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김동인/광염소나타
물매 정인량
1930년에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소설. 극단적인 유미주의, 예술주의에 입각했으며, 그 때문에 당대 조선의 현실보다는 오히려 소설에서 말한 대로 수십년 후의 조선, 즉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라고 가정해도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는 구성이 특징이다. 두 차례 드라마(구 TV 문학관, HD TV 문학관)로 제작된 적도 있다. 그만큼 역사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매드 아티스트 본연의 광기를 잘 묘사한 작품.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백성수"라는 음악가의 이야기에 대해서 친구 사이인 자선가인 "모씨"와 작곡가 "K씨"가 나누는 대화, 그리고 백성수의 수기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백성수는 타고난[2] 예술적 재능과 함께 범죄의 광기를 타고난 인물이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종교 활동을 통해서 광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이 들자 백성수는 약값을 구하기 위해 담배 가게에서 돈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결국 감옥에 갇혔다.
백성수가 출옥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3] 묘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깊은 원한을 품게 된 백성수는 그 담배가게를 찾아가 방화를 저질렀으며 그 불길에 흥분해서 "광염 소나타"를 작곡했고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K에게 발견되면서 음악계에 데뷔한다. 그리하여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그 쾌감에 도취되어 창작욕을 불태우는 비정상적인 욕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얼마동안 참고 있던 백성수는 또 다시 방화를 저지르고 "성난 파도"를 작곡했으며, 완전히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성수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 밤중에 다리 밑에서 노인의 시신을 마구 던져 짓뭉갠 다음 "피의 선율"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심지어 사랑하던 여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간을 저지른 다음 사령(死靈)이라는 곡을 작곡했다.이정도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그 뒤로는 여러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끝에 결국 범죄자로 붙잡혔다. 현재는 음악가들의 탄원으로 일단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정받아 정신병원에 있으며 K씨가 '이 사람은 음악을 할 때 빼고는 지극히 정상인데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게 맞는 건가'라는 고민을 들려줬다.
'걸작을 낳는 예술가의 광기에서 비롯된 범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대한 답변이 엇갈리며 나오는 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다.
(출처/ 나무위키)
김동인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이다.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명문〉, 〈무지개〉,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광염소나타〉[5]가 있다. 김동인 소설의 특징은 경향성이 무척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전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반된 특성이 한 사람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감자〉와 〈명문〉에서는 자연주의, 〈광염소나타〉와 〈광화사〉, 〈배따라기〉에서는 탐미주의, 〈붉은산〉에서는 민족주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인도주의 경향이 발견되고 <K박사의 연구>[6]는 SF적 경향마저 보여주는데 서로 다른 경향성이 한 작품에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있다.
19 0년 10월 2일에 평안남도 평양시 융흥면 하수구동(현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평양 하수구리 한 곳에서 8대를 내려온 토호 집안으로, 상당히 많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계층의 갑부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대윤(金大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장로교 장로였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역시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지독하게 없던 그는 사치벽으로 재산을 탕진해버린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 등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명을 부리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또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일본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수시로 놀러다녔으며, 담배 1갑을 사려고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던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보통강 수리사업에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가 쪽박차고, 그 많은 재산은 물론이요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려먹었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첫 번째 부인 김혜인이 결국 가출해 버려, 졸지에 이혼남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전처를 디스하기 위해 '무능자의 안해'라는 소설을 썼으나 김혜인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 문인이었던 현진건의 경우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대가로 가난에 찌들면서까지도 문학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도 했다.아니면 황순원처럼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쓰느니 차라리 붓을 꺾고 말지' 라며 잠수를 타 버린 경우도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 같은 경우는 친일 행적이 있지만 2차대전 와중에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리면서[9]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그 자신도 지인들에게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말을 했다. 또한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이갑기(李甲基)로부터 "드디어, 네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당장 일자리를 때려친 사람이다.
채만식 같은 경우는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미로〈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역시 가난에 찌들어 6.25 전쟁을 2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평생 소원이 원고지를 넉넉하게 가져보는 것이었다고. 최서해도 말년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았지만, 최서해의 가난한 형편이 잘 알려져 있었기에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인들마저 욕하지 않았을 정도[10]. 반면 김동인은 일제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만큼 재력이 있었으나 본인의 방탕한 사생활 탓에 가난해졌고,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을 시작했기에 모양새가 굉장히 추하다.
메이지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 해 9월 다시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 화숙(川端画学校)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그녀")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이광수의 작품이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