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날/안행덕-
좁은 골목, 트럭 한 대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방금 버려진 세간살이 몇 개
휘청거리는 흙먼지에 감았던 눈을 뜨고
모퉁이로 사라지는 이삿짐 트럭을 바라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
둥글게 빈 밥사발
오래전 내가 파놓은 묘혈(墓穴)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텅 빈 그릇에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 주인의 밥상을 지켰을 저 빈 밥그릇
버려진 운명을 원망도 없이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고스란히 식탁에 오를 것 같다
-이사/이병률-
봉투에 손을 넣어 비밀을 적자
손을 마저 잘라 봉투 안에 넣고 밀봉을 하자
-마지막 이사/이서화-
이삿짐을 싣고 가던 차량이
신문의 가파른 사회면으로 굴렀다
어느 기우뚱한 지점 계곡아래
마지막 이삿짐을 부렸다
차곡차곡 단풍 옮겨 실은 가을 나무들이
우수수 이삿짐을 부려놓던 곳
쿵쾅거리는 위층도 없고
치받던 아래층도 없는 나무들의 사이에
부려놓은 짐들은 스산하다
누구나 살면서 급커브 지점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지점에서 이사를 다니고
이삿짐을 쏟아놓고 정리하다보면
자꾸 한쪽으로 기울던 경사면 그럴 때마다
단단하게 밧줄 묶어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녔던 살림살이들
이삿짐 차는 단풍벽지 발라진 수피령 고개
낭떠러지 중간쯤에 짐을 풀었다
단풍처럼 타오르다 흩어진 세간들
상수리나무 옆에 냉장고가 배치되고
TV 화면은 무음의 구름만 방영중이다
요란한 소음은 석양 속으로 돌아가고
고개를 넘는 바람의 집들이도 끝이 났다
이사 갈 때마다 버리거나 쏟아진 짐들이
주인을 잃듯
두 번 다시 이사 가기 싫다는 듯
곳곳에서 단풍들이 쏟아진다
-이사/김상혁-
일상 집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모든 가족에겐 아이가 필요합니다
엄마는 재혼을 포기하셨지요
집을 바꾸고 학교를 아빠를 바꾸는 일
뭐 대수라구요
낯선 장소가 그립습니다만 언제나처럼
다락방 하나 긴 마당이 하나 그리고 공터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하나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습니다
긴 마당에서는 밤마다 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야 하고요
공터는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피 묻은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곳
이번 공터도 엄말 닮았어
나에게 짖던 강아지들은 쥐약을 먹고
놓아기른 병아리들은 식탁에 올랐습니다
곧 떠날 동네에는 작은 무덤이 남고 우리는 다른 집을 찾습니다
나무가 꺾인 자리
불모의 터에서는 왜 같은 냄새가 날까 이사 갈 때마다
내 살갗 위로 눈알이 하나씩 늘어야 합니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건 천박한 짓이야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지 말래두?
버릇이 없어 나는 해변으로 자주 보내졌습니다
엄만 죽어서 인공위성이라도 될 테지요
가족들 무덤 위에 말뚝이라도 심어 두려구요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일이 코 막고 연애를 하는 일이
뭐 대수랍니까 나는 안목이 재주를 초과하는걸요
낙서 같은 조감도는 묻어 두고 짐을 꾸립니다
손금이 복잡한 손은 깨지기 쉽습니다
-이사/고 영-
벌건 대낮
술 취한 물뱀처럼 집을 찾아든다
그런데 집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이놈의 집이 그새 허물이라도 벗었나?
너무 오래 집을 비워뒀던가, 집 비운 사이
집마저 나를 잊었던가
환장할 봄날에 취해 단체로 바람이라도 난 것인가
얼마나 더 취해야, 얼마나 더 검불처럼 떠돌아야
집은 모습을 드러낼 텐가
애당초 집을 짊어지고 나왔어야 했는가
놀이터 벤치도 그대로
수수꽃다리 향기도 다 그대로인데
집아, 너만 어디로 갔니?
회초리 같은 햇살에
볼기짝 맵게 얻어맞을 가엾은 마음을
길가에 눕혀두고
하릴없이 하늘에 삿대질이나 해대다가 문득,
서천(西天) 가장자리에 외롭게 뜬
초췌한 낮달을 본다
바보, 너도 집 잃어버렸지?
-이사/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이사/최금진-
이사를 가야지, 제일 먼저 개명을 하고 전화번호를 바꾸고
인터넷가입을 해지해야지, 식구들도 다 바꿔야겠지
마누라와 별거를 하고, 아이들도 제멋대로 크게 둬야지, 신경 꺼야지
잡초같은 머리털을 하고 이 다음에 나를 찾아와도 만나지 말아야지
이사를 해야겠어, 무덤도 좋고, 섬도 좋고, 폐기도 좋아
흉보기 좋아하는 것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도 흉을 보겠지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내가 떠나면 너희들 세계는 내게 소용없지
시큰둥해진 나를 보고 괘씸하게 생각하겠지, 당황해하겠지, 꼴좋다
추락이 새로운 높이와 깊이가 되어 유령처럼 기다리는 곳
아아, 식구들에게 뭐라고 말해야하나, 이 사실을, 이 비밀을
이 두렵고 확실한 절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내가 앉았던 의자는 치우고
내기 읽던 책들은 태우고, 내가 보던 tv는 버리고, 내 사진은 찢고
내 옷들은 파묻고, 내가 심어놓은 포도나무는 뽑아버리렴
밥 먹다 말고 울음이 터져 나올지도 모르지만, 부질없고 쓸데없는 일
실종은 경찰서와 동사무소에 가면 해결될 일
카드도 버리고 연락처도 버리고 주소도 남기지 않을 테니
남은 옷 몇 개가 텅 빈 방을 껴입고 누워 벌벌 떨고 있겠지
평생 이사를 가기 위해 살았던 사람처럼 어서 나는 이사를 가야지
내게 더는 명령을 하지 말 것, 아는 척 하지 말 것, 총고하지 말 것
내가 스위치를 내리면 너도 아웃
캄캄한 밤이 왔고, 더 캄캄한 밤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거다
이 외로운 세상에, 외로움이 전부인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 비겁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이사를 간다, 내가 이사 가는 걸 너는 끝내 모르겠지만
-이사/이규리-
돌아가는 차의 후미등을 오래 보았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목소리를 두 손에 담아
이 서러운 보관이 더 오래이도록
주머니를 여미었다
몇 번 마음의 물결이 흰 겹을 두르며 출렁이는 동안
차는 보이지 않고
이것이 여기에서의 일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지는 잎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잘 잊을 수 있다면
잊었다는 것도 잊을 수 있다면
빈자리,
지상에서 일군
그와의 자리였을 것이다
-이사/박시하-
롤로는 영혼의 집을 옮겼다.
메이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낯설고 낡은 부엌
금간 벽에 붙어 있던 잎사귀를 떼어내는 일을
롤로는 기도처럼 경건하고
비밀스럽게 했다.
집은 낡고 허물어져
깨진 창유리 사이로 상한 빛이 들어왔다.
아픈 메이에게 무엇이 좋을까
롤로는 정성스레 소파를 놓고
식탁을 닦았지만
여기서도 메이는 낫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도 나아지지 않으면
병은 무수한 잎을 돋울 것이다.
롤로는 잎사귀 하나를 뜯어 벽을 장식하고
잎사귀 또 하나를 뜯어 머리에 꽂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 같았다.
아슬아슬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찬장을 열어서 프라이팬을 꺼냈다가
검게 탄 손바닥을 꺼냈다가
기도를 얼마나 했으면 손이 타버렸지
롤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갈망은 기도를 낳았다.
기도는 절망을 낳았다.
롤로는 다만 아무것도 낳지 않고 싶었다.
낳는다는 건 퍼져나가는 일이지.
퍼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롤로는 그러나 낳고 또 낳았다.
퍼져나간 그림자에서 잎사귀가 또 돋아났다.
금간 벽에 잎사귀를 붙였다 떼는 일이
메이와 함께 바다로 갔다.
검은 손바닥도
정든 소파와 식탁도 가버렸다.
롤로는 남았다.
병도 남았다.
찬장에서 기억을 꺼내 먹었다.
가만가만
롤로의 영혼이 이상한 빛을 내며 상해갔지만
바다는 영원을 가장하며 푸르렀다.
-어떤 이사/이영림-
이젠 이곳엔 아무도 안 살아요
집달리가 문짝마다 빨간 어제를 붙이고 갔어요
그 빨간 어제가
책상 화분 꽃병 티브이
달력 속 그림인줄 나도 몰랐어요
내일 보다 리얼하고 선명했으니까요
파도는 내일이 지워진 나를 데려가지 못했죠
벽 위의 달력들만 가지고 갔죠
집안 여기저기
집달리가 붙인 시간이
사방무늬 물 그늘 아래 울긋불긋해요
손을 뻗어 떼어내려 해도 닿지 않아요
새로 도착한 것들은 언제나
바람보다 낯설어요, 따개비 불가사리들
고양이의 동공처럼 공중에 붙어있어요
열여덟 살의 달력을 주고
리본 달린 선물을 받았다고 말들 하지만
어디론가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고양이털이 삐꺽삐꺽 검은 계단에서 자라나고
넝쿨 장미는 유리문에 물든 입술을 자꾸 부딪혀요
이제 이곳엔 아무도 안 살아요
바람 부는 팽목엔 노란 그리움만 제 안의 숫자를 세며
침묵처럼 사월의 벽 위에 매달려 있어요
-이사를 하며/송태한-
이사를 하며 나는 몇 번을 놀랐다
저 많은 이삿짐들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가끔은 진귀한 골동품을 찾아낸 듯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고 문득 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긁던 밥솥처럼
오랫동안 정들었던 살림이 있는가하면
한 번도 못쓰고 묵혀 둔 낚시용품까지
한 때는 모두 애지중지 아꼈던 것들
없으면 못살 것 같던 마음들이
창고와 벽장 틈에서 마술 상자처럼 쏟아져
사다리에 실려 트럭으로 옮겨 타고 있었다
어떤 물건은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도 하고
때로는 가구 뒤편에서 빛바랜 책 묶음이
아직 살아있다고 외마디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가
손대면 다시 눈을 깜빡이는 추억처럼
소싯적 핏대 세우며 굽히지 않거나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내 몸으로부터 멀찌감치 작별해야할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버려
나는 세간 사이에서 남몰래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이사/원동우-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밭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이사/오 은-
마지막으로 화분을 실었다
꽃이 없는 화분
흙이 가득한 화분
오늘도 물을 줬는지 촉촉했다
트럭이 새집을 향한다
손을 흔들어도 집은 가만있었다
멀어지는 동안
어느새 옛집이 되어 있었다
잠잠하던 화분이 눈을 떴다
싹이 있는 화분
화분이 움직이는 집이 되던 순간
네가 나타났다
여백이 실체를 드러냈다
뚫어져라 바라봤는데도 집은 가만있었다
낡은 새집으로 있었다
가장 먼저 화분을 내렸다
집집이 집 안으로
-이사/전영관-
미래라는 사치는 처분하고
서쪽으로 창을 낸 집을 얻었다
하루가 몰락하는 장관이 거듭되는 거기서
인생을 설계하라는 개발서 저자를 비웃는다
희망이라는 꽃나무를 화분에 심어
말려 죽일까
까짓게 살아남겠지 하면서 농락한다
코에 물을 부은 듯 치솟게 하는
불안은 뇌전증 같은 것이라고 포기한다
채권추심인 마냥 집안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무례하게 가구들의 무표정을 더듬는다
근로계약서를 읽어보다가
합법적 불법을 획책한 자를 저주한다
희망은 천사들의 직업병
날짜 지난 연주회 이인용 티켓
나비 박제 몇 개
최선을 다했을 배터리들
납작하게 눌러놓은 알람소리
먼저 살았던 이가 흘린 불면
다 들켰다는 듯 체념한 곰팡이들과 공존하며
미래보다 명징한 에덴의 서쪽*을 신뢰한다
희망보다는 다채로운 공짜 노을을 만끽한다
* 장승리,「에덴의 서쪽」
-멀고도 가까운 이사/김이듬-
1
가구들이 다 나갔어 집은 텅 비었고 보일러는 망가졌어
이사업체 인부들에게 네 침대를 팔았어
커튼 뒤에 숨겨놓았던 술병들도 버렸어
우리의 고양이도 창문으로 도망가버렸지
해가 지면 찾아오는 한기처럼 언제나 문을 두드리는 건 추위와 고독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창문에 네 이름을 쓴다
어둠이 흐르고 공기에는 기억이 배어있다
2
집은 여전히 공사 중이야 네가 없으니 앞으로 나는 되는대로 살게 되겠지
육체의 굴레가 있어 사유도 있다고 했던가
우리는 싸웠지 너는 일어난 일을 생각했고 나는 일어날 일을 생각하느라
나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제발 그를 네 옆에 앉히지 마
내면의 폭풍과 오해는 좋아하는 음악처럼 나를 변화시킨다
음악은 지나가는 법, 도무지 음악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3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
나를 허물고 다시 기본 골격을 세워야 했어
발목이 부었어 현기증과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새집은 늘 이런 거래 페인트 냄새로
집주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말했지 희고 부드러운 벽을 망치지 마세요
네가 없는 인생은 잘못 임대한 집같아
함부로 자국을 남길 수도 떠날 수도 없어
-비 오는 날의 이사/정두리-
내릴까 말까
기어코 내리기로 한 가랑비
안절부절
그러나 한 번 젖어버리면
그저 그래진다
젖는 것에 상관없어진다
걱정까지 비에 젖어 묵직한
무거운 저녁
이제 내가 할 일은
눈물로 배인 빗물을 닦아내고
물기로 부풀어 오른 곳 눌러
평평하게 다듬는 일로
긴 시간 소요해야 한다
심란해 하지 말아라
풀 죽지 말아라
어디 황망하게 비 맞는 일
앞으로도 아주 없을 수 있는 일
아닐 테니까
누가 그랬나,
이사할 때 비 오면 부자된다고
누가 그렇게 위로의 말씀을 마련하셨나
이 황당한 격려의 말씀에
나는 감격하지 않으리라
결코 속지 않으리라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