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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견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차령이남 사람들을 차별했던 고려태조 왕건 동상. 이 동상은 그의 아들이자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이 만들었다. 북한소재.
전라도는 신라 말엽에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 자주 위태한 지경에 빠트려 고려시대에 차별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 "차령 이남의 강물은 모두 엇갈려 흐른다"며 "차령 남쪽의 사람은 쓰지 말라"고 유언한 뒤로 벼슬한 자가 드물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와 드디어 금령이 느슨해졌다고 강조했다. 전라도에는 땅의 신령스런 기운을 타고난 인걸이 적지 않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 사람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 사람이며 하서 김인후는 장성 사람인데 모두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모두 광주 사람이며 절의로 이름났다. 고산 윤선도는 해남 사람이고 묵재 이상형은 남원 사람인데 함께 문학의 대가였다. 장군 정지와 금난 정충신은 모두 광주 사람으로서 장수로 명성을 떨쳤다.
▲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배신하고 자신의 옹위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해 두 번 배신할 수 있다며 차별했다. 전주 경기전 소장.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인들은 조선사회에서 크게 따돌림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는 왕씨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를 옹위한 공신들 가운데에서는 서북 출신의 맹장이 많았다. 태조는 나라를 세운 뒤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을 경계해 "서북 사람을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평안도, 함경도에는 300년 동안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혹 과거에 오른 자가 있다 해도 종5품 현령 정도였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차츰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들이 없게 되었고 사대부들도 그곳에 가서 살지 않았다.
책에는 각 지방에서 전래되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정유재란 때 적의 예봉을 꺾은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경리(經理) 양호(楊鎬)이다. 적이 남원에서 전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오자 양호가 평양에서 한양까지 700리를 이틀 만에 달려왔고 다시 천안까지 내려와 왜군과 맞붙었다.
원숭이를 태운 말을 적진에 풀어 혼란해진 틈에 철갑기병으로 적을 크게 무찔렀고 들판은 시체들로 뒤덮였다. 왜적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뒤부터 그때까지 그와 같은 승리는 없었으며 들에서 밭을 갈 때 지금까지도 창이나 칼 따위를 줍는다고 책은 논평한다. 전투 이후 양호는 무고를 당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다.
인조는 반정 이듬해인 1624년 일어난 반란(이괄의 난)으로 충청도 공주까지 피난 간다. 도망가다가 나무 두그루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서울에서 달려온 군사가 관군의 승리를 아뢰자 나무를 기특하게 여겨 두 나무 모두에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책은 "그 뒤 관아에서 나무 옆에 정자를 지었는데 나무는 말라죽고 정자만 남아 있다"고 적었다. 원나라 지배기에 우리나라가 중국인들의 귀향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원나라 문종(1304~1332)은 순제(1320~1370·원나라 마지막 임금)를 대청도로 귀향 보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으로 만든 부처를 모시고 매일 해가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후일 귀국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순제는 장인 100명을 보내 해주 수양산에 큰 절을 짓게 했는데 이것이 신광사(神光寺)이다.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우리나라의 으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버렸다.
대마도에 대한 언급도 이채롭다. 대마도는 왜국에 딸린 것이 아닌데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왜국을 빙자해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나라를 빙자해 왜국에게 중하게 보였으니 박쥐노릇을 하면서 이로움을 취했다. 이들을 토벌해 우리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책은 제시한다.
▶이중환(1690~1756)=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청담(淸潭)이다. 성호 이익(1681∼1763)과는 친척이었다. 24세가 되던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이 정5품 병조정랑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은 남인이었으며 경종 재위 시 국왕 시해사건을 고변해 다수의 노론 인사를 숙청시켰던 목호룡과 친분이 있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게 되면서 그는 목호룡과 함께 처벌받았다. 목효룡은 옥중에서 죽어 효수됐고 이중환은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형에 풀려난 뒤 30년 동안 전국을 정처없이 떠돈다. 그의 대표 저서 '택리지'는 이런 방랑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영조 29년(1753) 통정대부(문반 당상관 품계), 절충장군(무반 당상관)을 동시에 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죽기 겨우 3년 전이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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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시가 자주 얼굴을 찡그리는게 더매혹적이라
다른여자들이 따라 했다는설도 있지요
중국인이 아닌 전라도태생 이라니 과연....
잼난 역사 공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