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
1) 한국의 감사절
"全國 敎會에셔 一年에 一次式 感謝할 日을 作定할 問題에 對하야 徐景祚長老가 演說하기를 我國敎會가 比前 旺盛한것이 天父의 恩惠인즉 一 感謝日을 定하고 一年에 一次式 悅樂하며 感謝하난거시 甚合하다하고 其後에 梁甸伯·金興京·邦基昌·韓錫晋 諸氏가 繼續 說明하다.") 죠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제4회 회의록. 233쪽 (이하 공의회록으로 기재)
이상은 1904년 9월 13일 午后 2시 30분부터 서울 銅峴예배당에서 회집된 제 4회 합동 공의회 회의록 일부이다. 이 때 서경조는 발언권을 얻어 감사주일 제정에 대하여 크게 연설한다.
그가 주창한 감사의 이유는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동포들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여 감사절을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이 어찌 놀라운 신앙이 아닌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일 년 농사와 많은 소출에 감사하였으나, 서경조는 육신의 풍성한 삶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한 것이다. 참으로 차원 높은 감사요, 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의 감사이다.
그는 감사의 선봉장이요, 한국 교회 감사절의 창시자이다. 그가 감사절을 지킬 것을 제창함으로써 그 해 전국 교회는 일제히 감사주일을 지켰고, 이것이 효시가 되어 해마다 감사절을 지키게 된다.
요즘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설명할 때면 으례 미국 청교도들에 의하여 제정된 것을 한국 교회가 수입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런 설명은 뿌리를 알지 못하고 가르치는 맹목적인 교훈이다. 한국 교회의 감사절은 서경조의 감사신앙이 뿌리이며, 영적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일천이백만 성도와 5만에 가까운 교회를 가진 거대한 한국 교회는 교회 설립 1세기를 넘기고 이제 21세기를 바라보는 현시점에서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절이 지켜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또 오늘의 한국 교회가 감사절의 유래를 미국 교회의 감사절을 수입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요인들이 역사 속에 숨어 있다.
서경조가 감사절을 주창하자 한국 장로들은 일제히 찬성 발언을 한다. 그리고 선교사 중에도 牟三律목사는 찬성하며 "卽時感謝日을 作定"할 것을 동의하였으나, 이상하게 "韓偉廉牧師는 委員을 選定하고 限一年間 他敎會와 相議한후" 지키기로 개의를 하니 오히려 개의가 가결된다. 회장 자벽으로 선출된 위원들은 한위렴(한위렴(韓偉廉) William B. Hunt(1869-1953)을 비롯하여 언더우드·방기창·심취명·양전백 등이다.
시간이 잠시 흘러 이틀 후(15일 오전 9시)에 속회된 회의에서는 한위렴(韓偉廉)의 보고가 다음과 같이 있었고, 그것이 가결 된다.
"韓偉廉牧師가 報告하기를 今年 感謝日은 陽曆 十一月十一日로 定하얏다 하며 鄭益魯長老가 動議하야 採用하기로 決定하다."( 앞의 책. 237쪽).
타 교파와 협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일 년간 감사절 지키는 것으로 유보하자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틀만에 감사절은 가결되었고, 그 후 위원들에 의하여 감사절은 해마다 변경되었는데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04년은 양력 11월 11일이며, 1905년은 양력 첫째 주일 후 4일 즉 목요일이며, 이날은 양력 11월 9일 (음력 10월 14일)이다. 1906년에는 11월 19일, 1908년에는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정하였는데 이날은 11월 29일 (음력 10월 14일)이다.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현명한 독자들은 이미 감사주일을 연동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고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감사절은 반드시 목요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일에 감사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목요일에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많은 수확을 감사하면서 시작된 미국 교회의 감사절은 행정관 브랫드포드(Bradford)가 감사절 지킬 것을 정식으로 선언하였으나(1623) 국경일이 된 것은 와싱톤 대통령(1789)이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정하면서부터 였고,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개정함으로써 미국의 감사일은 목요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감사일은 목요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제 1914년에 있었던 제3회 총회록을 참조한 후에 다시 내용을 정리하도록 한다.
"감샤일은 션교사 최초 도션일(양력 십일월 뎨 3회 쥬일 후 삼일(저자주: 11월 18일)로 뎡하다" 예수교쟝로회 죠션 총회 뎨삼회 회록. 1914. 29쪽. (이하 총회록으로 기재)
곽안련은 [장로교회사 전휘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感謝日은 陽曆 十一月 第三 主日後 三日(水曜日)노 定하얏난대 此난 宣敎師가 朝鮮에 始渡하던 日을 擬用하기로 한것이니라. (一九一四年會錄 二十九 頁)") 곽안련. 앞의 책. 63쪽.
이 회의록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서경조가 주창하였던 감사신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미국 교회가 지켰던 추수감사절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감사의 이유마저 선교사의 내한이라는 [변태아]가 되고 만 것이다.
총회록은 분명히 선교사가 처음으로 내한한 것이 감사해서 감사절을 지킨다고 하였다. 그것도 감사의 이유가 될 수는 있겠으나 한국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한 것은 11월이 아니다.
서경조가 감사주일을 주창한 것은 선교사의 내한이 아니라 한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동포가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 감사해서였는데, 선교사들과 총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모르고 있었는지?
당시 한국의 농촌은 관개사업의 부실로 해마다 흉년이었다. 서경조가 감사일을 정하자고 주창했을 때도 흉년으로 고생하는 지역을 위하여 교회는 구제헌금을 결의했었다.
"朝鮮語를 用하난 會에셔난 凶年을 因하야 流離하게 된 金浦 通津 白川 延安等地에 잇난 敎會를 爲하야 各敎會가 捐補하기로 決定하고"(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록. 제4회 회의록. 18쪽.(이하 독노회록으로 기재)
먹을 것이 풍성해서 지킨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먹을 것은 핍절하여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 감사해서 드린 감사 예배가 아닌가? 이런 감사신앙의 본질을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미국 교회의 추수감사절을 내 것으로 알고 지키고 있을 뿐이다.
뿌리를 완전히 잊고 있으면서도 잊었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불감증에 걸린 오늘의 현실이 너무 통탄스럽기만 하다.
이것이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아픈 과거를 씻고 이제는 우리 것을 찾아 소중하게 발전시켜 가자고 굳게 다짐하여야 한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2)
2) 유년 시절
신앙의 위인 서경조는 1852년 12월 14일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상우(相祐)이고, 경조는 자(字)였다. 서경조는 형보다 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음으로써 부모의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시련이 오히려 더 크고 깊은 그릇이 되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며칠 사이에 잃은 소년은 서당에서 배우는 한문공부를 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독학으로 한문을 익혀야 했다. 독학으로 익힌 한문이지만 말년에 아들 병호와 함께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그는 한문서적만 탐독하였다]고 손자 서재현 장로가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3) 입신동기
서경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표현대로 오랫동안의 [心中戰] 즉 번민의 몸부림이 있은 후의 일이다.
그가 처음으로 복음과 만난 것은 1878년의 일이다.
형은 벌써 여러 차례 만주를 왕래하며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그는 아직 뚜렷한 목적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만주를 왕래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觀光차로 舍伯과 其外 四人이 淸國 營口에 드러가셔"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때 그는 맥킨타이어의 사저에서 드리는 예배에도 참석한다.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가진 첫 인상은 중국인 교인들에게서 풍기는 온유와 겸손의 몸가짐이었다. 평소 접촉하는 일반 중국인들은 교만 무례하며 한국인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예수를 믿는 중국인들은 매우 [겸손]하였다. 우선 그는 이 [겸손]에 큰 호감을 가지면서 심중전이 시작되는데 "예수교 中에 必有好況也라고 하고 慕敎之心이 生한지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성도들의 겸손과 섬김은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慕敎之心]의 동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때 예수를 영접한 것은 아니다.
그 후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작으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신문화의 위대함에 현혹되어 또 다시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때에도 "井中之蛙가 大海에 나온듯 하더라, 예수교 할 마음이 더욱 나난지라"고 고백한다.
그는 역시 신중하였다.
그 후 맥킨타이어의 초대를 받고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지만 역시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한다. 그가 감동의 회오리를 계속 체험하면서도 성큼 예수 앞으로 다가서지 못한 것은 "예수교理가 엇더한지 不知"한 때문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보다는 오늘의 현실에서 신중한 검토를 거친 후 출발하려는 그의 신중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기회를 주시기 시작하였다. 그가 1883년 소래로 이주한 후 로스가 탁송한 6천권의 성경 중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을 형에게서 전해 받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성경을 탐독한 후의 사항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교 할 마암이 깁히 드러가난 동시에 그 교를 하면 被殺하리라 하난 마암이 또 생겨 心中戰이 니러나난지라."
그러나 이것은 그의 초보적인 고민이었다. 그 후 그의 心中戰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지금까지는 천주교의 박해를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오는 심중전이었으나,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心中戰의 방향이 죄와 속죄의 문제로 변천하게 된다. 더욱이 사도바울의 죽음을 초월한 신앙과 선교부분에서 그의 심중전은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큰 감동과 함께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되며, 최후로 성령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신앙을 갖기로 결단한다.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聖神 밧난일에 대하여 생각이 나기를 죽난 거슨 잠간 동안이오 죽을가 두려운 마암이 실샹 어려우니 셩신을 밧아 두려운 마암이 업스면 죽난거시 두려올 것 업고 또한 死生이 天主의 뜻대로 되리라하고 信心을 定하였으나 그래도 간간이 죽기 두려운 마암이 잇어 聖經을 만히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만히 밧으니라"
"聖經을 만히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만히 밧으니라"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뿌리이며, 초창기 한국 교인들의 진솔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자랑스런 뿌리를 가진 한국 교회는 지금 말씀의 홍수에 묻혀 말씀의 기갈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경조의 이런 心中戰은 선교사 내한 이전의 일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3)
4) 서경조의 수세
그가 신앙을 가질 것을 결심하고 선교사의 내한을 기다리던 중 1885년에 서울의 형으로부터 상경하라는 서신을 받고 상경한다. 그가 상경하였을 때에 언더우드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의 일이었다.
"셔울 사람 1인과 의쥬 사람 1인이 셰례를 밧앗더라"
이것은 분명히 1885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때 서경조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언더우드는 소래로 내려와 서경조의 차남 병호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본서에서 이미 밝혀 두었다.
이 문제는 언더우드가 언제 소래에 왔었느냐를 규명하는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수세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최초 수세자는 노춘경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885년에 있은 세례식은 노춘경의 세례식보다 먼저 있은 것이 분명하며, 언더우드는 이 사실을 숨김으로써 역사를 오도한 것이다.
5) 신앙과 성품
이삭의 장자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성격이 호탕하였으나 야곱은 가정에 조용히 거하며 내실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이 쌍둥이 형제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처럼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서상륜은 호탕한 에서와 같은 성품을 가졌고, 서경조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히, 그리고 양보와 겸양의 덕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전형적인 선비형의 인물이다. 이런 성품을 채필근목사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평하였다. 이런 성품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형성된 것 같다.
형이 1879년 세례를 받고 로스와 성경 번역에 정열을 기울일 때, 그는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 후 이들 형제는 잠시 동안 길을 달리한다.
"본국에 나온 후에 통샹 되기만 기다리더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외국과의 정식 국교를 맺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방과 자유의 시민 사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믿음에 대하여는 그 때 다시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의 전도단 일행으로 동행하던 마가가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으로써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아주 미묘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나 후에 마가는 사도 바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서경조도 처음에는 신앙의 뿌리를 쉽게 내리지 못하여 형과 헤어졌지만 후에는 한국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인물로 성장한다.
대기는 만성(大器晩成)하는 법이다.
그의 겸양의 덕은 새문안교회와 같은 해에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상량의 순서를 서울 교회에 양보한 것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인품은 그의 생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년에 있은 일이다. 소래의 제 3대 목사로 부임한 김응순목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서적을 물려 주었는데, 이에 대한 고마음을 잊지 못한 김응순목사는 친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높은 인격과 욕심없이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격찬하고 있다.
"서목사님은 존경하는 목사님으로 내가 송천교회에 부임하였을때 나를 송천의 3대 목사라고 하며 일생동안 가지셨던 서적을 모두 나에게 인계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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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래교회 설립
형과 함께하는 만주여행을 마치고 고향 의주에 돌아와 조용히 생활하고 있던 1883년 이른 봄 어느 날 갑자기 형이 돌아왔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 "봉대"에 있는 외육촌에게 은신차 떠나니 가산을 정리하여 따라오라는 간단한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동생 경조는 고향에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고 형을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때를 "一千八百八十三年 癸未年에 長淵 松川洞에 移住ㅎ게 된지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서상륜과 서경조는 소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활달한 성격과 한국을 복음화시켜 보겠다는 뜨거운 사명을 가진 서상륜이 좁은 소래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수도 서울로 떠나니 소래교회는 서경조가 전담·관리하게 된다.
1884년 로스로부터 6천권의 성경을 인수하자, 서경조도 그 성경 일부를 얻어 소래를 중심하여 황해도 일원에서 매서활동을 전개하여 언더우드 등 선교사가 입국했을 때에는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세례 지원자가 생겨, 대거 상경하여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아 명실공히 소래교회의 신앙적 지주가 된다.
7) 각종 직분
(1) 조선 교역자 임명의 초보
서경조가 정식으로 교회의 직분을 가지게 된 것은 1888년의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사기 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是時에 賣書를 選定하야 一人은 京城近方에 一人은 長淵近方에 一人은 平壤近方에 一人은 義州近方에 傳道하니 이난 朝鮮敎役者의 任命의 初步니라"(차재명. 앞의 책. 14쪽).
이렇게 하여 그는 정식으로 권서의 신분을 가지고 복음전파의 제 일선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활동을 회고하면서 언급하기를 "매셔의 직분을 밧앗스나 ㅊ을 파ㄴ 수는 업고 친구간에 ㅊ권이나 주니라"고 소극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겸손한 그의 성품과 덕을 돋보이게 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그가 언더우드의 지시를 받고 중국인에게 성경을 전달하기 위하여 원산을 왕복할 때 보여준 활동상은 너무나 능숙하고 담대한 매서활동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는 이미 생사를 초월한 전도인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서인은 활동에 제한이 있는 법이다. 매서인은 이름 그대로 성경과 쪽복음 및 전도지들을 판매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2) 해서의 조사
그는 조사의 직분도 맡아 감당한다. 조사(助事)는 지방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보조하며, 때로는 선교사를 대리하여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관리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회에 비하여 이를 담당해야 할 교역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 이들 조사의 역할은 다양하였고 때로는 조사 한 명이 5·6개처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를 하는 순회 목회자의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조사는 어디까지나 선교사를 돕는 일(Helper)이 주업무였다.
서경조가 조사의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성경공부와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그가 상경하여 성경공부를 한 후에 선교사들은 그를 대동하여 지방 순회전도에 임하곤 하였는데, 그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
그는 1893년 4월, 약 1개월간을 선교사 배위량과 함께 양산·대구·용궁·안동·전의·경주·울산·동래·상주·경주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한 일이 있었는데, 대구에서는 성경 책을 주기는 하였으나 전도는 못하였고, 상주에서는 4·5일간 유하면서 전도를 하던 중 향교에서 전도하고 [덕혜입문]을 주었더니 다음날 다시 돌려주면서 잘 보았다는 인사만을 받았으며, 불교의 도시 경주에서는 전도보다는 구경꺼리와 놀림꺼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마페트나 이눌서 등과 함께 충청도의 공주와 청주지방에서 전도를 하였다. 이 때 그는 공주에서 달력을 많이 팔고 청주로 향하던 중 어느 시장 거리에서 장꾼들에게 성경을 많이 팔고, 또 청주에서도 가지고 있던 성경을 전부 판매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순회 전도시에 선교사로부터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제안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소래로 귀환하는데,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집으로 올 마암이 나셔 회심할 수 업난지라, 배목사는 락루하며 만류하되 듯지 아니하난대 맛참 마삼열 목사가 내려와셔 간졀이 권하되 듯지 아니하고 나난 대륜션으로 仁川까지 와셔 목션으로 숑쳔에 내려 오니라. 잇때 나는 내 마암도 아지 못할거슨 부산셔 아모 연고 업시 집으로 오고만 십고 평양 가려해도 아모 연고 업시 가기실흔 마암만 낫스니 후에 생각하니 내가 부산에 잇섯던지 평양에 갓더면 내가 숑쳔에 잇지 못하엿슬 것이오 내가 숑쳔에 업스면 매킨지목사가 오시지 아니하엿슬 것이오 그러면 숑쳔에 영광의 교회가 일즉이 서지 못하엿을 것이오 숑쳔에 교회가 몬져 되지 아니하엿스면 海西에 수다한 교회가 일즉이 되지 못하엿스리라.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려니와 범사에 긔회가 잇고 사람이 긔회에 하지아니하면 모든 일이 되지 못할줄을 아노라"(서경조. 앞의 책. 95쪽).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지역은 해서 지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해서 지역 교회를 위한 조사로 만족하였고, 이 일을 위하여 선교사들의 제안도 거절하면서 소래로 귀환하여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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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산지역의 첫 열매 김기원
1893년 봄 배위량과 부산지역 전도를 하였을 때 부산 지역 최초 신자 김기원과의 만남이 있었다.
"부산셔 밋기로 작졍한 一人을 차즈니 셩명은 김긔원이라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셥셥이 떠나니라"(앞의 책. 93쪽).
김기원으로서는 이 순간이야 말로 주님의 유효적인 소명을 받은 절대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본래 부산 사람이 아니다. 대구가 그의 고향이며, 우연한 기회에 부산에서 선교사와 서경조를 만나게 된 것이다. 더우기 그는 종창이 심한 상태에서 복음을 듣게 되었는데, 이는 마치 서상륜이 만주에서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던 중 맥킨타이어를 만난 경우와 유사하다. 그는 교인이 된 후 아담스(아담스 James E. Adams (한국명; aIeueA) 1867-1929)와 브루앤(브루엔 Henry M. Bruen (한국명; 1874-1957), 어드맨(어드맨 (aUOoØ¿) Walter E. Erdman. (1877-1948).과 함께 대구지역 전도에 힘썼고, 특히 아담스의 조사로 일하며 1896년에는 대구 남성정교회의 조사로 임명된다.
대구지역은 일찌기 천주교회에서 장악한 지역으로 개신교를 이단시하여 전도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 곳에 배위량은 1년이상을 거주하며 심혈을 기울인 결과 서자명¡¤정완식 등 4,5인이 믿기로 작정하여 힘을 얻는다. 대구가 복음앞에 문호를 개방하게 될 때 선교회에서는 1천량을 지불하여 남성정의 정씨 집(20여간)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축하였고,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여러 직분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 때 김기원은 조사로 임명된 것이다.
대구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김기원이 조사가 되었으니 참으로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사기 상]을 읽고 있으면 다른 지역은 모두 개척 전도자가 한국인 조사이며 예배당으로 사용한 건물도 자체적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독 대구만은 선교사가 전도에 힘을 쏟았고, 건물도 [宣敎會에셔 金 一千兩으로 南城洞 鄭氏家 二十餘間을 買收하야 禮拜堂으로 使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자급·자족·자전을 표방하고 있는 한국 교회로서 참으로 옥의 티와 같이 유감스러운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김기원은 평양의 조선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제 6회. 1913), 동년 12월 31일 마산포교회에서 회집된 제 7회 경상노회에서 목사고시에 합격한다. 1914년 1월 16일 경상노회 임시 노회에서 임시 회장 왕길지(G. Engel(왕길지(eYNIo¤) George O. Engel. 1864-1939. 독일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사)의 집례로 안수를 받고 목사로 장립되며, 경남 창원군 소재 웅천(熊川)교회를 비롯하여 경상남.북지역에서 1924년까지 목회를 한다.
서경조가 수고하여 뿌린 씨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는 서운하게 헤어졌지만 목사가 되어 만났을 때 저들의 감회는 깊었으리라. 이것이 전도자의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20).
(4) 해서지역 개척자
소래교회가 설립된 이 후 해서지역에는 많은 교회가 앞을 다투며 설립된다. "사기 상"에 의하면 1893년 한 해 동안에 무려 14개처 교회가 설립된다. 그 중에 장연군 칠곡교회는 서경조의 전도를 받은 김치도·홍염범이 믿고 교회를 설립하였고, 문화군 사평동교회는 소래교회의 지교회로 설립되었으며 다음 해 곡산읍교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곡산읍교회의 설립내용은 다음과 같다.
"谷山邑 敎會가 成立하다. 그後 徐景祚 巡行時에 敎會가 設立되니라") 앞의 책. 28쪽.
이 부분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곡산읍교회 개척자로서의 서경조가 아니라 순행자로서의 서경조이다. 그는 소래교회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조사가 아니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할 뿐 아니라 해서지역의 여러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하여 부단히 순회하는 순회 전도자였다. 이런 일이 그 후에도 변함없이 진행되는 것을 [사기 상]은 전해주고 있다.
1905년의 서경조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공의회의 일로, 신학 공부로, 소래교회의 목회자로, 이중 삼중의 많은 일들이 가는 곳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도 그는 순회 전도자의 역할을 중단하거나 소흘히 여기지 아니한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청산교회의 설립이다.
"長淵郡 靑山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徐景祚의 傳道로 敎會가 成立되야 후에 禮拜堂을 建築케 되니라"
이런 기록들로 보아 그는 해서지역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끊이지 않았고, 이것을 그의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감당하였던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6)
(5) 장로가 되다
소래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료와 서경조의 기록에 의하면, 1895년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한 후 서경조는 장로가 된다. 그러나 교회사는 1900년에 비로소 한국교회에서 장로장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자세한 연구와 접근이 필요한 줄 안다.
우선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사료중 [장로교회사 전휘집](長老敎會史 典彙集)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敎會에셔 長老選擧난 一九00年브터 始作하얏난대 一九0一年 (英語會錄) 各道에 初次選擧한 長老난 如左하니라.
이상과 같은 기록과 함께 1900년에 선출된 장로는 평남에 김종섭, 황해에 서경조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사기 상]의 기록은 앞서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퍽 상이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소래교회의 사료를 입증해 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長淵郡 松川敎會에서 徐景祚를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를 組織하니 是乃 我國敎會의 最先 長老더라. 同時에 敎人이 協力 涓金하야 瓦家 八間 禮拜堂을 新築하얏다가 翌年에 敎人이 增多함으로 瓦製八間을 增築하니라"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배당 건축과 서경조의 장로장립이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래교회의 기와집 예배당은 1895년에 건축되고 1896년에 증축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기 상]의 기록이 1900년도의 기록이긴 하여도 기와집 예배당이 건축된 1885년에 장로장립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부분에서 서경조 자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해 가울(저자주: 1895년)에 원목사가 나려와 교회 일을 쳐리고 직분을 택할새 내가 長老 피택이 되고 金允五와 安制卿은 집사가 되니라"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서경조는 1895년에 장로로 피택되어 장립된 것이 분명하다. 매서인으로 시작한 그는 조사가 되었고 이제는 장로가 되어 해서전역을 책임지고 섬기는 자가 된 것이다.
8) 초대 당회장
조실 부모한 서경조는 배움에 대한 길이 인생 초기에 좌절되었으나 결코 쓰러질 줄 모르는 오뚜기 인생을 산 사람이다. 그가 신앙을 가지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성경을 읽는 중에 되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도 진리를 향한 향학의 불길은 무엇으로도 끌 수가 없었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서울의 사경회는 좌절되었던 배움의 기회를 다시 살리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충족도 아울러 얻는 일석이조의 배움의 터전이었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7)
(1) 사경회 참석
그가 처음으로 참석한 성경공부 모임은 1888년의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그는 분명히 말 해 주고 있다.
"1888年 茂子年 셔울셔 처음으로 査經을 시작하야 십여인이 한달동안을 공부하니라"
"이해(저자주; 1889년)에 셔울셔 또 사경을 하난대 셔울 사람과 쟝연 사람과 의쥬사람이 모여 한달 공부를한지라"
언더우드가 자신의 사저에서 신학반을 창설한 것은 1890년도의 일이다. 그는 한국 교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공부에 대한 열망과 복음 전도의 열정을 발견하고, 이들을 교육시키면 장차 좋은 현지인 사역자가 될 것을 예견하고 신학반을 창설하였을 것이다. 서경조는 이 모임에도 참석한다.
그가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은 신학반이라는 명칭에 흥미를 느꼈다거나, 장래에 목회자가 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일차적으로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며, 아울러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적 충족을 체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에도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이 때 서상륜도 함께 참석하였고 모인 사람은 16 명이나 되었다.
1893년에 있었던 사경회에 대하여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해 겨울에 셔울가셔 한달동안 사경을 하난대 한셕진은 처음으로 참예하고 량뎐백은 구경만하고 가고 우종셰는 몃날공부를 하고 가니라"(서경조. 앞의 책. 94쪽).
(2) 말씀의 능력
불붙는 열의로 성경을 공부한 서경조는 해박한 성경 지식의 소유자가 되었고 마침내 우수한 성경교사가 된다.
1901년 12월 26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셥목사가 두달젼에 황해도를 나려가셔 장연,송쳔,은률 여러 곳사로 단니다가 해쥬로 도라와셔 십오일 동안 사경을 하난대 오목사와 밋 그 부인과 셔쟝로와 김흥경씨(김흥경은 서상륜과 함께 서울지역 전도인으로 임명된 사람이다)가 가라칠때에 와셔 공부하난쟈가 사십여인이라더라"(그리스도 신문. 1901.12.26).
어느덧 그는 성경 교사와 사경 선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가 성경을 가르친 일에 대하여 언더우드 부인도 다음과 같이 그의 탁월함을 격찬하고 있다.
"또 그해에 그 지방에서 성경공부반이나 연수 강좌를 저마다 다른 지역에서 열두 군데 열기로 하고, 여섯 개는 서씨가 책임을 맡고 나머지 여섯은 지도자들 중에 가장 학식이 많은 김 윤오씨가 가르치기로 했다."
"오후에 원주민 중의 어른인 서씨가 기독교인의 갑옷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린 아주 멋진 그림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가 손수 그리고 색칠을 한 것으로 아주 알맞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는 이미 성경적 지식 뿐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구비하였고 가르치는 요령도 완전히 터득하고 있는 유능한 성경 교사가 되었음을 고하는 기록이다.
(3) 大韓 耶蘇敎 長老會 神學校
학문에의 끝없는 욕망과 의욕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말씀의 사자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신학교육의 효시는 언더우드가 개강한 서울의 신학반 성경공부이다. 이 신학반 성경공부는 일반 교인들을 상대로 한 사경회와는 성격을 달리 하고 있었지만, 당시 폭발적으로 요구하는 정식 교역자 양성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제 한국 교회는 전문적인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필요한 시점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런 때 하나님은 마페트를 예비하시고 한국으로 파송하신다. 그가 내한한 해는 묘하게도 언더우드가 신학반을 창설한 1890년 1월이다. 그는 선교지를 평양으로 정하고 활동하던 중 지방 교회가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온으로 느끼게 되었고, 느리기만한 "서울의 신학반"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자체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는 선교 본부에 교역자 양성 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서를 보내며 이를 허락할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의 선교부에서는 이를 허락함과 동시에 자금 지원까지도 약속하는 소망적인 회신을 보내 왔다. 이 회신은 마페트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고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마침내 신학교 창설 문제는 1900년에 모인 합동 공의회의 의제가 되어 만장일치로 신학교 설립원칙을 가결하고, 평양 공의회에서는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할 것에 합의한다.
이런 수순을 거친 마페트는 1901년 봄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 방기창·김종섭 두 사람을 목사후보생으로 선발하여 자신의 사저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한다. 이 해 가을에 모인 공의회는 "神學委員을 선정하야 神學의 豫備科程을 準備케하매 公議會난 臨時科程으로 採用"토록 하는 안건을 통과시킨다.
이 학교의 명칭은 190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결정되는데 최초는 大韓 耶蘇敎 長老會 神學校이다. 이 명칭은 한일합병 후 [大韓]을 [朝鮮]으로 변경하여 朝鮮 耶蘇敎 長老會 神學校(이하 평양신학교로 기입한다)로 개칭된다.
신학교육은 출발되었으나 초창기는 예비단계로 신학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 신학과 5학년의 전과목이 결정되고, 평양 공의회가 추천한 길선주·양전백·이기풍·송린서 등이 추가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신학교육의 면모를 갖추어 가게 된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8)
(4) 서경조의 입학
평양의 신학교가 점차 본 궤도에 진입하여 1904년에는 전년까지 이수한 학생이 6명으로 모두 3학년이 되었고, 이 해는 17명이나 지원하는 대성황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지원자가 증가하자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 신학생을 엄선할 필요를 느끼고, 이 해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 학생만을 선발하여 좋은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여, 17명의 지망생 중 합격자는 15명으로 2명의 불합격자가 발생한다.
신학교의 난립으로 무분별하게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오늘의 신학 당국자들은 한번 고려해 볼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이 해에 특별히 편·입학한 학생 2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서경조와 한석진이다. 이들은 조사로서의 예비과를 마쳤을 뿐 아니라 교회시무 경력과 학식이 처음 입학한 6명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것을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하는 특전을 받는다. 이 때 서경조는 56세의 만학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신학 교육을 정식으로 마친 목사로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내리신 것이다.
(5) 제 1회 졸업
평양신학교가 개교한 지 5년째 되는 1907년은 재학생만도 75명이나 되는 유수한 학교로 발전하였고, 이 해 6월 20일은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 졸업식은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거행된다.
제 1회 졸업생의 영예를 누리게 된 얼굴들은 황해의 서경조(58세), 방기창(58세), 길선주(40세), 이기풍(40세), 송린서(40세), 한석진(41세), 양전백(39세) 등 모두 7인이다. 이들은 제 1회 졸업생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는 영광도 아울러 얻게 된다.
어려서부터 외롭게 살아온 서경조,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일어나 주님을 위해 삶을 헌신했을 때 주님은 결코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택한 그릇으로 귀하게 쓰임받기를 소원한 그를 주님은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신학교 제 1회 졸업의 영예를 안겨 주었고, 한국 교회의 열화와 같은 박수와 환영을 받으며 교문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실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 금과 은의 그릇"(딤후2:21)이 된 것이다.
(6) 독노회 조직
신학교에서 졸업생을 배출하면 다음에 있을 절차는 이들을 안수하여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한국에 자체적인 노회를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목사를 장립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외국 선교부에 속한 목사로 장립하는 일이다.
이런 일에는 모두 난관이 있었다. 난관 중 최대의 난관은 내한한 선교사들의 출신이 각기 다른 데서 오는 문제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러나 내한한 선교사들은 하나의 장로교를 조직하기를 원했고, 이런 소망과 기대를 본국 선교부와 협의하게 된다.
또 다른 난관은 한국인 목사가 계속 배출되었을 때 언젠가는 선교사의 수보다 한국인 목사의 수가 많아질 것이고, 이렇게 되면 선교사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각국 선교부는 하나의 장로교 설립을 허락하였고, 이에 따라 1905년 선교사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게 된다.
첫째, 1907년에 朝鮮 耶蘇敎 長老會를 조직하고 둘째, 노회 조직과 동시에 한국인 목사를 장립하며 셋째, 각 지교회에서는 목사 청빙서를 노회에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1906년에 개회된 선교사 공의회에서는 노회 조직과 관련된 결의를 계속하는데, 첫째, 노회가 조직되면 한국인 공의회는 자동적으로 폐지되며, 둘째, 노회 총대는 목사와 장로로 한정하되 총대는 언권과 투표권이 있도록 하였다. 셋째, 노회 창립 절차는 1906년도 공의회 회장이 창립 노회 소집장이 되어 임시 회장직을 수행하되, 노회의 성격과 조직의 절차만 설명한 후 기도로 노회를 설립하고 노회 조직을 공포하기로 하였으며 임원 선거는 조직된 노회에서 새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신학 졸업자에 대한 목사안수 절차는 첫째, 공의회가 신학 졸업자들을 고시한 후 장립할 것을 노회에 청원하며 둘째, 목사 고시위원은 공의회의 신학 교육위원들이 주관하기로 하고 셋째, 목사 고시를 받을 7인은 그 해에 주석 한 편과 설교 한 편씩을 고시위원에게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것으로 목사장립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된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9)
(7) 목사장립과 축도
"쥬 강생 일쳔 구백 칠년 구월 십칠일 샹오 두시에 평양 쟝대재 례배당에셔 작년 공의회 회쟝 배유진목사가 사도행젼 일쟝 팔졀에 우리 쥬 예수께셔 마자막 분부하신대로 증인이라고 강한후에 긔일목사는 떡을 가지고 츅샤하야 장로들노 난호며 배유진목사는 포도즙을 가지고 츅샤하야 장로들노 돌려셔 셩챤례식을 거행니라.") 독노회 제 1회 회록. 4쪽.
역사적인 사건은 시작되었다.
한국에 개신교의 씨앗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75년, 최초의 민족 교회가 설립된 지 24년, 선교사가 입국한 지 22년만에 드디어 노회가 조직되고,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장립을 받게 되는 감격의 순간이 온 것이다.
창립 노회는 동일 하오 2시에 다시 속개되어 임원선거를 한 바, 마포삼열(S. A. Moffett)은 회장에, 한석진은 서기에, 송린서는 부서기에, 회계에는 이길함(G. Lee)이 각각 피선된다.
회장은 목사 후보자에 대한 고시를 허락하였고, 고시위원들은 각기 과목을 따라 면접고시를 실시한다. 이 때 "고시를 담당한 위원은 14명이며 특히 이눌서는 신학을, 안이와는 정치를, 전위렴은 교회사를, 기일은 성경을 담당"(앞의 책. 8쪽)하였다. 이들의 문답에 대하여 배위량은 만족을 표시하였고, 이들이 제출한 설교와 주해만 합격되면 저들은 모두 고시에 합격이 되는 것이다.
동일 하오 7시 30분에 속회된 자리에서 회장은 다시 이들의 논문과 설교의 결과를 묻고 무흠한 것을 보고받자 곧 장립 절차를 취하게 된다.
이제 회의록을 통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도록 한다.
"회쟝이 각 시재 검사위원의 보고에 거리낌이 업산 즉 차용하기로 공포하시고 신학사 셔경조, 한셕진, 송린셔, 량뎐백, 방긔창, 길션쥬, 리긔풍 칠인을 호명한후에 신학 졸업한 것과 여러해 젼도쟝 리력을 셜명하시고 목사로 쟝립할 거슬 공포하시니라.
회쟝이 목사장립할 닐곱 사람의게 대한 장로 교회 졍치를 인준할 것과 목사되랴난 마암이 일뎡함을 무르신 후에 로회회원의게 안슈하기를 허하시며 우리와 같흔 직분을 위임하라 하시다.
회쟝 마삼열씨는 긔도하시며 로회회원들은 일졔히 신학사 셔경조, 한셕진, 송린셔, 량뎐백, 방긔창, 길션쥬, 리긔풍 칠인의게 안슈한 후에 우슈로 집수례를 행하야 목사로 쟝립하니라.
목사로 장립한 칠인의게 긔일씨는 바울의 온유와 인애와, 베드로의 긍휼과 겸손으로 부탁하시며, 리눌셔씨는 후딤 일쟝 십사졀에 직히난 뜻과 일치 아니할 뜻으로 부탁하시며, 셩셔공회 대표 민후씨는 번역한 극픔 신약 칠부를 션사하시며 이 책은 예수의 말삼을 번역한 책인줄 아시거니와 우리는 행실노 예수를 셰상 사람의 앞혜 번역하여야 하겟다고 권한후에 리길함씨가 일백이쟝 깃븐 챤송으로 인도하니라"( 앞의 책. 10쪽).
7인의 목사장립은 자신들 뿐 아니라 한국의 전체 교회가 영광으로 생각하는 감격의 순간이었으며 선교사들에게도 가슴뿌듯함을 안겨 주는 순간이었다.
이런 영광스런 날 서경조는 또 다른 영광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祝禱]를 한 것이다. 이 영광은 7인 중 오직 서경조만 누리게 된 축복이요 영광이다.
"회쟝이 셔경조씨의 츅복긔도 함으로 폐회하다."( 앞의 책. 11쪽).
목사를 장립하는 예식에서 장립받은 목사가 축도하는 것은 이 때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노회의 전통이기도 하다.
(8) 당회장 부임
1907년 9월 19일 상오 8시 45분에 속개된 노회에서 안수받은 7인 목사에 대한 임지가 결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새로 장립한 목사 칠인 중 일인을 선교사로 파송할 일.
2. 이기풍씨를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
3. 방기창씨는 용강, 제재, 주달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4. 한석진씨는 평양, 장쳔, 미림, 이천교회 전도목사로 정할 일.
5. 송린서씨는 증산·한천·외서장, 영유, 허리몰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6. 길선주씨는 평양 장대재 지교회 목사로 정할 일.
7. 양전백씨는 선천, 정주, 박천 등지에 위대모(Norman C. Whittemore. (1870-1952)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
8. 서경조씨는 장연, 옹진 등지에 사우(C.E.Sharp. (1870-1952)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
9. 전도목사 6인의 사례비는 각 당회 위원에게 담임하여 지출케 할 일.
10. 지교회 목사 위임례식은 그 당회위원에게 전임할 일.
회장이 이상의 10개조를 일일히 묻고 회중이 동의하여 가결· 결정하였다.( 앞의 책. 19쪽).
회쟝이 우항의 십됴를 일일히 무르시매 회즁이 동의야 가로 결뎡다.) 앞의 책. 19쪽.
이리하여 서경조는 영광스런 최초의 목사가 되어 소래로 귀환하니 소래 교인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리고 2년간 해서 지역의 교회를 돌보는 유일한 한국인 목사가 되었다.
서경조는 자신의 글에서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천구백칠년에 신학을 종업하고 목사 쟝립을 밧으니 나이 오십욕세라 海西 각 교회 젼도 목사로 이년간을 시무하고"( 서경조. 앞의 책. 106쪽).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0)
9) 공의회와 서경조
한국에 내한한 여러 선교사들은 한국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한편 피선교지 교회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생하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저들은 개 교회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교회를 조직하여, 양성된 인재들에게 교회를 인계해 주는 절차를 밟으면서 선교사가 걸어야 하는 정석의 길을 착실하게 걸었다. 이런 과정은 선교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토착화하여 아름다운 열매가 되도록 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1) 공의회 시대
내한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조직인 공의회를 1889년에 일차적으로 조직하였으나 이 조직은 쉽게 무산되었고, 1893년에 다시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한다. 각 지방에 교회가 늘어남에 따라 선교사 공의회는 각 지역별로 위원회를 두기로 하여 1895년에 서울 위원회와 평안 위원회를, 1901년에는 전라·경상 양위원회를, 1902년에는 함경 위원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 선교사 공의회의 성격이 선교사들의 자체 기관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 교회의 자치 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대표를 참석시키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사실을 간파한 선교사들은 1901년부터 본 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참석시키기로 하여 1902년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회의에 한국인 장로 3명( 참석한 장로는 서경조, 방기창, 김종섭 등이다)과 조사 6명이 처음으로 참석한다. 한국 교회의 대표가 공의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매우 평범하고 당연한 것 같지만 한국 교회의 역사 진행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사실을 공의회 회의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朝鮮은 各處에 敎會를 設立한지 數年에 아직 堂會는 設立되지 못하였으나 議論할 事件이 太多한고로 自今爲始하여는 全國 支會가 一處에 會集하야 議論하게되며 그 名稱을 朝鮮長老會 公議會라 하니 이는 將次 老會가 成立될 張本이라"
1901년 9월 20일
梁甸伯 謹書"(곽안련. 앞의 책. 214쪽).
한국의 대표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실습하는 것은 앞으로 노회와 총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때를 대비한 매우 요긴한 작업이었다.
(2) 초대 서기 서경조
한국의 장로와 조사가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의 현안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공의회에 참석한 역사적 현장에서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되어 왔던 서경조는 또 다른 입장에서 교회에 이바지한다. 그의 섬김은 우선 그에 대한 전국적인 신망을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때 모인 모든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서경조를 서기에 천거한다. 이 사실을 제 1회 공의회 회의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會衆이 公薦하여 徐景祚氏를 書記로 擇定함"( 앞의 책. 215쪽).
물론 회의를 진행하는 일이나 업무를 관장하는 능력이 뒤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한국 교회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회장에는 소안론(W. L. Swallen)선교사가 피선되고 서경조는 서기가 된 것이다.
이 회의는 한국 교직자들에게 행정실습을 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장차 조직될 노회를 위한 예비 조치였다. 이런 훈련 현장에서 그는 제 일차로 서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른 역할을 겸하여 훈련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개회 예배의 인도이다.
"徐景祚氏가 聖經을 朗讀하고 祈禱한 後에 會長이 開會하다"( 앞의 책. 215).
그가 개회 예배를 인도하였다는 사실은 서기로 피선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서기로 발탁
첫째, 그가 서기로 발탁된 것은 교계의 원로에 대한 예우의 성격도 있겠으나, 그가 개회 예배를 인도하였다는 것은 원로에 대한 예우적인 처사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앙 인격과 해박한 성경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둘째, 이제는 회중에서 성경을 읽고 예배를 인도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인 장로나 조사들이 성숙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공의회 사역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계속 감당하게 된다.
첫째, 매년 회집될 공의회의 정식 명칭을 제정하는 위원이 되었고, 이 위원들이 결정한 정식 명칭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이다.
둘째, 경기 김포지역과 황해도 백천지역에 대흉년이 들어 구제의 필요를 느끼고 있을 때, 전국 교회가 이에 호응할 것을 요청하는 공문 기초위원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공문은 전국 교회의 신망을 얻고 있는 분의 명예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였을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1)
(3) 성경교정 문제
제 3회 공의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글 성경 교정을 마페트에게 맡기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 때 방기창, 김흥경 등은 선교사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찬성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서경조는 심양과 서울에서, 그리고 펜윅과도 원산에서 성경 번역을 한 경험이 있어 외국 선교사들의 어학실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일에 강력히 반대 의견을 제기하며 그 부당성을 역설한다. 그러자 양전백, 한석진 등도 함께 동참한다. 마페트에게 일임하려던 계획은 서경조의 반대로 일단 주춤하게 되었고, 제 4회 공의회에서도 많은 논란을 거듭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되자 결국 연구위원을 선출하여, 제 5회 공의회에서 결의되기를 "國文 矯定하는 하는 事난 前과갓치 玉篇과 字典에 있난대로 施行하기로 하얏다(곽안련. 앞의 책. 246쪽)는 연구위원들의 보고가 채택되면서 3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매듭을 짓는다.
서경조는 양보와 관용의 넓은 도량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국 교회의 장래와 관계된 중대한 문제까지 묵인하고 넘어가지는 아니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선교사들과 약간의 갈등과 마찰이 예상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경우일지라도 결코 양보치 아니하였고, 한국 교회의 기틀을 올바르게 잡아가는 데만 전심을 기우렸다.
(4) 嘉尙한 事
서경조가 공의회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면 교회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 3회 공의회 때의 일이다.
그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을 이해하는 안목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는 차원이 다른 입장인 것을 알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各 傳道處에 嘉尙한 事를 說明할 問題에 對하야 徐景祚長老가 演說하얏고 惟獨 王吉志牧師난 敎會에 關廬되난 事로 說明함"(앞의 책. 227쪽).
그렇다. 서경조의 입장에서는 연약한 교인들이 열심으로 전도하며 수고할 때 약간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가상하게 보였고, 그래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교회 원로의 이런 언행은 전국 교회의 성도와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서경조의 발언이 있자,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송린서 조사, 김윤수 집사, 홍순국 교사, 길선주 장로, 한석진 조사, 김필수 교사 등은 즉시 일어나 그의 발언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왕길지만은 염려되는 부정적인 일에 대하여 발언을 하였으니 생각과 행동의 깊은 골을 보게 된다.
(5) 경애(敬愛) 사상의 주창자
제 2회 공의회에도 그는 장로 총대로 참석하게 되며 투표로 서기에 피선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의 업적은 더욱 화려해진다.
첫째, 제 2회 공의회부터 주로 취급되는 주요 의제들은 교회관리 부분이며 이를 위하여 많은 토론이 전개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헌금 관리, 부흥회 문제, 미자립교회 관리 등등이다.
회의 분위기가 교회 내적인 문제에 제한되는 듯한 상황에서 서경조는 일반 윤리와 기독교 신앙의 연결고리에 대하여 발언한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을 소흘히 하기 쉬우며, 이런 사소한 문제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부각시켜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계기가 된다.
서경조는 일반 사회에서도 존경 받고, 강한 교회의 위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윤리적인 삶을 강조한 것이다.
"信者가 尊貴한 사람의게 절하는 것이 如何한가하난 問題에 대하여 徐長老가 演說하매 諸會員이 繼續 說明하다"( 앞의 책. 221쪽).
교계의 원로가 발언한 내용을 한국 교회는 보다 일찍 듣고 실천했어야 했다. 그리하였으면 오늘의 교회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터인데...
둘째, 제 3회 공의회에서는 구제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한다. 이 때의 문제는 경상남북도에 흉년이 극심하여 이재민이 발생한 것을 그 지역 대표 김덕영, 김영찬 등을 통하여 보고를 받고 구제할 것을 가결한다. 남쪽에 대한 지원이 쉽게 가결되자 이번에는 북쪽에서 사역하고 있던 양전백이 평북 강계 등지에도 흉년으로 구제의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자 회의는 미묘한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 이제 어느 한쪽에 편중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고, 물질로 인하여 상처를 입기 쉬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은 일반 사회나 교회를 막론하고 퍽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풍부하지 못한 재정을 가지고 도와 주어야 할 곳이 많을 때 자연적으로 갈등과 난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이 문제를 조율할 위원의 선출이 필요해졌고 서경조, 길선주, 김영제 등을 선출하여 전권을 위임한다. 어찌된 일인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위원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미묘하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 구제의 일을 잘못하여 교회에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교회의 전권을 가진 사도들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를 가진 집사들이 난제를 해결하였던 것처럼, 외국의 선교사들보다 오히려 한국인 장로들이 슬기있고 덕스럽게 이 문제를 협의하여 처리하게 된 것이다.
셋째, 제 2회와 제 4회에서도 개회 예배를 주관하게 되며, 특히 제 4회 개회 예배시에는 빌립보 2장에서 본문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徐景祚 長老가 緋二章을 보고 禮拜節次를 行한後 祈禱하므로 會長이 開會하다"( 공의회 제3회 회록. 232쪽).
(6) 최대의 공헌
"一千九百一年부터 一千九百六年까지는 老會가 設立되기 前 其 六年間에 年年이 朝鮮 長老會 公議會가 모혀 朝鮮語로 일을 만히 처리하엿스나 其時에는 會錄을 인쇄하는 풍속이 엇서셔 會錄이 無함으로 公議會에셔 일을 엇더케 하얏난지 不知하얏거니와 今年에 其年 總會書記가 筆記한 會錄一件을 차졋스니 全敎會에 有益케 하기 爲하야 此冊附錄에 謄本하노라"( 앞의 책. 213쪽).
당시에는 "會錄을 인쇄하는 풀속이 없음으로 敎會가 公議會에서 일을 어떻게 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총회 서기가 성실하게 기록 보관하였던 "會錄一件"이 발견된 것이다.
이 회의록은 초대 서기였던 서경조가 성실히 기록하여 후배 서기에게 물려줌으로써 한국 교회의 보배로운 역사적 자료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가 남긴 많은 업적 중에서 이 한 가지만으로도 만고에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기록이 없는 역사는 왜곡되고 잊혀지기 쉬우며 영구한 아쉬움을 주기 때문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2)
10) 독노회 시대의 서경조목사
한국의 장로교가 독노회를 조직하고 7인의 최초 목사를 장립함으로써 이제부터 독자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었다.
(1) 목사 회원의 의무
그는 노회에 속한 목사회원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감당한다.
노회 회원으로서의 첫째 의무는 노회에 성실하게 참석하는 것이다. 그는 교만도 자만도 아니하고 일개 회원의 자격으로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기 위하여 매회마다 참석하기를 소흘히 하지 아니한다.
1908년 9월 6일 오후 2시에 제 2회 정기노회가 서울 연동교회에서 모였을 때의 일이다. 그는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이 때 그가 봉독한 성경본문은 사도행전 9장 31-35절과 10장 14-16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리시는 주님의 은혜를 노회원들에게 전하여 큰 은혜로 끼친다.
제 4회 노회에서도 예배를 인도 하였으며, 고전 13장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사랑에 강도와 긔도로 개회"하게 하였다.
이 때 그는 마페트¡¤위대모¡¤방기창¡¤이눌서¡¤왕길지¡¤길선주 등과 함께 별위원에 선임되었고 수임한 안건은 평북대리회에서 헌의한 축첩자의 원입 문제와 혼인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때 별위원 서기로 피선된 서경조는 헌의에 대한 문제외에도 교회안에 유입되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사회의 인습 전체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결의·보고한다.
별위원 서경조씨가 보고함이 여좌하니
(1) 혼인은 본디 방목사와 장로 조사께 의론하고 쥬관케 할 일
(2) 다리 사위나 밋 며나리 다리난 교인은 경계 할 일
(3) 쳡잇난 사람은 원입을 세우지 못할 일
(4) 교인의 셩명옴기난 일에 대하야난 졍티 됴사위원끠 맛길 일) 앞의 책. 15쪽.
이 때 별의원 보고에 나타난 대로 교인들의 이적문제는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문란하고 질서가 없다. 선배들이 수립한 좋은 전통을 후배들은 하나씩 둘씩 무너뜨리고 있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기강도 조금씩 해이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주소이다.
제 1회 노회에서 그의 임지는 장연¡¤옹진 등지를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제 2회 노회에서는 송화 남쪽과 장연, 옹진, 강령 등으로 활동무대가 한층 더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2) 고시위원
제 3회, 제 4회, 제 5회 노회에 걸쳐 서경조는 계속 고시위원으로 선임되어 장립받는 목사들을 고시한다. 이 때 그에게 고시를 받은 목사 중에 [한국의 무디]라고 할 수 있는 김익두목사( 김익두(1874-.950), 장로교 목사, 부흥사, 평양신학교 졸(3회, 1910).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 9회 총회장 피선(1920), 부흥회시에 많은 이적이 일어남. 1950년 10월 14일 후퇴하는 북한 인민군에 의해 신천 서부교회에서 피살, 순교.)를 거명할 수 있다. 그가 담당한 과목은 [성경 래력]이다.
서경조는 오랜 心中戰 끝에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한국 교회의 기초를 놓았으며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제 그는 많은 목사를 장립하는 노회 고시위원으로 선임되어 제 3회 노회에서 8인, 제 4회 노회에서 무려 25인, 제 5회 노회에서 17명의 목사후보생들을 고시하여 장립한다.
많은 목사를 장립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특히 김익두목사를 고시하여 장립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생각된다. 서경조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주님은 그의 대를 이어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룰 다음 주자를 그의 손으로 세우게 하셨고, 더우기 성경 과목을 고시토록 함으로써 성경 중심의 교회로 전통을 이어 가게 하신 것이다.
이제 교회 창설자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부흥의 횃불을 들고 일어설 후속 주자가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3) 기타 노회활동
제 3회 노회에서 규칙위원에 선임되어 상비부 활동을 시작하였고 제 4회 노회에서는 정사위원이 된다. 정사위원은 후에 정치부 혹은 임사부로 개칭되며 노회의 정치적인 업무 일체를 담당, 처리하는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이 때의 정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한위렴,소안론,윤산온, 서경조, 마로덕(마로덕 Luther O. McCutchen. (1873-1960)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1902년 내한. 전주 동부지방 책임선교사. 무주군, 진안군, 익산군, 금산군 등지에서 활약. 일제말 강제 추방령에 의해 귀국.)이기풍, 왕길지, 이원민, 마구례, 최관흘, 윤태흠, 정기정 등 12명이다.
제 5회 정기 노회에서는 공천위원과 각 대리회의 회록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어 남평안 대리회록을 검사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본 대로 그는 노회에서 부과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으로 섬긴 모범적인 한국 교회의 원로요 노회원이었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3)
11) 중앙 무대에 서다
(1) 새문안교회 목회
제 3회 정기 노회는 1909년 9월 3일 9시 평양신학교에서 개회된다. 이 회에서 그는 서울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사역하는 동사 목사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서경조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font size="1" face="굴림"> < /font>"경셩에 올나가 렴젼동교회와 졔중원교회와 셔편 六郡에 잇난 교회를 五年´동안 시무다가".
이 때의 일을 새문안교회 70년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font size="1" face="굴림"> < /font>"하나님의 도와주심과 온 교우의 불철 주야의 수고의 결정(結晶)으로 마침내 1910년 5월 22일 주일에 준공이 되어 교인들은 새로운 예배당으로 옮기였고 다음 주일인 5월 29일에는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니 교인들의 기쁨은 비길 데 없었다. 그 때의 참석한 인원은 약 450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은 예배당 밖에 서 있었다. 예배당 건축자는 중국인 청부업자인 장(Mr. Harry Chang)이였고 그 때 우리 교회는 염정동(廉井洞)예배당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기쁨은 그것만은 아니였다. 동년에 우리 교회는 언두욷목사를 도와서 동역자로서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인 서경조(徐景祚)목사가 동사 목사로 시무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목사로서 언더욷목사를 도와 일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 송천에도 왕래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새문안교회70년사. 앞의 책. 48쪽).
이 때의 일을 [사기 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font size="1" face="굴림"> < /font>"一千九百十年(庚戌)에 京城 新門內敎會난 宣敎師 元杜尤牧師 徐景祚의 勤勞로 振興되야 三百餘名 信徒가 合心協力하야 華麗廣大한 禮拜堂 廉井洞(今 西大門町 二町目)에 移建하니 敎勢가 漸益進展하니라"(차재명. 앞의책. 197쪽).
새문안교회 초창기에 그는 조사로 이 교회를 섬겼으나, 이제는 장립 받은 목사로 성도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부임하여 중앙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그의 감회는 그를 맞으면서 기뻐하였던 새문안교회 성도들 못지 않게 충천하였으리라.
(2) 경기지역 순회 목사
제 4회 독노회록에 서경조의 활동 반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셔경조씨난 셔울 렴졍동과 남문밧, 고양, 시흥, 파쥬, 교하, 통진, 김포 등디에 원두우목사와 동사 젼도 목사 될일"(독노회 제4회 회록. 18쪽).
향후 5년간 경기지역 전도목사로 봉사하게 된다. 서경조가 경기지역 순회 목사로 부임할 당시 이 지역의 교회 사정은 다음과 같다.
[사기상]에 의하면 남한에 설립된 교회 중 첫째는 부산 초량교회(1893년)이고 두 번째가 용인군 백봉리교회(1894년), 그리고 세번째가 광주군 신대리교회(1895년)로 되어 있다.
서경조가 담임하였던 김포·고양군 등지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97년에 고양군 행주교회·토당리교회(현 능곡교회), 김포읍교회 등이라고 한다. 그 후 김포군 송마리교회·파주군 문산리교회(1901년)가 설립되었고, 김포군 두산리교회와 시흥읍교회(1904년) 시흥군 영등포교회(1905년), 시흥군 광명교회, 가학리교회, 노량교회 김포군 용강리교회(1906년), 양주군 지사리교회, 부평리교회, 파주군 죽원리교회(1907년) 등 10여 처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가 담임한 지역 중에 교하와 통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순회 목사로 파송된 것으로 보아 그 곳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증명하는 글을 [사기 상]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牟牧師가 動議하기를 경기도에 金浦, 通津과 黃海道에 延安, 白川에 大凶年이 되야 該處敎友가 流離하니 其 情勢가 可矜한 즉 勉力救濟하자하매 會中이 繼續 說明하고 可決한 後에..."
이상은 1901년 공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흉년으로 고생하는 교회를 돕기 위하여 전국 교회가 헌금을 하기로 결의한 내용이다. 이 때 경기도 통진에 있는 교회를 돕기로 결의하였으나 이 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사기 상]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 곳의 교회를 돕기 위하여 헌금하기로 하였으니 이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기 상"에는 에는 누락된 교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
김포읍교회 설립에 관한 기사에서도 이런 누락된 부분을 발견하게 한다.
<font size="1" face="굴림"> < /font>"金浦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高陽郡 細橋敎人 高君甫와 其妻 朴撤羅米가 當地에 到하야 熱心傳道 함으로..."(차재명. 앞의 책. 39쪽).
[사기 상]에는 세교교회의 설립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細橋敎人 高君甫"에 대한 거취를 분명히 밝힐 수 없다. 세교에 있는 교회 교인이지, 아니면 세교인으로 타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교인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高陽市 細橋里敎會의 小學校"(차재명. 앞의 책. 177쪽.)라는 [사기 상]의 기록으로 보아 세교에는 일찌기 교회가 설립된 것이 분명하며, 세교교회의 설립기사가 [사기 상]에 누락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추적해 보면 통진, 세교, 교하 등지의 교회는 설립이 되어 있으면서도 [사기 상]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 교회였고 이런 사례로 보아 그 외에도 누락된 교회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경조는 서울과 경기 일원, 황해도와 평안도지역 등을 왕래하며 교회를 설립하는 평신도 개척 전도인이었으나, 이제는 목사가 되어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서울과 경기 북부지역의 열심있는 평신도 전도인들이 섬기는 여러 교회들을 당회장의 직임을 가지고 보살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4)
12) 은퇴
그가 새문안교회를 시무하는 동안 김규식을 장로(1910년 12월 18일)로 장립하여 당회를 보강하였고, 다시 차재명 조사를 장로(1912년 10월 27일)로 장립하여 교회를 든든한 기틀 위에 세운다.
이런 서경조가 1913년 62세의 나이로 돌연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고 제 2의 교향인 소래로 내려 온다. 이 일에 대하여 서경조 자신은 "一千九百十三年에 교회 사무를 다 놋코 근노 퇴로목사로 숑쳔에 내려와 있다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 모인 경기 노회에서는 그의 사임을 퇴양향리(退養鄕里)의 명목으로 이의없이 받는다. 그의 사임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앙금으로 남는 듯하다.
그의 사임 이유가 [퇴양향리]혹은 [근로퇴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노쇠하여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 고향에 내려가 쉬겠다는 뜻이다. 그의 건강이 그렇게 쇠약해졌을까?
은퇴 후에 그는 잠시 동안이지만 서울 안국교회에 부임하여 (1916년) 다시 목회일선에 복귀한 때도 있다. 더우기 아들이 있는 상해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따라 상해와 천진 등 객지를 전전하면서도 87세(1938년)까지 장수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가 어찌 [퇴로향리]일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없지 아니하다.
그는 소래에 내려와서도 일체 교역에 복귀하지 아니한다. 평생을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그가 아닌가? 초기 선교사들이 부산에서, 평양에서 동역하기를 권할 때 오직 소래로 귀향하여 소래교회와 황해도 일원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기를 소원하였던 그가 아닌가?
소래로 귀환하여 자신이 개척하고 가꾼 소래교회를 조용히 섬기며 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것까지 거절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 교역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가 단순히 후배들의 앞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心中戰]이 다시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한국교회의 정치 현장에서 풍겨오는 부패한 악취 때문에 이런 현장을 회피한 것은 아닐까?
평생을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전국을 누비며 섬기던 서경조의 목회가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린 데 대하여 좀 더 깊이 묻고, 살펴 정확한 해답을 내려야 할 부분이 과제로 남는 것 같다.
13) 안동교회 당회장
안동교회는 민준호(閔濬鎬)를 위시하여 많은 양반들이 모이는 교회로 [양반 교회]로 불리운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8년 승동교회 교인 이여한¡¤황기연과 연동교회 교인 박승봉¡¤유성준 등이 김창제의 집을 기도처로 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하면서 설립된 교회이다.
익년 3월 곽안련(C. A. clark)은 이 교회에 3백원을 헌금하여 초가집을 구입하였으며, 한석진이 초대 위임목사로 청빙된다. 이 교회는 설립되면서부터 계속 교인 수가 늘어 초가집으로서는 교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윤치오¡¤민준호¡¤황기연 등이 주동이 되어 건축헌금을 하였고, 당회장 한석진과 장로 박승봉의 노력으로 종로구 안국동에 300여평 대지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신축한다.
교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곳이다. 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자진하여 출석하는 교인을 쫓아낼 수는 없다. 교회의 이런 특성상 양반들이 모이는 이 교회에 일반 서민들이 모인다고 하여 이를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회에도 양반이 아닌 일반 서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평온하던 이 교회는 반상(UißE)의 갈등이 생기고, 어느덧 불편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더우기 한석진목사가 새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사회의 통념으로 되어 있는 남녀석 구분의 휘장을 철폐함으로써 양반 교인들에게 당혹감을 주었고, 이 결과 교회는 더 이상 편안과 위로를 받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키는 장소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일부 반대자들의 압력에 의하여 한석진은 사임하고 (1916년 3월) 마산으로 임지를 옮기었고 그 뒤 약 5개월간 목회자 없는 교회가 된다.
담임목사가 없는 5개월간, 교회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교계의 원로이며 선비형 목사인 서경조가 임시로 청빙(1916년 8월)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새문안교회를 사임한 후 소래에서 조용히 기도와 명상으로 여생을 보내기로 작정한 그는 다시 서울로 올리우게 되며 잠시 어려운 교회를 담임하게 된다. 그는 교계의 원로답게 교인들을 안돈시키며 믿음과 덕으로 이 교회를 수습하여 평화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다시 소래로 귀환한다.
14) 망명
그는 말년을 중국 상해에서 지냈다. 그가 모든 사역을 마치고 소래로 귀환하였을 때 그의 자녀들은 장성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가고 있었다.
장남 광호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와 의사의 길을 가고 있었고, 차남 병호는 교육계에 헌신하고 있었다. 이미 밝혔듯이 차남 병호는 1885년 9월 소래에서 언더우드에게 한국 최초의 유아 세례 교인의 영예를 누리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1893년에는 8세의 나이로 상경,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민노아 학당(경신 중·고등학교 전신)에서 1년간 신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1901년에 다시 상경하여 경신학교에 입학, 1905년에 단신으로 제 1회 졸업생이 된다.
그는 소래의 유지 김윤방씨 가문의 김구례와 결혼한 후 해서제일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대성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및 학감으로 봉직하였으나 1914년 9월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다시 중국 남경 금릉대학 철학과에 입학, 학업을 위하여 고국을 떠난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안 독립운동 지사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조국 광복운동에 투신한다. 그리하여 금릉대학을 졸업(1918년 졸업)한 후 1919년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당수로 취입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제헌 의정원 내무위원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쌓기 시작한다. 그가 남긴 업적으로는 대한 적십자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가 및 교포 구제사업에 진력하였고, 1921년 7월 국민 대표회 기성회 위원을 거쳐 1923년에는 상해에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하였고, 1933년부터는 상해의 인성학교 이사장과 상해 한인 기독청년회 이사장, 한교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그는 장로로 장립을 받는다.
독립운동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광복 후 조국에 돌아와서는 정치와 인연을 완전히 단절하고 교육사업에만 전념한다. 그리하여 모교인 경신학교의 이사, 운영회 이사장, 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새문안교회의 장로가 된다.
아들이 해외에서 조국 광복운동에 참여하자 서경조도 조용히 소래에 거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아들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국 땅 상해에서 조국 광복의 대열에 서 있는 아들과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국땅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그에게 하나님은 은총의 부름을 주신다. 1938년 7월 27일의 일이다. 주님의 은총이 임하는 그 날, 평생토록 지키며, 위로하며, 인도하시던 주님의 품에 조용히 안긴다. 당년 87세의 고령이었다.
그의 반려자는 황해도 백천 출신의 민유신 사모이며, 슬하에 광호와 병호 두 아들과 1녀 신영을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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