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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캔자스주 37도가 넘는 폭염으로 농장 들판에 살던 소 1만여마리 사망
2021년 쿠팡 물류센터 화재
국내 대표 전자상거래 업체인 쿠팡의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 지하 2층에서 17일 새벽 불이 나 소방당국이 진화에 나섰지만,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지며 오후 11시 현재 18시간이 넘도록 좀체 잡히지 않고 있다. 현재 인명 구조에 나섰던 소방관 1명이 11시간째 불이 난 건물에 고립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아 건물 내부 수색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화재는 오전 5시 20분쯤 지상 4층, 지하 2층, 연면적 12만 7178.58㎡ 규모의 물류센터 건물 지하 2층에서 시작됐다. 소방당국은 ‘대응 2단계’ 경보를 발령, 장비 60여대와 인력 150여명을 동원해 초기 화재 진압에 나섰다.
불은 발생 2시간 40여분 만인 오전 8시 19분쯤 큰 불길이 잡히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고, 초기 진화 작업 후 오전 11시 50분쯤 내부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은 뒤 건물 내부 진화작업을 벌이던 소방관들도 긴급 탈출 지시를 받고 야외로 대피했다.
2019년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 선출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옥사
2015년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 딜런 루프(21세) 인종전쟁 시작하려 흑인교회에서 총기난사 9명 사망
2012년 6·25 종군기자로 활약… 한국 첫 방송기자 문제안 별세
한국 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92) 전(前) 조선일보 체육부장이 17일 별세했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난 문씨는 일본 메이지(明治)대 전문부 문예과를 졸업한 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6일부터 한 달 반 동안 경성중앙방송국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기자로 활동했다. 방송사를 그만둔 후에도 언론계에 투신해 1946년 7월 조선통신을 시작으로 경향신문·중앙일보·국제신문·서울신문 등을 거쳤고,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차장과 체육부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1953년 정전협정 과정을 자세히 보도해 1955년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2005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평양서 면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5년6월17일 “미국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에라도 (북핵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과 좀더 협의해 봐야겠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6자회담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고 거부한 적도 없다”면서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보기 때문에 맞서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유효하며,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6·15 통일대축전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의 단독 면담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정 장관이 전했다. 정 장관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우리 정부가 구상중인 중대 제안에 대해 김 위원장에게 설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년간 중단된 6자회담에 북한이 복귀하느냐, 한다면 언제냐가 최대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은 귀환 후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50분까지 면담했다”고 밝혔다.
남북 관계와 관련, 김 위원장은 8·15 광복절 때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자는 우리측 제안을 수용했고, 특히 8·15에 화상(畵像) 상봉도 해보자고 했다. 그는 8·15 행사에 비중 있는 당국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의 한·미 정상회담 설명에 “회담 결과를 긍정 평가하고 그 이후 미국 태도를 주시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 장관이 다자 안전 보장을 거론하자 “핵문제 해결되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겠다. 다자 안전 보장 일리 있다.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 “적절한 때가 되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좋은 계절에 초청하겠다”고 말했다. 현 정부 고위 당국자가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밖에 남북 장성급회담 개최, 수산회담 개최 등에도 의견을 같이했다.
2004년 브라질, 1억 8000만년 된 가장 오래된 물고기 종(種)발견
브라질 과학자들은 1억8000만년 전부터 지구의 바다에 생존해 온 물고기 한 종을 새로 발견했다고 로이터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이 물고기는 몸 길이가 12~16인치로 상어와 유사하며, 날개 모양의 지느러미와 채찍 같은 긴 꼬리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난 2001년 브라질 남부 해안에서 어부들이 이 물고기 한 마리를 포획한 이후 새로운 종인지 여부를 조사해왔다. 브라질 발리 두 이타자이 대학의 줄레스 소투 연구원은 “이 종의 역사는 1억5000만~1억8000만년이나 된다”며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만큼 오래된 동물이 아직 살아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물고기의 학명은 스페인 과학자 지저스 마탈라나스의 이름을 따 ‘하이드롤라구스 마탈라나시’로 명명됐다
1999년 모리스 그린,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
미국 육상선수 모리스 그린이 1999년 6월 17일 벌어진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도노번 베일리(캐나다)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서 세운 종전기록(9초84)을 0.05초 앞당긴 것이자 1991년 칼 루이스(미국)가 9초90 벽을 허문지 8년만에 이룬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모리스 그린은 1997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아테네세계선수권 100m에서 9초86의 기록으로 도노번 베일리를 누르고 우승, 세계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8세때 육상을 시작한 그린은 20대 초반까지는 무명이었다. 고향의 캔자스시티 대학생이던 1995년 4월 텍사스 릴레이 대회서 9초88로 칼 루이스를 누르고, 이어 전미선수권에서는 2위를 차지해 관심을 끌었지만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탈락했다. 그린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에서 또 탈락하자 "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 `단거리 사관학교`인 UCLA의 존 스미스 감독 휘하로 들어갔다. 아토 볼든, 존 드러먼드 등 세계 정상급 선수와 연습한 그린은 1997년 전미선수권에 이어 세계선수권마저 제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탄생했다.
1998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의사당건물을 점령
1997년 문화체육부 청소년보호대책 마련,
18세 미만 청소년에게 담배 술 부탄가스 등을 못 팔게 하고 노래방 비디오방 등 유해업소 출입금지법 마련
1997년 국무회의, 러시아와의 `형사사법공조조약안` 의결
1996년 ‘패러다임 이론’ 창시한 토마스 쿤 사망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엔지니어인 사무엘 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49년 물리학박사를 받았다.
쿤은 과학 발전이 한 시대의 세계관(패러다임)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과학혁명은 바로 한 패러다임 내의 과학이 모순으로 부글부글 끓다가 위기에 닥쳐 뉴턴이나 인슈타인 같은 혁명가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쿤의 저서로는 문제작 ‘과학혁명의 구조’(1962) 이외에 구체적인 과학혁명의 예를 다룬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과 ‘흑체이론과 양자 불연속성’(1978), 과학·철학적 주제를 모은 논문집 ‘주요한 긴장’(1977)이 있다.
쿤이 1996년 6월 17일, 73세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쌀 제공 관련 남북차관급 회담
1994년 미국 미식축구선수 O.J.심슨, 전처 살해혐의로 체포
전처인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남자친구 로널드 골드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수배됐던 미국의 전설적인 미식축구스타 O.J.심슨이 경찰과 대치끝에 1994년 6월 17일 투항, 수감됐다. 심슨은 이날밤 경찰의 추격을 받자 1백여Km를 달아나다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자택 건물밖에 차를 세우고 권총자살하겠다며 90분간 경찰과 대치하다 결국 투항했다. O.J.심슨사건은 이후 미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재판이 진행돼 체포 후 474일 만인 1995년 10월 2일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합의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전체 12명중 흑인9명(남자1명, 여자8명)과 백인여성 2명, 멕시코계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무죄평결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평결 발표 이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평결에 동의하는 반응은 33%,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은 56%로 나타났다.
1994년 제15회 월드컵 미국서 개막
1994년 6월 17일 꿈의 구연 미국 월드컵축구대회가 아시아대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됐다. 전대회 우승팀인 독일과 볼리비아전을 시작으로 1994년 7월 18일까지 한달 동안 52경기를 소화한 이번 월드컵은 한국이 경기를 갖는 댈라스를 비롯,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등 9개 도시에서 펼쳐졌다.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전에 앞서 열린 개막식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24개 참가국들의 공연단이 자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였으며 한국은 로스엔젤레스 교민무용단이 고유의 부채춤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한국은 스페인과 2-2 무승부,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독일에 3-2로 패해 2무1패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결승전은 브라질과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갔으나 0-0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로 3-2 승을 한 브라질이 우승했다.
1994년 김일성,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회담.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2년 한글 로마자 표기법 남북 단일안 합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됨에 따라 서울 퇴계로 주변의 도로표지판에 써있는 ‘을지로’ 표기도 ‘Euljiro’로 바뀌었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남북한 단일안이 마련됐다. 1992년 6월 16, 17일 이틀간 파리 소재 프랑스표준협회(AFNOR) 회관에서 열린 제5차 기계화를 위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남북한 회의에서 양측은 쌍방제안을 절충시킨 단일 표기법안에 합의, 1987년 5월 모스크바 1차 회의 이후 5년간에 걸친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
정수웅 공업진흥청 차장과 홍린택 규격위원회 위원장이 각각 남북한 수석대표로 참석한 이번 5차 회의에서 양측은 자음의 경우 북한측 안을 ,모음은 한국측 안을 수용하는 절충안에 합의했으며 1992년 6월 17일 오후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단일안을 공식 제출했다. 남북한 단일 로마자 표기법이 합의됨에 따라 국내 지명, 인명표기 방식이 통일돼 국내외 표기상의 혼란이 해소되었다
남북한간의 단일안에 따르면 한글자음 ‘ㅂ’은 영문 알파벳 ‘p’로 결정돼 ‘부산’의 경우 ‘pusan’으로 확정됐으며 ‘ㄱ’은 ‘k’로, ‘이’는 ‘i’로 각각 표기되게 됐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에는 종전 표기를 인정하는 예외를 두기로 양측은 합의했다.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2호 양주별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고명달씨 별세
1989년 헝가리 개혁파의 기수 나지 전총리 복권
1987년 경남 거제 앞바다에서 유람선 극동호 엔진과열로 발화침몰 사망 25명
1986년 해경, 충남 서산 앞바다서 표류중인 중국선박(선원19명) 보호중이라고 발표
1985년 미국 유인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1983년 교황, 폴란드 방문중 계엄해제 자유노조 부활 요구
1983년 미국 첫 MX미사일 발사실험 성공
1982년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포클랜드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
1981년 이라크기 국적불명 F5기에 강제 납치되어 브라질산 우라늄 빼앗김
1980년 계엄사, 부정축재 국기문란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1977년 국무회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 가결
1972년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1972년 6월 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신참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란 사람이 결정적인 제보를 해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지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닉슨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제출한 녹음 테이프도 일부가 빠진데다가 결정적인 대목까지 지워져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이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1974년 8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딥 스로트’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다.
1971년 미국-일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970년 부산항과 일본혼슈 시모노세키항을 잇는 부관 카페리호 부산 입항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간을 운항하는 부관(釜關) 카페리호가 1970년 6월 17일 새벽 0시 30분 기시 노부스키 일본 전수상 등 귀빈과 승객 4백3명, 선원 44명 및 자동차 8대를 싣고 부산항 제2부두에 입항했다.
25년 만에 새로 등장하는 부관 카페리호는 3천8백톤급의 호화여객선이며 일본 아카다키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시속 21노트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을 7시간에 달렸다. 선장 105m에 선폭은 17.5m, 여객정원은 6백2명으로 귀빈실 2명, 1등 50명, 특2등 1백여명, 2등은 4백50명이다. 이밖에 승용차 60대와 8톤짜리 콘테이너 70개를 적재할 수 있었다.
카페리운항이 두 나라의 우호다리로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는 도로교통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제면허가 통하지 않아 승용차의 통관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임시방편으로 `자동차 임시수입에 따른 통관요령`을 내놓아 부관 카페리에 의해 운송되는 외국인 또는 교포의 승용차는 임시통관시키거나 여권기간동안에 재수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배는 6월 25일 다시 한국측의 관계인사와 보도진 등 500여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에 입항해 일본측의 환영을 받았다.
1968년 DMZ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천 북방 DMZ에서 잠복근무중 침투하는 무장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잔당 도주
1967년 중국, 수소폭탄 실험
1967년 작곡가 윤이상 동베를린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됨
1965년 미국 B52기 괌도에서 출격하여 북베트남 폭격 시작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을 대행
1957년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설립
1954년 한국 축구대표팀 월드컵 첫 출전
스위스 취리히 그라스호퍼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최강 헝가리와의 경기 9-0 대패, 당시는 교체 규정 없어 경기 중 네 명이 근육경련 일으켜 종료 휘슬 울릴 때는 7명만 뛰고 있었음
1953년 동베를린서 반정부데모 격화
1950년 소설가 채만식 사망
1930년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이 1950년 6월 17일 6·25 직전 고향 근처에서 병고로 사망했다.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귀국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했으며, 식민지 하의 왜곡된 사회와 경제질서를 풍자하는 소설들을 주로 썼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탁류’와 ‘태평천하’ 등이 있으며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단편집도 계속 발표했다. 그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또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일제시대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기도 했다.
1950년 신장이식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50년 6월 17일 미국 시카고의 메어리 병원에서 49세의 신장병 여성이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 피부와 뼈, 각막, 폐 등을 이식한 예는 있었지만 신장을 이식한 수술은 처음이었다. 신장을 제공한 사람은 환자와 똑같은 혈액형의 동년배 여성으로 수술하기 몇분 전 사망했고,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은 1개월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집도는 로욜라 스트레치 의대의 리처드 로라 박사가 담당했다
1950년 아랍연맹7개국중 5개국 아랍집단안보조약에 조인
1950년 덜레스 미국 국무성 고문 내한
1947년 팬아메리칸 항공, 최초로 세계일주항로 개설
1944년 아이슬란드, 덴마크로부터 독립
1944년 일제 미곡강제공출제 실시
1943년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사망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화북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한 이원대 선생이 1943년 6월 17일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1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안병철의 권유로 독립투쟁을 결심,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난징 조선의열단 간부학교에 입교한 후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선생은 난징·상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1943년 3월, 산시성 부곡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31년 제6대 총독 우원일성 임명
1925년 제네바 무기무역국제회의서, 독가스사용금지 조약 조인
1925년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연맹전 개최됨(~6.30)
1919년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설치
1906년 일간신문 萬歲報 창간
1906년 6월 17일 일간지 만세보(萬歲報)가 창간됐다. 손병희가 재정을 지원하고 오세창이 사장, 이인직이 주필을 맡았다. 훗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된 오세창과 철저한 친일파 이인직의 만남은 물과 기름의 동거였지만 그래도 신문은 제대로 만들었다.
일진회를 강경한 논조로 공격했고, 편집으로는 한자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한자 옆에 한글로 음을 달았다. 특히 신문소설을 처음 연재한 것은 만세보의 자랑 가운데 하나.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와 ‘귀의 성’을 연재한 것이다. 고종도 만세보를 애독해 1000원을 하사할 만큼 인기를 끌었으나 경영난은 어쩔 수 없었다.
약 1년 만인 1907년 6월 29일, 293호로 막을 내렸으나 만세보를 인수한 이인직이 ‘대한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7월 18일부터 간행하면서 철저한 친일지가 됐다.
1904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 120명 인천 출발
1902년 채만식 출생
아버지 채규섭과 어머니 조우섭 사이의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914년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중에 은선흥과 결혼했으며,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며, 1923년 귀국해 다시 돌아가지 않자 이듬해 장기결석으로 퇴학처분 되었다.
1924년 경기도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취직했고, 192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 여 만에 그만두었다. 1930~33년 〈개벽〉, 1937년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으며, 그뒤 개성·안양 등으로 이사해 가난하게 살면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945년 4월 고향에 돌아왔다. 8·15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잠시 머물렀으며 1946년 이리시 고현에 내려와 있던 작은 형 준식의 집에 기거하다가, 폐결핵이 악화되어 비참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에도 창작의욕은 대단하여 이때 많은 작품을 썼다. 1950년 폐결핵으로 죽었으며,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계남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1902년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공사, 러시아공관에 모여 철도, 광산 등의 이권탈취 모의
1901년 청나라, 미국 의정서 조인
1895년 일본, 대만에 총독부 설치
1882년 러시아 작곡가 이골 표도르비치 스트라빈스키(1882-1971) 태어남
“예술은 감독받고 제한되며 가공될수록 더욱 더 자유로워진다.”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 미국 등 국적을 여러 번 바꾸고 작곡 스타일을 수시로 바꿔 ‘카멜레온 같은 음악가’라 불림, 그는 편곡의 명수로 28세 때 초연한 발레음악 ‘불새’는 그의 손이 거친 9개의 판이 있고 다른 사람의 편곡까지 합하면 39개, 정열적 창작태도라는 평과 곡 모양을 조금씩 바꿔 저작권을 여러 번 행사하고 돈을 겹겹으로 타먹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 있음
1867년 고종4년, 육전조례 간행
1862년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사망
1818년 프랑스 작곡가 구노 출생
1789년 제3신분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1703년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 출생
1431년 조선, 월식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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