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
부드러움.
포근함.
독특한 그녀만의 향기.
신기하게도 상처 하나 없는 몸.
볼에 느껴지는 그녀의 피부.
서로의 몸을 이어주는 그녀의 머리카락.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해진 그녀.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르다.
붉은 눈이 부끄러워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그녀.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다.
감정을 억제하고 마법사로서의 길을 걸을 때보다...
한 사람의 여자로 곁에서 다정함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루리아...
아침.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기분 좋은 아침.
" 리즈 씨...일어나세요. "
" 오랜만이네. 이런 것. "
리즈는 루리아의 속삭임에 그녀에게 키스를 하다가 가만히 요 근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쁘게 살아왔던 나날들.
그녀가 아침에 깨워 준 날은 없었다.
거의도 아닌, 아예.
" 자, 자, 일어날까? "
리즈는 좀 더 그렇게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트와 함께 군사들의 훈련 상
태를 확인하러 가야만 했다.
점차 치밀하게 짜여지는 이트의 계획.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라트네 덕분에 북부 지역의 오우거가 사라졌으니 견제를 위해서라도 움직
이기 시작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면 진행 될수록 루리아는 불안해져만 갔다.
아버지와의 전면전.
생각하기도 싫었다.
" ...언니와 동생.. 무사하겠죠...? "
" 아무리 마족이라고는 하지만, 페린은 절대 가족을 해칠 만한 인물이 아
니야. 레긴은 하위 마족이고 성격이 원래 광적이었지만, 페린은 그렇지
않았잖아? "
리즈는 말로만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둘 모두 마족과 동화되어 자신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리아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 걱정마. 매번 '걱정마', 란 말밖에 못하지만...괜찮을 거야. "
...... . . . . . . . . . . ......
그리고 아침 식사 후 테헤르가 앞장 서서 군사 훈련장을 시찰했다.
사기가 충만해져 있는 병사들.
하지만 이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원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다.
" 테헤르. 이들이 전부 인가요? "
이트는 리즈와 루리아, 에리카와 함께 내성 뒤에 있는 군사 훈련장에서 병
사 들의 모습을 보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헤르를 보며 물었다.
병사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모은 병사였기에 복장은 다양하고, 무기도 다
양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조직만 잘하면 최대한 장점으로 끌어낼 수가 있었다.
문제는 보통 병사의 일이 아니었다.
에리카의 아버지께서 주신 책 맨 뒤에 적혀있던 내용.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전쟁시에 필사적으로 싸우는...
" 극비의 제 0 돌격대가 있을 텐데요..? "
" 그, 그건.. "
" 설마 전투 때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겠죠? "
이트는 진지한 자세로 테헤르를 향해 말했기 때문에 테헤르는 절대 빠져나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트의 무서움.
바로 진지해지면 끝까지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촌장으로서도, 길드장으로서도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결국 테헤르는 내성 뒤, 북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궁금하단 표정의 리
즈에게 말했다.
" 아마 모르실 겁니다. 일반인들에게는 극비로 되어 있으니... "
" 그게 뭐지? 제 0 돌격대라는 것이? "
" ...보시면 아실 겁니다. 우선, 왜 북쪽에는 성문이 없는지 아십니까? "
" 남문은 미끼용 정문. 동문과 서문은 훈련장에서 이어진 문. 하지만 북쪽
은 그냥 성벽으로 막혀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
" 바로 제 0 돌격대 때문입니다. "
그리고 모두는 테헤르의 말과 함께 비밀리에 훈련을 하던, 북문과 큰 막사
건물 뒤에 있던 제 0 돌격대를 볼 수 있었다.
...... . . . . . . . . . . ......
" ...뭐, 뭐지? 저 차림은.. "
리즈는 한참 동안 걷다가 삶에 의욕 없이, 금속제 고리를 이어 만든 체인
메일과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플레이트 메일로 온 몸을 감싸고 거대한 금
속제 방패를 들고서 돌격 훈련을 받는 병사들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 멍하게
있다가 테헤르를 향해 물었다.
체인 메일과 플레이트 메일, 방패.
세 가지의 조합은 거의 착용자의 몸무게를 상회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입지 않았다.
리즈는 예전 처음 여행할 때 이트가 떠올라 잠깐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병사들의 표정과 행동은 이상했다.
그냥 묵묵히 앞에 있는 나무 상자를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
넘어지면 절대 일어날 수 없기에 위태위태하면서도 가속을 얻어 중량에 의
해 돌격하는 병사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 보시는 대로 입니다. 제 0 돌격대. 주 임무는 전쟁시 엄청난 두께의 갑
옷으로 공격을 막으며 1진으로서 적진을 향해 돌격, 중량에 의해 성문을
파괴하거나 적의 1진을 양분시키는 역할입니다. 보통 행군 시에는 리즈
님을 몸으로 보호하는 역할입니다. "
"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지 않나!!! "
리즈는 태연자약하게 그런 말을 하는 테헤르를 향해 큰게 소리쳤고, 훈련
하던 병사들은 그제서야 리즈 일행을 발견하고서 천천히 정렬을 하기 시작했
다.
그리고 정렬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그것을 보고 있던 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해야 했다.
" 이게 현실이다, 리즈. 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소중히 해야 해.
선두로 나서서 먼저 죽어 아군을 전멸시키지 말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고. "
" 이, 이트. "
" 리즈. 마음을 굳게 먹어. 내가 알기로는 이들은 전부 가족을 잃은 사람
들이야. 그리고 나중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이지. 자신을
억누르며 단련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 "
" 그렇습니다. 리즈 님. 이들이 사는 이유는 왕을 지키다가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끼리만 알게 명예롭게 죽는 것입니다. "
테헤르도 이트의 말에 리즈가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리즈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걸 수 없었
던 것이었다.
분노.
왠지 모르게 분노가 솟아났다.
이런 사람들을 만든 현실에 대해 화가 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해 먹는 사람들에 대해서인지도...
" 리즈.... "
루리아는 테헤르와 이트의 말에 안스러운 표정으로 병사들을 보다가 조용
히 두 손으로 리즈의 주먹을 감싸주었다.
그녀도 슬픈 것은 마찬가지 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리즈가 우선시 되고 있
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일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 그래. 내가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지. 하지만...저들이 죽도록 하지
않겠어. 반드시... "
[ 저희의 주군, 리즈 아이티스 님께 목숨을 맡기겠습니다. 저희를 방패로
서 잘 써 주십시오. ]
[ 반드시 리즈 님과 루리아 님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
[ 저희들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하늘에 먼저 간 가족을 떳
떳이 볼 수 있게... ]
그런데 정렬이 완료된 병사들이 리즈의 말을 들었는지 모두 장식용 갑옷처
럼 서서 리즈에게 소리쳐 왔고, 리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 좋다! 모두의 생명, 짐에게 맡겨라! 모두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겨 주마.
명예로운 기사, 최고의 기사 집단 크루세이더 라는 이름으로... "
=======================================================================
" 당신이 찾아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후훗. 내 딸아. 너만은...너만은 죽일 수 없어 이렇게 했다만, 미안하구
나. "
페린은 자신의 곁에 남은 장녀, 시리아 이클리드가 감금된 작은 방에 들어
가 이제는 완전히 붉게 변한 자신의 피빛 눈으로 시리아를 보았다.
마족과 동화되기 전에 낳은 유일한 딸.
자신의 피를 전부 이어받은 단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렇기에 죽일 수 없었다.
아무리 마족과 동화되었다고 해도 인간적인 이성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 아버님께 잘못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 제가 말씀 드릴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
" 언젠가 너도 자유로워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
페린은 시리아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 같자 그냥 그 말을 마지
막으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나무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시리아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우연히도 자신을 예언자로 만들어 준 그에게...
- 저기... 페린...제 아버지께 생길 일.. 아시지요? 잠시 시간을 내주시어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
- ..너는 너의 미래를 알 수 있지 않나?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너의 능력
을 네 스스로 인정하라. 너의 미래...넌 그대로 될 것이다. -
- 아, 알겠습니다... -
시리아는 그의 전언에 쇠창살이 끼워진 창으로 걸어가 새하얀 별빛을 맞았
다.
루리아를 데려간 리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린지 일 주일이 조금
넘은 시점.
페린의 생각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도.
모두의 미래도.
시리아는 별빛을 맞다가 루리아와 같은, 허리까지 오는 자신의 검은 머리
를 살짝 매만지다가 한 숨을 쉬며 침대로 갔다.
운명을 안다.
그것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좋은 미래를 봄과 동시에 나쁜 미래도 볼 수 있고, 운명에 대해서 말을 함
부로 꺼낼 수 없었으므로 말조심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도 역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 루리아...널 볼 수 없겠구나. 불쌍한 아이... 하지만..어쩌면 다행일지
도...내가 죽는 장면을 네가 본다면 충격이 크겠지? 루리아... "
마족인 된 것.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붉은 머리에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눈은 피를 원하는 눈이었다.
리즈.
그 인간이 변수가 될지는 몰랐다.
첫 인상도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의지가 강한 눈.
그런 눈빛의 인간은 흔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제 시작인가?
이 페린이란 인간과 동화되어 서로의 혼을 합쳐 이성을 하나로 만드는 데
에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시작해야 한다.
마족에게는 중요한 일이니...
" 레긴... 성을 너에게 맡긴다. "
" 예? 이런 일은 제가 가... "
" 내가 간다. "
" 예. 알겠습니다. "
레긴은 강경하게 나오는 페린의 태도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속으로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페린이 죽을 것 같은 예감.
아니,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그것이 아련히 느껴지고 있었다.
" 먼저 용병대를 보낸다. 그리고 재상의 부대. 기사대는 그 다음. 마지막
은 내가 직접 싸운다. "
" ...성은 제가 반드시... "
" 후후후.. 당연한 말을. "
- 아버님... -
그런데 대화 도중 페린에게 리리아의 전언이 들어왔고, 페린은 밝게 웃으
며 보이지 않는 자신의 딸에게 대답해 줬다.
- 왜 그러느냐? 먼저 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
- ...맞습니다. 먼저 그냥 언니의 동생으로 잠입하겠습니다. 제 능력으로
는 정면 대결은 어려울 테니. -
페린은 리리아의 말에 하마터면 허탈하게 웃을 뻔했다.
정면 대결이 어려운 능력이라...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인가?
리리아는 아직 그녀 자신의 힘을 모르고 있었다.
실전 경험이 없다는 탓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페린은 생
각했다.
- 그러려무나. 마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
-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
" ...리리아 님이 먼저 가시는 군요. "
" 뭐, 뭐야? 너도 들었다는 말인가? "
" 죄송합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들렸습니다. "
레긴은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지만 페린은 점점 불안해졌다.
눈앞에 있는 레긴이란 부하.
정확한 능력을 알 수 없었다.
광기라는 변수도 문제였다.
과연 이렇게 위험한 자를 수하에 계속 두어도 될지...
" 당당하게 출전을 해볼까... 이제 만나겠군..리즈 아이티스. "
=======================================================================
[ 리즈 폐하. 바리에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점심 식사시간 식당 문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목소리.
그것은 바리에의 도착을 알리는 말이었고, 바리에를 알고 있는 모두의 얼
굴에는 웃음이 번져 나갔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인재들.
아직 아무 편에도 붙지 않고 중립을 고수하는 도시, 마을들.
이트의 힘으로 좋게만 바뀌는 소문.
모든 것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어서 들어오게 하라! "
리즈는 급하게 문을 열 것을 지시했고, 곧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
의 바리에를 볼 수 있었다.
원래 음유 시인의 복장이었지만 호리기 마을에서의 일 이후로 평범하게 입
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의 복장은 처음 바리에를 보는 사람들이 그를 무시할 만한 복장이었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리즈가 반기는 사람은 대부분 굉장한 인재였으니.
" ...리즈 폐하. 바리에 발렌타인. 서둘러 로이프에 도착했습니다. "
" 바리... "
리즈는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하마터면 '바리 아저씨'라고 부를
뻔했으나 상황이 상황이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 위엄 있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리에에게 다가갔고, 바리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리즈가 가까이 오자 주군의 예를 갖추었다.
" 바리에 발렌타인. 리즈 님을 주군으로 삼아 리즈 님을 따르겠습니다. 제
목숨은 리즈 님의 것. 제 생명을 다할 때 까지 리즈 님만을 위해 일하겠
습니다. 저의 주군... "
" 바리에. 기사단을 맞으시오. 테헤르와 함께 모두를 지휘하길.. "
" 감사 드립니다. "
즉석에서 이루어진 기사단장의 선출.
하지만 아무도 이 일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 준 리즈의 인재 등용, 활용 능력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
다.
작지만 그럭저럭 조직된 용병대의 지휘를 에이드와 아리엘에게 맞기고, 도
적 길드와의 일은 에리카에게, 신전의 일은 데카르트에게, 마법 길드와의 일
은 루리아에게 맡겨 최대한의 협력을 얻어내는 리즈의 능력은 전술, 전략상
최고를 달리는 이트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트는 곳곳에 용병 순찰대를 조직, 파견하여 로이프 내의 치안을
맡겨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마치 페린이 강제적으로 점령하지 않더라도 모두 리즈의 편이 되어 줄 것
같았다.
" 바리에... 짐의 검기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도록 도와주겠소? "
" 예. "
모두는 잠시 리즈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강한데 얼마나 강해져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라트네, 마족에 대한 일을 생각한다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 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북부 지역 오우거가 전부 사라졌으니 페린
은 곧 움직입니다. 모두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 해주십시오! "
이트의 생각은 이러했다.
오우거 분산 게릴라전으로 시간을 끌려던 페린의 계획은 100년만에 인간계
에 온 물의 정령왕 라트네에 의해 착오가 생겨났다.
오우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로 하여금 일을 일으킨다.
그가 아마 레긴이나 페린 자신이 될 것이다.
이렇게 추리를 하자면 '곧 페린 쪽의 움직임이 나타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면 동시에 이쪽에서도 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성전이라는 구호 아래.
아네스를 위한 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 우리 모두- "
[ 리즈 폐하!! 방금 전 마법 길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페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이트가 잔을 들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 문 밖에서 시종이 다
급하게 마법 길드에서의 연락을 알려왔고 이트는 들었던 와인잔을 단번에 마
시고는 에이드를 보며 말했다.
이럴 때를 위해 조직된...
" 에이드. 곧 용병대를 이끌고 헤지리 마을 아래에 있는 다리를 방어해 주
세요. 그곳은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반드
시 그곳만은 지켜야 합니다. 아마 섣부른 공격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
" ...알았네. "
" 수도인 이스티나에서 여기까지 올려면 아직 멀었습니다만, 모두 준비해
주십시오. 상대는 마족. 예상 외의 전투가 벌어질 테니... "
=======================================================================
" 에이드. 이제 출발이지? "
" ...사냥꾼이던 우리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지내게 될 줄이야... "
에이드는 식사 직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지며 편안한 나날들에 대
해 생각하던 아리엘의 말에 그녀의 곁에 누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떠올려
봤다.
어린 시절 용병대에 들어가 살던 나날.
우연히 만난 아리엘.
그리고 검기...
광기...
" 어쩌면 우리와 싸우게 될 사람들은... "
" 알고 있어. 그들이겠지. 하지만..당신을 보고 우리편으로 돌아올 것 같
아. 에이드. 최고의 용병대 대장. "
" 최고라... 최고의 용병대 대장. 최고의 현상금 사냥꾼. 어느 것도 좋은
기억은 없군. "
" ...하지만... 나와 만났잖아? "
" 그렇지. 그것만은 절대 잊지 못하지.. "
에이드는 아리엘의 중얼거림에 처음 아리엘을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순진했던 소녀.
지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어느 쪽도 모두 아리엘이었기에 에이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아리엘을 죽일 뻔한 일이 있었으니.
" 곧 출발...그들과 만나고 싶군. 얼마만 인가... "
" 5년...정도? "
" 최강의 용병대...그들과 싸운다면.. 재밌겠어... "
어느 날 언니는 여행을 하겠다며 성을 나갔다.
이상하리 만치 귀족 생활을 싫어하던 언니가 여행을 떠난 것은 그때가 첫
번째는 아니었으므로 꼭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리즈 라는 남자와 만나면서 언니는 불행해 졌다.
별궁에까지 쳐들어와 모두를 죽이고 언니만을 데려간 살인마.
시리아 언니가 살아남은 것은 모두 루리아 언니가 언니의 목숨을 걸고 필
사적으로 매달려서 였을 것이다.
그 뒤로 1년.
언니는 그 남자와 같이 억지로 살며 지내다가 무슨 일인지 몰라도 갑자기
로이프로 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분명히 그 남자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협박했을 것이다.
언니...
내가 그를 없앨 수는 없어도 언니를 반드시 데리고 도망칠 것이다.
반드시!
[ 꼬마야. 무슨 일로 왔니? 길이라도 잃었니? ]
오늘도 로이프 남쪽 외성문의 보초를 보던 사내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에이드를 필두로 한, 헤지리 남쪽 다리 방어를 위해 용병대가 출병한지 얼
마 안된 시점이었지만 아직 로이프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므
로 그는 얼핏 본 루리아와 비슷한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
오는 귀여운 여자아이에게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추고는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
눌 수 있는 여유가 있었고, 곧 평범한 아이처럼 흰색 치마에 붉은 색 셔츠를
입은 그 여자아이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생글생글 미소를 띄우는 귀여운 아이. 하지만 그 아이의 대답은...
" 루리아 이클리드의 동생, 리리아 이클리드 입니다. 언니를 만나러 왔는
데... 들여보내 주시겠지요? "
=======================================================================
" 언니-!!! "
" 리리아...여기를 어떻게... "
루리아와 리즈가 리리아를 만난 것은 리리아가 왔다는 시종의 말에 황급히
밖으로 향하던 중, 정원 한 가운데에서 였다.
마치 루리아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듯한 모습의 리리아.
리즈는 리리아를 보는 순간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마 아이가 생긴다면, 딸을 낳게 된다면 리리아와 같을 거란 생각에...
" ..몰라. 정신을 차려 보니까 리자 였어. 그런데 언니가 여기 있다는 소
문이 퍼져서...사람들을 쫓아 여기 까지 온 거야. "
" 그래..잘 왔어. 리리아... "
루리아는 리리아의 무사함에 안도감을 느끼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리리아를
안아 주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어도 이곳에 있다는 것에 안심
할 뿐이었다.
이제 시리아 언니만...
" 꼬마 공주님. 몸은 괜찮나요? "
리즈도 루리아가 기뻐하자 자신도 기뻐져 허리를 굽혀 리리아의 눈을 보며
방긋 미소를 띄우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리리아는 리즈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돌리며 루리아의 품
에서 빠져 나와 루리아의 뒤로 숨어 버렸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
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기 심한 오빠를 피하는, 아니 아버지를 피하는 아이처럼 리즈를 피하
는 루리아.
말을 걸자마자 도망쳐 버리자 무안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지금만큼은
왕이 아닌 초보 아버지 같은 리즈.
그런 둘의 모습에 한 손으로는 리리아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리즈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띄우는 루리아.
셋의 모습은 한 가정의 자연스런 웃음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모두는 표면적인 미소 뒤에서 진심으로 축복을 보내고 있었다.
한 가정을 가진다.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정신적으로 약간 다급해져 있
던 리즈에게는 좋은 약이 될 것이었다.
실질적인 가족은 아니더라도...
" 자-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갈까? 꼬마 공주님? "
리즈는 곧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웃음을 잃지 않은 얼
굴로 루리아의 손을 이끌어 내성으로 향했다.
그래도 리리아는 루리아의 치마 뒤에서 리즈와 시선을 마주치기를 피했으
므로 모두의 시선은 셋이 모습을 감출 때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가 없
었다.
...... . . . . . . . . . . ......
" .... "
" .... "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리즈의 시선을 피하는 리리아.
그런 리리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리즈.
둘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결국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루리아가 둘을 향해 다가갔고, 리리아는 루
리아가 자신에게 오는 줄로만 알고 고개를 돌리며 어린 아이다운 미소를 띄
웠지만 그 예상은 무참히 깨어지게 되었다.
리즈의 뒤로 가 리즈의 목에 팔을 감으며 눈가를 찡그리는 루리아.
리리아는 그런 언니의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하게 되었다.
뭔가 이상했다.
예전의 언니가 아니었다.
" 리리아. 리즈 씨를 피하는 이유가 뭐니?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밖에서
는 억지로 얼굴을 굳히고 있지만 이방 안에서만큼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
" 어, 언니.. "
" 언니를 빼앗겼다는 기분 때문인가? 웅... 난 가족이라고는 없어서 그런
것은 모른단다. 내게 가족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루리아 뿐이지. 내
가 무서워 보였던 모양이지? 그럼 사과할게요. 꼬마 공주님. "
리즈는 지금 리리아의 심정을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빨라야 1년.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언니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리리아가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고 결정 내린 리즈 였다.
그래서 리즈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곧 루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루리아는 리즈의 목을 껴안은 채 조용히 미
소지어 주었다.
어린 여자아이와 같이 있는 것은 리즈로서는 처음 있는 일.
루리아는 리즈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즐거
웠다.
이럴 때면 리즈는 마치 어린애 같았다.
어찌할지 몰라 엄마를 쳐다보는 아이..
" 꼬마 공주님은 루리아와 같이 자고 싶은 모양인데...좋아. 오늘부터 우
리 꼬마 공주님은 나와 루리아 사이에서 자도록 하지. 좋지? "
" 무, 무, 무슨 소리에요?! "
" 좋아요. 리즈... "
리즈는 루리아의 미소와 리리아의 심정을 염두 해서 같이 잘 것을 제의했
고 리리아는 리즈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리즈의 얼굴을 똑바로 쳐
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리즈와 루리아의 미소뿐.
" 리리아..리즈 씨는 좋은 사람이란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
이고... "
=======================================================================
피곤하다.
리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피곤할리는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루리아와 방을 나와 모두에게 소개 되기를 반나절.
모두 귀엽다란 말들을 하며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누가 누구인지 전
혀 기억하지 못했다.
고작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데카르트와 회색머
리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트와 에리카. 몇 번 만나 본적이 있는 테헤르와 세
기루스가 기억에 남은 사람들의 전부였다.
그 외 바리에, 에렌, 아크, 라이라, 테시 등... 잘생기고, 아름답고, 깜찍
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었어도 머리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 잘자...리리아. "
" 응. "
얼마만 인가.
루리아 언니와 같이 자는 것이.
곧 루리아는 리즈와 입을 맞추고는 리즈의 팔베개를 한 채로 잠이 들었고,
리리아는 루리아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고운 숨소리에 언니가 잠들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예전과 몸도 달라진 루리아.
분위기와 성격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느껴지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이질감이 있었다.
" 잠이 안오니? "
리리아는 차분하면서도 정감 어린 목소리에 자신이 배고 있는 팔의 주인쪽
을 바라보았다.
살인마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착해보이는 리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가식.
그런 것으로 생각해 보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리즈를 보는 눈빛으로 보나 방에 돌아왔을 때의 모
습을 보나 리즈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착한 사람과 살인마.
자신이 마족인 것과 자신의 힘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리리아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온 것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 사이에 혼란만
느끼다니...
" 루리아...넌 좋은 언니를 둔 거야.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여신과 같
은 여자. 그게 네 언니란다. "
" ... "
" 내가 이 일을 일으킨 것도 루리아를 위해... 나에대해 잘 알고 있는 사
람들은 알고 있지. 아마 네 아버지와 싸우게 될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그것을 각오하고 있어. 루리아를 위해.... "
리리아는 리즈의 말에 내심 뜨끔해져 왔다.
아버지와 싸운다.
분명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하려는 리즈는...
" 사람. 많이 죽겠지...내 욕심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나쁜 사
람이지? "
리즈는 그 말과 함께 눈을 감으며 리리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리리아로서는 혼란만 더해질 뿐이었다.
만약 언니가 리즈의 곁에 없다면...
이 남자가 없다면 언니는...
도저히 금방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아버지, 페린이 올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서 나가기는 손바닥 뒤집기 였다.
결국 리리아는 리즈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잠을 청해 봤다.
루리아와 리즈 사이에서 따스함을 느끼며.
하지만 리즈를 완전히 신용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잠시 두고 보는 것뿐.
페허.
우리가 지나쳤던 헤지리 마을은 폐허였다.
이미 시체들은 전부 이트의 명령에 의해 치워져 건물만 남은 마을.
하지만 건물들도 멀쩡한 것이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을 마을.
이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걱정은 없다.
이별의 다리.
우리는 강물의 범람 범위를 피해 다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바로 길을 통해 다리와 연결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우리를
환호해 주었기에 부담 없이 머무를 수 있었다.
이것이 이트의 능력인가?
아무튼 우리는 아무일 없이 벌써 일주일이 가깝게 지내고 있다.
" ...오늘도 검을 닦는 거야? "
" 한동안 손질을 못했으니까. "
에이드는 지루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리엘을 향해 여느 때와
달리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고면서 계속 헝겊으로 검을 닦았다.
영구적으로 마력이 씌워진 브로드 소드, 롱 소드, 레이피어, 숏 소드.
모두 4자루의 검 중에서 마력에 의해 손질 할 필요가 없는 브로드 소드를
제외한 모든 검을 닦아야 했기에 검 닦는 시간은 계속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리엘은 자신도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뽑아 헝겊으로 정성스래
닦아 보았고, 거울과 같이 빛을 반사시켜 반짝이는 검면에 얼굴을 비춰 보았
다.
사냥꾼 일을 하면서도 잔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아리엘은 예전 기억의 단편이 떠올라 방긋 미소를 짓고는 조용히 검을 닦
고 있는 에이드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근육으로 뒤덮인 몸으로,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검을 닦고 있는 에
이드의 모습에 아리엘은 살짝 뒤에서 기습을 할까 생각했지만 곧 검을 검집
에 집어넣고, 검을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막사 안에
있는 자신의 잠자리에 들었다.
장난을 치고 싶어도 검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런데 갑자기 에이드는 닦던 검을 검집에 넣고는 검들을 탁자 위에 있는
아리엘의 검 옆에 놓았고, 항상 애용하는 브로드 소드만을 가볍게 쥐고서 막
사 안을 밝히던 불을 끄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 에이드? "
" ...조용히 해. "
" 무슨 일이야? "
" ..셋. 지휘관만 없애겠다는 속셈이군. "
에이드는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을 안으며 이불을 뒤집어 써 몸이 이불에 가
리게 했고, 미약하게만 느껴지는 기척들을 쫓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봐서 이번 상대는 상당한 실력자들 같았다.
" 아리엘. 절대 내 곁에 있어야 해. "
" ...응. "
아리엘은 에이드의 말에 자신의 검을 탁자 위에 놓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
다.
무기도 없는 상황에 에이드의 말대로 에이드 곁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에이드에게 죽을 것이다.
" 온다. "
[ 팟-!! ]
에이드는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기척 중에 하나가 사라지자 즉시 아리엘의
어깨를 꽉 쥐면서 검을 뽑아 이불을 차올림과 동시에 이불 뒤에 형태만 보이
는 인영을 베고는 몸을 날려 아리엘과 함께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물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익숙한 피내음, 그리고 방금 전까지 누
워있던 침대 베개에 박힌 20여 개의 금속 물체가 시선에 들어오자 에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력에 의해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검을 들어올리며 싸늘한
어조로 누군가에게 말했다.
" 나와라. 나머지 셋. "
[ 우리의 기척을 느끼고, 기습을 피하면서 한 명을 처치하다니.. 역시 굉
장하군 에이드. ]
막사 안의 어둠을 가르며 나타난 세 명의 인영.
검은 색 천으로 온 몸을 감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들이 모습을 드
러내자 에이드는 대강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처럼 등장은 했지만 어차피 인간이었기에 분명히 막사 어딘가에 구멍
을 뚫고 들어왔을 것이었으므로 에이드와 아리엘은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그
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 암살 전문대. 아즈닌의 일원인가? "
[ 알면서 묻다니.. 쓸데없는 데에 말이 늘었군. ]
에이드는 그 말에 흠칫하며 재빨리 몸을 돌려 막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무런 공격도 없었고, 단지 무미건조한 말이 들려올 뿐이
었다.
[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건투를 비네. ]
" 무슨 말이지? "
[ 우린 이만... ]
그들은 곧 검은 그림자만을 뿌리며 모습을 감추며 미약한 기척을 남겼고,
에이드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땅을 통해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
그리고 막사 안에서도 보이게 된 마을에서 솟아오르는 불길.
" 제길!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돼! "
...... . . . . . . . . . . ......
[ 캬 캬 캬... ]
[ 쿠헤! ]
" 뭐지... 저 괴물은? "
아리엘은 용병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도망칠 수 있게 도와
주다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생물의 생김새를 보고는 눈을 찌푸리며 에이드
를 향해 물었다.
키는 에이드 정도면서 긴 뒷다리를 이용해 껑충껑충 뛰는, 양팔은 갈고리
처럼 생겨 인간의 목을 찍어 머리를 파먹는 괴물.
머리는 역 삼각형 꼴로 생겼고, 눈은 온통 흰색으로 빛나며 온 몸이 갈색
비늘로 뒤덮인 그 생물은 사람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따라 보통 인간이 달리
는 속도의 2배 이상 되는 빠르기로 인간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 서, 설마... 오라그나크. 고대 마물? "
한편, 에이드는 아리엘의 말에 그 생물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용병 일을
하다가 우연히 읽게 된 고대 서적에 적혀 있던, 인상 깊어 아직도 기억하는
그 생물의 이름을 떠올리며 망연자실하게 다시 한 번 그 생물을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마찬가지.
" 역시 페린이 마계에서 데려온 모양이군. "
에이드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오라그나크를 이 세계에 끌어들인 페린
을 저주하며 검을 들어 검기를 끌어들였다.
그들의 이동 속도를 보아 멀리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가까이 라면 코앞에서 점프라도 해서 반대편에서 뒤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에이드는 곧 검기로 충만한 검을 세로로 휘둘러 공기를 베었고, 마력에 의
해 공기를 가른 검의 풍압은 그대로 일직선을 그리며 인간의 목을 낚아채 머
리를 씹어 먹던 한 마리의 오라그나크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오라그나크가 멀리서 세로로 갈라지며 보라색의 체액을 뿜는 순간
에이드는 검을 하늘로 향하며 크게 외쳤다.
" 모두 다리를 사수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만약 한 마리
라도 살아남는다면 모두 죽는다!! 돈이 아닌, 목숨을 위해 싸워라! "
죽어 버린 오라그나크의 뒤로 자신들을 공격한 상대를 쫓아 온 오라그나크
들.
에이드의 말에 근 80에 가깝던 용병들은 마을 사람들을 다리 쪽으로 보내
며 모두 천천히 진형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아리엘은 에이드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끔찍한 외모로 인간의 머리만을 먹는 괴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꿈 같았다.
" 에이드. 우리 여기서 죽지 않겠지? "
" 죽지 않아. 설마 내가 여기서 아리엘을 죽게 만들라고? "
에이드는 그 말과 함께 걸치고 있던 회색 망토를 벗어 아리엘에게 건네며
몸을 돌려 몸을 풀었다.
오라그나크.
인간형 생물의 머리를 주 먹이로 하는 그 마물은 고대 에스타 전(全)반에
서식하다가 고대인들에 의해 멸종된 고대 마물이었다.
현재는 생김새를 그린 그림과 빠른 움직임으로 사냥을 한다고만 알려지고
있었고, 실존하지 않는 이유로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오라그나크 200마리면 최강의 생물 드래곤의 새끼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방금 모습을 드러낸 10마리의 오라그나크를 상대한다는 것은 새
끼 드래곤의 1/20 정도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검기를 쓸 수 있는 인간으로서 에이드는 자신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
어내야만 했다.
" 망토 잘 보관해. 내가 아리엘에게 선물 받은 이후로 계속 써 오는 것이
니까. "
에이드는 아리엘에게 짤막하게 말을 하고는 오라그나크들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보통 인간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뒤로 넘어가 목에 팔을 박아 넣는 생물.
보통 검으로는 간신히 뚫을 수 있는 비늘.
자신의 손으로 막아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 그럼 싸워 볼까? 고대 마물이여. 인간을 먹이로 보지 말라. 나 같은 인
간도 있느니. "
[ 크크크..케!! ]
" 닥쳐!! "
에이드는 가장 앞에 있던 놈이 앞다리를 들고 기분 나쁘게 웃자 재빠르게
달려가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빼며 양팔을 잘라 냈고, 검면으로 머리를 박
살내고는 오라그나크의 보라빛 체액을 뒤집어 썼다.
매캐한 냄새를 내는 채엑에 에이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닦을 수도 없었다.
달려들기 시작하는 오라그나크들.
체액이 눈에 들어가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오라그나크의 수는 이제 9.
' 과연 이길 수 있을 까? '
에이드는 달려들던 놈의 갈고리 팔을 자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끈질긴 생명력.
팔을 자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공격 방법인 이 마물들을 이기기란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에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바꾸었다.
현상금 사냥처럼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 한 놈도 뒤로 보내지 않는다. 아리엘을 위해... "
그리고 에이드는 자신의 배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갈고리 모양의 오라그나
크의 팔을 근육에 최대한 힘을 가한 자신의 왼팔로 막으며 놈의 목을 베었다.
아무리 비늘에 싸여 있고, 비늘이 단단해도 관절 부위와 목은 약한 법.
단 두 군데만 노리면 됐다.
" 절대...보내 줄 수 없다. "
에이드는 아리엘이 있을 방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다가 멀리서 지원조
로 달려들던 오라그나크를 검기를 쏘아 등분하며 수를 세어 보았다.
7 마리.
이제 7 마리.
" 모두 없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