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San Francesco Saverio Sacerdote St. Franciscus Xaverius, C ST. Francisco Xavier Saint Francis Xavier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연도: 1506-1552년 같은이름: 방지거, 사베리오, 사베리우스, 사비에르,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ianciscus Xaverius)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Basque Provinces)의 팜플로나(Pamplona) 교외에 있는 하비에르 가족 성(城)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 또는 프란체스코)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528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를 만났다. 처음에는 이냐시오의 생각에 반대했던 그는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1534년에 파리(Paris) 북부 몽마르트르(Montmartre)에서 첫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1537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에서 서품을 받고, 그 다음해에 로마(Roma)로 파견되었으며, 예수회가 성좌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1540년에는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발이 묶였다. 왜냐하면 국왕 후안 3세(Juan III)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프란치스코는 8개월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1541년 4월 7일에야 떠날 수 있었는데, 이때는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뒤였다.
그 후 그는 중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안토니우스(Antonius)라는 중국인 청년과 복음을 전하려고 출발하였으나 광둥항(廣東港)이 바라보이는 상치안(Sancian) 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대륙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흔히 그는 사도 바오로(Paulus)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그 자신이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하더라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19년 시복되고 바로 이어서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와 함께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일)와 함께 '가톨릭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포교 사업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사제 대축일
150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나바라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성 이냐시오의 동료가 되었다. 1537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1541년 동양으로 와 십 년 동안 인도와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중국 앞바다의 샹챤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E Vita Francisci Xaverii, auctore H. Tursellini, Romae, 1596, Lib. 4, epist. 4[1542] et 5[1544])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8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땅이 몹시 메마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이 부근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한 명도 살지 않습니다. 이곳 원주민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릴 사제도 없고, 사도신경이나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십계명을 가르칠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도 거룩한 청원을 양심의 가책 없이는 거절할 수 없으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도 신경과 주님의 기도 그리고 성모송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 중에 머리 좋은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지극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학문에 대해 쏟는 열성만큼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에 대해 결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 수련과 다른 방법으로 자기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저는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 주의 하비에르 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 통일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한 뒤 파리 생트 바르브 대학에서 공부하고, 1530년에 철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거기서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예수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또한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특히 나병환자들에게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
중국선교를 결심하고 중국 내지로 진출하려던 그는 병을 얻어 1552년 중국 광동 근처의 상치안 섬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인도의 고아에 안장되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라고 부르는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개종시킨 이만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인도와 일본의 사도'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그를 시성하였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축일은 12월 3일.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Saint Francis Xavier-POZZO, Andrea 1701, Oil on canvas, 235 x 137 cm.Kiscelli Museum, Budapest
"사람이 온 세상을 얻을지라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 말은 학문으로써 장래가 극히 촉망되며 성공과 명에, 특권의 생활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한 젊은 철학 교사에게서 여러 번 반복된 것이다. 그 당시 24세이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이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냐시오의 끈질긴 설득은 결국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했다.
프란치스코는 1537년,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베니스를 떠나 리스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동인도로 항해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인 고아에 상륙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인도인들, 말레이 인들, 일본인들 등 사방에 흩어진 국민들의 신앙을 깨우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그는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특히 나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잠잘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으며 심지어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말레이지아 섬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일어를 열심히 배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교훈을 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교 본부를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 계획은 중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선교는 반드시 머나먼 외국에 가서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자녀들, 남편이나 아내, 혹은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의 선행,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선행,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선행 등 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시간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가장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홍콩에서 남서쪽으로 7백 마일 떨어진 산치아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코가 배 안에서 병으로 죽어 갈 때 그 배에 있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그를 배에서 옮겨야만 했다. 그에 대한 친절로 선장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바닷가 모래밭에 프란치스코를 내려둔 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어떤 포르투갈 상인이 쓰러질 듯한 오막살이 안으로 프란치스코를 데리고 갔다. 그는 열이 심한 발작과 피를 빼는 불안한 치료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는 갈수록 허약해져만 갔다.
"나(그의 친구인 안토니오)는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그가 죽어갈 때 그의 손에 촛불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며 평화와 안식을 지닌 채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1506-1552) 축일 12월 3일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구 열강의 정복 민족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골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따라 한 분뿐이신 임금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Javi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534년에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37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인도(1541-43,48,51-52년)와 스리랑카(1544-45년), 몰로카스 제도(1545-47년) 그리고 일본(1549-51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활동적인 모습은 그리스도교 모든 젊은이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정열을 쏟으라는 격려가 된다. 그는 1552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상찬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교황은 이냐시오에게 포르투갈의 요한 3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인 들에게 두 명의 예수회원을 보내라고 했다. 이냐시오는 보봐딜리아와 시몬 로드리게즈를 뽑았다. 그러나 보봐딜리아는 병이 났고 이냐시오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를 그 대신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540년 3월 15일 포르투갈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동양을 향해 리스본을 떠나는 함대를 놓쳤다.
1년 뒤에 포르투갈의 왕은 리스본에서 두 명의 예수회원이 다음 배를 기다리면서 한 일을 보고 학교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로드리게즈에게 포르투갈에 남아 있기를 요청했다. 로드리게즈는 인도로 가지 않았다. 1541년 4월 7일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홀로 인도의 고아를 향해 유럽을 떠났다. 그리고 첫 번째 선교사 예수회원이 되었다.
(예수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인 팜플로나 교외에 있는 사비엘 가족성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528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거기서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났다. 처음에는 이냐시오의 생각에 반대했던 그가 일단 생각을 바꿈으로써 예수회의 창설 회원 7명 가운데 들게 되었다. 그들은 1534년에 몽마르뜨에서 첫 서원을 발하였다.
그는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베니스에서 서품되었고(1537년), 그 다음 해에 로마에 파견되었으며, 1540년에는(예수회가 공식 승인을 받은 해), 그와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가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리스본에서 발이 묶였다. 왜냐하면 국왕 요한 3세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1545년, 그는 말라까를 찾아갔고, 또 1546년부터 47년까지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를, 1549년부터 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였다. 그는 인도의 첫번째 관구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중국에 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안토니오라는 중국인 청년과 복음을 전하려고 출발하였으나 상치안 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대륙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흔히 그는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그 자신이 개종시킨 교우수만 하더라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으며, 비오 10세에 의하여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부산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생애 (1506-1552)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의 성1)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Juan de Jaso)는 1516년 하비에르가 10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어려워진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에 나바라는 까스띠야 왕(Carlos V)국과의 전쟁 중에 있었고, 하비에르의 두 명의 형(Miguel과 Juan)들은 전쟁에 나갔고, 어린 하비에르는 어머니(Maria de Azpilicueta)를 돕고 있었다. 동시에 집안의 경당(웃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에서 기도와 공부에 주력했다. 하비에르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에 누나 막달레나는 Gandia의 관상수녀회에 입회를 했었다.
한편, 전쟁이 끝났을 때 두 형은 집으로 돌아와서 하비에르에게 군인이 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법학자가 되려고 했다.
18세까지 그는 빰쁠로나에서 성장하면서 내적으로 강한 청년이 되어갔다. 그리고 사냥과 수렵 등을 취미로 하면서 육체적으로도 강인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고등학교를 빰쁠로나에서 마치고 그는 당시에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파리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다.
어머니와 이별을 한 뒤에 말을 타고 3주 동안의 여행을 한 끝에 파리에 새로운 정착을 했다. 그리고 도착을 해서 보니, 이미 그곳에는 다른 유럽에서 공부를 하기위해 온 40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저마다 자신들의 꿈들을 키워가는 모습이 분주해 보였다. 본인이 원하던 곳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하비에르에게는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성적도 좋았다. 동시에 성격도 낙천적이었고, 운동을 좋아해서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친구들 중에서도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이냐시오 로욜라’ 라는 스페인 바스크지방에서 온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매우 친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냐시오라는 동료는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또 자신의 그릇된 과거에 대해 들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기도하는 방법(영신수련)과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하비에르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이냐시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들과 충돌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꾸만 이냐시오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들이 모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냐시오의 질문이 보다 깊게 하비에르에게 던져졌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태 16, 26) 즉, 예술가의 손에 다듬어지기 위해 들려진 작은 나무 조각처럼 단단했던 하비에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게 될 무렵에는 동료들(IGNACIO, FABRO, JAVIER, LAINEZ, SALMERN, BOBADILLA Y RODRIGUEZ)과 매우 친하게 되었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모두가 사제수품을 받고, 예수회라는 이름으로 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수회를 인가하게 되었고, 보다 실질적인 신원이 현실화 된 것이다. 한편 당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2)은 대외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 5세와 포르투갈의 국왕 후안 3세는 동양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 가면서 동시에 선교사들을 동반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냐시오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냐시오는 그 뜻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로 병으로 눕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이 원했던 그 일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파견을 받기까지 24시간의 식별도 그에게는 길었던 것이다.
예수회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수도회로서의 면모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비에르는 첫 번째로 파견을 받고 떠나는 것이었다.
그의 여행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에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미리 유언장을 써놓고 길을 떠나고 있었고, 하비에르가 떠날 무렵에 이미 모잠비크에서는 80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뱃길이 위험했고, 각종 질병과 추위 그리고 음식 등등이 죽음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했어야 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단 하루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모든 황금을 준다고 해도. 하지만 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었다."
"사람들이 회심을 하기 시작했고, 종을 흔들던 손으로 세례를 많이 주었기 때문에 지쳐있었다."
한편 하비에르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경험(인도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교리를 병행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병자들과 나환우들을 돌보셨고, 죄인들을 도와주셨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셨다." 라고.....
인도에서 몇 년간 체류한 후에 하비에르는 Malaca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보낸 한 달여의 위험한 여정을 이겨낸 후, Malaca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에서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품행이 그렇게 바르지는 못한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하비에르는 그들의 물질적인 부유함과 다르게 반대로 아주 허름한 초막을 지었다.
어느 날 밤에 하비에르가 자신의 초막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그 사람들은 엿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돌을 베개 삼아 사용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그는 자신의 초막에서 나와 Malaca의 언어로 설교를 하고, 그의 얘기를 경청했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었는지.... 하비에르의 이런 선교 활동 안에서 치유와 작은 기적들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Malaca에서 다시 하비에르는 Molucas의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종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응하지도 않았고, 모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언덕위로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올라가야 했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노래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하비에르는 그 주민들의 언어로 교리도 가르쳤고, 음악도 가르쳐주었다.
하비에르는 선교활동에 대한 신념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에 그의 열정적인 선교에 대한 투신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했다. 이번 선교지 역시 그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황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당장 세례는 몇 백 명 정도를 넘지 못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우선 그에게는 더 많은 수천 명의 일반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박해와 조롱 그리고 경멸을 받으면서도 낡은 그의 수단(수도복)을 벗어버리고 일반인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예를 갖추고 황실을 방문하여 선물까지 하였다. 그 방법이 그들에게는 매우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가 생각하기에 “먼저 대중국을 회두시켰더라면 일본은 그리스도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굳히고, 상뚱반도(Canton)의 관문이 바라보이는 상춘섬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으로 들어가려던 많은 외국인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비에르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비에르는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중국인 어부 한사람을 포섭하여 돈을 지불하고 그의 배에 숨어서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어부는 돈만 받아 챙기고, 하비에르와의 야속을 저버린 채 나타나질 않았다.
어느새 겨울이 되었고, 섬은 점점 황량해져갔다. 즉 오가는 사람의 발이 끊긴 것이다. 하비에르는 다른 배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섬에는 몇 명의 열심한 신자들과 하비에르만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서 중국인 안토니오(Antonio)와 인도 사람 크리스토발(Chritoacutebal)이 하비에르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그는 혹독한 폐렴으로 작은 초막에서 중국선교의 꿈을 접은 채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1552년) 그의 눈은 중국을 응시하고 있었고, 예수와 성모마리아를 부르면서 생을 마감했다.
주) 1) 하비에르 성은 나바라의 왕을 위한 전쟁의 장소였고, 많은 전쟁을 치루어 낸 곳이다. 2) 포르투갈 예수회 설립, 1546년 - 스페인보다도 1-2년 정도 먼저 설립 2002년 예수회 스페인 관구 자료집에서
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두말할 것 없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일 것이다. 그는 1506년 4월 7일에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인 팜플로나 교외에 있는 사비엘 가족 성(城)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히 당신 국내에는 전란과 기타 재화가 계속되어 가정은 차차 쇠퇴했으나, 그래도 양친은 자녀들의 교육을 등한시하지 않고, 특히 프란치스코를 파리에 보내어 대학에서 고등 지식을 연마케 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빈곤한 처지에서도 앞날의 입신출세를 꿈꾸며 부지런히 학업을 계속했다.
프란치스코는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에 심사숙고한 끝에 그 말씀 속에는 참으로 엄숙한 진리가 들어있음을 깨닫고, 마침내 1533년 이냐시오에게 지도를 청하고 그를 영적 아버지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네 명의 동료를 얻어 6명이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회를 조직하고 8월 15일의 성모 승천 대축일의 경사스러운 날을 택해 몽마르트 성당에서 청빈과 정결의 서원을 바치고 팔레스티나의 순례를 기약했다.
그 뒤 방학을 맞은 하비에르는 40일간 묵상하며 준엄한 고행 생활을 했다. 그 이후 그의 머리에는 다만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 사업에 종사하는 것만이 들어 있었다. 하비에르는 우선 다른 형제(수사)들과 더불어 이탈리아에 갔다. 그것은 전에 기약한 팔레스티나에의 순례를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불행히도 그 계획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하비에르는 잠시 베네치아에 있는 어떤 병원에서 불치의 환자를 간호하고 얼마 후 동료들과 같이 로마로 향했다. 어느 날 밤, 그가 한명의 인도인을 안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넘어진 끔을 꾸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동료에게 이야기했는데, 얼마 후 그 꿈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즉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포르트갈의 국왕은 그 나라 식민지인 인도에 예수회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이냐시오에게 요청했으므로 두 명의 형제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 중 한명이 신병으로 눕게 되어 하비에르가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사절(使節)이라는 칭호를 받고 1541년 4월 7일에 출발했다. 이 사절의 여행은 쓸쓸하고 아주 초라했다. 그러나 겸손하여 다른 이의 힘은 일절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노력했다. 배 안의 여객들은 그의 겸허하고 친절함에 감복되어 자신들의 좋지 않은 행동을 삼가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비에르가 인도에 온 것은 그런 신자들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였다. 인도말을 모르는 그는 해변에 집단 거주하는 어촌에 들어가 통역을 통해 전교 활동을 했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어 영세자가 매달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한다.
한편 그들의 가난한 생활고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어 때로는 열렬한 기도를 했더니, 하느님께서도 가상히 여기시어 기적을 행하게 하셨으니, 이것 역시 전교 상 성공의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매일 같은 열렬한 전교 활동을 하면서도 극기, 고행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단식지를 지키고 가끔 철야 기도를 했다. 하느님께서도 그의 이 거룩한 생활을 기꺼이 여기시어 보수로 천상적 위로와 환희를 주셨다.
1545년에 해안 지방에서 전교에 크나큰 성과를 거둔 하비에르는 다시 말라카를 찾았고, 또 1546년부터 47년까지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 지방에 갔다. 도중에 두 차례나 위험한 조난을 겪고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으나 끝끝내 그 원거리 여행을 단행했다. 그의 기도, 고행, 기적은 계속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끊임없이 천상적 환희를 주셨다.
몰루카스 지방에서 말라카에 돌아온 때였다. 그는 사또미 야지로오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이 사람은 본국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온 사람이었다.
하비에르는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또한 그 사람을 통해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요 주민들은 모두 선량하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로 향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시 고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르투갈 국왕의 대리인 총독의 허락을 받고 1549년 6월 24일에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어려운 고비를 거듭한 항해를 마치고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 15일이었으며, 야지로오도 동반했다. 하비에르는 즉시 전교에 착수했으나 예상한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수도에서 젼교하기 위해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교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오오닌(應仁) 이래의 내란으로 인해 인심이 어지러웠으므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 4일 일찍이 일본을 떠났다. 체류 기간 불과 2년 반, 그동안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야마구치였다. 그의 체류 기간은 짧았으나 일본의 사도임에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였고, 일본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일본을 떠남에 앞서서 다른 선교사에게 사업을 인계했다. 그는 일본 국토를 좋아했고 일본을 잊을 수 없어 상부에게 끊임없는 서한으로 그 후계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독촉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부가 계속 들어오게 되고, 일본 남쪽에서 북쪽까지 많은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이 같은 융성을 초래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의 선물인 것이다. 그는 후에 중국에 전교하려고 광뚱(廣東)에 가까운 산첸(山天) 섬에 이르러, 그곳에 체류하며 대륙에 들어갈 편의를 찾던 중 잠시 한 명의 중국인과 마라바라인인 한 신자와 셋이 어느 초막에서 구차한 생활을 하며 대기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4일 동안 고투하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윗의 후예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취후로 46세의 나이에 성스러운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유해는 고아에 이송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아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 한다.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22년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으며, 비오 10세에 의해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제게 약속하신 천국을 원하기에 당신께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지옥이 그만큼 두려워서 당신께 저를 내어드리고, 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당신께로 향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주님, 당신께서 조롱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도록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당신의 몸이 그만큼 상처 입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시고, 당신이 모욕 받으셨고, 죽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마지막까지, 오로지 당신의 사랑, 당신의 방법으로 비록 천국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시고, 비록 지옥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께서 제게 사랑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제가 기다린다 하더라도 오지 않을 수 있고,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는 사랑합니다.
'동방의 사도' 하비에르 성인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삶과 영성
인도와 일본에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해 '희망봉부터 인도와 중국,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북(北)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이다. 그는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당시 유럽 최고 대학인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개인 영광에 목표를 두던 그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 나라 영광'으로 돌아선 것이다.
1529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534년 8월 성 이냐시오를 포함한 다섯 동료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 순교자성당에서 '예수회'를 설립한다.
일본에서 복음를 전파하던 중 중국이 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중국 선교로 목표를 수정해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믈라카를 거쳐 이듬해 인도 고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상치안 섬에서 약속된 안내자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544년 1월15일 인도에서 쓴 그의 편지에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주여,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 엘렌 르브렝(헬레나, 71) 교장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영성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조건없는 신뢰'"라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으로 흔들림이 없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문명숙 교감은 성인에 대해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인도와 일본을 방문해 전교에 앞장섰던 성인께서 가져간 것이라곤 수단과 성경책 뿐이었다"면서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 맨발의 성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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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 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