 욕망을 한껏 분출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육체주의의 시적 코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화사」를 들 수 있겠다.
麝香 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達辯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저 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石油 먹은듯…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花蛇」 전문3)
뱀은 땅속에 살며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동물이다. 땅속에 산다는 것은 지하적 삶을 의미하고, 기어 다닌다는 것은 수평적 삶을 의미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전적으로 땅에 구속된 음지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뱀을 싫어하고 징그럽게 여기며 멀리하고자 한다. 더욱이 이러한 뱀의 존재에 종교적 의미, 곧 아담의 아내 이브를 꼬여내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게 한 사탄의 의미까지 더해져서 증오의 존재로 여김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뱀이 서정주 시인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게 된다. 곧 새로운 기호로 거듭나게 된다. 예의 이 텍스트에서 ‘花蛇’라는 기호가 바로 그것이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뱀을 의미한다. ‘꽃뱀’을 기호론적으로 보면, 꽃과 뱀의 의미를 지닌다. 꽃은 식물성으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뱀은 동물성으로서 징그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꽃뱀’은 식물성과 동물성, 아름다움과 징그러움을 동시에 지닌 모순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어서 시인은 꽃뱀의 모순성, 곧 양면성을 인간적인 층위로 전환시키는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꽃은 성적으로 충만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로, 뱀은 저주받은 형벌의 몸으로 전환된다. 가령, “꽃다님”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들인 “크레오파투라”, “순네”로의 이미지 전환이 전자를 대표해주고, “저놈의 대가리”, “슴여라! 베암”이라는 비하적 명령적 언술이 후자를 대표해준다. 이처럼 화사가 인간적인 층위로 전환되면 꽃의 아름다움은 성적인 이미지로 연상되고, 뱀의 붉은 아가리는 더 구체적인 고흔 입술로 연상된다. 물론 그 연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피의 이미지이다. 피는 시인인 화자의 육체적인 성의 욕망을 본능적으로 불타오르게 만든다. 정신주의를 거부하고 육체주의를 수납하게 만든다. 하지만 순간순간마다 무의식이 화자의 의식을 마비시키며 제동을 걸기도 한다. 꽃뱀과 한 몸으로 융합하고 싶으면서도(뱀을 목에 두르고 싶다는 내용) 동시에 그와 분리되고 싶다는(뱀보고 사라지라는 내용) 언술이 이를 밑받침한다. 그래서 화사에 대한 감정은 가깝게 하고 싶은 마음과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양의적인 감정으로 나타난다. 4)
이와 같이 서정주 시인은 화사를 통하여 동물적인 피의 뜨거운 열정과 본능을 상상해내고 있다. 그 열정은 성적 욕망의 충족과 쾌락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지상의 육체적 삶에 완전하게 구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화사가 지하에 구속되어 있듯이, 그 화사를 애호하는 한 시인도 지상적 삶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피의 유혹, 곧 육체성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피에 취했던 서정주는 차츰 피의 자장을 소거하려고 한다. “피란 결국은 느글거리어 못견딜 노릇./ 마리아./ 이 춤추고, 電氣 울 듯하는 피는 달여서/ 여름날의 祭酒 같은 燒酒나 짓거나,/ …(중략)…/ 허이옇고도 푸르스름한 後光을 彩色하는/ 물감”(-「無題」 일부)으로 사용하자는 언술이 이를 증거 한다. 피를 달이는 것은 피의 정화ㆍ증류를 의미한다. 또한 지상의 육체적 삶을 떠나 천상으로의 비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서정주는 뱀에 날개를 달아 서서히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새가 되게 한다. 몸에서 피를 거둬내는 몸의 비상, 몸의 투명화인 셈이다.
千年을 보던 눈이
千年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한번 天涯에 맞부딪노나
山덩어리 같어야 할 忿怒가
草木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중략…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우름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못한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곁을 나른다
―「鶴」 일부 5)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누이의 수틀 속의 풍경은 학이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학은 땅속에 구속되어 사는 뱀과 달리 지상과 하늘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따라서 지상의 의미와 천상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양의적 기호로 작용한다. 뱀과 대립시켜보면, 뱀은 수평적 체계를 보여주게 되고, 학은 수직적 체계를 보여주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뱀이 날개를 달아 학으로 날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분출하는 피의 세계, 곧 성욕의 세계를 줄이고 해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학은 비상할수록 그 몸속의 피는 거의 다 사라지고 하나의 작은 점으로 응축되고 만다. 하늘 끝, 곧 “天涯”에 부딪친 학의 머리털 속을 살펴보면, 거기에 오직 붉은 점 하나만 찍혀 있다는 것[丹頂鶴]이 이를 예증한다.6) 그 붉은 점 하나는 지상적인 분노와 설움을 삭인 인내의 결실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의 몸속에 피가 확산되면 그 무게로 인하여 지상적 삶에 가깝게 되고(육체주의), 피가 해체되고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면 그 가벼움으로 인하여 천상적 삶에 가깝게 된다(정신주의).
뱀과 달리 학은 피를 다스린 고요한 마음의 세계를 얻고 있다. 육체성과 대립하는 정신성을 획득하고 있다. 물론 서정주 시에서의 육체성과 정신성, 이것은 동물적 상상력의 결과로 얻은 산물이다. 그 동물적 상상력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피의 언어, 육체성의 언어로 작용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과 대립되는 천상적 코드(정신적 언어)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만약에 기어다는 뱀에게 바퀴를 달아주면 어떤 동물의 기호로 변환될까. 학의 머리에 찍혀 있는 붉은 점을 없애면 어떤 새의 기호로 변환될까. 놀랍게도 황지우 시인은 이 물음에 대하여 그의 시로 답하고 있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근엄한 검정색 예복, 아니 정복을 입었다.
무슨 일을 감행하는 집단들처럼
틈틈에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기어나와, “맞어”,
기어온다.
…(중략)…
자꾸 자꾸 기어 나온다.
食生活에서 性生活에 이르기까지
나의 私生活 전역에 투입되어,
“여보, 바퀴벌레 때문에 못 살겠어요.
우리 이살 가든가 이민을 가든가 해야지.”
비닐 장판을 열면 겨우내 새끼들을 수두룩수두룩 까 놓고
…(중략)…
수채 구멍 속에서, 구정물 찌꺼기통에서
벽으로, 찬장 그릇 속으로, 안방으로, 책장 사이로, 이불 밑으로.
어쩌면 우리가 잠든 새 콧구멍 속으로, 머리칼 속으로, 꿈꾸는 松果腺에까지
공룡 크기만큼 확대되어 엄습해 오는
이 야간 침입자들.
어느새 우리와 共生共死하자는 듯,
어느새 묵인된 이 범법자들.
오줌 누러 불을 켜면, 화다닥, 동작 그만!
들킨 바퀴벌레는 젖은 세멘트 벽에 붙어서,
그놈은 그놈대로 비상을 걸고, 부지런히 더듬이를 돌려대며
나의 접근을 관찰,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그놈은 지금 그놈의 死線에 엎드려 있다.
그 사선은 나의 사선이다. “이번이 기회야.
놓쳐선 안 돼.” 여차하면 이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틈 속으로 매복해 버린다.
“죽여요. 죽여!” : 아내도 마루 끝에서 소리친다.
짠――긴장 : “이놈, 우리 現世의 사생활을 분탕칠하는
이 더러운 놈, 네놈의 그 더러운, 그 지상에서의 몸을
죽여 주마. 깨끗한 몸으로 교환하여 다시 태어나거라.”
중얼거리는 내 마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이놈을 갖다가, 슬리퍼로, 그냥,
딱!
(쳤다)
(나는 죽였다)
…(중략)…
죽여 놓고도 아내와 나는 끔찍해 한다.
그리고 즐겁다.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
수레를 끌지 않는다, 쌍 !
— 「바퀴벌레는 바퀴가 없다」 일부7)
예의 황지우 시인은 기어 다니는 뱀에게 바퀴를 달아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바퀴벌레의 기호로 변환시키고 있다. 뱀과 바퀴벌레는 동일하게 땅속이나 건물 속의 음지에 기생해서 사는 동물이고 수평적인 삶의 코드를 지닌 동물이지만, 그 바퀴의 유무에 의해 변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바퀴 없는 뱀은 속도 대신에 꽃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며 살고, 바퀴를 지닌 바퀴벌레는 아름다운 대신 재빠른 속도를 생명으로 하여 산다. 그래서 황지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여차하면 이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틈 속으로 매복해 버린다.”라고 하며, 그 빛 같은 속도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바퀴벌레는 그러한 속도를 무기로 삼아 교활하고 더럽고 부패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점이다. 황지우 시인은 그러한 바퀴벌레의 습성을 통하여 부조리하고 부패한 인간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풍자하게 된다. 이 텍스트에서 바퀴벌레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어둠 속에 매복․잠복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위장전술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전 영역에 몰래 침투하여 자기들의 생활반경을 크게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食生活에서 性生活에 이르기까지/ 나의 私生活 전역”을 침투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파렴치한 범법자인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바퀴벌레를 더러운 놈으로 간주하고 죽이려고 한다. 바퀴벌레의 야간 침투로 생활의 전 영역이 위험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야간 침투의 두려움으로 인해 이민까지 가야 할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인인 화자와 바퀴벌레 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사선(死線)에 서게 된다. 결국 그 사선에서 화자는 “現世의 사생활을 분탕칠하는” 야간 침투 범죄자인 바퀴벌레를 죽이는 승리를 안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퀴벌레를 처단하고 보니 그의 교활성을 담보해주는 속도, 곧 그의 몸에 달려 있어야 할 바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만다. 여기서 바퀴가 없다는 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바퀴벌레의 바퀴는 무용하다는 의미이다. 바퀴로 정직한 노동을 해야 하는데, 바퀴벌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만을 실현하기 위해 불법만을 일삼고 있다. 시인이 바퀴벌레가 “수레를 끌지 않는다”고 한 언술도 이에 기인한다. 바퀴는 정직하게 수레를 끌어야 한다. 그런데 바퀴벌레는 수레를 끌지 않고 누군가가 끄는 수레에 몰래 올라타서 몰래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조리한 삶, 불법의 삶, 이기적인 삶, 교활한 삶을 의미한다. 이를 인간적인 삶의 층위로 전환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자행되는 부조리한 삶을 상징해준다. 다시 말해서 윤리와 도덕, 그리고 각종 무수한 법을 어기고 어둠속에서 은밀하게 불법을 자행하는 위선자들을 비판하고 풍자․풍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퀴벌레가 기승하는 이 지상적 삶은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물욕적이고 가장 파렴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황지우 시인은 바퀴를 날개로 변환시켜 이 통속적인 어둠의 지상을 벗어나 천상을 향하여 비상하는 새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8)
―「出家하는 새」 전문
황지우 시에서 바퀴의 코드가 날개의 코드로 바뀌자, 다시 말해서 지상적 삶에 구속된 바퀴벌레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유로운 새의 코드로 바뀌자, 무욕의 삶을 욕망하는 원시적 에너지를 보게 된다.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바퀴벌레와 달리 새는 타자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를 배려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헌신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따른 그 어떤 고통도 내색하지 않는다. 가령 새는 자기의 자취도, 자기의 투영도 남기지 않으며, 자기의 기척도, 자기의 체취도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고통에 따른 눈물 한 방울도 보여주지 않는다. 새가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타락과 불법이 난무하는 세속의 세상을 떠나 탈속의 세계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몸에서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야 새는 가볍게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 그래서 새는 모든 욕망을 비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하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욕이 된 새의 몸, 물론 이 몸에도 피가 있지만 서정주의 학처럼 육체성을 초월하려는 것으로 기능하지 않고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육체적인 힘으로 기능하고 있다. 서정주의 학과 변별적인 셈이다. 그래서 황지우의 새는 그 풍속을 이겨내고 “내일의 숲”을 찾고자 한다. 그 숲은 바로 탈속의 세계를 의미한다. 새의 비상으로 산출된 지상과 천상의 대립은 곧 세속과 탈속의 대립적 의미를 낳는다. 예의 황지우 시인의 새는 이미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그런 비상을 연습하고 있었다. 가령,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일부9)에서 알 수 있듯이, 새들은 세속적인 인간 세상을 비판․풍자하면서 자기들의 자유롭고 탈속한 세계를 찾아 늘 어딘가로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3. 주종과 상생의 시적 코드: 물질성(물욕)과 생명성(타자)의 대립
주지하다시피 서정주 시인은 땅에 기어 다니는 뱀과 하늘을 나는 학을 통하여 육체성(피)과 정신성의 시적 코드를 산출했고, 황지우 시인은 땅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하여 본능성(세속성)과 탈속성의 시적 코드를 산출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적 코드들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다양한 형태와 의미로 분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만큼 동물적 상상력이 시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의미화 하는데 매우 다양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다양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인 가운데 우리는 최승호 시인을 뽑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이전의 시인들과 달리 지상과 지하에 기생하는 동물들, 도시나 농촌에서 기르거나 서식하는 동물들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인간 삶의 폭력성과 허위의식, 물질만능과 생명경시 등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그러하다. 때문에 그가 시적 대상으로 다루는 동물들은 제 각기 다양한 의미로 쓰이거나 다양한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요컨대 동물적 상상력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기하게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동물들을 하나의 물질적 대상으로 다루는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인간의 교활성, 이기적 욕망을 비유해주는 동물들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간략하게 탐색하기로 한다.
푸줏간 냉장고에서
황소의 두개골이 조용히 울부짖는다
뿌리째 뽑혀
갈고랑쇠에 걸려 있는 기인 혓바닥,
칼로 후벼낸 눈알,
콧김 없는 콧구멍,
떼어낸 다리.
자신의 몸뚱이를 四元素로 해체시키고
결국 무엇이 남는지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자
죽음이 이르기 전에 죽음을 맛보려는 자
신비의 검은 구멍, 숨쉬면서, 말없는 구멍.
런닝셔츠 바람의 푸줏간 주인이 도끼를 들어
내리찍는 넓적다리뼈들이 덜컹거린다
한때는 털가죽 속에
따뜻했던 뼈들이
산을 버티고 우뚝 섰던
듬직한 다리들이 이제는
화살촉처럼 살을 찌르는
적의의 뼛조각이 되어
튀어오른다 쟁기를 끌던 시간
등에와 파리에 시달리며
부르르 가죽을 떨던 시간
푸른 옥수수잎을 씹던 시간이
부서져 버린 시간의 조각들이 튀어오른다
팔려가는 쇠고기 한 근의 죽음
저울 바늘은 영에서 시작되어
흔들리다가
다시 영으로 돌아간다
공중 목욕탕에서 체중을 재듯
나의 죽음의 무게를
살코기의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
무언가 다른 것,
살코기와는 다른 무게,
다른 눈금의 저울이 필요하다.
―「저울」 전문 10)
소는 야생과 변별되는 가축 중의 하나이다. 그런 만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많은 노동을 제공해주는 유익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농업과 관련되어 온 소는 풍요와 부요, 노동의 상징으로서 인간의 정감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좀 더 강조한다면 한 집의 가족으로서 대우받기도 했다. 예를 들면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김종삼, 「묵화」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벗어나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소는 단순하게 육류, 곧 고기만을 제공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좀 더 비약하자면 인간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단순한 물질, 하나의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소는 땅을 기어 다니는 뱀과 바퀴벌레와는 그 존재적 의미가 다르다. 땅을 기는 것들은 수평적 존재이지만 적어도 소는 네 발로 땅을 든든하게 디디고 선 수직적 존재이다. “산을 버티고 우뚝 섰던/ 듬직한 다리”를 가진 수직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 생명적 의미도 변별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품화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그 생명의 가치보다는 그 생명이 지닌 물질의 가치를 가장 중시한다. 다시 말해서 소의 생명보다는 소가 지닌 몸의 가치, 곧 육류의 가치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최승호 시인이 “황소의 두개골이 조용히 울부짖는” “푸줏간 냉장고”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동물적 상상력을 작동시킨 것도 이에 연유한다. 말할 것도 없이 “푸줏간 냉장고”는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물질, 즉 고깃덩어리로 바꾸는 주검의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는 고기의 우열은 있어도 생명의 우열은 없다. 황소도 예외는 아니다. “푸줏간 주인”의 손에 의해 소의 몸뚱이는 “四元素로 해체”되고 만다. 여기서 최승호 시인이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전도된 가치관이다. 생명을 물질로 전환시키는 그 상품논리의 비정성과 그러한 삶에 대한 기계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예의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그 도구들을 보면, 모두 끔찍한 금속성의 도구들인 갈고랑쇠, 칼, 도끼 등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삶의 조건들이다. “잔혹스러운 삶의 조건의 상징적 소도구로 동물 이미지가 동원”11)된 것이라는 논의도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시인은 잔혹한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생명을 상상하게 된다. “쟁기를 끌던 시간”의 소, “옥수수잎을 씹던 시간”의 소, “파리에 시달리며/ 부르르 가죽을 떨던 시간”의 소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매몰된 자본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저울”에 “쇠고기 한 근의 죽음”을 올려놓고 그것을 사들고 갈 뿐이다. 이 지점에서 최승호 시인은 생명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반성 없는 기계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비판한다.
주지하다시피 최승호 시인의 동물적 상상력은 비판적이다. 그 비판은 상품화, 기계화, 물질화 되어가는 삶의 방식을 타깃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고 교묘한 삶의 방식을 타깃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거미가 왜, 끈적한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지
이해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법이 불법(佛法)이고 불법(不法)이다.
커브를 튼다, 택시들이, 자전거들이 거미줄을 타고
굴러간다, 교통순경은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다 보고 있다.
등이 거미줄에 붙은 날벌레들, 허공 쪽으로 발을 내밀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구원을 미끼로 등 쳐먹는 자들에 대한
나의 구원(舊怨), 오늘은 또 누가 걸려들었나 보자, 처마 밑에서
궁둥이가 큰 거미가,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내려온다.
껑충 뛰듯이, 거미줄 전체를 한번 흔들어 보는,
큰 거미, 해가 거미줄을 녹일 듯이 뜨겁게 진다.
내일은 아마, 눈에 해 뜨지 않는 자들이 꽤 있을 거야,
어기적거리며, 궁둥이가 큰 거미가, 처마 밑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거미줄」 전문 12)
이 텍스트에서는 거미의 삶의 방식을 비유하여 인간들의 교활하고 교묘한 삶의 방식을 비판․풍자하고 있다. 거미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닌 동물이다. 거미는 땅에 기어 다니는 동물이지만 공중에 그의 집을 짓고 산다. 여기서 공중에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새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미는 수평적인 삶의 방식과 수직적인 삶의 방식을 공유한 동물기호로 기능한다. 이는 그만큼 사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 다양성을 달리 말하면 교활함과 교묘함이 된다. 그 교활함과 교묘함이 거미 자신에게는 불법(佛法)이 되고, 타자에게는 불법(不法)이 된다. 이런 점에서 거미는 이중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거미는 자기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죽지 않지만 타자는 그 거미줄에 걸리기만 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 이를 예증한다.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궁둥이가 큰 거미”는 오로지 자기 식욕을 충족시키는 데에만 그 삶의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그는 거미집을 비워두고 처마 밑에 숨어서 거미줄에 먹잇감이 걸리기를 몰래 기다리게 된다. 예의 불법(不法)으로 걸린 먹잇감이 살려달라고 구원하면, 살려주려고 가는 척하며 그 먹잇감을 잡아먹는다. 최승호 시인이 거미를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거미의 삶의 방식이 바로 인간이 사는 도시적 삶의 방식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 의하면 도시적 삶은 거미줄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교통순경은 운전하는 사람들이 그 교통의 거미줄에 걸리기를 바라며 숨어서 감시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도시적 삶은 교활하고 교묘한 덫의 세계이다. 예의 거미의 세계로 전환된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차츰차츰 동물기호인 거미의 기호로 변환되어 가게 된다. 물론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양이, 쥐 등의 동물기호로 변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반달칼 발톱”을 지닌 기괴한 동물기호로 변환되어 살기도 한다. “참을성 더하기 커다란 의문의 도시에서/ 나는 야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못난 사람들이 엉성한 쥐이빨을 드러내며/ 목덜미의 털을 곤두세우고, 찍찍거리는 도시에서/ 굽은 등을 날쌔게 파먹는 사기꾼들,/ 반달칼 발톱이 쥐 가죽을 벗기고 있는 도시에서/ 나는 꼬리를 끊어 버린 쥐들을 보았다.”(-「야옹거리는 도시」 일부13)에서 보듯이, 삶 자체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적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이런 동물적 공간은 주종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 부자와 빈자의 관계를 고착화하는 삶의 코드를 산출케 한다. 그래서 최승호 시인은 이러한 대립적 코드를 해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동물적 상상력에서 비상할 수 있는 ‘새’의 기호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마도 이에 기인하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한번 상상해보기로 한다. 소를 도살했던 주체들이 소들의 꿈을 꾼다면 어떻게 될까. 공중의 거미들이 그 교활함을 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엉뚱한 상상적 질문에 겸허하게 응답하는 시인이 있으니 바로 송찬호 시인이다. 그는 농촌의 소를 바다의 고래로, 공중의 거미를 높은 공중에 떠 있는 기린의 머리로 코드 변환을 하여 죽음과 대립되는 생명, 감시와 대립되는 자율의 시적 세계를 산출해내고 있다. 요컨대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세계를 산출해내고 있다.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듣는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 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쏜살같이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고래의 꿈」 전문14)
시인인 화자는 “고래의 꿈”을 욕망하고 있다. “고래의 꿈”이라는 것은 화자가 고래가 되어 고래가 욕망하는 세계를 고래로서 그려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고래에게 요구하는 욕망과는 차원이 다른 꿈이다. 일종의 자리바꿈이 생겨난 것이다. 곧 주체였던 화자가 타자가 되고, 타자였던 고래가 주체로 전환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해서 화자는 자기의 욕망을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고래가 욕망하는 것을 수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래의 꿈이다. 화자가 고래에게 줄 선물로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을 준비한 것도 고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다. 고래는 물을 통하여 삶을 즐기니 말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해보도록 한다. 큰고래가 바다에서 숨을 내쉴 때 분수처럼 물줄기가 높이 오른다. 이 광경을 비유해서 말한다면, 바다의 고래는 큰 화분이고 물줄기는 큰 꽃나무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화자가 선물용으로 “작은 화분 하나”를 준비하겠다는 것은 다름 아닌 “어린 고래”를 선물로 주겠다는 뜻이다.
예의 자리바꿈 현상이 일어나자, 모든 것은 주체인 고래의 욕망을 따라 화자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인인 화자는 자기의 이야기를 고래에게 들려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고래의 이야기를 듣는 타자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고래의 항로를 지켜 보”며 생활하게 된다.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한다는 뉴스도 그러한 소산물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화자의 이야기는 없고 오로지 고래 이야기만 있다. 예컨대 화자의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고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고 화자가 언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기를 더 많이 잡기 위해서가 아니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서 고래가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이처럼 강자인 인간이 그 자리를 떠나 약자의 자리로 설 때, 주체의 자리를 버리고 타자의 자리에 설 때, 고래는 무한한 생명의 기쁨을 누린다. 더불어 인간도 상생의 기쁨을 누린다. 시인이 종국에 “어린 고래”가 되고자 하는데, 이것은 상생의 기쁨에서 나온 욕망이다. 물론 이 “어린 고래”는 시인이 선물하고자 한 “작은 화분”에 해당한다. 등가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어린 고래”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선물용이라는 뜻이고, 그 자신이 고래들의 세계로 보내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중략)…
언제 한번 궤도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꺾어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꽝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詩의 족장을 보아라
―「기린에서」15)
송찬호 시인은 공중의 거미를 기린의 머리 코드로 변환하여 거미와 정반대되는 시적 의미를 산출해내고 있다. 거미는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매개적 존재이다. 그의 삶의 터전인 거미줄이 공중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린 역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존재이다. 그의 생활을 지배하는 머리가 공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매개적 기능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거미줄은 타자의 무덤을 만드는 기능을 하지만 기린은 타자의 생명을 크게 살리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거미와 타자는 대립하지만 기린과 타자는 상호 융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전자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상상력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이고 친화적인 상상력이다. 예의 이러한 사실을 송찬호 시인의 시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는 그 수직적인 높이로 인하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 텍스트에서 그 매개체는 비유적 기호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먼저는 그러한 형상이 높은 산의 모습으로 상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린의 몸이 높은 산의 둘레라면 기린의 머리는 산꼭대기가 된다. 시인이 기린의 머리 위에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고 언술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 산상 호수는 목마름을 축여줄 뿐만 아니라 조개 등의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또한, 기린의 수직적인 긴 머리는 “별을 따는 장대”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 장대로 하늘을 긁으면, 하늘의 별들이 아아아 노래하며 유성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천상적 가치가 지상에 하강하면서 지상의 세계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곧 지상의 천상화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기린의 긴 목은 높은 고원으로 상상되기도 하며, 야구장의 홈런볼을 잡을 수 있는 키다리 아저씨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원에서는 천상적 가치를 지닌 “하늘나리”도 꺾을 수 있으며, 야구장에서는 홈런볼을 잡아 아이들에게도 줄 수 있다. 이렇게 기린은 인간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즐겁게 충족시켜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린이 천상지향적인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지상도 매우 사랑한다. 그는 높은 머리를 낮추고 “어린이날 재롱잔치”를 위해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껑충거리기도 한다. 이처럼 기린의 머리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인간의 세계와 하나로 융합되는 기호로 작용한다. 그래서 인간들 또한 그 기린을 동물적 차원에서 인간적 차원, 곧 영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받아들인다. 기린에게 주어지는 “詩의 족장”이라는 명칭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동물적 상상력은 매우 다양하다. 동물적 상상력이 풍부한 만큼 시적 구조와 그 의미도 큰 성취를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한국현대시를 한 차원 높게 이끌어준 것은 다름 아닌 동물적 상상력이다.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제와 제재 면에서도 그러하고, 시적 장치와 시적 정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을 신선하게 보여주었다. 더불어 한국현대시가 서정시를 근간으로 하여 모더니즘 계열인 도시시, 해체시, 정치시까지로 확대해 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앞으로도 동물적 상상력은 다양한 코드 변환을 통해 무한하게 발전할 에너지가 있다고 본다. (끝)
정유화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 등이 있다.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 녹색시인상 수상. 서울시립대 강의전담교수.
1) 김현승의 「나무」에서 인용함.
2) 김광림의 「꽃의 문화사초」에서 인용함.
3) 서정주, <미당 서정주 시전집1>, 민음사, 1991, p.36.
4) 정유화, 「서정주 시의 순환적 공간구조」, <문예운동>, 문예운동사, 2010년 겨울호, 참고.
5)서정주, <미당 서정주 시전집1>, 민음사, 1991, pp.91~92.
6)이어령, 「피의 해체와 변형과정」, <시 다시 읽기>, 문학사상사, 1995, p.340.
7)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pp.85~87.
8)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p.132.
9)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p.37.
10)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 pp.90~91.
11) 유종호, 「난폭 시대의 시」,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 p.118.
12) 최승호, <진흙소를 타고>, 민음사, 1987, p.38.
13) 최승호, <진흙소를 타고>, 민음사, 1987, p.59.
14)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pp.40~41.
15)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pp.1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