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6일 연중 제29주일
제1독서 : 탈출 17,8-13
제2독서 : 2티모 3,14─4,2
복 음 : 루카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만 있을 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렸을 때 성당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일을 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자주 하는 이 말을 멈춰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하는 것은 욕심이야.’,
‘남들 정도만 하면 되지.’ 등의 말은 우리가 할 일을 더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중요한 것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봉사, 희생,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직무 유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일을 더 우선시하면서
우리는 이 직무 유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에 관해 관심도 없고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요구하는 보잘것없는 과부는
재산관리에 있어서 억울한 상황에 있습니다. 물론 고약한 재판관이 일 처리를 피합니다.
이 과부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또 재판관이 왜 자기 임무를 유기했는지,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약한 재판관도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가시게 구는 과부의 요청은
난관을 극복하는 신앙생활의 집요한 노력으로 상징합니다.
기도는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요청에 굴복한다면
진실되고 의로우신 하느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나중으로 미뤄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포기하고 미루다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 역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영적승리의 삶
-기도하십시오, 공부하십시오, 싸우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를 바탕으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 이라는 성가는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참으로 수도자는 물론 많은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성가입니다.
언젠가 수녀원 피정지도를 마칠 때,
수녀님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러줬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영적승리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 피정지도 시 강의 끝 무렵에 드린 결론 말씀이 생각납니다.
피정오신 스무 명 남짓 자매들 대부분이 일 년 사계로 헤아려 보니
거의 모두가 가을 인생에 해당 된다 싶어 “희망의 여정” 강의 결론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요, 기도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3-4시,
일 년 사계로 하면 가을철에 해당 됩니다.
사실 주로 피정 많이 오는 연령대가 가을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가을 삶의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참으로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해야 하는 가을철에 가을 인생입니다.”
요즘 피정 때마다 “희망의 여정” 강의 시 맨 먼저 “바다”라는 동요를 부를 때,
금방 흥겹게 부르는 자매들의 모습에서 가을 인생들임을 실감합니다.
30-40대 자매들은 전혀 모르는 노래이니 세대 차를 실감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궁극의 희망이자 삶의 중심인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은 영적승리의 삶에 대한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집요하게, 물러서지 않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마침내 과부의 끝없는 간청에 항복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고백입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이 이럴진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이야말로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지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와 믿음은,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결코 포기해선 안됩니다. 기도는 절박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기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철석같이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이런 기도가 가능합니다.
기도는 감정도 마음도 기분도 아닙니다.
항구한 의식적, 의지적 분투의 노력이요 훈련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도의 끈, 희망의 끈, 하느님 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죽습니다.
주님을 꼭 붙잡고 있으면, 주님 친히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당신 품에 안아 주십니다.
다음 복음 말미 예수님 말씀은 다시 우리 기도와 믿음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도 증발 되어 사라집니다.
믿음의 뿌리인 기도가 한결같고 간절하고 항구해야 튼튼한 믿음의 나무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믿음의 나무가 아니라 기도의 거름이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튼튼하게 성장하는 믿음의 나무입니다.
정말 늘 기도한다 해도 늘 부족한 것이 기도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공부하십시오.
세상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세상 공부가 아니라,
하느님 공부, 성경 공부, 말씀공부, 참 나의 공부입니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주는 공부입니다.
깨달음을 주는 공부요, 마음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궁극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 영혼에 빛과 생명을 주는 공부, 하느님 공부요 구체적으로 성경 공부, 말씀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와 참 나의 공부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단순하고 순수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
이어지는 사도의 말씀은 사목자들에게 주로 해당 됩니다만,
믿는 모든이들에게도 말씀공부와 실천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하게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기도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해야되 듯이
공부도,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 참 나의 공부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공부해야 비로소 사람이, 성인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육적 욕망만 남는 짐승이, 괴물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셋째, 싸우십시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전쟁입니다. 보십시오. 평범한 일상이 영적전쟁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이 삶은 영적전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찬가지 복음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역시 삶은 영적전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듯이,
평생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인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는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임을 봅니다.
혼자서의 고군분투의 싸움이 아니라 전우들과 함께 일심동체가 된 전투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영적전쟁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는 기도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모세가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이지만,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물론 아론과 후르 역시 훌륭한 주님의 전사요, 모세의 전우들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합니다.
막상막하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쟁입니다.
모세와 아론 후르, 여호수아의 일심동체의 전우애가 감동적입니다.
다음 숭고한 전우애의 그림 같은 장면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영적전쟁에, 전우애에 마음이 하나 된 공동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모세를 돌판에 앉힌 다음,
아론과 후론이 양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은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찌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인 모세. 여호수아, 아론, 후르의 넷이 일심동체가 되어 힘껏 싸우니
하느님도 감동하여 도와주시어 이스라엘의 승리입니다.
영적전우들의 영적 전우애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니
결국 영적승리는 이들의 승리이자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바라십니까? 참으로 고귀한 성인이 되시길 바라십니까?
방법은 셋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1. 기도하십시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평생, “주님의 신비가”가로 사십시오.
사랑의 신비가로!
2. 공부하십시오.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참나의 공부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사십시오.
사랑의 학인으로!
3. 싸우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기적인 나와의 싸움, 세상 악마들과의 싸움에 평생, “주님의 전사”로 사십시오.
사랑의 전사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았습니다.
변호사는 강도상해죄로 기소된 탈북민을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변호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의 형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피해자의 상처는 피고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남편이 폭행 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피해자의 상해에 대한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가
탈북민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피고인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방법을 찾아서 피고인의 형량을 감량시키려 했지만,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였고, 징역 4년을 만장일치로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피고인에게 징역 1년 6개월과 집행 유예 3년 4개월을 선고하였습니다.
판결 이유는 탈북민이기에 대한민국의 법을 잘 모르고, 처음 범죄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피고인이 5년간 숨어 있다가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와서 자수하였다는 것입니다.
형량의 감량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자수’였습니다.
변호사들은 형량 감량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피고인 본인의 자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서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요?
제가 사제로 살았던 저의 성과와 업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했던 봉사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양파 한 뿌리’라는 소설에서
아주 작은 선행만으로도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평생 인색하게 살았던 할머니가 지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할머니가 젊은 과부에게 양파 한뿌리를 주었던 것을 찾아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할머니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고,
할머니는 양파의 뿌리를 잡고서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의 다리를 잡고 같이 가려고 하였습니다.
양파의 뿌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할머니는 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을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그만 양파 뿌리가 끊어졌고 할머니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능력과 업적 그리고 선행과 봉사만으로는 하느님께 가는 것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드라마에서 피고인이 자수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였던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우리가 욕심이 가득하고, 자신밖에 모르지만, 자녀들의 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이고, 실천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예전에 ‘자수하여 광명 찾자.’라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어둠 속 그늘에 살기보다는 자수하여 희망의 빛 속에서 살라는 표어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고, 기쁘게 살려면 기도하라.
박영식 신부
루카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다.(3,21-22)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데 습관이 되신 메시아이다.
자주 광야로 물러가서 하느님과 만나셨다.(5,16)
이 만남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치유를 베풀기 위해 힘을 받으셨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선정이라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가 철야기도를 하고(6,12-13),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기도하셨다.(11,1)
예수님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다음 군중을 떠나 홀로 기도하고(9,18),
아버지와 대화하여 당신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셨다.(9,22)
중대한 사건을 치르기 전에는 꼭 기도로 아버지의 뜻을 여쭈셨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다.
이어서 베드로가 당신을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받게 하셨다.(9,28-29.32)
또한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버지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부르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다.(10,21)
이 기도로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신 것 같다.
예수님은 체포되시기 직전에 게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루카 22,42)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의 기도가 참된 기도이다.
예수님은 최후만찬 때 감사기도를 드리며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맺고(루카 22,17)
빵을 당신의 몸으로 변화시키셨다.(22,19)
베드로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형제들을 굳건하게 하도록 기도하셨다.(22,32)
생사의 기로에서 올리브 동산으로 가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22,39-46)
아버지의 뜻을 확인한 뒤에는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처형하는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23,34)
기적적으로 당신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 처형되셨다.(23,35. 37. 3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하고 기도하며 운명하셨다.
예수님은 구원을 희망하며 당신의 영을 하느님 아버지의 보살피심에 맡기셨다.
아버지의 현존 속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에 힘입어
부활하고 인류 구원의 위업을 실현하셨다.
당신 뜻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참된 기도의 표본이다.
그 기도 내용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당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내용도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비는 것이다.
그래야 부활하여 예수님처럼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은 침묵하는 시간, 일상생활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시간,
힘이 저장되는 시간, 자신을 억제하는 시간, 사물이 성숙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이다.
기도, 명상, 사색들로 혼자 있어야 힘이 솟아난다.
자주 묵상기도를 바치면 우리의 뇌세포가 건강해지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창의력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성도 계발되고 하느님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사랑할 힘을 받는다.
극단적인 고통이나 불안이 엄습해 올 때조차도
기도에 힘입어 여전히 기쁘게 살 수 있게 된다.
“남들은 묵묵히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지만,
하느님은 나에게 그 고통을 노래할 힘을 주셨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명상과 생각은 영원으로 가는 길이다.
반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명상하고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믿음을 갖지 않고 공허한 말만 늘어놓는 사람은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붓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심에 빠져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끊거나
고작해야 피상적인 만남밖에 이루지 못한다.
그의 인생은 처절하게 외롭고 내팽개쳐진 것으로 비쳐진다.
이처럼 기도를 게을리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직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까닭은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 때문이다.
진정으로 겸손하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불에 피운 향이 인간의 생명을 상쾌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는 인간의 마음에 희망을 북돋워 준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모세의 기도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도의 절실함이 그 주제입니다.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아래 놓고 그을 그 위에 앉혔다.”
여기 모세의 기도의 단순함을 봅니다.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모세가 계속 기도하였기 때문이었지요.
탈출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탈출 15 장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홍해바다에서 수르 광야로 진을 옮겼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물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마라에서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나아가다가 마라에 이르게 되어 물을 발견하지만,
그 물의 특징은 너무 써서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불평하자,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뭇가지를 보여주시며 그것을 물에 담그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자, 쓴 물이 단물로 바뀝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나뭇가지를 담그면
우리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바뀝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우리의 나쁜 기억들이 아름다운 일로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나뭇가지가 필요합니다.
나뭇가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고, 성사적 은총입니다.
우리의 기도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부정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뀌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하느님께서는 악으로부터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바뀌었듯이 우리의 부정적인 삶이 긍정적인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나뭇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나뭇가지로 우리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 새 땅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변화된 사람으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살게 됩니다.
예로서 모세의 경험을 봅시다.
모세는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파라오의 나쁜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는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모세는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지만, 이제 태어나면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석 달 동안을 숨어서 기릅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울면 입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자 더 이상 입을 막을 수도 없고,
누군가가 아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발각되고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모세 어머니는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나보냅니다.
아기가 바구니에 담겨 강에 떠내려갑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삶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부정적인 삶의 경험을 은총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 바구니가 파라오의 궁에 도달합니다. 버려지는 삶이 은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강에 버려지는 것은 분명 부정적인 경험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경험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하십니다.
파라오의 궁에 도달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운 삶으로의 여정입니다.
구약의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그를 마른 우물에 던졌습니다.
그들이 그를 거기서 건져내어 이번에는 이집트 상인들에게 팔아버립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경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팔려 가는 이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나뭇가지를 담그면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그 경험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거기 함께 계시면서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지니면
남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저주조차도 우리가 잘 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시로 쓴 최근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권씩 나눠 드립니다.
열망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물음에 또 다른 물음으로 답하는
두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보네
이 물음 안에는 함께 머물면서
당신을 깊이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는 말씀으로
당신과 함께 묵으면서
당신을 만나보라고 초대하시네
두 사람은 따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고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네
함께 머물면서 내밀한 만남이 이루어졌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선문답처럼
이루어지는 이 대화 안에 깊이 머무르네
때는 오후 네시쯤 이었다고 요한은 전해 주네
때는 단순히 시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 은총의 시간을 의미하네
그 시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의 첫 해후가 이루어진 시간이기에
깊이 마음에 새겨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네
이 묵상을 통해
각자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만남을 되새기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시네
그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머무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주제는 항구한 기도 생활에 관한 것이다.
탈출기와 복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 기도는 항구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족을 대항하여 거두는 승리는
모세가 산 위에서 항구하게 하는 기도에 좌우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강조한다.
여호수아는 기도의 도움에 의지해서만 이길 수 있었다.
모세가 계속 기도할 수 있을 때만이 여호수아는 이길 수 있었다.
기도는 그가 행하는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모세의 이 행위는 기도와 생활, 묵상과 행동 사이의 불가분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모세의 기도가 없었다면 여호수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의 예는 어떠한 인간적 행위도, 자유를 위해
그리고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싸움까지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도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 속에 스스로 소외되지 않도록 해준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과업이 엄청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사명을 완수하여 나갔다.
기도에 대한 주제는 복음에서도 다루고 있다.
복음의 본래의 뜻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이다.
그 비유의 내용은 불의한 재판관과 가난한 과부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기도의 특별한 관점이 강조되고 있다.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허락해주시는
주님께 끊임없이 간청해야 한다.
항상 기도해야 할 필요성은 주님의 명령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항구하게 지키고자 하는 본질적이며 내적 필요성에서 온다.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이 밤낮으로
하느님께 부르짖는다는 구절(7절)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 사람들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매달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라고 한
그 불의한 재판관의 입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역설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악한 사람조차도 한 가난한 여인의 간청을 들어줄 줄 안다면
당신이 몸소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배려야 이에 비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는 기도하면서 항구할 것과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으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끊임없이 주님께 말씀드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또 믿지 않는 이들 때문에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꾸준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한편 주님께서 당신의 오심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참조: 2베드 3,1-16).
때문에 종말론적 긴장을 이완시키고 감소시켜 신자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서 해방되고자 하느님께 의탁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래서 루카는 이러한 상황을 제시하면서
신자들이 긴장과 동시에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가 오늘날 부딪치게 될 가장 큰 위험 요소는 기다릴 줄 모르고
과학과 경제적 발전이 제공하는 현실에 안주하고 거기에 희망을 두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되고 만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위협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러 즉시 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항구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진정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또 그 기도가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두고 항구하게 끝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항구하고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익어갑니다.
가을이 익어가듯, 형제자매님들의 가슴에도 주님의 자비가 익어가고,
사랑이 익어가고, 신앙이 익어가고, 기도가 익어가길 빕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복음에서는 기도에 관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들려줍니다.
복음의 이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루카 18,1)는 이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할까요?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전승 안에서, 서방교회에서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주로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언제나 그분과 대면하고 있는 면전에서 벌어지며, 그분을 향하여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일이요,
현존하신 그분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기도의 본질적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주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은지,
또 주님 아닌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그 어떤 우상들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기에,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모세가 강력한 아멜렉 군사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듯이 말입니다.
또 복음에서 과부가 판결해 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이처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다시 말하면, 이토록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우리 주님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 유대와 연대의 관계를 맺고
희망으로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 이것이 곧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수도원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하느님을 향하여 있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 주는 곳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루가 18,1)
주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 한다하더라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의혹과 조바심에도 몰려오 때에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하소서.
어둔 밤일지라도 그 밤마저 몰아가는 당신을 믿게 하시고,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항구히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그 비유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약한’ 재판관도 과부가 성가시게 굴면, 과부의 소원대로 판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님이 가르친 믿음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 되겠는가 묻습니다.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자기의 환상을 쫓는 행태들이 공동체 안에 이미 있었고,
복음서는 그런 현상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기도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화수를 떠 놓고 혹은 성황당에서 비는 기도가 있습니다.
심청전의 선원들이 심청이를 제물로 용왕에게 바치면서 빌던 것이 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면서 자기가 모시는 신에게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기도들입니다.
사람이 소원성취하겠다는 기도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중에도 기도는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나게 하는 능력을 얻고자 바치는 기도가 있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능력을 얻기 위해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자녀를 입학시험에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있고,
선거에 당선되도록 혹은 사업이 잘되도록 비는 기도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기도들은 많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도 자기 앞에 닥친 중요한 일을 바라보면서 당연히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그 일 위에 내려올 것을 비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그 일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시고,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을 항상 빕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혜택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이 가르친 기도에도 청하는 기도가 있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라’는 기도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청하는 기도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충만히 살아 계시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신 하느님이 생각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기도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비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에는 모세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핵심으로 발생한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이 계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근거로 발생한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깨달음 후에 모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구약성서는 말합니다.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 간에 미래의 상호 행동 방식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받들어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가 준 10계명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삶의 실천 양식을 열 가지로 나누어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그런 신앙 전통 안에 사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모세가 깨달은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도,
인간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어떤 연대성을 사는지를 나타냅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새로운 계약’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하느님과 함께 연대하여 사는 방식을 예수님이 새롭게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과의 연대성에 충실하셨고,
부활은 그 연대성이 죽음을 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선포도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5,14)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연대성을 보장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겠다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 앞에 하는 우리의 기도도 자기 한 사람 잘되기 위해 소원을 비는 것이라면,
그 기도는 우리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출애 33,19)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체험과는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롭기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기도도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修養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삶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여서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자요한이 예수님을 만나서 한 말을 전합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3,30)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커지고 자기 자신은 작아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그분이 철저히 사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느님이 차지하시는 비중이 커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기심은 작아질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우리의 머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안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연대성, 우리 이웃들과의 연대성을 사는 사람이
자기 안에 하느님이 더 크게 자리하시게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분이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김도, 사랑도,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염철호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를 위해 과부와 재판관 비유를 들려주시는데,
재판관은 비록 불의한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끊임없이 청하자 그녀와 그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엑디케오’는
“복수하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부는 자기 이득을 좀 더 챙겨달라고 청한 것도 아니고,
불의한 것을 청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억울하게 당한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올바로 잡아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불의한 사람이었지만
귀찮아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재판관도 귀찮아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간청을 과연 내버려 두시겠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께는 선택된 이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며(본 기도)
의롭게 살다가 겪는 억울한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광야에 들어선 뒤 닥친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정의를 세워달라고 청하기보다,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며 이집트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그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은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하느님이 아니심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지만,
당신이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계속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계속 반항을 하다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게 됩니다.
우리도 삶이 어렵거나 힘들 때마다 하느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기보다
그런 어려움을 없애 주십사 청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십사 간청하며,
그런 청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을 외면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사주팔자나 운세를 보기도 하고, 심한 경우 무당을 찾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화답송이 이야기하듯이 우리 구원은 오직 주님 이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모든 삶의 인도자이시고,
모든 것을 바로 세워주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성경에서 도움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진정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삶에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가르치고 꾸짖으며,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 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은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라고 노래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