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심씨, 조선왕조의 4대 군주 세종대왕의 왕비
1408년 충녕대군 시절의 세종과 결혼했으며 세종보다 2살 연상(1395년 생)이다.
이후 세종이 왕이 되고 외척을 견제하려는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이 사사되는 등 일가가 숙청되었고...
거기에 유정현과 박은이 폐위를 주장했지만, 태종은 외척 세력만 견제하려는 의도였기에 다행히 폐위를 면했다...
이후 박은의 병환이 위중하여 졸기를 앞두고 있던 즈음, 그때 당시의 일을 용서할 정도로 맘이 넓었는데...
그러한 성품은 실록에 의해서도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 기록될 정도였다.
왕비로서도 항상 최선을 다했다.
특히 세종 8년(1426)의 한양 대화제 당시, 강무를 위해 지방에 나간 세종대왕과 세자였던 문종을 대신해서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한 게 사료에서도 전해지며...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2015_003
세자 문종의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는 등 당시 왕실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세종대왕이 조선시대 전반을 통틀어 이상적인 군주의 대표사례로 칭송 받았듯이
소헌왕후 역시 조선시대 전반을 통틀어 이상적인 왕비의 대표사례로 칭송받았다.
세종대왕과의 금슬도 매우 좋아
세자(후일 문종), 수양대군(후일 세조), 안평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등 8남 2녀를 낳았는데
이는 조선 왕조 전반을 통틀어 가장 많은 세자, 대군, 공주를 낳은 정비의 기록이기도 하다.
*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비는 태종비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가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첫 세자인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더 낳은 적이 있다.
이 셋 모두 원자 책봉전 사망해 정식 대군으로 임명받지 못한 것
세종대왕의 총 22명의 자녀 중 10명을 낳았던 소헌왕후...
많았던 자녀들과 비빈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세종대왕의 여성편력이 심했다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 관계를 들여다보면 소헌왕후를 유독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적 면모가 많이 보인다.
만년에는 병이 생겨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1446년, 이질 때문에 향년 52세로 수양대군 사저에서 눈을 감는다.
사후, 수양대군의 건의로 세종은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해 한글로 번역한 불교서적 『석보상절』 을 발간...
또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글로 악장가사를 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한글 활자본 『월인천강지곡』 이다.
* 며느리 중에서도 수양대군의 부인(훗날의 정희왕후)을 가장 아꼈다 전해지는데
도원군(훗날의 의경세자)을 출산할 때, 관례를 깨고 궁내에서 출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헌왕후가 손자 단종의 치세 때에도 살아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정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역덕들의 평가도 많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영릉(英陵)'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다.
첫댓글 내명부 관리도 엄청 잘했다고 함.
대개 역사를 보면 성군 곁엔 현숙한 왕비가 있는 법이 많죠. 중국사에서는 후한 광무제의 음려화나, 당 태종의 장손씨 황후를 보면...
한국사에선 왕건의 쿠데타 당시 왕건의 맘을 다잡도록 종용한 신혜왕후 유씨가 있었고, 조선만 해도 이전의 태종비인 원경왕후도 현명한 걸로 잘 알려졌구요.
@서초패왕 항우 왕조실록에서 보면 원경왕후가 투기가 심했다고 했는데, 아닌가요?
@소수림왕 현명한...;; 그래서 '현숙' 이 아니라고 이후 언급하려 했는데 벌써 대댓글을 다셨네요. ㅎㅎ
어떻게 10명을 ...낳으셨습니까..
첫 자녀인 정소공주가 1412년 생, 세자(문종)가 1413년 생, 정의공주가 1415년 생, 수양대군(세조)이 1417년 생으로 대군시절 낳은 자녀가 이렇게 되네요...
세종이 즉위할 당시에도 안평대군을 가진 만삭의 몸이었던...
본인의 아들을 후구에게 맡겨 키우게하기도 했죠 그만큼 후궁들 사이에서도 신뢰가 두터웠음
ㅇㅇ 신빈 김씨를 가장 신뢰해서 영응대군의 유모를 맡기기도 했다고...
이분이 살아계셨으면 수양대군 그 놈이 조카를 몰아내는 일은 절대 못했을텐데.. 참 아쉽네요..
수양대군이 가장 어머니를 잘 따랐고 효심도 깊었다고 하죠... 역심이 있어도 소헌왕후가 제지시키는 선에서 바로 끝났을 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