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 by 순둥이
訓民正音
世宗御製 訓民正音 序文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여 與文字로 不相流通할새 故로 愚民이 有所欲言하야도 而終不得伸其情者가 多矣라. 予가 爲此憫然하야 新制二十八字하노니 欲使人人으로 易習하여 便於日用耳니라.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의 말소리)과 달라서 서로 잘 통하지 않거늘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훈민져ᇰᅙᅳᆷ, 訓民正音)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에서 해설하고 있는 뒷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한글은 1443년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이 창제하여 1446년에 훈민정음으로 반포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훈민정음의 판본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크게 해례본(한문본), 언해본이 있고, 그밖에 예의본이 있다. 실록본이 있는데, 이는 예의본에
속한다. 이 가운데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
하는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今正音之作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初非智營而力索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 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음양의)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훈민정음 이십 여덟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제자해〉(制字解)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이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상주본은 2008년 8월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세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현재 상주에서 발견된 해례본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두 명 존재하여 1년이 넘도록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상주본은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서적을 오히려 훼손할 우려가 있어 서적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분쟁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훈민정음 예의본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희방사판(喜方寺版) 《월인석보》에 실린 것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 언해본은 해례본의 한 종류이나 편의상 따로 언해본으로 불린다.
언해본은 본디 한문(해례본/원본)으로 되어 있던 것이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상언해본이라고 한다
의의...
이 책은 한글의 창제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이다. 《해례본》에 포함되어 있는 있는 예의(例義)는 특히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
이 책의 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된다. 또한, 해례는 오랫동안 문제로 삼던 글자의 기원 등 여러 가지의 의문점을 밝혀 주고
있다. 《예의본》은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鄭麟趾 序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子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文字以通其用 是猶 鑿之 也.
豈能達而無 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吾東方禮樂文章 擬華夏.
但方言之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獄者疾其曲折之難通.
昔新羅薛總 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 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犀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字韻則淸獨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逐命詳加解釋 以喩諸人.
於是 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 副敎理臣朴彭年 臣申叔舟 修撰臣成三問
敦寧府注簿臣姜希顔 行集賢殿副臣撰李塏 臣李善老等 謹作諸解及例
以敍其傾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
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恭惟我殿下
天 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盖有待於今日也歟.
正統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
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온갖 사물의 실상(實相)과 통하게 하였고, 삼재의 도리를 책에 싣게 하니,
후세 사람이 능히 (이를)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이에 따라 서로 다르다.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그래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그 사용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어서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은 예악(禮樂), 문장 등 문물제도가 중국에 견줄만하나
다만 방언 이어가 (나라말만은) 중국과 같지 않다.
(그래서) 글 배우는 이는 그 뜻의 깨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법을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글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 말에)
들어맞지 않는다.
비단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데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달치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 모양은 고전(古篆)을 본떴고,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칠조에 맞고,
삼재의 뜻과 이기(二氣,陰陽)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28글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고도 요긴하고 정(精)하고도 통하는 까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 글자로써 송사를 심리하더라도 그 실정(實情)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자음은 청탁을 능히 구별할 수 있고, 악가(樂歌)의 율려(律呂)가 고르게 되며,
쓰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고, 이르러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가 있다.
드디어 (세종께서) 저희들에게 자세히 이 글자에 대한 해석을 해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분부하시니,
이에 신(臣)은 집현전 응교 최 항, 부교리 신 박팽년, 신 신숙주, 수찬 신 성삼문,
돈녕부 주부 신 강희안, 행(行)집현전부수찬 신 이개, 신 이선로 등과 더불어
삼가 여러 해(解 )와 예(例)를 지어서 이 글자에 대한 경개를 서술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바랐사오나,
그 깊은 연원이나 , 자세하고 묘한 깊은 이치에 대해서는, 신들이 능히 펴 나타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시정 업적이 백왕(온갖 임금)을
초월하여,
정음을 지으심도 어떤 선인(先人)의 설을 이어 받으심이 없이 자연으로 이룩하신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지 아니한 데가 없으니,
(이는) 어떤 개인의 사적(私的)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음이 오래 되지 않음이 아니나,
문물을 창조하시고 사업을 성취시켜 주실 큰 지혜는 대개 오늘을 기다리심이 계옵셨구나!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
,ㅿ'과 중성의 '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
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
爲
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
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하는 책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한문본, 〈훈민정음〉원본이라고 한다. 목판본 1책 33장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출처:문화재청>
촬영현장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