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4. 7(주일) - 부활절 둘째 주일 - (2024년 14주)
제목; “부활 사건에서 부활 신앙으로”
성경; 눅 24:36-48 (p.140) (시 4:3, 300<406>, 370<455>, 6)
<예배의 부름> (시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부활절이 지나고 나면 부활에 대한 관심과 생각이 거의 사라지는데.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항상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간직하고,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공철학과 성공원리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이끌어준짐 론(Jim Rohn)이 <내 영혼을 담은 인생의 사계절>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
“지금 나는 어느 계절에 와 있는가? 봄은 기회, 우정, 사랑, 생각을 활용하는 시기이다. 봄은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행동의 씨앗을 뿌려야 가을에 수확물을 보상받을 수 있다. 봄은 약속한다. ‘뿌린 대로 거둔다.’(기도의 씨앗,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열매로 응답합니다.) 뿌린 결과는 반복해서 돌아온다. 여름은 보호하고 성장하는 시기이다. 여름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벌레와 해로운 잡초를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역경을 예상하고 미소를 짓고, 감사하라. 인간의 영혼이 역경을 통해서 성장한다. 가을은 봄의 노동에 따른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이다. 가을이 주는 보상에 기뻐한다. (수확의 시기를 놓치지 말라.) 그러나 봄에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여름에 경계하지 않는 사람은 가을에 혼란과 근심,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가을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기이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결과를 향상할 수 있다. 겨울은 과거의 후회가 아니라 감사를 모두에게 나눠주는 시기이다. 겨울은 추위, 칼바람, 얼음, 눈이 있다. 절망, 고독, 실망, 실패라는 겨울이 온다. 겨울이 왔을 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준비를 했거나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하는 것이다. 겨울은 검토와 숙고, 성찰의 시기이다. 매일 성취하는 것과 역경, 불확실한 미래에 감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라는 한 날은 정말로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하느냐?”하는 것은 오늘 이후로 남기게 될 흔적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4월을 ‘갈아엎는 달’이라고 말합니다. 농부는 가을의 수확을 기대하며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아엎는 수고를 합니다. 우리 역시 단단해진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매일매일 생각하고, 행동하고, 노력해야 내일에 수확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마음에 뿌려야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현실에 결과물을 보내줍니다. 오늘 꿈을 꾸어야 내일이 달라집니다. 매일의 봄에 기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돌, 잡초, 다른 방해물이 있어도 씨앗을 넉넉하게 뿌려야 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도 씨앗을 영리하게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돌, 잡초, 가시가 모든 것을 파괴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황이 결코 저절로 변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달라지고 싶다면 만나는 사람과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봄에 기적을 보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최고의 명품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 폴 투르니에가 말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인생이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야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가 됩니다. 새로운 영감을 얻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가 됩니다.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자아가 성장합니다.
인문 심리학의 창시자 칼 로저스 박사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4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①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②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솔직하고 순수하다. ③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며 말하는 사려가 깊다. ④ 다른 사람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 행복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부활의 은혜와 감격이 계속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예수 부활 복음의 씨를 뿌리므로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부분 교회는 사순절을 통해 부활주일을 준비하고 부활절을 최고의 절기와 축제로 지킵니다. 그런데 부활절 후 교회 절기가 끝나지 않고 이후에 부활절 둘째 주일, 셋째 주일, 넷째 주일,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이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일 년에 한 번씩 기념하고 지나가면 되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이후의 우리 삶에 부활 신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이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눅 24:36-48)은 예수님께서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의심하는 제자들이 자신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구운 생선을 드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부활 전승은 크게 예수님의 ‘빈 무덤 이야기’와 ‘나타나신 이야기’이 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여주는 누가복음 24장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1-12절은 빈 무덤(예수님 부활), 13-43절은 나타나심, 곧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13-35), 예루살렘에서 제자들(36-43),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최후의 사명을 주심(44-49)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필히 점검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고 낙심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 부활 사건은 알았지만, 그것이 부활 믿음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가 자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이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신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을 만나주신 분이 예수임을 알게 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자신들이 엠마오로 가던 중 만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곳에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믿음을 갖게 하고, 부활 신앙 공동체로 세워나가시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부활 사건을 부활 신앙으로 이어주십니까?
1. 부활의 예수님이 평강을 나누어주셨습니다(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36)
예수님의 죽음까지는 확인했는데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제자들의 상태는 절망과 허탈함과 막막함이었습니다. “밤새 안녕이라더니”라는 우리의 표현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배와 그물, 처자식까지 버리고 따랐던 과거를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오른편, 왼편에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날이 막막했습니다. 이렇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으로 절망했습니다.
또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불안해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강을 전하셨습니다(36).“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에이레네 휘민, Εἰρήνη ὑμῖν)예수님께서는 이제 이런 불안과 절망과 두려움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평강을 전하셨습니다. “평강”(에이레네, 샬롬)은 ‘국가적 평온 상태’(계 6:4), ‘개인들 간의 화목’(녹 12:51), 또는 ‘안전, 번영’(녹 19:42)을 뜻하는 명사이며, 당시에 매우 널리 사용되던 흔한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20:19-21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이 단어가 두 번 사용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실 시대에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던 것과 연관지어 볼 때(눅 2:14),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곳 어디나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누구에게나 평화가 깃들리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의 ‘샬롬’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명령이요 인사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흔하게 말하는 축복이 아닙니다. ‘이대로 될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복을 빌고 계십니다. 이러한“평강”의 반대되는 것은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의심’에 사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직접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부활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지식이나 상식, 인간의 경험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배고파서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두려움 중에서 으뜸가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평안입니다.
어떤 외과 의사에게 수술받기를 원하는 한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수술받은 환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퇴원한 뒤에 얼마 있다가 또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인사받으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기로는 분명히 3년 뒤에는 재발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영안실에서야 끝날 병인데, 그것도 모른 채 찾아와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료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그때마다 잠깐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일 뿐, 종당에는 영안실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해결을 얻기 전에는 아무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를 죽인 저들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까봐 그러하냐? 나는 부활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골방에 앉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너희는 장차 나와 같이 될 것이라고 확실한 미래를 보증하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절망과 두려움과 불안함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희망과 새로운 비전과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사탄의 권세는 결박되었으며, 우리를 묶고 있던 죄의 권세도 무너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최종 승리를 얻은 자가 누리는 평강을 부활하신 주님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300장 “내 맘이 낙심되어”가사처럼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을 때,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 날 버릴 때,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 때, 번민이 가득 차고 눈물이 흐를 때, 환난이 닥쳐와서 어려움 당할 때” 이런 때에 부활 신앙으로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 부활의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을 직접 보여주시며 확인시켜 주셨습니다(39-40).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39-4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평강을 전하신 주님은 그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의 증거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37절에서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님을 ‘육체가 없는 귀신인 줄로 알아 놀라고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38절에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이 “의심”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보이시며 만져보라’고 하시며 부활의 증거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39-40).예수님의 손과 발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완벽한 치유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여 얻게 될 새로운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하면 영혼만 살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로 영원히 살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한 또 하나의 두려움은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버렸으니 당신께서도 우리를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도망갔으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마땅하다’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 가운데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28:20에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20:19-29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가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한 것을 기억하시고, 여드레 후에 다시 오신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고 신앙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 무슨 조건이나 이유가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어떤 이론이나 철학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역사적 사건을 믿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에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3. 부활의 예수님은 직접 음식을 먹으시며 확인시켜 주셨습니다(41-43).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41-43)
예수님께서 자신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41)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운 생선을 드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43).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은 못 믿겠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식사 모티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0-31)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아먹고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만나고 엠마로 가던 길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함께한 자들을 만납니다.
이 식사 모티브는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에게도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확신이 없었던 일곱 제자들은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물을 던지므로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이것을 보고 요한은 예수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주님이시라”고 말하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오십 칸”(200규빗, 약 90m)쯤 되는 거리의 물 속으로 뛰어듭니다(8). 베드로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과 떡도 있습니다(9).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떡과 생선을 먹으면서 부활을 확실히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십자가 이전에도 예수님과 함께 행했던 수많은 식사에 대한 기억을 재현시키심으로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현실적이고 생생한 체감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마지막으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4. 부활의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27, 44-45).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박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구운 생선을 먹으신 후에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성경 말씀으로 부활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을 통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주십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도 “이에 ‘모세’(토라, 율법서)와 모든 ‘선지자의 글’(느비임, 예언서)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케투빔, 성문서)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고 했고, 이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32).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도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4-45)라고 한 것처럼 구약 성서의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자주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제자들은 정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막 8:17, 요 8:43).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눅 18:31-34).
그리고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성경 말씀이 자신에 대한 예언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47)라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이루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죄사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사를 통해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사함을 받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5. 결론 : 부활의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48).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약에 예언하신 완전한 속죄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신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부활의 증인 공동체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4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부활 주일이 부활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나 연중 행사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이어져 매일 삶에서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이어지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찾아가서 확인시켜 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눈이 밝아지고(31), 마음이 뜨거워지고(32), 마음이 열려 깨닫게 되는(45)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낙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의심으로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제자들도 부활 신앙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능력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5:41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히 11:38)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58에서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했습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달라진 인생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강력하게 역사하는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III.
일본의 기독교 문학가 엔또 슈샤쿠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핍박받을 때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농부 두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예수 믿는 신앙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만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십자가 형틀에 두 농부의 몸을 비끄러매어서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 박아놓았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나면 급기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물이 점점 허리에서 어깨로, 목으로 자꾸 올라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네덜란드 신부가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도와주시옵소서. 능력을 나타내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침묵하고만 계십니까?”하고 울부짖습니다. 신부의 귓가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나의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그렇듯 용기의 사람이 되고 확신의 사람이 되고 엄청난 증인이 되고 그에 따른 도덕적 생활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의식하였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부활 신앙에만 참 신앙이 자리합니다. 그러할 때에 기쁨도 평안도 위로도 얻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쓸모없는 사람들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사람들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특별한 신앙이며, 따라서 이 신앙이 바로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고 다시 산다는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은 생명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아갈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 일은 예수님 이전에도 없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기는커녕 예수님 부활을 믿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처음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시고, 못 박힌 손과 발을 친히 보여주셔서 만지게 하시고,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부활 신앙을 확실하게 해주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부활이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 승화하여 예수 부활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첫댓글
2024년 4월 7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hongjoon.kang/videos/1504138950516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