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관안에 들어있는 불이 켜지지 않은 수많은 전구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초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반면 사방의 거울과 조명이 서로가 어우러져 반사시켜 엄청난 빛이 향연을 펼치는 것은 반부패와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민초들의 희망입니다”
115년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초로 농민군이 승리를 거두고 반외세-반부패-반봉건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들어선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894년 당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수만의 무명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과 첫 싸움에서 승리한 자리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기존의 황토현 전적지기념관 바로 앞 부지에 자리 잡았다.
무명동학농민군을 추모하고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이 기념관은 총 39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동학농민혁명 110주년인 지난 2004년에 개관했다.
이 전시관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용했던 무기류 106점과 생활 자료 458점, 역사자료 3천832점, 서화류 54점, 종교관련 서적 319점 등 모두 4천769점 등을 전시하거나 보관중이다.
대표적인 유물은 흥선 대원군이 농민혁명군에게 보낸 효유문(曉諭文)과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의 친각 인장 5점, 전봉준 장군의 재판 기록인 공초록과 판결문 사본 등이며 기념관은 동학혁명 관련 유물을 중심으로 혁명 전개 과정을 시대별 장소별로 재구성해 전시물을 설치했으며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등 주요 세계사적 혁명 발발 원인과 영향을 설명하는 공간도 마련했다.
기념관은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 ‘농민혁명을 향하여’, ‘고부에서 전주까지’, ‘일본군에게 가로막힌 꿈’ ‘끝나지 않은 함성’ 등의 주제로 각각 운영된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1893년 고부 봉기시 이평 말목장터에 설치됐던 장두영 옆에 심어졌던 감나무(높이 4미터, 둘레 1.8미터)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고사한 감나무를 썩지않도록 방부제 등으로 복원처리한 후 로비에 전시했다.
이에 관람객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30여만여명의 혁명군의 뜻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다.
‘진혼 Ⅰ’이라는 주제로 설치된 상징조형물은 4개 강화유리박스안에 투명전구 3만개를 담았다. 3만개 전구 가운데 불이켜지는 전구는 4개곳에 각각 1개씩이다. 이는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키기전 암울했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어 ‘진혼 Ⅱ’ 주제로 설치된 조형물에서는 ‘진혼 Ⅰ’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가로 1.5미터 높이 5미터로 만들어진 스텐레스상자안으로 들어가면 9개의 조명시설은 사면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반사해 수천개로 연출되며 빛의 향연을 펼친다. 김형진 작가가 설치한 이 상징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무명용사들의 바라는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진혼 Ⅱ’ 전시공간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고 나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무명용사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진혼 Ⅱ’ 전시공간 표지판에는 “우리 모두 갑오년에 보안국민 외치며 쓰러져간 농민군의 넋을 깊이 애도를 표하고자 합니다”라고 쓰여져 있다. 즉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나오도록 하는 것은 의식적인 목례보다 무의식적으로 관람객이 예를 갖추도록 유도한 것이다. ‘진혼 Ⅱ’ 전시공간 입구 상단에는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농민혁명 대표지도자 6명의 초상화와 활동상을 담아 전시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관람객을 발길을 붙잡는 곳이 또 하나 있다.
2층 전시실에 설치된 전봉준 공초(조선시대 형사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입체 모형이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이 순창 쌍치면 피노리에 피신했다 체포된 후 재판받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재판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재판에는 일본영사 및 법무아문 재판관 등이 “농민봉기가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피고인 전봉준을 대상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과정이다. 252개 항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 재판에서 전봉준은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농민봉기는 모두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전봉준은 1895년 2월 9일(음력)부터 3월 10일까지 모두 5차례 공초를 거쳐 같은 해 3월 29일 사형판결을 받았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이같이 동학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를 만날 수 있는 전국 최대규모다.
2층 전시실에는 19세기말의 변화하는 조산의 모습과 생활상 및 양반과 농민의 밥상 등을 비교 전시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77곳을 표기해 유치원과 초·중·고등학생들에게 산 역사교육현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와 함께 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황토현전투와 농민군이 경군과 전투를 통해 전주성을 입성하는 계기를 마련한 황룡현전투 광경을 입체모형으로 설치했으며 농민군이 점령한 전주감영과 집강소 등을 디오라마로 전시하고 있다.
또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사거리 800미터, 분당 1천발의 실탄을 발사는 캐트링기관총과 농민군이 보유했던 최대사거리 70보인 화승총,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 군복 등을 고증을 통해 재현해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개인 증명서 또는 마을단위로 이를 확인하여 발간한 책자 등이 당시 농민봉기에 대한 사회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전시관에는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초·중·고·대학생 8만9천여명과 일반인 26만명, 외국인 700여명 등 모두 36만여명이 방문하는 등 역사체험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관리사무소 장황규 소장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19세기말 봉건체제 학정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서 1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항거한 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며 “당초민초들이 추구했던 반봉건과 반 침략의 역사적 대의를 후세들이 되새길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를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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