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계속)
④ 무덕관 창설 논쟁
무덕관은 청도관과 더불어 1940년대 후반 활발하게 관세를 넓혔다. 그 위용도 대단했다. 황기는 무덕관 창설에 대한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말고 푸른 하늘밑에 신비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상 위애 고결한 민족의 해심인 청년들의 수양도장 l 해방의 종소리와 함께 엄연히 나타났다. 즉 단기 4278년(1945)11월에 교통부를 중심하여 당수도장 무덕관이 창설되었다. (당수도교본 원문 1958)
황기의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 김인석 원로(1926)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철도국 직원으로 일하다 1945년 11월 9일에 당시 7명의 인원으로 수련을 시작한 것이 무덕관의 첫 시작이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그가 저술한 당수도교본 외에 입증할만한 다른 사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당수도 교본 표에서도 해방이후라고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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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의 개설 시기에 대한 연구에 보면, 1947년 초에 개설되어 그해 5월 11일 당수도 무덕관은 황기의 청도관 도장을 방문하여 첫 심사를 거행했다.
바로 이 시점이 무덕관의 공식적인 개시일이자 창립 시기로 간주될 수 있다.(김영선 2020) 심사 사진과 증서 등 2건의 1차 사료와 여러 기록 자료들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뒷 바침하는 사료는 당시 청도관 제3회심사(1947.05.11)에 무덕관 1회심사를 본 흔적이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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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관 심사자는 관번 1번인 김은창을 비롯해 김용덕, 최희석 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청도관 제3회 심사인데 이때 황기와 이원국이 있다. 이 심사에 참여한 엄운규(청도관), 최희석(무덕관)은 청도관은 3회, 무덕관은 첫 심사라고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김영선 2018)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첫 심사 후를 무덕관 창설이라고 보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첫 심사가 5월 11일이라면 최소 6개월 전이며 당시 수련의 강도와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무덕관창설은 그 이전 그러니까 1946년 초,중반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증적 진실을 정황 증거와 사진으로 확실한 창설 날짜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고, 증언마다 다른 내용을 진술하고 있어 무덕관 창설일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어찌되건 당수도 무덕관은 광복이후 서울 용산에 위치한 철도국에서 시작해 그 세를 넓힌 것은 사실이고 당수도 무덕관을 철도국 도장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⑤무덕관의 명칭은 류(流)파가 아니라 장소다?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에서 무덕관(武德館)이란 명칭은 사실 한 유파의 관(館)을 의미하는 것이 닐 것이다. 무덕관은 다양한 무술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장소로써 심신단련이나 스포츠를 하는 곳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910년 8월29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치욕적이고 분노가 끌어오르는 날이다. 이날을 치욕의 “경술국치” 라고도 부른다.
이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경성이라 불렸던 서울에서 무덕관(武德館)을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 무덕회 지부와 무덕전이 건립되었다.(문화체육관광부 2012)
이 무덕관에서 일본의 무도정신을 보급하고자 검도, 유도, 궁도, 검술 등을 가르쳤다.
당시 경무국 주도로 10만인 증보계획을 세웠고 정회원은 입회금 2원(학생은 1원)특별회원은 5월 유공회원은 25원을 회비를 내게 되었다 한다.
이는 일본 무도를 통한 한국식민 지배를 본격화 하고 우리나라의 호국정신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였다.
무덕관(장소)는 당시 검도와 유도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 사실을 일본이 패망이후 우리의 잔재가 되어 1960년대 중반까지도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아래의 기사는 1964년 03월 20일 마산일보의 기사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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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제 강점기때 이 무덕관을 황기가 창설한 무덕관(武德)館)으로 차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보면 강제로 조선의 무술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은 우리의 모든 상식을 초월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무덕관 단번(段番) 1번인 김운창을 시작으로 김용덕, 유화영, 남삼현, 비롯해 김인석, 이복성, 황진태, 정창영, 이강익, 홍종수 등 걸출한 태권도의 인물들을 길러냈다.(서성원 2007, 김영선 2019, 황기,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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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는 무에도보통지에 심취해 2년에 걸쳐 번역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수박도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재정했다.
⑥ 화수도와 당수도의 명칭에 관해서...
무덕관 명칭에 대해서 황기는 이렇게 서술 하고 있다.
저자로서는 현재 “당수도”라는 명칭을 대회적으로 쓰고 있으나, 이것은 본의 아닌 칭호인것이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화수도(花手道)라고 새로운 명칭을 제정하였던 것이다.....중략.....
그러나 화(花)자는 과거 화랑도의 첫자를 채택했고 수(手)자는 당수도의 수(手)를 인용함도 되지마는 수(手)라함은 손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람을 표현함이요....중략.....도(道)인데 이 자(字)는 고대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말이며, 이에 대해서는 현명한 세상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므로 군말을 피하는 바이다.
(당수도교본 본문중에서 1958)
1958년 집필한 당수도교본에서 당수도와 화수도에 대한 명칭을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9년 2월26일자에 내일이 방월 국군 다수선수 20명이란 제하에 최홍희 육군소장을 단장으로 월남 국방성초청으로 우리나라 당수선수들이 월남을 방문한 사실이 나와 있어 태권도와 당수(唐手)를 혼용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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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무술계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가가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저마다 많은 관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특히나 무덕관을 대표하는 명칭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황기는 명칭과 이름에 대한 애착이 남다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기는 태권도 통합에 반대해왔다. 통합과정에서 당수(唐手)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왜 수박도를 주장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단법인을 문교부로부터 받고 당수도(唐手道)와 수박도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화랑정신과 무예도보통지 등 태권도 역사기술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면서 체계적인 적립을 세우고 있는 시기였다.
대한태권도협회 창립과정에서 제자들이 통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1962년 8월 탈퇴한다.
1963년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들어갈 당시 대한수박도회에 속한 도장들은 대한체육회 산하 대한태수도협회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승인대회나, 전국체전등 대회에 출전을 할 수 없었고 대한수박도회에서 발급한 단증은 공인단증도 아니라 무덕관계열의 도장들은 도장운영에 어러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많은 제자들이 통합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1965년 3월 16일 당시 고참 사범들과 각 시, 도지부 본 관장들이 마포도장(일명 마포회의)에 모여 통합을 최종 결정한다.(허인욱 2008)
통합찬성파의 중심에 있던 홍종수는 “무덕관” 최대의 비극적인 현장이라고 말해 당시의 마음아픈 심경을 그대로 전했다 한다.
1965년 3월 18일 최홍희가 주축이 된 관(館)대표자들의 통합선언식에 사인했다가 다음날 "무효"라며 번복하여 깜짝 놀란 제자 홍종수의 하루 반나절을 충심직언 해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고단자들도 그를 찾아갔지만 소용없었으며 제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진 것이다.(서성원 2007)
관(館) 통합을 지지했던 제자들은 그를 재적이라고 말하지만, 스승을 무덕관에서 끌어내리는 하극상이 벌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황기는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해 수박도를 전파하기 시작해서 11년 뒤 인 1974년 미국연맹을 창설하고 웨스트포인트 미군사관학교의 무술 정규과목으로 수박도가 채택되는 영광을 맞이했다. 수박도의 보급현황을 보면 미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 27개국이다.(정근표 2020)
황기가 이끄는 무덕관 세계대회 때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보수교육을 하는데 이 교육을 꼭 이수해야 하며 황기 자신도 그들과 함께 1박2일간 열심히 직접 가르치고 함께 수련하는 모습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무도인 다운 면모를 죽을 때 까지 보여줘 해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으로 남아 있다.
(다음 편에 계속)
다음 편,
국제 태권도1호 사범은 무덕관에서 배출한 사람은 누구?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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