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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보다 일주일 늦었지만 드디어 파비우 아우렐리우가 브라질로 돌아간다.
전 리버풀 레프트백이 안필드에서 열린 아약스와의 레전드 매치를 위해 머지사이드로 돌아온 것은 뼈아픈 경험이 되었다.
그는 경기가 끝난 후 시내 360 스카이 바에서 옛 팀 동료들과 어울리는 대신, 5개의 갈비뼈에 금이 가고 폐에 구멍이 난 채 아인트리 대학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했다. 아우렐리우는 전반 막판 키키 무삼파가 아약스의 두 번째 득점을 위해 골문으로 쐈던 슈팅을 막으려했고, 리버풀의 4-2 승리를 위해 다치고 말았다.
"저는 단지 블락을 하려고 노력했던건데 그가 슛을 쏜 후에 이어지는 동작에서 저를 무릎으로 때리고 말았습니다."라고 아우렐리우는 설명했다. "레전드 매치에서 이런 사고가 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시겠지만 6만 명 앞에 나서다보면 경쟁적인 순간이 연속되곤 하죠."
"지난 주 폐가 손상되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3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조금 무서웠는데, 며칠 전에 엑스레이를 보고 전문의가 괜찮아졌다고 하더군요. 폐는 괜찮고 갈비뼈도 제대로 있으니 치료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 훨씬 나아졌고 클럽의 케어를 받았습니다. 나쁜 일에는 항상 좋은 면이 있죠. 이는 일요일 안필드에서 열린 브라이튼과의 경기를 즐길 수 있다는 얘기기도 했어요. 그 사고를 제외하고는, 환상적인 여행이었습니다."
절반이 차있는 유리잔을 보고 '물이 반이나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아우렐리우의 긍정적인 접근법은 17년의 선수 생활 동안 그가 연속적인 부상을 극복하는데에 좋은 도움이 되었다.
10년 전 은퇴한 뒤,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고향 상 카를로스로 돌아간 그는 에이전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 레알 베티스 미드필더였던 처남 에두와 함께 NG 사커의 파트너이다.
"우리는 상 카를로스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약 35명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저는 축구 경기를 사랑하지만, 감독이 되는 것은 저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스트레스와 그 직업에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 밖에서 실제의 삶을 살지 못하죠. 저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삶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199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끈 레프트백 브랑쿠를 우상으로 삼으며 성장한 아우렐리우는, 14세에 상파울루와 계약을 맺고 3년 뒤인 1997년 1군 무대에 데뷔했다. U-15 팀부터 브라질 대표팀의 일원이었던 그는 호나우지뉴와 같은 유소년 팀에서 뛰었다.
그는 "호나우지뉴가 축구선수로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지켜보는 것은 놀라웠습니다."라고 말한다. "유럽에 와서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가 가진 기술만으로도 가능성은 분명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브라질 대표로 출전한 아우렐리우는 스페인 발렌시아와 계약을 맺었고, 6년간 메스티야에서 라파 베티테스 휘하로 뛰며 2번의 라 리가 우승, UEFA컵 우승, UEFA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라파보다 6개월 전쯤 발렌시아에 도착했죠. 헥토르 쿠페르 감독이 팀을 2연속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려놨지만 두 차례 모두 패배했기 때문에 구단은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라파는 이제 막 테네리페를 이끌고 승격했었죠. 그의 첫 시즌에 우리는 31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에서 우승했고, 이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같이 매우 우세한 팀들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니테스가 리버풀로 떠나기 전인 2003-04 시즌에 다리가 부러져 아우렐리우의 출전은 제한을 받았다. 2년 후, 아우렐리우는 리버풀과 계약한 첫 번째 브라질리언이 되었고 그들은 안필드에서 재회했다.
그는 "저는 발렌시아와의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고, 2월에 라파로부터 리버풀로 오겠냐는 의사를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라고 밝혔다.
"저는 국가대표로 뛰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렌시아에서 국가대표로 소집된 적이 있었는데 무릎에 문제가 생겨서 기회를 놓쳤었죠."
"발렌시아에서 저는 레프트백, 레프트 미드필더, 레프트 윙어를 맡았습니다. 국가대표팀에 도움이 되려면 레프트백으로 자리를 잡고 싶었고 라파가 저를 잘 알기 때문에 저는 그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발표하자 발렌시아의 사람들은 '너 뭐하는거야? 미쳤어? 이 날씨를 두고 거기로 간다고? 넌 더 이상 햇빛을 볼 수 없을거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매우 흥분되었어요. 구단 최초의 브라질 선수가 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아우렐리우는 2006-07 시즌 25경기에 출전하며 인상적인 출발을 보였고, PSV 아인트호벤과의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었다. 이는 그가 아테네에서 열린 AC 밀란에게 패배한 2007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놓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시즌, 그는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화려한 발리슛으로 데뷔골을 넣으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홈에서 열린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에서, 그는 내전근이 찢어져 절뚝거려야만 했다. 그의 대체자였던 욘 아르네 리세는 2차전에서 디르크 카윗의 선제골이 취소된 가운데 후반 자책골을 넣었고,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런던팀의 선수들은 연장전 끝에 3-2로 승리를 거뒀다.
"대처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 정말로 발전하고 있고 더 큰 것을 성취하기 위해 준비되어있다고 생각이 되는 순간에 매번 부상이 저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았습니다. 심한 부상에서 돌아올 때마다 더 힘들어졌죠."
그는 2008-09 시즌에는 33경기 출전, 3골 6도움을 기록하며 리버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2009년 3월,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4-0으로 격파하고 나흘 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넣은 놀라운 프리킥은 하이라이트였다.
"그 순간은 완벽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네마냐) 비디치가 퇴장당한 직후에 제가 득점을 기록해서 3-1로 이겼죠. 돌아가서 한 경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다면 바로 그 경기일 것입니다."
챔피언스 리그 8강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벌인 첼시와의 4-4 명승부에서 기억에 남을 프리킥이 또 나왔지만, 리버풀은 1차전에서 3-1로 패하며 고개를 숙였다.
해당 시즌은 맨유가 그들을 4점 차로 누르며 우승을 차지했고, 리버풀은 빈손으로 시즌을 마쳤다. 이후 구단주 톰 힉스와 조지 질레트의 빚 투성이 운영이 타격을 주면서 구단의 운명은 곤두박질쳤다.
베니테즈는 2010년 여름에 팀을 떠났고 아우렐리우는 자유계약선수(FA)로 그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로이 호지슨이 감독직을 이어받아 그에게 새로운 2년 계약을 제안했다.
호지슨은 6개월만에 경기장 안팎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펜웨이 스포츠 그룹이 리버풀을 인수한 후 3개월 만에 구단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긍정성을 제공하기 위해 케니 달글리시가 복귀했다.
"선수로서 필드 밖의 상황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구단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리버풀에서 최근 몇 년간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며 함께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큰 차이를 만들어요. 바로 이 부분이 리버풀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부상에서 돌아온 후 라파에 의해 방출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리시즌이 되자 저는 건강을 되찾았고 로이는 레프트백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계약을 요청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저에게는 선물이었죠."
"케니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클럽에서 엄청난 인물이었죠.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로이는 케니와 같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2011년 여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호세 엔리케가 영입되면서 아우렐리우의 출전 시간은 제한을 받았고, 그는 그레미우에서 뛰기 위해 브라질로 돌아가기 전에 2011-12 시즌 리버풀에서 단 세 번 출전했다. 그러나 그레미우 데뷔 전을 앞둔 전날 훈련 중, 그의 전방십자인대(ACL)가 파열되었다. 그는 2014년에 34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 다시 한번 반격에 나섰다.
아우렐리우는 부상에 발목이 잡힌 이유를 알고 싶어 선수 생활 말기에 전 리버풀의 물리치료사 빅터 살리나의 도움을 받았다.
"저는 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제 자신을 돌봄에도 왜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빅터는 저를 바르셀로나로 데리고 가서 DNA 검사를 진행했고 제 몸의 모든 것을 확인해줬습니다."라고 아우렐리우는 말했다.
"저는 종아리에 몇 차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저의 근조직에 많은 흉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제 근조직에서 흉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근육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덮고 있는 조직이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죠. 절대 이길 수 없는 것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6시즌 동안 리버풀에서 134경기에 나섰던 아우렐리우는 자신이 성취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에 구멍이 났다고 해서 2025년 다음 안필드 레전드 경기를 위해 복귀를 미루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것은 저에게 있어 꿈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U-15 팀에서 U-23 팀까지 뛰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죠."라며 그는 덧붙였다.
"두 번이나 소집될 수는 있었지만, 부상이 저를 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봤을 때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단 한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제가 겪은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17년의 커리어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발렌시아에서 심각한 연골 부위 문제가 있었고 선수 생활을 끝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럼에도 저는 리버풀에서 6년을 더 보냈죠."
"사람들은 몇 번 넘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몇 번 다시 일어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다시 안필드로 돌아와 여전히 경기를 즐겼습니다. 물론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화가 났겠지만요."
첫댓글 이 형님은 왜 레전드 매치에서도 다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리킥골은 아직도 기억이나는!
아우렐리오가 첫 브라질리언이었구나
레전드매치에서도 부상... 초심 안 잃으신 형님 ㅜㅜ
그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레전드❤️
레전드❤
ㅋㅋㅋㅋ한결같네요
유리몸은 유리몸이네ㅋㅋㅋ
웃프네요 ㅋㅋㅋ
얼굴보니까 오랜만에 맨유전이었나 뜬금 프리킥골 생각나네요
개근가 ㅋㅋㅋㅋㅋㅋ ptsd오네.
제가 본 리버풀에서 가장 완벽했던 정육각형의 풀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