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저그, 테란, 프로토스 세 종족 간 전쟁을 다룬 블리자드사의 PC용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다. 1998년 발매된 확장 팩 부르드워(Brood-war)는 20세기에 창안된 게임 중 유래 없는 파괴력으로 세계를 강타했고 전에 없이 강한 중독성으로 퍼져나갔다. 국내에서는 1999년 한국e스포츠협회가 발족함으로써 철부지들의 야유회 수준이던 게임 산업이 급부상, 프로게이머라는 직업군이 생겨났고 거대 스폰서를 둔 구단이 창설됐으며 연 10만 관중을 동원하는 리그가 열렸다.
손기술 하나는 타고난 민족답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1등은 세계최강으로 추앙받았다. 막 태동한 역사에 사람들은 황제와 영웅, 폭풍을 만들어냈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성원을 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팬을 자처하며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을 따라 팬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청춘들이 부와 명예를 좆아 별들의 전쟁터로 향했다.
두 평 남짓한 부스 안에서 스무 살 안팎 게이머의 감각은 바짝 곤두서 오로지 상대를 이기는 데 집중된다. 과정은 이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지만 이기는 방법은 실로 간단하다. 일꾼을 동원해 미네랄과 가스를 채취하고, 채취한 자원을 바탕으로 유닛을 생산, 적절한 조합을 갖춰 공격해 상대방에게 GG를 받아내면 승리한다. 패배를 인정하는 메시지. 받아낼 때의 쾌감과 선언할 때의 좌절감이 공존하는 단어. 승자에게만 해당되는, 굿 게임.
GG
셔틀에 휘둘릴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뚜렷한 대처방법 대신 내 본진을 유린하고 일꾼들을 학살하는지 진수의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든 순간 판이 꼬이기 시작했고 시야가 좁아지더니 이길 수 있는 길이 사라졌다. 경기 외적으로 울컥해버리면 상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건 모든 스포츠에 기반 하는 상식이었으나 몸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상대가 진수였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일꾼 뽑느라 고생했다.”
화가 치밀기도 전에 진수의 이죽거림이 시작됐다. 허락하지 않은 어깨에 버젓이 청개구리 같은 손을 올리고, 하지 말라는 티를 아무리 내도 굴개굴개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놓았다. 형 셔틀 동선은 도저히 못 읽겠지? 라는 둥, 이제 형 템플러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릴 거야? 라는 둥, 형이 판을 참 잘 짠 것 같아. 그치? 라는 둥.
이죽거림이라는 점만 빼면 하나같이 사실이었다. 두 살 많은 그가 형인 것도, 그의 셔틀 움직임이 현란한 것도, 일꾼 주변에 그의 템플러가 떨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것도, 게임 운영 능력이 탁월한 것도. 사실을 사실답게 만들지 못하는 건 진수의 밉살맞은 혓바닥이었다. 혀를 멈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뽑아버리거나, 입을 다물게 해주거나. 대회 준비를 위해서나 위생적인 면에서나 후자가 나은 선택이었다. 우선은 당장 분한 것부터 풀고.
“맵발이야. 순 프로토스 맵에서 이긴 주제에.”
진수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싱긋 웃었다.
“프로게이머 할아버지가 와도 시작은 일꾼 4기부터야. 네가 못해서 진 거지.”
“그럼 맵은 네가 고르고 나랑 한 판 하지. 오만 원 빵. 콜?”
판당 오만 원. PC방과 닭장을 구분해주는 가장 단적인 면이었다. 오십 평쯤 되는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컴퓨터와 그 앞에 앉은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도박에 가까운 내기를 하겠는가. 닭장생활 6년차인 권은 실력만큼이나 소문난 악동-이라기보다 양아치에 가깝다-이었다. 젖살도 안 빠진 주제에 고참이랍시고 나이 불문 반말은 예사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길목에 버티고 서서 명목 없이 통행료나 챙기려는 그에게선 연습게임만큼의 경험치도 얻을 수 없었지만 괜한 치기에 걸려들어 통행료를 뜯긴 초짜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권이 요즘 들어 노리고 있는 먹잇감이 나였고 능히 도발에 넘어갈 만한 나는 다행스럽게도 진수(도무지 형 같지는 않다)와 닭장 동기였다.
“너 나한테 열 판은 지지 않았나.”
굴욕적인 기색도 없이 권은 나직이 지껄이고 자리를 떴다.
“고까우면 대신 하시든가. 손목 병신 주제에.”
그에 응답하듯 진수의 손목이 가늘게 떨었다. 세상에 절름발이 축구선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프로게이머가 마우스를 쥐고 움직이는 데 불편을 느낀다면 말 그대로 끝인 것이다.
3년의 닭장생활은 진수에게 실낱같은 희망과 거대한 장애를 맡겼다. 무엇을 찾아가든 진수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청춘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니냐고, 따져 물을 곳도 없었다.
“저 새끼는 나보다도 어린 게 너한테 꼬박꼬박 반말하네.”
진수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는.”
준프로 선발전은 매달 열린다. 자신이 있다면 매달 참가할 수도 있지만 보통 석 달을 주기로 기회를 노린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려면 상·하반기에 있는 프로게이머 드래프트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준프로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게 우선이었다. 모든 자격은 토너먼트를 통과한 상위 시드에게만 주어지므로 수단이든 방법이든 간단했다. 닥치고 게임만 잘할 것.
막연하게 기다려왔던 날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천하의 권도 건들거리지 않을 만큼 닭장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이번엔 누가 될 것인가. 혹시 나는 아닐까. 기대하는 이보다 초조해하는 이가 더 많은 시기. 나는 기대도, 초조도 않으려 애쓰면서 부지런히 자원을 캐고 유닛을 뽑고 공격과 수비에 열을 올렸다. 오로지 GG를 받아내기 위해서.
“나강철, 잠깐 나 좀 볼까.”
막 식사를 끝낸 최선수가 날카롭게 손가락을 퉁겼다. 빈집에 떨어진 폭탄드랍을 목격한 때처럼 숨이 가빠졌다. 빈집을 포기할 권리도 없었으므로 나는 주뼛주뼛 대표실로 향했다.
“두 달째야. 알고 있니?”
소리 나지 않게 예, 했다. 모른다는 표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최선수는 말을 길게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음 달까지 해결 안 되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닭장에서 나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씨앗에게 양분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아무 땅에나 가서 혼자 꽃을 피우라는 우의적 표현이기도 했다. 의도는 다르지만 은근한 치통처럼 나를 괴롭히는 엄마의 말과 일맥상통했다. ‘철아, 더 해야겠니?’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내 기억 속 나강복 씨의 하루 일과는 강철슈퍼의 셔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해 내리는 것으로 끝났다. 셔터가 올라가 있는 동안은 근처 노래방에서 서비스를 몇 시간씩 요구하며 보내거나 뒷산에 올라 발성 연습. 트로트가 주종목이지만 시대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며 최신곡도 줄줄 꿰고 있었다. 가게에 들여오는 계란은 거진 반 이상 나강복 씨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삼자의 눈에는 가수를 향한 장년의 열정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당사자를 포함한 가족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기세가 밀려 대낮에 암흑이 돼도 남편이라는 작자의 도움은커녕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을 때의 분노와 학기 초마다 아버지 직업란에 마땅히 쓸 수 있는 게 없을 때의 곤란함이 어우러진 가장의 모습을 생각해보시라. 어깨가 들썩거리는 세레나데로 저녁마다 엄마를 웃게 하기도, 가전제품센터 개업 기념 노래자랑에서 받은 디지털 카메라를 받아온 적이 있긴 했다. 있긴 했지만, 한방에 강철슈퍼를 날려 먹은 건 소소한 행복 따위로 상쇄할 수 없는 중죄였다.
뻔한 스토리였다. 데뷔 시켜줄 테니 돈을 마련하라는 것. 실력이 있으니 데뷔만 하면 뜨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 젊은 사람들도 대기하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준비할 것. 눈 뜬 상대의 코를 능숙하게 베어가는 도둑의 손길처럼 가게며 살림살이는 차례차례 남의 손에 넘어갔다. 엄마가 악착같이 모아온 적금 통장 덕분에 빚은 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당장 몸 누일 곳도 없었다. 허름한 여관에서 이틀을 머물고 엄마와 나는 단출해진 짐을 쌌다. 터미널에서 나강복 씨를 만나 자장면을 먹고 우리 가족은 외가로 향했다. 평일 오전의 시외버스는 자가용 수준으로 한산했지만 엄마와 나강복 씨는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승객처럼 저만치 떨어져 앉았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플레이트 지붕이며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며 적응하고도 왠지 코끝에 남은 듯한 소똥냄새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사위를 딸 도둑 보듯 하는 외할아버지나 실제로 죄를 지은 최강복 씨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기류도 변함없었다. 변한 건 홍일점인 엄마의 한 자나 튀어나온 입이었다. 늘 해온 사람처럼 축사와 과수원 일을 뚝딱뚝딱 해치우는 모습이 꼭 성난 불개미 같았다. 그 곁에서 나강복 씨는 베짱이처럼 노래만 불렀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 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제2의 조용필이 부르는 <꿈>. 순전히 엄마의 얘기였다. 사회생활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외간남자의 뒷바라지를 결심한 건 나강복 씨의 가창력이 아니라 엄마의 눈에 씐 콩깍지 때문이었다. 어린 나조차 그래도 지금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외할아버지는 오죽했으랴. 외할아버지는 작정한 듯 미운 털을 단단히 박아놓고 강복 씨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 놔라 대추 놔라 그렇게 하면 일 다 망친다, 등등 집요하게 잽을 날렸고 나강복 씨는 끈질기게 조용필로 버텼다. 개미로 변해버린 엄마, 베짱이 근성의 나강복 씨, 베짱이 전용 농약 같은 외할아버지 틈에서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학교나 집 대신 PC방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건 그 무렵부터였다.
사과 수확을 앞둔 어느 가을, 나강복 씨와 엄마가 마주앉았다. 외할아버지가 밤마실 나가고 없는 조용한 밤이었다.
“강복 씨, 요즘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지?”
느닷없이 튀어 나온 자신의 이름에 나강복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한 자 한 자 같은 음정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 지난 일은 다 잊고 얘기해 봅시다. 당신, 아직도 미련 못 버린 거 맞지? 그래서 아버지가 못마땅해 하는 게 견딜 수 없는 거지? 실은 노래가 하고 싶어 죽겠는 거지?”
“장인어른이 계속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시니까 나도……”
“성공해서 나 호강시켜주면 바뀌기 마련이라고 누가 그랬지? 사나이 자존심은 난 몰라. 근데 지금 상황에 자존심 내세우는 건 너무 철없는 거 아니니?”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난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 당신 꿈은 가수라고 했지. 내 꿈은 뭔지 알아? 도시에서 사는 거였어. 엄마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버지 수발까지 하면서 새침한 서울 아가씨 되는 거만 바라고 살았다고. 근데 지금은 소똥 치우고 농약 뿌리면서 살아. 내 꿈도 접었는데 당신 꿈도 좀 접어주면 안 될까.”
나강복 씨는 굳건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난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이거니와, 엄마도 지지 않았다.
“나강복 씨, 그럼 꼭 해야 하는 건?”
밤이 깊도록 분위기만 험악해질 뿐 ‘하고 싶음’과 ‘해야 함’ 사이에 의견 조율 따위는 없었다.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았으므로 외할아버지는 계속 강복 씨를 괴롭혔고, 강복 씨는 조용필로 응수했으며, 엄마는 소똥을 치우고 농약을 뿌렸다. 일주일에 한 번 외할아버지가 밤마실 나간 때면 어김없이 두 사람은 하고 싶지도 않을, 해야 하지도 않은 부부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묵묵히 준비해온 폭탄을 터뜨렸다.
“저 스카우트 받았어요. 고등학교 대신 서울 가서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습니다.”
내 나름으로는 ‘하고 싶음’과 ‘해야 함’을 모두 만족 시키는 중차대한 결심이었지만 예상대로 세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외할아버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고 엄마는 결사반대. 강복 씨는 종잡을 수 없는 얼굴로 단호한 엄마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믿어주세요.”
“안 돼. 꿈도 꾸지 마.”
그날 이후 엄마는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최선수가 운영하는 닭장에 들어갔다.
강복 씨가 어떻게 구워삶았어도 엄마 귀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남을 설득할 만큼 뛰어난 말재주도 없었으니까. 프로게이머 출신에 지금껏 데뷔 시킨 게이머가 셀 수 없이 많으며 TV에 나오는 게이머 중 몇몇도 자기가 발굴했다는 걸 얼마나 조리 있게 설명했는지, 전화 한 통에 오케이를 받아낸 최선수야말로 정말이지 프로 같았다.
“보통 재능 있는 아이들은 1, 2년쯤 연습해서 프로로 데뷔합니다. 강철이 같은 경우는 기본기가 워낙 탄탄하고 본인 의지도 있으니 하기에 따라서 1군도 금방 올라가고, 어느 정도 성적만 내준다면야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슈퍼스타 되는 거죠.”
기어이 서울까지 따라온 엄마는 성실한 수험생처럼 최선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수표 다섯 장을 건넸다. 말끔한 정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과 시답잖은 PC방과는 비교할 수 없이 치열한 연습 중인 아이들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더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바리바리 싸들고 온 반찬들을 건네며 “주눅 들지 말고 열심히 해.”했다.
“되기만 하면 영화배우만큼 유명해지고 돈도 잘 번대. 일 년만 기다려요.”
얼마 만에 웃는 얼굴로 엄마는 새침한 서울 아가씨처럼 대꾸했다.
“누가 지애비 아니랄까봐.”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월 50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세월을 낭비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기한을 두었더라면 지금쯤 부스 안에서 왕좌를 다투고 있었을까. 진수에게 GG를 받아내며 나는 이번이 마지막임을 느꼈다. 어떤 식으로든 겨울이 지나면 무언가가 되어야 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함을 달았거나, 중3 같은 고3이 되거나. 다시 도전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무례한 손이 어깨를 툭 쳤다.
“우리 강철이 요즘 게임 좀 늘었는데. 십만 원 빵 한판 콜?”
두 배로 건방져진 권이었다. 어째 잠잠하다 했더니. 나는 단호하게 헤드셋을 썼다. 상황 파악 안 되는 양아치와는 상대할 시간도 없었고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방을 만들고 맵을 확인한 뒤 짧은 찰나 전략을 세우고 수천 판째 되풀이하고 있는 연습게임 다시 시작. 5, 4, 3…… 헤드셋이 발랑 뒤집혔다. 카운트를 세던 디지털 사운드 대신 권의 나지막한 협박이 귓전을 두드렸다.
“죽고 싶냐?”
그 순간만큼은 하느님과 부처님이 손을 잡고 왔어도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뒤에 있던 권을 맞힐 만큼 정확하지 못했고 나는 허공을 지르며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권이 침을 튀기며 눈을 부라렸다.
“이게 뭘 잘못 먹었나, 게임 한 판 하자는데.”
“적당히 좀 해라. 다 너 같지는 않잖아.”
당연하게도 진수였다. 안하무인으로 설치는 권을 잡아 세워야 할 최선수는 연습실이 쩌렁쩌렁 울려 무너지기 전에는 대표실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늘 반복되던 그림과는 달리 권은 시시덕거리지 않고 진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럼 백진수 에이스께서 해주시면 되겠네. 삼십 어때. 콜?”
진수는 응대하지 않고 멍하게 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쉬는 게 치료법인 그의 손목은 엉성하게 붙여놓은 파스가 못마땅한 듯 거칠게 몸부림쳤다.
“한 판만 하자고. 어차피 못 먹을 거 나라도 먹게. 넌 또 떨어지게 돼있……”
입 대신 코를 부여잡고 나뒹군 걸 보면 이번에도 제대로 맞히진 못한 듯했다. 사람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다. 넌 동업자로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거냐?, 라는 말조차 아깝다.
“양아치 새끼.”
나는 씩씩 대며, 여차하면 얼굴을 통째로 걷어 차버릴 각오로 권을 내려다보았다. 진수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수는 최종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피의자처럼 무력한 기색이 역력했다. 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다른 아이들이나 나를 쏘아보는 권의 얼굴에도 승소한 검사는 없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명백백했지만 평범을 박차고 나와 모인 지망생들에게 조악한 주먹질 외에 그를 피력할 수단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최선수라도 정리를 좀 해줬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나강철, 집에 전화 넣어드려. 양권은 나 좀 보자.”
전화는 대표실에 있었다. ‘전화 넣어드리라는’ 건 집에서 돈을 보내왔다는 반증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권과 함께 대표실로 들어섰다.
“저번에 말했지. 짐 싸라.”
놀란 권은 헤엥, 하고 이상한 신음을 냈다.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나와 달리 권은 최후통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권은 전에 없이 어눌한 목소리로 최선수에게 며칠의 말미를 부탁했다. 고소한 기분도 잠시 영문 모를 미안함이 권의 울먹거리는 소리를 따라 점점 커졌다. 집에서 원조가 끊겼으니 그렇게 십만, 삼십만 가당치도 않은 소릴 했던 거구나.
“안 받네요. 다들 일하러 갔나. 나중에 할게요.”
나는 신호도 가기 전에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황급히 대표실을 나왔다. 이미 늦었지만 가장 비참한 순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으니까.
권이 그런 식으로 쫓겨나고 곧 선발전 날이 되었다. 경기장으로 가기 전부터 진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한 자의 여유라기엔 너무 큰 부담감이 웃음 밖으로 고개를 짓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어줄밖에.
“웃지 마. 정들어.”
대회장은 여느 때처럼 온갖 닭장에서 몰려온 지망생들이 뿜어내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최선수가 대진표를 확인하러 간 사이 우리는 연습용 컴퓨터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세팅했다.
“형은 좀 쉬어야 하지 않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익숙할 만도 한 대회장에 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형 소리가 나왔다. 진수는 언제 헤실거렸냐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형도 프로게이머 되고 싶다.”
대진표를 확인하고 돌아온 최선수를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다들 노력한 것보다 더 거둬갈 거야. 긴장 풀고. 한 알씩 꼭꼭 씹어 먹어.”
200명이 조금 넘게 지원한 이번 선발전은 64명씩 4개조로 나뉘어 3판 2선승제로 진행되며 각조 1위가 준프로 자격을 얻는다. 운이 좋으면 몇 판 정도는 부전승으로 올라가겠지만 결국 64:1의 경쟁률을 뚫어내지 못하면 다시 닭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쌉싸름한 청심환 향이 입 안 구석구석 퍼지도록 씹었지만 긴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기억 저편에 있던 강복 씨의 <꿈>이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다
태양의 향기를 맡으면서
오전 동안 벌써 절반 이상이 실패를 맛보고 돌아갔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스타를 제일 잘 하는 아마추어 32명만이 대회장에 남아 있었다. 최선수 산하 선수들은 진수와 나 둘뿐이었다. 진수는 손목에 통증이 심한 듯 8강까지 오고도 표정이 어두웠다.
“잘하고 있어. 밥 먹고 조금만 더 힘내자.”
최선수는 전에 없이 헌신적이었다. 가식이라고 해도 한 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에 김밥이나 라면 대신 한식집까지 데려온 걸 보면 진수나 나에게 적잖이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최선수는 군말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말도 안 돼. 8강이라니. 나강복 씨, 나 이번엔, 어쩌면 진짜 될지도 모르겠다구요. 듣고 있어요?
“아빠 좀 바꿔주세요.”
“어어, 잠깐만 기다려라잉.”
수화기에서 새어나오는 노래를 따라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춤을 췄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퍼졌나.
“아들!”
이번엔 엄마였다. 흥보다 술이 더 오른 목소리다. 설마 하면서도 나강복 씨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들아, 빨리 노래자랑 틀어봐라. 아빠 나온다.”
나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과연 나강복 씨가 세상 다 가진 얼굴로 프로그램의 막바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우리 아들 힘내라. 파이팅!”
나, 원, 참. 아무리 좋아도 아들 말도 안 듣고 끊다니.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었지만 대회장으로 가는 내내 걸음이 가벼웠다. 얼마 되지 않는 상금은 사랑하는 아들의 꿈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권과 함께 짐을 싸지 않아도 됐던 건 오롯이 나강복 씨의 작지만 큰 성공 덕이었다. 대회가 끝나면 다시 전화를 걸어야지. 알았어요, 나도 사랑한다구요.
여세를 몰아 8강전도 가뿐히 통과했다. 사랑의 버프를 받은 해병 앞에 우주괴물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앞으로 두 번. 세상에 나아갈 때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형은요?”
대답 대신 최선수는 얼굴에 근심을 한가득 띠웠다. 나는 조심조심 발끝을 세워 게임에 한창인 진수 뒤로 갔다.
회심의 리콜을 준비하던 아비터가 허무하게 격추당하고 쥐어짜낸 질럿과 드라군은 태반이 마인에 폭사했다. 하나뿐인 멀티에는 벌처가 난입해 일꾼을 속아내고 탱크는 넥서스를 향해 포탄을 날린다. 옵저버를 보내보지만 테란의 멀티가 늘고 있다는 비보를 전해올 뿐이다. 역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얼마 남지 않은 병력마저 메카닉 군단의 포화에 녹아내린다.
GG
결승 문턱에서 또 다시 미끄러진 진수는 손목을 절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졌다는 표시 같기도, 내면에서 몰밀어 오는 슬픔 같기도, 패배자에게 찍힌 낙인처럼도 보였다.
프로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징크스였다. 이른바 우승자 징크스. 전(前) 시즌 우승자가 리그 시작과 함께 추락하는 불운. 재기에 성공한 이도 많아 단순한 징크스지만 진수는 아직 데뷔도 못 했는데. 이건, 이건 누가 봐도 불합리한 거잖아.
스포츠가 괜히 각본 없는 드라마겠어, 하듯 진수는 덤덤히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겼다. 그리고 영영 떠날 사람처럼 내게 마우스 케이블 홀더를 내밀었다.
“잘 해.”
예정된 수순을 밟듯 홀로 대회장을 나가는 진수를 최선수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위로 정도는 해주는 게 어때요, 하듯 바라보는 내게 최선수는 진수만큼이나 덤덤히 마우스 케이블 홀더를 설치해주었다.
“내가 더 하란다고 남을 거였으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아. 본인이 선택한 거지. 한 걸음 물러선 건지, 완전히 포기한 건지 아무도 몰라. 확실한 건 없어. 모든 책임은 진수가 진단 것밖에.”
그러니까 당신이 진수 손목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줬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거 아냐. 정말 선수 키울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우린 그냥 당신한테 매달 50짜리인 거냐고. 역시 당신은 돈밖에 모르는 가식덩어리. 썩어빠진 인간이야. 시선을 받은 최선수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은 이길 생각만 해. 네가 데뷔하고 게임으로 밥벌이를 하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물론 그럴 거야. 당신이 아니라 진수를 위해서.
“곧 결승전이 시작될 예정이니 선수분들은 자리에 착석해주십시오.”
귀를 닫고 있었지만 들린다. 손은 언제보다 잘 풀어졌다. 자리에 앉아 차분히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산재한 문제들을 구석으로 밀어내고 맵을 펼친다. 본진과 본진 사이가 꽤 멀고, 자원이 많지 않은 2인용 맵이다. 상대는 프로토스. 몰아붙이면서 멀티를 막 늘려가진 못한다. 그렇다면 더블 커맨드. 먹고, 생산하고, 버틴다. 견제에 주의할 것. 캐리어나 아비터를 섞는지 꼼꼼히 확인할 것.
‘프로게이머 할아버지가 와도 시작은 일꾼 4기부터야.’
진수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디지털 신호음이 카운트를 센다. 5, 4, 3, 2, 1, 0.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화면이 전환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댓글 재미나게 잘읽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장이 술술 잘 읽히네요 백수아버지와 연게하며 프로게이머지망생 강철을 잘 그렸다고 봅니다
'혀를 멈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뽑아버리거나, 입을 다물게 해주거나.' 혀를 멈추는 거와 입을 다물게 하는 거는 같은 거네요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거랑 똑같은거 같슴다 뽑아버리거나 재갈을 물리거나가 괜찮을 듯요 그리고 반증의 쓰임새가 이상해보이네요 제가 보기엔 방증이 맞는듯
재미는 있지만 독자층이 적은 범위로 한정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게다가 스타크래프트 한물가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