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류
신사임당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504년 10월 29일 ~ 1551년 5월 17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된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된다. 1504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먼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이 글을 깨우쳤다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다. 친정어머니 이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다.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의 원조를 받아 한성의 본가에서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 해에 몇 번 처가를 들르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편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계속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시에 그쳤고, 기묘사화로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산 사임당의 어머니는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고 소신있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씨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었으나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을 탄복케 하였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아들 딸의 차별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 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 특히 신명화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후대의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결혼 이후에는 본이름 대신 사임당, 임사재, 인임당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한성부에 거주했고, 한성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7세 때는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으로부터 부덕과 소학, 대학, 가례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칭송을 받기도 했는데, 명종조에 살던 어숙권(魚叔權)은 어린 인선의 작품을 보고 감탄,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기도 했다. 엄격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 보통 사대부가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다. 한편 신명화는 덕수 이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하였다.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주변에서는 사위감을 볼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신 진사는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증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다. 지체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택한 인물은 이원수라는 총각이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은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킨 조건은 이원수가 편모 슬하에서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딸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까운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처럼 시집을 보내지 않고 친정 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1522년(중종 17년) 8월 20일 형제 정승인 이기, 이행의 조카인 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5남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훗날 사이가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친정을 떠나 이원수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때 고향에 대한 향수와 친정을 떠나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들은 후일 그의 대표작으로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시댁은 파주에 있었지만 결혼하던 그해 말, 친정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한성과 친정 강릉을 오가던 생활이 많이 불편했던 그는 남편 이원수에게 특별히 한성과 강릉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는데 셋째 아들 이이는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조선 중,후기 서인과 노론 당의 사상적인 시조였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관직은 정3품에 머물렀지만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고,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 재주에 능하여 작은 신사임당,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유교적인 규범을 내세웠던 조선 왕조 환경에서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모든 재능을 묻어야만 했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대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기녀임을 보면, 일반 가정의 부인이 집안 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이런 사회적 제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들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임당이 예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가지 환경이 크게 좌우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아버지 신명화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원수는 한편으로는 부인인 사임당을 어느정도 멀리하게 된다. 당대의 인물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에 비교하여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았으나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적 부인관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모로 재능이 출중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유독 둘째 사위감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했고, 남편인 이원수는 장인 신명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혼한 첫 해에 장인이 갑자기 죽게 되자 이원수는 어쩔수 없이 강릉과 파주를 오가게 됐다. 또한 남편 이원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는 않았는데,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좋은 명산을 알아내 남편을 보내기도 했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왔고, 그는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만에 학문을 단념,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 한성부와 평창 등 각지로 이사 다녔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사임당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33세 때,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대학이이다. 1537년 사임당은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로 담았다. 이는 후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송되었다.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산처럼 내고향 천리연마는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톺에 혜락 모이락
고깃배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친정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사임당은 38세에 한성부에 새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씨와 함께 살았다. 홍씨 부인 역시 연로하여 살림을 모두 며느리에게 맡기고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친정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건강의 악화와 함께 남편의 축첩,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자상하고 인자한 태도를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남편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겨 방을 따로 얻은 것이다. 남편 이원수가 첩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평생 한양과 강릉을 오가면서 부인과 생활을 했지만, 주변에 여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그의 외할아버지 이사온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 없이 평생을 살았다. 때문에 남편의 외도는 신사임당에게 예기치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결국 남편 이원수는 외도에서 끝내지 않고, 첩을 한명 들이게 된다. 그러나 남편이 들인 첩 권씨는 술주정과 행패가 심하였다.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 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시조 시인인 이은상 시인이 쓴 사임당과 율곡에서 발췌.
광해군때에 출판된 동계만록에 적혀 있는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대화를 보면 신사임당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이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남편의 첩이지만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한 권씨를 사임당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재능있는 여성이었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을 쓸 정도였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이원수가 세도가인 의정부영의정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기는 이원수의 5촌 당숙이자 시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였는데, 명종 초기에 소윤의 영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인물이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1550년 가슴 통증을 앓다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다. 병은 심장병이었다. 그녀의 그림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부인은 가난하여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 ”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그것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
실수로 빌려온 옷을 버렸던 그 귀부인은 치마를 팔았는데, 실물과도 같아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림과 시 재주는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어머니를 닮아 서화에 뛰어난 솜씨들을 보이며 이름을 날린 이우와 큰딸 이매창이 그들이다. 특히 이우는 "그림의 품격이 빼어나 조화를 일찍 묵화로 풀벌레를 그려 내어 길에다 던지자 뭇 닭들이 실제 벌레인줄 알고 한꺼번에 쫓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형 이이가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과 시 재주가 있었다. 큰딸 매창 역시 시화에 능해서 '작은 신사임당'이라 불렸다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씨와 관계하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된다 이원수가 첩살림을 시작하자 신사임당은 반발하면서 부부관계가 냉각되고 마침내 한때 그녀가 금강산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대의 동인과 남인들은 율곡 이이는 물론이고 사임당도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던 것은 아니냐며 이이와 그의 정당인 서인(西人)을 향한 정치공세 꺼리로 활용한다. 죽음을 예감한 신사임당은 자신이 죽더라도 새장가를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반발심 때문인지 이원수는 공자, 증자, 주자도 새장가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임당이 하나 하나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반박하자 이원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편 이원수는 한성과 파주 율곡리와 강릉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줄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인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여자가 바로 권씨였다. 그러나 권씨는 신사임당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 사는 탕녀였다. 첩인 주모 권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다시 이원수에게 첩인 권씨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원수나 사임당은 자녀들 중 특히 이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이이는 평생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딸 매창은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알아채고 글과 그림을 직접 가르쳤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정성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이 형제의 병구완에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신사임당은 죽기 직전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씨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은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그가 죽자마자 첩인 권씨를 본댁으로 들여오고, 아들 이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자리도(紫鯉圖), 노안도(蘆雁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적이며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551년 5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중이던 남편 이원수는 세곡 운반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파견되어 갔다. 1551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이이(李珥)도 함께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 보냈다. 전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울면서 편지를 썼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임무를 마치고 자식들과 함께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임당이 편지를 보낸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일 후에는 위독해졌다. 그리고 병상에 둘러 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신사임당은 5월 14일경 병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7일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향년 48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한다. 사후 그의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이이가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하였다. 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 안장하였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다. 후에 이이가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까지 승진하여, 정경부인(정1품)에 추증하였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또한 그녀의 친정 조카인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선조이다
긍정적 평가
신사임당은 봉건 시대의 제약을 받았으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자기 개발에 매진했다. 시문과 그림, 글씨 등 조선 시대의 대표적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개척하였다. 신사임당 생전에도 문정왕후나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나 한세기 전의 인물인 어우동, 유감동 등과 비교, 대조되어 훌륭한 여성,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았다. 사후에도 서인의 이론적, 정신적 지주인 이이를 기른 훌륭한 어머니로 존숭되었고, 17세기에는 송시열에 의해 격찬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는 어머니와 부녀의 모범으로 양반 사대부가의 여식들에게 훈육되었다. 조선 후기 율곡의 학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은 그녀의 시와 글, 서예작, 그림 등 찬사를 보내며 "그가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고 격찬하면서 그녀에 대한 국가적인 존경, 숭배는 강화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 이이를 추켜세우면서 율곡의 부모 역시 성자(聖者)로 현창하려 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이라는 미관말직인데다가 무능력한 인물이라 결국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성자로 추앙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한국의 위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추앙받았다. 그는 현재까지도 현모양처의 상징, 훌륭한 여성 작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정적 평가
신사임당은 지와 덕을 겸비한 총명하고 인자한 어머니였지만 자식들의 곁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 '기존 남성중심 사회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신사임당이 여성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여성들은 지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역사로부터 외면당하고 평가절하되어 왔다. 교과서에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던 신사임당은 어떠한가. 신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예술가였지만 우리 역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을 강조한다. '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남편에게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면서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신 효녀효부로 알려져 있다" 위의 문장은 신사임당에 대한 자료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는 신사임당의 개인의 능력이나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누군가의 딸이면서 아내이면서 며느리이자 어머니였던 신사임당을 표현하고 있다.'고 사례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역사 속에서 여성은 이렇게 한정적인 역할만을 맡아 왔다.' 는 것이다.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라는 말뜻 그대로의 현모양처라면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말은 맞고도 틀리다.' 는 의견도 있다. 작가 김별아는 '스스로 지어 부른 사임당이라는 호가 성군의 대표 격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훌륭한 어머니 태임을 배우고 본받는다는 뜻인 만큼,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을 포함한 4남 3녀의 자식들에게 사임당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였다. 실로 사임당이 우리 역사 속에서 `희귀'하다시피 한 여성 인물로 우뚝 자리 잡은 데는 율곡 이이가 쓴 `어머니의 일대기'(先行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쓴 적이 없지만, 어머니 사임당에 대해서는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행장뿐만이 아니라 모친상을 당한 직후 슬픔과 허무감에 빠져 금강산에 들어가 칩거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사임당이 '현모'였음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틀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며 그 이유로 '율곡의 행장에서 드러나는 사임당의 모습은 놀랍게도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던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임당은 남자 집안 중심의 중국식 친영례가 자리 잡아 가던 조선 중기에 전통 혼례 방식으로 오랫동안 고향에 머무르며 친정 부모를 봉양했고, 좋게 표현하자면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남자'지만 실제로는 학문이나 재능이나 의지의 측면에서 사임당에게 턱없이 부족했던 남편 이원수에게 여필종부하기보다는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다”하였다.' 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김별아는 그가 성리학적인 가치관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아내의 투기는 칠거지악의 하나로 꼽히지만 사임당은 병약한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하며 남편에게 자식들을 위해 새장가를 가지 말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친이 편찮을 때 몰래 외조부의 사당에 가서 기도했다는 율곡의 일화로 미루어볼 때 사임당의 자식들 또한 부계보다는 모계에 더 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실제 모습을 알면 알수록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묶일 수 없는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강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임에 분명하다.'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허난설헌
난설헌 허씨(蘭雪軒許氏, 1563년 ~ 1589년 3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이다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에 직언했다 한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
哭子곡자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능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지전소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증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알려지면서 격찬을 받았다.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郎)가 그녀의 시를 간행, 한때 애송되기도 하였다. 고부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정조 이후에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허균이 광해군 말년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9월에는 그의 시작품 168편을 모아 청 만력 40년(161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됐다. ≪취사원창≫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출신 문인인 반지항(潘之恒, 1556~1622)의 문집 『긍사』(亘史)에 1책으로 수록되어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는 허난설헌의 산문 글 1편도 들어있었는데, 당시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이 처음 발견했고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교수 박현규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이던 이 소장품을 정밀분석해 한국 학계에 소개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취사원창은 중국 학계에서도 호문해(胡文楷)가 1957년 간행한 『역대부녀저작고(歷代婦女著作考』라는 책에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실전된 상태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시는 오언고시 14편, 칠언고시 11편, 오언율시 6편, 칠언율시 14편, 오언절구 20편, 칠언절구 103편이며 산문 1편은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다. 처음 세운 비석은 실전되었으나 대한제국 멸망 이후 다시 세워졌다. 새 비석은 이숭녕(李崇寧) 등에 의해 오석으로 세웠으며, 전면에는 이숭녕이 지은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허난설헌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29-5에 있다.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일본의 여류
오노노 코마치
오노노 코마치(일본어: 小野小町, 생몰년 미상)는 헤이안 시대의 시인이다. 6가선의 한 사람으로 오노노 다카무라의 손녀라는 설, 조카딸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활동 시기는 대략 9세기 전반에서 9세기 말까지로 추정된다. 닌묘 천황의 후궁 미쿠니마치(三国町)라는 설, 몬토쿠 천황의 후궁 산조마치(三条町)라는 설도 있고 세이와 천황의 후궁이라는 설도 있다. 헤이안 중기의 시인으로 아키타현 출신으로 절세미인으로 코마치라는 단어의 모델이다. 기록을 별도로 남기지 않는 궁녀의 특성상, 오노노 코마치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대략 825년에 태어나 900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850년을 전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코마치슈(小町集)가 전해지고 있으며, 소토오리히메와 비견될 정도의 용모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선조는 아스카 시대에서 쇼토쿠 태자의 명을 받고 수나라로 파견된 견수사 오노노 이모코이고 할아버지 오노노 다카무라(小野篁)는 밤이 되면 우물을 타고 지옥으로 내려가 염라대왕의 재판을 보좌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오노노 코마치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 중 후카쿠사노 쇼쇼(深草少将)라는 남자가 그녀에게 구애했는데 그녀는 100일 동안 매일 자신을 만나러 오면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약속대로 매일 그녀를 만나러 오던 후사쿠사노 쇼쇼는 100일째 되는 날 폭설이 내려 그대로 동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에서 고마치잔(小町算)이라는 숫자 놀이가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무로마치 막부때 쓰여진 노가쿠 세키데라 코마치(関寺小町)에 의하면 집안이 몰락한 후 노년에는 왕년의 미모도 잃고 구걸하며 끼니를 때우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래도 과거의 품격은 잃지 않아, 승려와 선문답도 완벽하게 해내고 초대받은 연회에서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고 춤도 추어 주변 사람들이 데꿀멍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조 높은 절세의 미녀로 유명했던 인물이기에, 시즈카 고젠 등의 미녀들과 함께 노가쿠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캐릭터 중 하나이기도 하다만 노가쿠에서는 나이든 모습으로 주로 등장한다. 당장 노가쿠 작품 중 코마치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는 작품들만 해도 무지하게 많다. 소토바 코마치, 카요이 코마치, 소우시아라이 코마치 등. 남성들이 구애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는 전설에서 여성의 기능을 상실한 인물이었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기에 '드물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녀'라는 용법 외에도 '아름답지만 여성의 기능이 없는 성불구자'를 빗대는 인물이기도.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인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 적힌 가사에 그런 의미로 언급된 일이 있다. 오노노 코마치의 이름을 본따서 아키타 현에서 나온 쌀의 이름을 아키타 코마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밥쌀로도, 술쌀로도 아키타에서는 제법 널리 쓰이는 쌀 가운데 하나이며, 이를 다시 한 번 개량해 주조 전용으로 만든 쌀이 아키타 사케 코마치. 도쿄에서 아키타를 잇는 아키타 신칸센의 열차 명칭인 코마치도 여기서 따 온 이름이다. 현재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절세미인이면서 시인인 것을 생각해 보면 황진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와카(일본의 전통 시로 우리나라의 시조와 같다)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꽃의 색깔이 완전히 바래니 다만 덧없이 생각에 잠긴 동안 시간은 흘러가네.
花の色は うつりにけりな いたづらに わが身よにふる ながめせしまに
무라사키 시키부
무라사키 시키부(일본어: 紫式部, 973년경 ~ 1014년 및 1025년경)는 헤이안 시대 일본 황실의 궁녀로,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무라사키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일본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로도 잘 알려져있다. 겐지 이야기는 1000년에서 1012년 사이에 집필되었다.[1] 무라시키 시키부는 필명이고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1007년 황실 일기에서 언급된 궁녀 후지와라노 교코(藤原香子)로 추정될 뿐이다. 헤이안 여성은 전통적으로 행정에서 쓰는 문자인 한문 학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무라사키는 한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유창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라사키는 20대 중후반에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결혼 2년 만에 죽었다. 무라사키가 《겐지모노가타리》의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혼 생활 도중이나 과부가 된 직후로 추정된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1005년경 무라사키를 황실로 초빙하여 쇼시 황후의 시녀로 삼았다. 이는 무라사키가 가진 작가로서의 명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는 시녀로 일하면서도 계속 글을 썼고 작품에 궁정 생활을 담았다. 5~6년 후, 그녀는 은퇴하여 궁궐을 나오고, 쇼시와 함께 비와 호수 지역으로 간다. 무라사키가 사망한 연도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은 1014년까지 살았다는 설에 동의하지만 1031년까지 생존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라사키는 시집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와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를 썼다. 겐지 이야기는 완성된 지 10년 만에 지방 곳곳으로 퍼졌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한 세기 만에 일본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학술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무라사키의 작품은 20세기 초에 번역되었다. 6권 분량의 영어 번역은 1933년에 완역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헤이안 궁정 사회의 정점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러한 작품의 중요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13세기부터 일본 화가들이 무라사키 작품의 삽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우키요에의 대가들도 그녀의 작품을 목판에 담았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973년 일본 헤이안쿄에서 9세기의 초대 후지와라 섭정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후손인 후지와라 북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후지와라씨는 딸들을 황실과 정략결혼 시키고 섭정을 하면서 11세기 말까지 조정을 손에 넣었다. 10세기 후반~11세기 초에는, 이른바 미도간파쿠라 불리는 미치나가가 네 딸을 천황과 혼인시켰고 미치나가는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었다. 후지와라가는 무라사키의 증조부 후지와라노 가네스케 시절에는 귀족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점차 권력을 잃게 되었다. 무라사키가 태어날 무렵에는 지방 관리 정도의 중하위 계급 귀족으로 떨어져 있었다. 보통의 하급 귀족들은 중앙 권력이 있는 교토의 조정에서 쫓겨나 사람들이 부임되고 싶어하지 않는 지방으로 전임되었다. 비록 가문은 지위를 잃었지만 무라사키의 친증조부와 조부는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증조부인 후지와라노 가네스케는 21가지의 황실 가집 중 13가지,〈36가선〉, 〈야마토 이야기〉 등을 포함해 총 56가지의 시를 지었다 그녀의 증조부와 조부 모두 기노 쓰라유키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일본어 시를 대중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라사키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다메토키는 국립 대학 다이가쿠료 (大学寮, 대학료)에 다녔고 중국 고전과 시 분야에서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다. 그의 시는 시집으로도 엮어졌다. 다메토키는 968년 경에 하급 관리로 공직에 입문했고 996년에 지방 관리가 되어 1018년경까지 재직했다. 무라사키의 어머니는 다메토키와 같은 후지와라 북가의 후손이다. 부부는 아들 한 명과 두 딸을 낳았다. 헤이안 시대에는 현대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기록했다..궁녀는 직위를 이름으로 불렸고, 남성 친척이 직위나 직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직위를 이름으로 사용했다. 즉 "시키부"는 성이 아니고, 무라사키의 아버지가 관료로 있던 의례부인 식부성 (시키부쇼)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라사키"는 단어 후지(무라사키의 가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의 뜻인 등나무와 관련 있는 색인 보라색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가 《겐지 이야기》의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직접 지은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미치나가는 1007년 일기에서 궁녀 몇몇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 중 하나인, 후지와라노 다카코(교시)가 무라사키의 본명일 가능성이 있다.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별도의 가정을 가졌다. 부계 사회가 여전히 이어지긴 했지만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무라사키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남동생 노부노리와 함께 교토 데라마치 거리의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남매가 아주 어렸을 때 출산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는 세 명 이상의 이복 형제자매와 계모와 함께 자랐다. 무라사키는 20대에 사망한 한 자매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무라사키는 중국 사절이 중단되고 강력한 민족 문화가 출현하며 일본이 고립되어 가던 시기에 태어났다. 일본어는 9세기와 10세기에 한자를 축약하여 만들어진 음절문자인 가나가 발달하면서 점차 문자 언어로 변화했다. 남성들은 무라사키가 살던 시기에도 계속 한자로 글을 썼지만, 가나는 친숙한 문자이자 귀족 여성이 사용하는 문자가 되어 독특한 형태를 가진 일본 문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무라사키의 남동생은 공직을 준비하기 위해 한자를 배웠고, 무라사키도 어린 시절 아버지 집에서 지내면서 한문을 익혔다. 무라사키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동생이... 어렸을 때 한자를 배울 때면 난 항상 옆에서 듣고 있었다. 나는 걔가 이해하고 외우기 힘들어했던 구문을 해독하는데 능숙해졌다.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인 아버지는 항상 그 사실을 두고 '내 운수일 뿐이지'라며 후회했다. 그는 "그 아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중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음악, 서예, 일본 시 같은 보다 전통적인 과목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의 교육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였다. 루이스 페레즈는 일본의 역사(History of Japan)에서 "여성들은... 진정한 지성이 없다고 여겨져 한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무라사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가식적이고, 어색하고, 접근하기 어렵고, 까칠하고, 자기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고, 차갑고, 교만하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고약하고, 멸시하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시아 문학 학자인 토마스 잉게는 그녀가 "친구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 강압적인 성격"을 가졌다 생각한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 여성은 남들과 접촉할 수 업고 통제된 삶을 살았으며, 대화할 수 있는 남성은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 구성원 뿐이었다. 그녀의 자서시에서 무라사키가 여성과는 잘 어울렸지만 아버지와 남동생 이외의 남성과의 접촉은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라사키는 가끔 여성과 시를 교환했지만 남성과는 전혀 교환하지 않았다. 무라사키는 대부분의 귀족 여성과 달리 사춘기에 결혼하지 않았다. 무라사키는 20대 중반 혹은 30대 초반까지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996년 아버지가 에치젠국에서 4년 동안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어 무라사키는 아버지와 함께 에치젠국으로 갔다. 무라사키는 998년에 교토로 돌아와 아버지의 친구 후지와라 노부타카와 혼인했다. 남편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육촌이었다. 그는 같은 후지와라씨 분가 출신으로 궁정 관료이자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뛰어난 무용수로서 정평이 나 있는 의례부 관료였다. 결혼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그에게는 그 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사교적이면서 궁정에서 유명했던 그는 무라사키와 결혼하고 나서도 수없이 연애를 했다. 무라사키는 남편이 아내의 집에서 사는 관례에 따라 아버지 집에서 계속 살았을 것이다. 노부타카는 두 개 이상의 지역에서 지방관을 하고 있었고 무라사키와 결혼할 당시에는 꽤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리처드 보우링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생각했지만 일본 문학 학자 시라네 하루오는 무라사키의 시에서 남편에 대한 원망이 암시된다고 본다. 딸 겐시(가타이코)는 999년에 태어났다. 2년 후 노부타카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무라사키는 결혼 생활 동안 딸을 돌보고 집안일을 맡는 하인을 두어 충분한 여가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서를 즐겼던 그녀는 《다케토리모노가타리》와 《이세모노가타리》 같은 로맨스 모노가타리를 읽었다. 학자들은 《겐지모노가타리》를 쓰기 시작한 시기를 남편이 죽기 전으로 본다. 이는 남편이 죽자, 슬픔에 빠져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라사키는 일기에서 남편이 죽은 후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우울하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몇 년 동안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왔다....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일보다는 조금 더 뭔갈 하면서... 계속되는 외로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설에 따르면 무라사키는 8월 밤, 비와호 이시야마데라에서 달을 보다가 영감을 받아 《겐지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일본 예술가들은 이시야마데라에서 달을 보며 영감을 얻으려 하는 무라사키를 그리곤 했다. 무라사키는 요청를 받아 이 이야기를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의 영웅 히카루 겐지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추방된 신하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무라사키는 《겐지 이야기》의 새 장을 친구에게 주고, 친구는 그것을 다시 필사하여 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겐지 이야기》는 이 과정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무라사키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무라사키는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궁녀(뇨보)가 되었는데, 작가로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뮬헌 치에코는 《Japanese Women Writers, a Biocritical Sourcebook》에서 학자들이 왜 무라사키가 비교적 늦은 시기에 궁에 들어갔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썼다. 남편이 죽은 후 미치나가와 시를 교환했다는 증거가 일기에 있어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보우링은 무라사키가 미치나가의 첩으로 궁정에 끌려갔다는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공식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궁정으로 데려갔다는 점을 알아냈다. 뮬헌은 미치나가가 딸 쇼시를 교육시키기 위해 무라사키를 궁정으로 데려왔다고 본다. 헤이안 문화와 궁정 생활은 11세기 초에 절정에 이르렀다. 귀족들이 헤이안궁의 관청, 조성에 고립되면서 교토의 인구는 약 100,000명 정도까지 늘었다. 할 일이 줄어든 조신들은 현실과 단절된 궁정 생활에 몰두하여 예술 활동에 눈을 돌렸다 주로 옷감, 향, 서예, 색종이, 시, 겹겹이 놓은 옷 등을 기분과 계절에 따라 색상을 예술적으로 조합하여 감정을 표현했다. 전통적인 미학을 따르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조정에서 빠르게 인기를 잃었다. 바닥까지 오는 길이의 머리카락, 하얀 피부, 검은 치아를 고수하던 헤이안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취미로는 연애하기, 시 쓰기, 일기 쓰기 등이 있었다. 헤이안 궁녀 들이 쓴 글들은 가장 초기의 문헌이자 일본 정경으로 쓰여진 최고의 문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995년 미치나가의 두 형제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와 후지와라노 미치카네가 죽고 섭정 자리가 비게 되었디. 미치나가는 조카 후지와라노 고레치카 (이치조 천황의 황후인 후지와라노 데이시의 오빠)와의 권력 투쟁에서 여동생 센시의 도움 덕에 빠르게 승리할 수 있었다. 고레치카는 퇴위한 가잔 천황이 저격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를 안고 996년에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오빠를 후원했던 데이시는 권력을 잃게 되었다. 4년 후 미치나가는 12살 정도의 나이였던 장녀 쇼시를 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보냈다. 쇼시가 후궁으로 들어가고 1년이 지나자, 미치나가는 데이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쇼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원래도 황후였던 데이시를 다시 한번 황후로 지목했다. 역사가 도널드 쉬블리는 "미치나가는 데이시(혹은 사다코)와 쇼시를 동시에 황후에 앉혔다. 전례 없던 황후 임명에 그의 세력도 충격을 받았다. 데이시는 "교고"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고 쇼시에게는 데이시의 "교고"와 동등하게 칭호 "쓰구"가 주어졌다."라고 전했다. 약 5년 후, 미치나가는 무라사키를 쇼시에게 데려가 어떠한 직위를 맡게 했는데, 보우링은 이 직위를 가정교사로 보았다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들은 궁정에서 칩거 생활을 했으며, 가문은 이들을 정략 결혼을 시켜 권력을 잡는 데 이용하였다. 쇼시가 여러 황족들과 결혼하면서, 외척이 천황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미치나가를 비롯한 여러 후지와라 섭정들은 이런 방법으로 권력을 쥐었다. 일부 여성들은 칩거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참가하는 사교계는 높은 경쟁력을 가졌다. 이치조의 어머니와 미치나가의 여동생 센시도 영향력 있는 살롱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치나가는 이에 맞설 살롱을 세우기 위함으로 쇼시가 무라사키 같은 교양있는 여자를 가까이하길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라사키가 입궁했을 때 쇼시는 16세에서 19세였다. 아서 웨일리에 따르면, 쇼시는 깊은 생각을 가진 젊은 여인이었고, 쇼시는 아버지의 집과 황궁 안에 있는 자신의 궁정 두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초기 역사 모노가타리 〈에이가모노가타리〉의 저자인 아카조메 에몬과 이즈미 시키부 같은 교양 있는 여성 작가들을 가까이 했다. 이들 사이의 경쟁은 무라사키의 일기 중 이즈미를 폄하하는 내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라사키는 이즈미를 두고"이즈미 시키부는 재밌는 편지 작가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 .그녀는 조심성 없이 글씨를 빠르게 휘갈겨 잽싸게 작품을 만드는 재능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모방할만한 흥미로운 주제나 원작이 있어야 한다. 사실 나는 그녀를 진짜 시인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썼다.〈마쿠라노소시〉의 작가 세이 쇼나곤은 쇼시가 입궁했을 때 데이시의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무라사키는 쇼나곤의 경쟁 상대로서 쇼시의 궁정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데이시가 무라사키가 입궁하기 전인 1001년에 사망하여 두 작가가 동시에 궁정에 있지는 못했지만, 무라사키의 일기에 쇼나곤에 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라사키는 쇼나곤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쇼나곤에게 일부 영향을 받았다. 쇼나곤의 〈미쿠라노소시〉는 교양 있는 시녀들로 유명한 데이시의 궁정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의뢰된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 문학 연구자 조슈아 모스토우(Joshua Mostow)는 미치나가는 이와 비슷하게 쇼시의 궁정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쇼나곤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교양 있는 여성으로서 무라사키를 쇼시에게 보냈다고 믿는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기질을 가졌다. 쇼나곤은 재치 있고 영리하며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무라사키는 내성적이고 예민했다. 무라사키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라사키는 "세이 쇼나곤... 끔찍할 만큼이나 거만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며 여기저기에 써놓은 한문 글귀를 보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킨은 쇼나곤이 쇼시의 경쟁 상대인 황후를 섬겼던 것에 근거하여 무라사키에게 비쳐진 쇼나곤의 인상이 쇼시와 쇼시 궁정의 여자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는 무라사키가 쇼나곤의 인기 있는 《마쿠라노소시》에 대응해 《겐지모노가타리》를 쓰도록 궁정의 부름을 받았다 생각한다. 무라사키는 다양한 면에서 쇼나곤과 자신을 대조했다. 무라사키는 《마쿠라노소시》를 폄하했다. 또한 한문 지식을 뽐내던 쇼나곤과 다르게 무라사키는 한문을 모르는 체 했고, 한문을 가식적이고 꾸며진 언어라고 보았다.
사진 :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