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213A734751BBCA3814)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온 섬마을 선생님
이 가사는 유행가의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가사의 서두의 노래이다.
나는 반가운 사람하고 술한잔 기울릴 분위기가 되어서 즐겁게 술 한잔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고는 노래방을 찾는다면 이 노래 "섬마을 선생님"이 십팔번 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그사 연을 잘 알고 섬마을 선생님의 노래를 찾어 으레히 곡조가
흘러나오도록 해주곤 한다. 사람은 누구나 크던 작던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고 애환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이야기를 않하고 대화를 않해서 그렇지,..
서로 친한 사이가 된다면 자기의 속 내심을 내 비취기도하는게 우리네 인생이고
삶이지 않겠는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진정 나하고 내 내면의 깊은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사람이 과연 몇사람이 되겠는가?
나는 오늘 이글은 걷기방의 심산 운영자님의 색스폰연주의 합창단에서 연주했던 제목이
'섬마을 선생님'이란 노래가 색스폰의 합창단이 하도 하모니가 아름답게 울려와서
내 감정을 사로 잡아주어서 또 컴에 앉아 글을 올리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5여년전의 청춘의 꿈많은 시절의 이야기로 거슬려 올라가게 된다.
66년도에 서울에 상경하여 대학을 다니다가 부모님이 올라오시게 되어 내가 연로한
부모님을 부양을 하여야 할 입장에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60이 넘으셨으니 노동력도
없으시고 어차피 내가 부양을 해야하는 입장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더 공부를 해야하고 나름대로 목표를 향해서 나가야하는 형편인데
가정형편이 그렇게 되지는 못하고 ,그래서 인천교육대에 문을 두들리게 되는 것이다.
당초목표는 초등학교 교사가 목표가 아닌데 어쩔수 없이 교대로 가서 저기 서해안에
있는 섬마을에 가서 눈빛초롱 초롱한 어린학생들하고 생활을 하고 싶었고 한없이
넓은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석양의 지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젊음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가정을 해보기도한다.
섬진강가에서 젊어서 부터 꿈을 버리지않고 섬진강 주변의 초등학교를 벗어나지않고 평생을
순수한 자연속에서 시심을 키우고 수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금은 시인으로 우뚝선
'김용택시인'을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만약에 평생동안 학교에 머물었다면 어떤 나가
현재 되었을까? 나의 현재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등등이다.
나는 ' 인천교육대학교'(현 경인교대)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도중에 나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주시는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그래서 '섬마을 선생님' 노래만 흘러나와도 그때 어려웠던 시절의 추억과 어머니를 생각
하게되고 가끔 눈가에 이슬을 젖게 한다. 헌신적이고 자식을 가르켜야 겠다는 남다른
노력으로 자식이 잘되게 하는 길은 교육이라하시고 나주고향에서 10리길을 '감'을 팔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시켜서 서울로 올라와서 시야가 넓은 이곳에서 그래도 부족한
학문에 눈을 뜨게 하여주신 어머니에게 불효 이자식은 무엇으로 대해 드릴수 있을까요
그 뒤로 서울에 사시는 둘째누나와 매형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또한 먼저 저세상으로
간 마누라가 없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접근활수 있었을까?
부모님의 힘이 미치지못한 못한 부분을 둘째 누나와 매형이 채워주셔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셨다.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내가 인천교육대를 학교를 다닐때에는 지금의 마포꼭대기
판자촌에서 겨울의 찬바람이 항상 방안에 가득하고 겨우 연탄방의 온기에 의존해서
살면서 배고품을 참아 가면서 공부를 하였던 추억이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병환을 가을철에 얻어 다음해의 봄이 오면서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40여년전의 세월은 흘렀지만 유행가 이미자 가수의 구성진 '섬마을 선생님'의 노래
한가락이 나의 가슴을 후비고 눈가의 이슬을 맺히게 된다.
나는 오늘도 토요일이어서 집에서 쉬고해서 책을 들고 남산의 도서관으로 향해서
내가보고 싶은 고전문학그리고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과 책들을 보면서 나의 부족한
학문의 세계에 접근을 하고 또다른 분야의 책들을 접하면서 즐거운 휴일을 보내고져
한다. 오늘도 내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글한수를 올리면서...................베드로용상
------- 어 머 니 ----
저 머~얼리
국토의 최 남단
남도의 한많은 고향
어려운 농촌의 아녀자로 태어나
가정형편도 어려운 선비 집안으로
오셔서
그렇게 힘에 겨운 삶을
그러나 자식들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여
손발이 불고 잠못 이루시면서도
또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셔서
논과밭으로 ..........
피눈물 나는 눈물을 감추시고
피땀흘리는 삶을 위하여
손 발이 다 하도록
오로지 자식 잘 되라는 기대하나로
구술땀을 흘리시는 어머니 !
제대로 한번 모시지 못하고
제대로 치료도 한번 못해드리고
저세상으로 가신 어머니
오로지
아들이 교사가 된다는 소식만 듣고
즐거워 하시던 어머니
저세상으로
가신지 오래 되었어도
어머니가 아련히 그려져
오늘도 한번 이불효자는
불러봅니다 ----베드로용상
![](https://t1.daumcdn.net/cfile/cafe/017E863A51BBE4DA15)
첫댓글 감을 팔러다니셨다는 이야기에 감을 줍던 저의 어린시절이 생각납니다
서울까지 따라올라가셔서 뒷바라지하신 어머님을 일찍 여의신 내력을 글로 쓰시니
얼마나 어머님이 그리우시겠습니까?
비슷한 처지의 어린시절을 뒤돌아보게하는 순간을 섬마을선생님과 함께 회고해봅니다
아직도 공부를 하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합니다
아침일찍 일어나서서 나주읍내에 십리길을 머리에 이고 가셔서 돈을 만들어 등록금을 만들어 중학교 ,고등학교를
힘에 겨웁게 졸업했던 추억이 머리를 더나지 않습니다.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얼마되지않아서 저세상으로 떠나시는 가슴아픔을 맛보았습니다. 제대로 치료를 해드리지못하고 불효한 자식으로 영원히 남게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주어 고맙습니다
감사하니다
베드로용상님~님의 아팠던 과거의 여러 일들이 새삼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그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웠던 시절이고
우리들의 부모님도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신 님의 현재.
학문의 세계에서 님의 세계를 만들어가시는 님이 보기에 좋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인생에 제일가슴아팠던 추억입니다. 60년대 7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느낌니다.
누구나 어렵고 가슴아팠던 일이 없겠습니까만 늦둥이로 태어나서 부모님에게 불효를 하는 낙인을 찍히고...
그래도 그어려웠던 힘으로 겨우 내앞가름이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어머니 불러도 불러도 그리운 이름이지요
나 역시 엄마가슴에 멍만들어놓고요 아직 살어계시것만
여전히 전 애물단지에요 베드로용상님 어머니도 저 하늘에서 내아들 장하다고
칭찬하시면서 흐뭇하게 웃고 계실거에요 왜냐구요 열심히 사셔서요 그리고 부러워요 그열정이요
감사합니다
부모님에게 자식노릇도못하고 겨우 내앞 가름이나 하는 신세 입니다.
그정렬은 컸던같습니다. 지금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않고 있으니.................감사합니다
어머니 언제나 가슴짠 한 이름입니다...잘 읽고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특히 어머니의 노력이 크다고 보아집니다 감사합니다
갑장님 지나온 추억의 밑돌을 빼어 가슴을 마음을 흔드는구려..
그때그시절 누구인들 그보다더 불행하고 어려운 생활로 보낸 그시절 입니다
지금의 덕망과 학문의 열중합을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항상 좋은 오늘을 만들어가시기을 바라면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부모님의 힘에 겨운 덕택에 그래도 내앞가름이나 해나가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격려에 힘을 얻습니다.건강하시고 즐거운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지나온 삶의 흔적들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날입니다
어머니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그리움이고 고향이지요
베드로님의 절절한 그리움이 어머님에게까지 전달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이 들어서도 열심히 학문의 세계로 진입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도대체 머리속에 들어가질 않아요 ㅜㅜ
감사합니다
어머님의 따뜻한 뒷바라지로 고등교육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 학문의 길로 들어설수 있어서 내인생의
초석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그피나는 노력이란 말로 못할것같습니다
옛날 시골에선 선생님의 직업이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가장신선하고 존경받았기 때문이였겠지요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런길을 걸었다는것 만으로도 행운이 었습니다 힘든과정있었지만 하고싶은일도 해보고 나이들어서도 취미찾아 즐길수 있다는것을 보람으로 여겨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이란 자식사랑이란 참으로큰것같습니다.
그걸모르고 사는게 또한 자식인것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너무안타까웠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유유히 흐르는 어머님의 품속같은 영산강
가야산 자락의 아망바위가 낯설지 않아 가슴이 설레입니다.
백제가 무너지고,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영산강을 바라보면서
많은 상념에 젖어 아망바위를 혼자서 올랐던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역사는 돌고도는 것인가 ? 역사는 영산강처럼 말없이 흐르는 것인가 ?
가슴 찡한 글에 머무르다 갑니다.
무탈하시고 아름다운 행복이 가득한 고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향이 같은것 같습니다. 저사진은 영산강의 구진포못 미쳐가서 있는 앙암바위밑입니다
초등학교 동창회때 가서 찍은 사진으로 '황포돛대'를 타면서 찍은사진입니다.
항상 고향을 그리고 부모님이 그리운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섬마을 선생님 노래는 아마도 등학교 저학년 일때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였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넉넉함을 누릴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머님의 은혜를 어찌 달 갚으리요
하늘같은 어머님 사랑을 다시한번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희생정신은 대단하지요.
한알의 밀알이 썩어서 더큰 수ㅡ확을 얻는것처럼
감사합니다
어머니 ㅡㅡ,
이 한마듸에도 콧등이 시려오는 정많고 한도 서린 보리고개를 격어본 세대들의 공통된 안타까움.
그러나 작금의 세대들의 마음에 새긴 부모란 ㅡㅡ? 걱정 됩니다.
그렇습니다. 모리고개의 가난과 배고품을 겪어본사람들하고는 틀리지요.
그대 먹고살것이 없어서 서울로 올라왔지요.감사합니다
예전의 꿈은 이루지 못하셨어도 지금 섬마을이 아닌 도시에서 학생들과 지내실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누구나 점점 더 부모님 생각이 나고 후회가 많아지는 우리들 나이인 것 같습니다
내가 늙은 엄마가 되고보니 ... 예전에 엄마한 테 했던 모든 생각과 행돋이 후회가 됩니다
정말로 보고싶은 엄마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희생만하고 저세상으로 가신어머니 ................
자식을 잘두어야 대접을 받을텐데. 병원도 한번도 못가시고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베드로용상님의 글을 읽으니 친정 어머니 생각이 간절합니다.
건강하세요.
어머니는 다그렇게 고생만하시고 하신것같습니다.
아~!
동창분을 만났군요
저도 인천교육대학 졸업생인데~ 아마도 저의 후배되시는 분 같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대와는 좀다른 글내용~
어느학교에서 꽃을 피웠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도 15년경력을 정리하고 이민길에 올라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낭만이 좀있습니다. 글이나 쓰고 공부나 하는 서생스타일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