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팔가자 가는 길 (중편)
강 문 석
간담회에서 북경교구와 교황청과의 긴장관계는 감지할 수 없었다. 교황께 대한 충성심은 지상교회가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구장은 로마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부와 교황청이 국교를 수립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7년 전 부주임이 교황청을 방문했고 그 다음해엔 교황청 추기경이 중국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부주임은 교황을 위한 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다며 아직은 교류가 자유롭지 못하지만 교황과 일치를 이루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교황청은 대만정부를 인정하고 있지만 중국과의 외교문제도 신중하게 논의하고 있어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중국교회도 선교에 훨씬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간담회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서자 야고보 교회사연구소장 신부가 중국교회에 대해 추가로 전할 말이 있으니 잠시 조용한 휴게실로 가자고 통역사제에게 부탁했다. 야고보 신부는 순례에 나서기 전 중국 천진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리동 신부 서품식에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다녀온지라 전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리동 신부 서품식 참석은 한국교회 초기 주문모 신부 등을 한국에 파견하고 김대건 최양업 신부 양성에 적극 도움을 준 중국교회에 작은 은혜나마 되갚는 나눔의 자리로서 의미가 컸어요. 중국교회는 공산화로 그동안 침체의 길을 걸어왔지만 최근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보은의 기회이자 동북아 선교를 다지는 뜻 깊은 일이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우리의 선교역량을 중국과 몽골 등 동북아시아 복음화에 집중해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심양과 단동 연길교구 등의 신학생과 성소자를 지원하고 북한교회 복음화에 한 몫 하려면 신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더욱 요청되기도 하구요.” 잠시 얘길 끊은 야고보 신부는 통역사제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나머지 순례자 일행은 고궁을 찾아갔으니 간담회 팀에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도착한 커피를 마시며 야고보 신부는 느긋하게 하던 얘길 이어갔다. “중국에도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실정이지요. 근대 이전이나 지금이나 중국은 종교를 국가통치 아래 두고 있어요.
그래서 정치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중국에서 발휘되기는 어렵죠. 그런 측면에서 천주교 애국회의 ‘애국’이란 말이 지닌 뜻이 분명해진다고 볼 수 있지요. 한마디로 애국회는 중국 정부의 관변 단체예요. 애국회를 통해서 중국 천주교를 토착화하려는 목적이 있거든요. 이에 반해 지하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중국교회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교황청과 중국의 외교관계 논의를 둘러싸고 애국회와 지하교회의 관계는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어 향후 더욱 갈등이 증폭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구요. 최근 들어 교황청과 중국 정부 간 관계개선 징후가 보이고는 있지만 사실 오랫동안 양측의 외교관계 수립에 최대 걸림돌은 주교선임 문제였어요. 주교 임명권과 관련해서 교회법에서는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천주교 주교를 스스로 선출하여 서품하는 행위는 교회법과 정면으로 배치되잖아요.
그래서 양측이 합의를 본 것이 중국 정부와 교황청이 제출하는 주교 후보자 명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교황청의 결정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 교황이 주교를 임명하는 시스템에 합의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교황청과 중국 외교관계 수립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지요. 특히 홍콩이나 타이완 쪽에서 목소리가 높아요. 현재로서는 중국과 교황청 모두 서로 간의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구요.
중국 입장에서는 교황청과 수교를 통해서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만의 독립 노선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죠. 교황청 입장에서는 교황의 중국 주교 서품 권한을 회복하고 세계 가톨릭의 통일성을 이루고 방대한 중국 천주교 신자를 획득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것 같아요. 여기까진데요, 말이 길어진 것 같아 미안합니다.” 순교자현양위원회 업무를 수행하면서 체득했을 중국교회 관련 현안을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한 야고보 신부는 이때 예순 중반을 막 넘고 있었다.
평안도 태생으로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절두산순교자성지 기념박물관을 맡았었고 서울대교구청 사목국장과 명동성당 주임신부 그리고 잠원동성당 등 서울 시내 몇몇 성당 사목도 맡았었다. 바쁜 사목활동 중에도 틈틈이 묵상집『종살이 30년에』와 『세상을 책임질 사람』그리고『생활 속 복음』등을 펴냈으니 따르는 신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야고보 신부 얘길 듣고 떠올랐던지 루카 박사는 달리는 차안에서 중국교회 격동의 시기에 대한 얘길 시작했다.
그는 김포공항 대합실 첫 상견례에서 자신을 호명하자 이미 장년에 든 그였지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꾸벅꾸벅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여 순박한 인간미를 드러냈었다. “우리 조선은 18세기 후반 중국교회를 통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후 왕래와 친교가 거의 끊긴 채 지내왔기에 보편교회와 중국교회가 자유롭게 만나 형제적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날이 빨리 찾아오길 지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19세기말, 중국인들은 왜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반감을 가지고 반대운동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겠지요. 아편전쟁 이후 서양과 중국 사이에 힘의 균형이 역전되자 그리스도교와 선교사는 조약으로 서양 열강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때 프랑스 대표가 조약을 체결할 때 황제가 중국인의 천주교 신앙금지를 해제토록 요구했고 결국 100년 이상 지속된 천주교 금지조치가 해제되기에 이르렀죠. 하지만 이 명령은 실제로 중국 사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어요.
결국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인 1860년 베이징조약에서 강제로 천주교 보호조항이 들어가게 돼 프랑스는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 보호권을 획득하게 되었지요. 이로써 천주교 선교사가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성당도 건립하고 선교의 자유도 얻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와 비신자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어요. 이걸 가리켜 반기독교 운동 즉 교안敎案이라 했고 이러한 외교적 마찰을 풀고자 중국과 교황청이 외교관계 수립을 시도했었지요.
중국은 교안 문제를 교황청과 협상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프랑스가 간섭하는 바람에 20세기 전반까지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못했던 거예요. 1922년 들어 교황이 중국에 주교를 파견해 공의회도 개최하고 중국인 주교 축성도 주도했어요. 그 결과 1926년 6명의 중국인 사제가 교황청에서 첫 주교서품을 받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중국 천주교 토착화 작업에 매진하게 되는데 교황청 주도 하에 이뤄진 것이에요. 그러다가 1942년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그 4년 후엔 교계제도까지 성립됐어요.
마침내 청도 대목구장 주교가 최초의 아시아인 추기경에 임명되어 외교관계가 시작되었구요. 당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벌이고 있던 때였고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을 추방하게 되고 외교관계도 단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중국 천주교 토착화와 관련해 예수회 소속의 중국인 마상백 신부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국 천주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에요.
1870년 사제로 서품되어 중국 교회사에서 보자면 예수회의 엄격한 훈련과 체계적인 학위과정을 마치고 성직자로 양성된 인물은 마상백이 최초이기 때문이지요.” 루카 박사가 차분하면서도 알차게 설명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순례자 중 나이가 지긋한 영남교회사연구소 글레멘스 부소장도 이동하는 2호차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서양에서 중국에 천주교가 전래된 역사를 들추기 시작했다. 1614년 북경에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가 출간한「천주교 수양서」얘기부터였다.
제목은「수양서」라 하면서도 가톨릭을 전파하고 있는 이 책은 이미 400여 년 전 선보인 고도의 선교전략이었다는 것. 판토하가 활동한 시기는 명나라 말기로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에 비해 판토하는 일반 대중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고 했다. 마테오 리치 타계 후 그의 작업을 판토하가 이어받았기에 대표작『천주실의』와 함께 판토하의『칠극』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학西學 종교서로 꼽힌다는 것.
중국학자 서광계도 마테오 리치를 만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동양 전통의 유교와 불교와 도교에서 강조하는 덕목보다 가톨릭이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교회사 학자들은 우리나라 천주교 교회사를 알려면 중국 근현대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란 것.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화의 꽃을 피운 자생 교회로 앞에서 말한 명나라 말기 중국에서 활동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기 때문이라며 해설을 끝냈다.
요녕성 교구장은 성씨가 김씨인 김패헌 주교였다. 그래선지 얼굴 모습과 풍기는 분위기도 흡사 한국인처럼 느껴졌다. 서울 명동성당처럼 고풍스러운 고딕건축물 성전에서 레오 사장 신부와 야고보 소장 신부 공동 집전으로 순례기념미사를 봉헌했고 참례자들은 주님을 향해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았다. 맞춤한 것처럼 미사복사는 제주에서 참여한 대학생 형제가 맡았다. 그들은 형제지만 일란성쌍둥이였고 복사에 임하는 진중한 태도가 신학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사가 끝나자 주교는 순례자들 손을 일일이 잡고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성전 보수공사가 한창인 개주성당에선 순례자 일행을 기다리는 중국인 사제와 수녀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당에 들어섰고 성당 소개를 마친 사제는 선 자리에서 주모경을 바쳤다. 개주성당을 나와 찾아간 양관성지는 폐허로 변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장식이라곤 없이 학교 교사처럼 일자로 길게 늘어선 단층건물 앞에 향나무 몇 그루가 남긴 했지만 황성옛터처럼 쓸쓸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