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자! (누가복음 10:30-36)
곤충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세 종류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거미입니다. 거미는 처마 밑이나 음침한 곳에 줄을 치고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나비나 다른 곤충들을 줄로 얽어매서 잡아먹는 악한 근성을 가진 곤충입니다. 다음은 개미입니다. 개미는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울에 먹을 자기 먹이를 준비해서 쌓아놓습니다. 개미는 쌓아서 자기만 먹고 일절 남에게 꾸어주지도 않고, 남을 도와주지도 않는 그러한 근성을 가진 곤충입니다. 이와달리 열심히 자기 먹이를 만들어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곤충이 있습니다. 꿀벌입니다. 꿀벌은 들에 피어있는 꽃으로 꿀을 만들어서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양제를 만들어주는 곤충입니다.
이 세 종류의 곤충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면서 살아가는 거미가 있는가 하면 남을 해치지는 않지만 자기만을 생각하는 개미가 있고, 그리고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좋은 일을 하는 꿀벌이 있습니다.
이러한 곤충의 삶을 가지고 유명한 철학자인 존 베이컨이 인간을 거미같은 인간, 개미같은 인간, 꿀벌같은 인간으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거미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에게 사기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은 거미같은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온갖 부를 축적해서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무관심하고 자기만 향락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달리 자기를 희생하면서 인류사의 복지를 위해서 헌신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상존하는 이 세계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거미형인지, 개미형인지, 꿀벌형인지를 성찰해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거미같은 존재는 없겠지만 개미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소수의 꿀벌형의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의 창조자로, 그리고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자신을 별세시켜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서 그 삶의 모습들이 참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모든 세상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함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미같은 강도형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개미형은 함께 살기는 살지만 전혀 무관심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꿀벌형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살아야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크게 둘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계명을 한마디로 종합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는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율법을 어떻게 알았으며 어떻게 지키고 있느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 말씀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때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보면 1-4계명은 하나님 사랑, 5-10계명까지는 인간사랑, 이웃사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른말로 표현하면 '함께 살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살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계명이요, 또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 모든 계명은 이웃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선하게 산다는 것은 함께 잘 산다는 얘기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 선한 사람들입니다. 직장에서 함께 잘 살면 선한 국민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함께 잘 살면 이게 바로 선한 민족입니다. 서로 죽이고 원수 맺고 사는 것은 선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한 형제라고 말한다면 교파와 모든 교리와 신학을 초월해서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선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이고 여리고는 250m이니까 500m의 차이를 두고 36km의 언덕길을 내려가는 곳이 바로 그 길입니다. 이곳은 동굴도 많고, 음산한 곳이 많기 때문에 강도들이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괴롭히고, 약탈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다니면 강도 만날 일이 없는데 혼자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의 옷을 벗기고 거반 죽을 정도로 때리고 내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유대인의 제사장,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사를 성전에서 집례하는 제사장이 지나다가 강도를 발견하지만 그냥 피하여 갑니다. 또 잠시 후에 제사장을 돕는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가지만 피하여 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곳을 지나다가 강도 만난 자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 상처에 부어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귀에 태워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봐주고 다음날 떠나면서 주막집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맡기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갚아드리리이다" 하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라고 물을 때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강도 만난 자와 함께 살려고 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는 남을 죽여서 혼자만 살려고 하는 자요, 자기의 안일을 위해 강도 만난 자를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혼자 살려는 사람입니다.
여기 사마리아인은 한 사람으로 비유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예수님의 모형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처럼 살려고 오신 분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누구입니까? 상처 입은 자요, 병든 자요, 죽게 된 자입니다. 이 사람을 살려주려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버리고 인간의 모형을 입고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죄인의 세계에 오셨고, 주님이 어렸을 때 헤롯왕의 살인적 음모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간 것은 끊임없이 피난살이하는 인간들의 그 서러움을 친히 몸으로 체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셨기 때문에 배고픈 자의 굶주림도 아셨습니다. 목수로서 33년을 일하시면서 그는 노동자의 아픔도 아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나셔서 소외된 자의 서러움과 그 아픔을 친히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면서 죄인의 고통을 몸으로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땅에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려고 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뭐하러 오셨나" 살려고 오셨습니다. 누구와 살려고 오셨느냐?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오셨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류 전체를 말할 수도 있고, 아담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사람으로서 마귀 강도를 만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다 벗어버리고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상실되었으며, 완전히 죽은 자처럼 버린 바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세 가지 방법을 취했습니다. 첫째는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두 번째는 상처난 부위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서 상처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특별한 의약품이 없던 시대에 상처난 자를 치유하는 간단한 치료제가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처를 소독하고 낫게 하는 치유제였습니다. 세번째는 그 사람을 나귀에 태워다가 주막집에 맡겼습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돌봐주시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전도의 삼단계의 비밀을 보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고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님의 창조 형상을 잃어버리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자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그 다음에 자기 있는 것을 쏟아 부어서 그를 데려다가 교회에 맡겨야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구세군 창시자였던 부스 대장이 런던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가 "선생님,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부스 대장은 "저 봐라 수많은 영혼들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만 저들은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불쌍한 영혼들을 보니 내 눈에서 눈물을 금할 길이 없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불쌍한 자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불쌍한 자입니다. 저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안믿는 자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피상적이고 자기의 어떤 욕구를 위한 기도를 넘어서서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며칠 전 저는 총회를 참석하기 위해서 수행 전도사와 군산에 갔다가 제 첫 목회지였던 교회와 두 번째 목회지였던 교회를 탐방하면서 전도사에게 내가 걸어다녔던 길과 그때 내가 어떻게 전도했는가를 다 얘기해주고 한 권사님 무덤에 성묘를 하러 갔습니다. 미리 시골교회 목사님에게 무덤을 찾도록 부탁을 해서 안내를 받으면서 갔습니다. 제가 성묘한 권사님은 제가 고부에서 눈물로 길을 적시며 전도하러 다닐 때 고구마 밭을 매고 있는 아주머니들 틈에 끼어서 고구마 밭을 함께 매 주면서 전도해서 교회에 나온 권사님입니다. 제가 고구마 밭을 매면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니까 이 권사님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젊은 전도사님이 얼마나 안타까우면 이럴까 내가 믿어주어야지' 그 생각을 가지고 믿기 시작해서 얼마나 잘 믿었는지 그 먼 길에서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늘 교회에 와서 새벽마다 눈물뿌려 기도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무덤에 성묘하고 오다가 옛날에 권사님이 살던 집을 찾아갔는데 그 권사님 며느리가 그곳에서 살고 있어요. 나이가 70이나 되었는데 제가 그 자매님에게 금일봉을 주면서 할머니의 믿음을 따라서 예수 잘 믿으라고 격려하고 돌아왔습니다.
저희 교단에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후배가 있는데 김해성 목사입니다. 그는 목숨 걸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늘이 보낸 선교사입니다. 그 분이 하는 일은 제가 무조건 도와주어야 되는 사명을 하늘이 저에게 준 것 같아요. 그분이 부탁할 때 거절하고 싶어도 '저 분의 말을 내가 거역하면 큰일나지' 그런 두려운 생각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많은 산재를 당합니다. 손가락이 부러지고, 떨어져서 낙상하고, 몸에 상처를 입는데 한국의 악덕 기업주들이 그들을 치료도 안해주고 내버립니다. 다치기만 하면 내버리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때 당시에 김해성 목사가 인권운동을 했거든요. 김해성 목사를 찾아와서 살려달라고 호소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김해성 목사가 악덕 기업주와 투쟁을 해서 저들에게 보상금을 받아주었는데 한번은 네팔 사람 하나가 손가락이 끊어졌어요. 그래서 기업주에게 가서 얘기해서 3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아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네팔 사람은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1년후에 김해성 목사에게 편지가 왔어요. "목사님, 제가 3천만원의 돈을 받아가지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좀 와 보시죠." 그래서 김해성 목사가 기쁜 마음으로 네팔을 방문했는데 이 사람이 김해성 목사를 자기 집으로 안내하면서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는데 좋은 집에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잘 살게 되어서 옛날 부인은 내보내고 젊은 부인 둘을 얻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다 목사님 덕택입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도왔던 것이 기껏 이것이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불쌍히 여기고, 장애 입은 것 때문에 불쌍히 여겼던 것이 바로 이것이냐' 하고는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보상금 받아주는 것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볼 것이 아니라 예수 복음을 주어야 되겠다.' 하고는 그때부터 복음을 들고 외국인 노동자를 선교해서 구로동에 중국인 교회, 안산에 중국인 교회, 광주에 중국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김해성 목사는 구로동에서 1000명의 중국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10억의 헌금을 개인적으로 해서 중국인 노동자 교회와, 중국인 선교 신학교를 지금 운영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병든 자가 아닙니다. 소외된 자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불쌍한 자는 객과,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신 24:19-22).
객은 나그네요, 고아는 부모 없는 자녀요, 과부는 남편없는 여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세 부류의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없는 나그네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부모 없는 자녀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당시 농경사회에서 남편없는 과부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밭의 곡식이나, 포도나무나, 감람열매를 남겨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적 의미로 이것을 해석한다면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요, 살아서 하나님의 집을 모르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의 집에 가지 못하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고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는 불신자입니다. 영혼의 고아들이 이 땅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과부가 누구입니까? 예수 신랑을 모시지 못한 인생들이 모두 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임재하셔서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셨습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물론 이것은 가난하고 배고픈 자에게 주는 말씀같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면은 복음이 없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 기갈이라"(암 8: 11)
오늘날 굶주린 자가 누구입니까? 목마른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가 다 기갈된 자입니다. 벗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옷을 다 벗어버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입니다.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이 병든 자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서 치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치료제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고 성령의 기름을 보내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북의 우리 동포들이 너무 가난하니까 옛날에는 퍼주었지만 이제는 쏟아 부어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같은 동족이니까요. 조금 퍼주는 것 가지고 많이 주네 적게 주네 할 것이 아니라 쏟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퍼부어 주어도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입니다. 이북 땅에 갈 때마다 하늘도 메마르고, 땅도 메마르고, 산천도 메마르고, 짐승도 메마르고, 사람도 메마른 것을 봅니다. "평양의 대동강아 눈물을 흘러다오. 강물아 흘러다오."
북한이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황폐해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세요. 남한의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해서 이 나라가 이 정도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잘나서 되었습니까 정치, 경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 축복이 뭡니까? 교회가 이 땅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우리의 기도가 이 땅을 부요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민족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명령입니다.
주막집은 상처입은 사람을 데려다가 치료하는 곳인데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로 데려오셔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만 전하고 끝나버린다면 그 사람은 또 어느 때 상처를 입고 죽을지 모릅니다. 교회에 맡겨야 됩니다. 어느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내가 돌아올 때 비용이 더 들면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와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경고를 들어야 됩니다. 피하여 지나간 자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강도는 이미 악한 자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한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아는 자요, 복음을 아는 자요, 구원의 생명의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자를 피하여 갔습니다.
저는 가끔 주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신반포에 살던 사람이 주님 심판대 앞에 서서 심문을 받을 때 "그대 어디 살았는고" "예, 신반포 4차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한신교회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몰랐는가" "예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자네는 천국에 오지 못하고 이 심판대 앞에 서 있는가" "글쎄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누가 나보고 교회에 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웃집에 한신교회 무슨 집사가 살기는 살았는데 나만 보면 슬슬 피하여 갔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제사장은 목사를 말하고 레위인은 평신도를 말하는데 지나는 사람이 다 피하여 갔다는 말은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피값을 누구에게서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자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데 한 사람이 눈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그냥 가버립니다. 선다씽이 가보니 그 사람이 거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붙잡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같이 갑시다. 이 사람을 좀 살려갑시다." 하니까 "나도 힘든데 누구를 돌봐" 하면서 그냥 가버립니다. 선다씽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업었다가 놓치면 또 뭉치기하고 또 업었다가 놓쳐서 둘이 뭉치고 하면서 언덕길을 오르다가 눈 위에 쓰러져 있던 사람의 몸이 녹으면서 둘이 살아서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혼자만 살려고 먼저 갔던 사람들은 다 쓰러져 죽었던 것입니다. 같이 살려고 한 사람은 그 사람도 살리고 자기도 살았습니다. 선다씽은 그것은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남을 살리려고 하면 나도 살고 남을 살리려고 하지 않으면 나도 죽는구나!'
교회가 사는 길 딱 하나입니다. 전도하면 살고 전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의 문제가 뭡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종교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가정에 놓아두었습니까 자식을 망치는 부모입니다. 그를 데리고 교회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아이가 생명의 복음을 들어야 바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할 최고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민족을 살려놓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구원적 사건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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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