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평생 부엌에서 사시다가 죽음도 부엌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6남 1녀의 형제들이지만 먼 곳에서 사는 친척 형들까지 우리 집에서 실았으니 부모님까지 포함해서 거의 11명의 식사를 매번 준비하셨던 어머니의 평생 일터인 부엌을 추억해 본다.
초가집이던 우리 집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은 세개였지만 안방에 있는 아궁이는 주로 나무를 때서 난방만 하는 곳이었고 그 옆에 커다란 나무광이 있어 그 곳에 한 겨울에 쓸 난방이나 부엌에서 쓸 나무를 쌓아 두는데 그 나무가 들어오는 날이 커다란 행사 중의 하나였다. 나무는 처음에는 제재소에서 쓰다 남은 각목나무나, 혹은 인천 앞 바닷가에서 수입되는 통나무의 껍질을 벗긴 것을 사서 들여 놓기도 하고 때론 톱밥을 사서 쌓아 놓기도 하셨다.
이 나무가 들어 오면 형제들이 큰 길에서 집까지 모두 손으로 날랐는데 그 일이 정말 힘들었다. 손에 가시가 박히고 온 몸이 껄끄러웠던 나쁜 느낌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었다. 반면 연탄은 다행하게도 연탄을 파는 곳에서 모두 연탄광까지 가져다 주기에 편했었다.
아랫채의 부엌은 세들어 사는 사람 그리고 건넌방에 있는 부엌이 우리 가족의 모든 식사를 만드는 곳이다.
아랫채와 본채 사이에 커다란 나무대문이 따로 있어 세들어 사는 사람은 별도의 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당시 부엌의 아궁이 중 하나는 나무를 때고 또 하나는 연탄을 이용했는데 밥은 주로 나무를 때는 아궁이에 커다란 무쇠솥으로 이용했다. 연탄을 때는 곳은 커다란 밥솥이 올려져 있다. 나무를 때다 보니 어머니의 치마폭은 불에 탄 곳이 있어 늘 군데 군데 기워져 있었다.
부엌바닥은 검고 단단한 흙이었고 넓은 마당도 역시 같은 흙이었다. 마당 한켠에 커다란 장독대가 있어 고추장이나 된장, 기타 마른 반찬을 담은 독이 많았었다. 부엌은 물기가 많은 곳이니 어두운 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물을 담는 커다란 장독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저장해 놓는 용도였다. 그러다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왔지만 그 수도도 부엌까지는 들어 오지 않고 마당에 설치되어 매번 부엌으로 퍼 날랐지만 어머니의 일손은 그나마 무척 편해지셨다.
후에 마당까지 비가 맞지 않게 프라스틱패널로 덮어 놓아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 흙마당이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문이 앞과 뒤에 있었고 나무로 된 선반이 있어 그릇들을 쌓아 놓으셨다. 그 때는 사용하던 그릇들이 내구성이 없어 이빠진 그릇들이 많았었기에 그릇이 깨지지 않는 한 그대로 이용해야만 했다.
이후 스텐그릇들이 나와 편하긴 했지만 그 것도 겨울에는 날카로워져 손이 베기도 했었다.
그 때는 우리 형제들이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어머니와 누님만 부엌에서 일을 하시고 식사도 아버님과 형제들이 먹고 남은 음식으로 그 곳에서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부엌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늘 30촉 백열등이 달랑거리는데, 밥을 하기 위해 중간에 무쇠솥을 열면 김이 나와 전구가 켜 있어도 부엌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잠시 열린 틈에 생쥐가 한마리 솥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큰 해프닝도 있었다.
부엌에는 늘 그렇듯이 쥐들이 가득했다. 밤에 자다보면 쥐들의 놀이터인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한 밤 중에 나가 혹시 뚜껑이 열린 그릇이 없나 하고 자다가 일어나 확인하는 날이 많았다.
부엌과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방이나 마루가 달라 늘 식사 때만 되면 가족이 그릇들을 하나 하나 나르거나 혹은 작은 상으로 나누어 옮기는 것도 매번 일이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불편한 일을 감수했을까?
그러다가 동네 언덕까지 올라가는 소방도로가 우리 집을 관통하는 바람에 집을 어쩔 수 없이 2층 양옥집으로 짓고 부엌은 아래 층과 2층으로 나뉘었다. 그래도 2층은 온전히 세들어 사는 사람의 부엌이었고 아래 층에는 부엌이 안방과 쪽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식사 때마다 그릇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는 일은 없어졌다.
아무리 양옥집이라도 사용하던 무쇠솥과 양은솥은 그대로 가지고 오셨기에 늘 허리 구부리며 일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부엌 바닥도 세멘트로 덮고, 밖으로 연결된 창문도 있어 어머니의 일터는 동네 사람들과 소통하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
다만 장독대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건물 옆 계단 옆에 두었기에 여전히 식사 조리를 위해서는 장독대를 오르내리셔야 했다. 집이 폭이 좁아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좁아 매번 조심 조심 다녀야만 했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직장 다니기 시작한 81년도 여름에 병원에 입원한 나의 간호를 위해 과로하셔서 혈압으로 쓰러지시고 이후 반신이 어려운 몸에도 불구하고 불편하신 왼 손과 왼발로 부엌일과 빨래 일을 모두 다 하셨다. 그렇게 7년 동안 자식들 모두 출가한 쓸쓸한 집에서 아버님과 사시고, 88년 어느 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다시 혈압때문에 쓰러지신 채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양 살다가 가신 어머니가 늘 그립다.
첫댓글 정말 가슴 아린 기록입니다...여자의 일생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만드는.
88년도이면 벌써 33년 전, 참 오래 전이네요. 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하지만 애 많이 쓰셨던 어머니께서는 그 부엌일에서 벗어나 훌훌 가볍게 지내시는 거, 맞지요?^^
어제 산소에가니 어머님이 천국에서 내 모습 보면서 미소짓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가슴이 저러오네요.
가족과 자식을 위해 고생만 하신 부모님들, 그래서 그 사랑이 위대하고, 우리가 살아 평생 잊지 못하며 그리워 하는게죠.
어머니께서 지금은 필히 천국에서 편안한 휴식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살면서 느끼는게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걸 느낍니다.
저도 어머니가 계실때는 어머니의 헌신과 고통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나이들수록
죄송하고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듭니다
왜 살아계실때는 그걸 모르는지..
인간은 참 어리석은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