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
박수경
벨이 또 울린다. 초인종을 연이어 누르는 누군가의 조급함을 느꼈을까. 신원 확인 없이 열지 않던 현관문을 급하게 밀었다.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두 명의 여인이 서 있다. 이건 우리 집도 마주하는 상대의 집도 아닌 어정쩡한 거리다.
‘누구 집을 찾아오신 건가요?’를 묻기도 전, 화장실을 사용해도 되냐는 낮은 음성이 들렸다. 낯선 이의 익숙하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기도 전, 그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차례대로 열린다. 그들의 뒤통수를 필두로 전실에 놓인 강아지 목줄, 중문 앞에 질서 없이 놓인 생수통, 거실을 혼잡하게 만드는 잡동사니들이 줄을 이룬다. 앗, 화장실에 잔뜩 낀 물때는 어쩌지. 내 몰골은 또 어떻고. 일 분도 안 되는 사이, 세 개의 공간을 침범당했다. 생소한 발자국이 생겼다.
철문을 경계로 나누었던 기준선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안은 나의 것이다. 곳곳을 어지럽힌 물건 사이사이를 누비며 살냄새를 채웠다. 자기를 드러내며 손때 발때 묻혔다. 밖과는 사뭇 다른 자아가 사는 안식처다. 타인과 외부의 나로부터 단절되고 싶을 때 피할 수 있는 피신처다. 어린아이의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대기도 하다.
날것을 들켰다. 정돈되지 못한 상태다. 초대하지 않은 그들에게 초췌함을 내보인다. 약속된 사람에게 허용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밖의 시간을 연장하여 안을 열어줄 때는 연출과 편집하며 공을 들인다. 상대에 따라 강도를 달리하기도 한다. 부모님이냐, 시부모님이냐, 친구냐, 동료냐에 따라 사물의 위치와 냄새가 바뀐다. 그뿐인가. 외모와 태도를 변화시켜 그들이 기억하는 나로 변신까지 한다. 지금은 어정쩡하게 둘의 꽁무니만 쫓기 바쁘다. 채비할 잠시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은 침입자가 더는 다른 문을 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행히 제정신으로 생활하는 곳만 들켰으니 괜찮다고 다독이며 다음 문으로 가는 길목으로 발을 급히 옮긴다.
안방만큼은 사수해야 한다. 비밀을 많이 품고 있다. 근래 몇 년간 식구 외에는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박수경’을 각인시켰다.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연결 다리인 전의식이 혼재해있다. 옷걸이에 얌전히 걸린 셔츠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잠옷, 침대 아래 어딘가에 양말이 있을 수도 있겠다. 손만 뻗으면 꺼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거실화 한 짝은 여전히 놓여있겠지. 저들이 이곳만은 욕심내면 안 된다.
내보이고 싶지 않지 않은 모습이 있다. 치부를 들키기 싫어서. 그 치부가 뭔지를 몰라 무작정 숨기고 싶을 수도 있겠다. 외부로 보이는 인격과 내면에 자리한 인격의 괴리를 좁히지 못해 그러진 않을까. 자제하지 못하고 속을 보일 때가 있다.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오십을 목전에 둔 지금도 상대방과 어긋난 감정을 나타내어 서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태 쌓은 사회적 눈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겉치레로 만든 신기루가 무너진다. 굴절 정도에 따라 계산하며 보여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진다.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신기루가 사라져도 괜찮을까. 형체엔 어차피 아무런 변화도 없으니 말이다. 거듭되었던 이전의 아픔을 떠올리며 그와 연결된 실의 두께와 길이를 가늠해본다. 상처의 무게추를 상대 저울에 연이어 올린다.
경계의 깊숙하고 은밀한 안에는 무수한 것이 그곳을 채우고 있다. 명명되는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질서 없이 둥실둥실 헤매고 있달까. 몸을 최대한 웅크려 표정조차 알 수가 없다. 뭉그러져 동그라미인지 세모인지조차 모호하다. 유영하며 지내기만 하면 좋을 것인데, 한번씩 튀어나와 당황스럽다. 밖이 궁금해서일까. 아니면 내 처신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어서. 당황함에 어쩌지 못하고 허둥대는 걸 보고 호탕하게 웃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사실, 상대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고 나면 시원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무명씨가 고맙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넘나드는 경계의 정확한 선이 절실한 경우가 허다하다. 정리하지 못한 내부가 여전히 시끄럽고 불편한 탓이다.
침입자. 더 휘저어주면 좋겠다. 원초적인 욕구를 배설하게 해준 대가치곤 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깥에서 더 크게 당할 망신을 피하게 해줬으니 대문을 나가기 전, 어거지로 그었던 선도 같이 가져가 주길 바라본다. 이제라도 구분하지 않고 편하게 숨 쉬고 싶다. 자유로이 통하는 공기 흐름에 숨구멍을 맡기면 어지러이 찍힌 손자국 발자국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멋모르고 열었던 철문이 닫히지 않길.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들 한다. 잘 사는 것도 그러하단다. 호흡하며 별거 없이 잘 살고 싶다.
첫댓글 '어거지로 그었던 선도 가져가주길..
멋모르고 열었던 철문이 닫히지 않길'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