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자유
자유에 이르는 길
무조건적 사랑에 이르는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
서론
개인으로든
사회로서든
실상에서 우리는
스스로 깨달은 정도만큼 자유롭지만
그러나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고
우리는 그게 정말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인이
저마다 그 답을 안다고 상상하지만
정말 그런가?
자유란
삶을 경험하는 심리적/감정적 방식인가 아니면
그저 지적/정치적 이상주의자 마음을 사로잡는 구호일 뿐인가?
자유를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상당히 복잡하고 힙겹다는 것이 판명된다. 자유라는 용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정의할때와 마찬가지로 내용만이 아니라 맥락도 필요한데, 그 맥락은 누구를 위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의 자유인가이다.
조사를 통해 상대적 정도를 갖는 자유의 전 범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유란 용어는 다시 의식의 측정된 수준들을 가리키고 그와 더불어 공히 실재하며 지각되는 내면의 주관적 경험 대 외적 조건들 간의 차이를 가리킨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문제는 해결된다.
진실로
자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지
단지 그에 대해 생각하거나
가설을 세우는 것만은 아니다.
운용상으로
만인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고
그러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상상력 넘치는 공상인지
혹은 확증 가능한 실상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 있다.
정의
사전에서는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해방과 독립의 상태, 편안함, 방식, 특권적, 자결적 , 속박에서 자유로운 미국헌법은 국민에게 삶, 자유, 행복추구의 자유를 보장했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은 여기에 네가지 자유 즉 언론자유, 신앙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가했다. 우리는 자유가 바람직스러운 가치의 측면에서 정의되고 또한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걸 본다. 이렇듯, 자유는 인간이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 대 원치 않는 것과 박탈을 반영하는 말로 정의된다.
정의된 바와같이
자유란
순수히 주관적인 현상이고
욕구와 욕구의 충족정도 간의
경계면을 반영하며
따라서
경험함의 상대적 상태라는 것이
신속히 분명해지게 된다.
원하는 것이나 혐오하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시간동안 내적 자유를 느낄 것이고,
혐오하는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욕구가 많은 이들은
풍요로운 환경에 있더라도
좀처럼 자유를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렇듯,
성숙함과
사람의 의식수준이
자유에 대한 경험의 질을 결정하며
그것은
사적인데,
그렇다면 사회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의무를
어느 정도로 지는가?
사회적 자유는
성취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가,
아니면 기회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가?
불편한 느낌이란
내적 상태이지
사실상 사회적 요소는 아닌데,
그렇다면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없도록
사회가 자신의 한도를 늘려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인가?
지상의 법이
신경증적 문제 및
성격장애의 병리에 맞춰져야 하는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 꿈, 욕망, 혐오, 싫음이 솟아나는 마음 자체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편해하는데, 그것은 그저 그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고, 남들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에 대한 유아적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임상적으로
그리고 연구를 통해 볼때,
사람의 의식수준이
200밑으로 더 많이 내려갈수록
내적 자유의 경험은 더욱 적어진다.
그리고
의식수준의
가장 낮은 수준들에서
자유의 경험은 가능하지 않다.
필연적 귀결은
사람의 진화 발달 수준이 높을수록
기회, 가능성, 경험되는 자유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측정수준 540이상에서,
자유는
항상적인 내면의 경험적 실상이며
세계에서 전적으로 독립해 있다.
진화와 더불어
성공, 행복, 자유는
완전히 독립적인 내적 상태이고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각성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마음의 산물로서의 자유
경험적 자유는
개인적, 사회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감정에 물든 정신화이기 때문에
기대를 포함하는 정신기능에 대한
실용적이고 비전문적인 이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진화의 귀결로서의
마음은
만인이 똑같이 갖고 있는
어떤 것만은 아닌데,
관찰해보면
정말 정신화의 두 지배적 에너지 장이 있다는 것과
각각의 에너지 장은
어떤 끌개장을 반영하는
측정가능한 지배적 의식수준과
상관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특정한 측정가능한
의식수준 에너지 장과의 정렬은
경험과 의도에 의해
수정되는 유전적/카르마적 유산의 귀결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두개의 주요 수준에서 묘사가능한데,
그 두 수준은
차례로 뇌 생리의 차이 및
높은 마음의 에테르 뇌 출현을 반영한다.
그래서
낮은 마음은
물질적 뇌가 갖는 능력 및
그 뇌의 신경화학으로 한정된다.
마음의
이 두 수준에 대한 묘사는
전통적 지식 및
인간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표1. 마음의 기능 : 태도
에고 마음(155로 측정). 내용(세부) | 높은 마음(275로 측정). 내용더하기 장(조건들) |
구체적, 사실적 | 추상적, 상상력이 넘치는 |
제한적, 시간, 공간 | 무제한적 |
개인적 | 비개인적 |
형상 | 의의 |
세부에 초점을 맞춘다 | 일반성 |
독점적 사례들 | 유형을 분류한다. 포괄적 |
반발하는 | 초연한 |
수동적/공격적 | 보호적 |
사건을 회상한다 | 의의를 맥락화한다 |
계획한다 | 창조한다 |
정의 | 본질, 의미 |
특수화한다 | 일반화한다 |
지루한 | 뛰어난 |
동기부여 | 영감을 주는, 의도 |
도덕률 | 윤리 |
사례 | 원리 |
육체적 감정적 생존 | 지적 발달 |
쾌락과 만족 | 잠재력의 실현 |
축적 | 성장 |
획득한다 | 음미한다 |
기억한다 | 반성한다 |
유지한다 | 진화한다 |
생각한다 | 처리한다 |
명시적 의미 | 추론 |
시간 = 제한 | 시간 = 기회 |
현재/과거에 초점을 맞춘다 | 현재/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
감정/원하는 것들에 지배된다 | 이성/영감에 지배된다 |
비난한다 | 책임진다 |
부주의한 | 규율있는 |
모든 점진적 변화는
강도를 반영하는
대조적 쌍들 간에 존재한다.
예를들면
갈망함, 원함, 욕구, 꼭 가져가야 함, 애호함
혹은 수용함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이 단하나의 성질에서의 차이만으로도
살인, 분노, 우울, 비참함과
그와 대비되는 만족, 이완, 느긋한 기대간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철학은 물론이고
심리학, 정신의학, 뇌화학에서는
태도에 관한 연구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데,
그것은
태도가 인간의 행복, 만족, 성공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감안할때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다.
태도는
지각된 자기를
지각된 세계 및 지각된 타인들과 결부시키는
습관적인 심정 경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태도는 이른바 자기계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워크숍들이 있고 상당한 분량의 문헌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집단적 경험에 의하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기대는 성장과 점진적 성숙 및 영적 진화와 더불어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문화적 성장의 장은 최근 '문화적 창조자"로 명명된 사회의 진보적 부문을 끌어당긴다.
간단한 연습삼아
다음을 포함하는
대조적 목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동안 간과되었던
다양한 선택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표 2. 마음의 기능 : 태도
에고 마음(155로 측정) | 높은 마음(275로 측정) |
성급한 | 참을성이 있는 |
요구한다 | 선호한다 |
욕망한다 | 가치를 부여한다 |
당황, 긴장 | 평온한, 신중한 |
통제한다 | 확산시킨다 |
심리적 이용 | 잠재력을 본다 |
사실적 | 직관적 |
에고 자기 지향적 | 에고 더하기 타인 지향적 |
개인과 가족의 생존 | 타인의 생존 |
옥죄는 | 확장하는 |
착취한다. 고갈시킨다 | 보존한다. 증진시킨다 |
설계 | 예술 |
경쟁 | 협력 |
예쁜 | 매력적인 |
순진한, 인상받기 쉬운 | 세련된, 학식이 풍부한 |
죄책감 | 후회 |
잘속는 | 사려깊은 |
비관주의자 | 낙관주의자 |
과도함 | 균형 |
낮은 힘 | 힘 power |
영리한, 교활한 | 지적인 |
생명을 착취한다 | 생명에 봉사한다 |
무정한 | 자비로운 |
둔감한 | 민감한 |
특수화하다 | 맥락화하다 |
진술 | 가설 |
종결 | 중도 변경이 가능 |
말기적 | 배아기적 |
동정한다 | 공감한다 |
등급을 매긴다 | 평가한다 |
원한다 | 선택한다 |
회피한다 | 직면하고 수용한다 |
유치한 | 성숙한 |
공격한다 | 피한다 |
비판적 | 수용적 |
선고를 내리는 | 용서하는 |
표 2는 자기 앎에 이로운 더이상의 선택지와 가능성들을 드러내준다. 한계가 있는 태도는 성격 결함으로 불렀는데, 영적성장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그러한 결함을 인지하고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자마자 그것이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의 결함을 부정하는 대신
수용하는 것의 이로움은
자기정직성, 안전함, 높은 자존감과 같은
내적감각이 고양되는 것이고
더불어 방어적 태도가 대폭 감소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타인으로 인해 감정을
다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므로
정직한 통찰에는
잠재적인 것은 물론
실제적인 감정적 고통을 줄여주는
즉각적 이로움이 있다.
사람이 겪는
감정적 고통은
자기 앎의 정도 및
자기 수용의 정도와
정확히 관련된다.
우리가
자신의 그늘을 인정할때
타인은 그 부분을 공격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덜 취약하며
보다 안전하고 무사하다고 느낀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언쟁은
단순한 성격결함에 대해서조차
그것을 인정하거나
책임지기를 거부하는데서 비롯된다.
예를들어
그것은
어떤 심부름이나
사소한 일을 깜박하는 것 같은 일인데,
기묘하게도
그런 것이 대인관계 갈등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말다툼은 감정적 성숙함과 정직성이 있었다면 미연에 방지되었을 사소한 일들로 인한 끝없는 상호비방을 나타낸다. 가정 폭력과 배우자 살해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시작되어 그 다음에 그것이 자기애적 에고를 풀어놓음에 따라 점점 고조되는데, 자기애적 에고에 대해 정당성은 놀랍게도 심지어 생명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고통없는 성장의 비결은
겸손함이다.
겸손함이란
자부심과 가식을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자신과 타인의
정상적 인간특성으로
수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낮은 마음은
관계를 경쟁적인 것으로 보지만,
높은 마음은
관계를 협력하는 것으로 본다.
낮은 마음은
타인에게 관여하게 되고,
높은 마음은 타인과 정렬되게 된다.
미안합니다라는
단순한 말이
대부분의 불을 고통없이 끈다.
삶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냐에 대한
강박을 포기함을 뜻한다.
상냥함이
호전성보다 훨씬 강력하다.
승리보다는
성공이 낫다
(정직한 겸손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느 유명인사는 감옥행을 피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표 3. 마음의 기능 : 태도
에고 마음(155로 측정) | 높은 마음(275로 측정) |
방어적 | 우호적, 너그러운 |
냉소적, 회의적인 | 낙관적, 희망적 |
의심하는 | 신뢰하는 |
이기적인 | 배려하는 |
계산적 | 계획적 |
솔직하지 않은 | 솔직한 |
돈키호테식 | 안정된 |
신경질적인, 까다로운 | 쉽게 기뻐하는 |
쪼들리는 | 넉넉한 |
강요한다 | 부탁한다 |
과도함 | 균형 |
무례한 | 정중한, 상냥한 |
극단적 | 타협적 |
돌진한다. 서두른다 | 계속간다 |
물욕 | 돈이 전부는 아니다 |
욕정 | 욕구 |
감사할 줄 모르는 | 감사하는 |
헐뜯는다 | 칭찬한다 |
선고를 내린다 | 찬성하지 않는다 |
성차별주의자 | 인도주의자 |
무기력한 | 진보적인 |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심 |
기회주의적 | 삶의 계획에 맞춘다 |
자족적 | 자기계발 |
상스러운, 천박한 | 절제된, 미묘한 |
발뺌한다 | 정직한 |
시기한다 | 감상, 존중 |
가혹한, 무거운 | 유머감각, 마음이 가벼운 |
자기 존중은
자기 정직성에서 비롯되며
심술궂고 다투기 좋아하는
방어적 태도와
에고 팽창인 시비조의 태도
그리고
비현실적 기대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함께 버릴 수 있게 해준다.
정상적 아동기에 괴롭힘과 장난을 주고 받는 것은 성숙과정을 돕는데 그것은 과민함을 줄여주고 남들이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때 에고가 무시당하는 느낌을 줄여준다. 아이들은 서로를 멍청이라고 부르지만 신경질적이고 반사적으로 방어하는 대신 그것을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성공의 비결은
자신을 바꾸는 것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데 있다.
뉴욕시는
차갑고 무례하고 냉혹한 곳일까
아니면 우호적이고 정중한 곳일까?
이 모든 것은 뉴요커들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달려있다. 크게 진화한 사람은 뉴욕시를 친근하고 거의 고향같은 곳으로 여긴다. 미성숙한 사람은 그곳을 차갑고 거부하는 곳으로 보는데, 왜냐하면 세상은 본인 스스로가 투사시킨 지각을 되비춰주기 때문이다.
성공은 건설적 태도의 자동적 부산물이고, 또한 잭 캔필드가 "성공의 원리"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단순하고 상식적인 기초의 자동적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힘겹지 않고 매우 즐거우며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 성공은 상당히 단순한 원리들의 귀결이다.
높은 마음의 발달은
종교적 훈육(나중에 삶에서 그것을 거부하게 되더라도)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에
아름다움, 특히 고전음악, 미술, 발레,
자연과 접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지지되는데
그러한 것 모두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 패턴들의 발달 및
물질적 뇌자체의 뉴런 배열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자유와 에고
대량학살을 포함하여 전쟁과 범죄 및 모든 사회적 갈등의 근거는 에고 자체의 핵심에서 특히 성급한 욕구와 목청높은 항의 및 비현실적 기대를 동반하는 유아적 에고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진단된다. 성숙해지면서 과대한 에고는 더욱 조용해지고, 유순해지면 타기 쉬워진다. 심리적 의식의 진화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난다.
1. 억압 : 원시적 충동은 억압되고 뒤이어 부정되며 그 다음에는 타인에게 투사된다(사회적 피해망상)
2. 내맡김과 승화 : 적절한 양육과 더불어 자기애적 원시적 충동은 사랑과 수용같은 그리고 지지적 부모 및 권위 인물과의 동일시같은 더 나은 이득을 얻는 대가로 포기된다.
3. 순응 : 이것은 성숙을 회피하는 방식이며, 원시성의 지속을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에고 중심성은 억제될 뿐이고 내면의 자기애적 '왕아기' 태도의 전능함/과대성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적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모든 방해를
임의적이고 가증스러운
권위주의로 보는 결과를 낳으며,
분개, 반항, 저항,
지속적 미성숙함으로 귀착된다.
이 이원성은 또한
사건을
가해자/피해자 모델로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실상에 대한 심각한 왜곡으로 인도하는데,
가해자/피해자 모델은
그 다음에 사회에 투사되어
지극히 무시무시한 귀결을 낳는다.
자기애적 에고 속의
이러한 분열이
지난 세기에 1억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하여 성숙의 실패는 병리적 성격장애로 인도하는데, 그런 성격장애는 범죄성향, 만성적인 정치적 반체제주의, 그리고 자국민뿐 아니라 자신의 가조까지 살해하는 과대한 폭군과 독재자들의 병적 자기중심성이 포함된다.
자유대 유치증
유아적 에고는
자유를 방종이자 쾌락주의의 즉각적 충족으로
더불어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잘못 해석한다.
약화된 형태로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며
모든 제한을 뒤엎으려고 한다.
유아적 에고는
또한 경계선을 넘는 것에
어떤 귀결도 없어야 한다는
비현실적 기대에 이른다.
그것은 요즘 십대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인위적으로 유발된 기대인데, 십대들은 자신은 피해자이므로 사회적 위반에 책임이 없다는 관념을 주입받았고, 그것은 해로운 태도로 귀착된다. 대중매체의 쇼크자키들이 최근 알아챈 것처럼 극단주의는 결국 역반응을 촉진한다.
어떤 좋은 것은 남용과
온전치 못한 악용은
자멸적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사회구조와 생존의 기본적 요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악용은
자유의 상실을 초래한다.
자기애적 에고의 욕구불만은
가장 빈번하게
증오를 일으키는 방아쇠인데,
현 사회에서 증오는
모든 권위있는 인물과 기관들을 향해
자유롭고도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유아적 에고는
무신론자에 무정부주의자이며,
모든 상황을
'가해자/피해자 측면'으로 보는
피해망상과 광범위한 지각의 왜곡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모든 사회적관습을 무시하는 것을 쿨하게 여겼던 1960년대의 나세대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사회적 발달의 결핍이었다. 그 그늘은 귀결을 무시하는 그러한 위치의 순진성이었는데, 이마 밝혀진 바와같이 사회 관습을 무시한데 대한 귀결은 죽음이나 종신형까지 포함하여 정말 대단히 엄중할 수 있다.
이 행성에서의
생명의 진화에서 설명한 것처럼
최초의 생명 형태는
선천적으로 욕심이 많았고,
인간에게서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끊임없는
굶주림/결핍/욕망으로 지속된다.
누그러지지 않은
자기애적 에고가
성인기에도 지속되는 것은
냉혹하고 기본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성격으로
인도한다.
내적 허영심은
만족할 줄 모르며,
이는 실재하거나
가상적인 무시에 대한 예민함으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지위, 추구, 질투, 그리고 악의와 뒷공론이라는 형태의 선망은 친구에게 등을 돌리거나 혹은 온전성보다는 악의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는 '등에 칼을 꽂는 자"들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속성이다. 이렇듯그런 사람들은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타인을 팔아넘기고 타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에 재빠르다. 동일한 정신 역동이 자신의 조국, 동료, 혹은 전우에게 등을 돌리는 이들에게 적용된다.
현재의 정치적 경향에 내재된 권위에 대한 적대감은 합법적 부모권위와 기능에 대한 점진적 공민권 박탈을 통해 예시되는데, 이제 부모의 권위와 기능은 정부에서 후원하는 학교교육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모든 전체주의의 특징인데, 전체주의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프로그래밍이 전통적 부모기능을 대체한다. 아이들의 새 생각, 밈, 사회적 정치적 태도들로 의도적으로 프로그램된다. 그 상태가 부모역할을 대체하고 그 다음에는 규칙을 만든다. 젊은이들은 취약하고 말랑하기 때문에 으레 이슬람 물라에서 이른바 해방운동가에 이르는 권력 추구자들의 먹이가 되는데, 이들은 모두 통제를 추구하며 젊은이들의 순진성을 양식으로 삼는다.
성숙해지면서
사회적 삶은
동물충동을 승화시키는 대가로
사랑, 안전함, 성공, 존중, 자존감,
신체의 자유와 같은
상위의 이득을 얻는 거래들이 이루는
평형상태이자 그 귀결로 보인다.
어떤 경계선이나 사회적/법적 규정이 속박하는지 혹은 보호적인지 여부는 외적실상보다는 하나의 관점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사회는 집단적 무지뿐 아니라 집단적 지혜를 반영하는데, 집단적 지혜는 흔히 큰 수난과 고통을 치른 대가로 온다.
사회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면,
자기애적 에고는
플라이휠이 없는 엔진과도 같다.
성숙해지면서 사람은
경찰, 법률, 윤리, 합리성, 도덕이
무책임성이라는
자유의 환상적 대체물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지적 영역에서 유치증은 이성, 논리, 도덕, 윤리를 임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강압이자 제한으로 보며, 따라서 사회의 그러한 부위는 범죄자, 범죄문화, 비속함을 미화한다. 유치증은 무정부주의자를 영웅으로 보고, 그에 걸맞게 미와 아름다움을 헐뜯는다. 에고는 영리하여 증오와 폭력이라는 자신의 유아적 동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데, 그 방식은 신을 제거하는 것이거나 혹은 역설적으로 신의 이름으로 남을 학살하는 일(즉 지하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참고) 지하드
이슬람에서 지하드(아랍어: جهاد)는 아랍어로 고투 혹은 분투를 의미한다. 성전은 지하드에 포함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지하드가 곧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라마단에 해 떴을 때 욕구를 참고 금식을 하는 것도 '영적인 지하드'라고 할 수 있다.
이드가 꿈구는 자유
팽창된 유아적 에고는
요구하고 자격이 있다고
과대하게 느끼며,
자신이 가진 권리때문에 분개하고
아무런 귀결이나 책임이 없는
방종을 허락받을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구조가
전체적으로 충동성을 좌절시키는
큰 요인으로 보인다.
에고의 핵은
반항적 무정부주의자에다
무신론자이며,
삶이 끝없는 흥청거리는
로마의 주연이기를 기대하는
노출증환자인데,
그러한 기대하는 술취한 방종이
그리고 순진하고 취약한 이들에 대한
학대를 허용하는
각종 도착적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에게조차 제한은 없으며, 아이들의 피해자화는 사회적으로 승인되어야 하고 심지어 합법화조차 되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구실로 그들은 그런 약탈적 행동이 언론자유로서 용인된다고 선전하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동일한 정신과정이 언론자유라는 용어가 말대신에 전적으로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표현이나 행동을 가리키도록 그 말의 의미를 바꿔놓으려 한다. 그럼으로써 늑대는 정치적 구호라는 양의 탈을 쓴다.
자기애적 에고의 핵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개인책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과
그에 대한 거부인데,
책임지라는
어떤 요청도 억압적인 것이라며
요란스럽게 거부된다.
자기애적 에고는
피해자인 것의 힘을 얻은
거짓된 느낌을 양식으로 삼으며
피해자로 보이기 위해
실상을 왜곡한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 식별력은
진보와 퇴보간의 차이를 흐려놓는
선전의 집중포화를 맞고 비틀거린다.
그러한 선전은
모든 위대한 제국이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도덕적 부패로 말미암아
몰락한 역사적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것과 퇴행적인 것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대단히 명백한데, 그것은 측정수준이 저하되면 힘의 수준 역시 저하되고, 따라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내적 생존력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성숙해지면서
권위는
악당으로만 보이지 않는데,
권위가 악당으로 보이는 곳에서
범죄자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성숙해지면
오히려 사회의 대표들로서의 권위는
보호적인 것으로 비친다.
범죄자에게
경찰은 적이지만,
법을 준수하는 이들에게
경찰은 친구다.
온전한 이들은
행사장과 거리가 비디오 감시하에 있음을 알면
좀더 마음을 놓지만
떳떳치 못하고
온전치 않은 이는
그러한 태도에 동반되는
타고난 피해망상으로 인해
공공장소 감시에 대해
분개하고 혐오한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느낀다. 감시 카메라는 현사회의 떼어낼 수없는 일부이며, 사회에 넘쳐나는 자기애적 성격으로 인해 존재한다. 카지노와 백화점은 정부 수사기관만큼이나 감시체계가 정교한데, 그보다 훨씬 나는 경우도 많다.
자기애는
본래 피해 망상적이며
따라서 끊임없이 숨으려고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
작성중인 상세한 서류를 보유하고 있고,
그것을
세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오늘날의 컴퓨터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일이다.
사생활의
모든 세부사항이
누적된 자취로서 자동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자취를 따라가면
일체의 구매행위, 웹사이트 조회,
재정적 조처가 드러나고
또한
관심사, 정치, 교육,
그리고 더 많은 것에 대한
단서가 드러난다.
만인이
공적 영역에서 살아가며
항의자는
항의자로 확인되어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될 뿐이다.
왜곡된 지각의 투사는 정치적 압력단체들이 그것을 정부기관에 잘못 적용할때 재앙에 가까운 악영향을 낳는다. 미국대사관과 군사작전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요즘의 재난들은 선의에서 나왔으나 순진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시민의 생명과 안녕을 보호하는 관계기관의 능력을 훼손시키는 중요 기관들에 대한 제한조처에 뒤이어 일어난 뜻밖의 귀결들이다.
역사적으로 동일한 순진성으로 인해 전쟁성 장관 스팀슨은 2차 대전 이전 일본의 동향에 대한 사전경고를 무시했는데, 그것은 네빌 챔벌린(185로 측정)이 보여준 현실 검증력 결핍으로 야기된 것과 비슷한 사건이었다. 챔벌린은 히틀러를 만난뒤 "우리시대의 평화"라는 구호를 들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그의 우둔함을 조소했다). 테러리즘과 타협은 155로 측정된다. 그것은 나약함이자 비겁함으로 얕잡아 보이며 공격성을 불러들인다.
측정수준 200이하에서
강자는 약자를 공격한다.
200이상에서
강자는 약자를 보호한다.
합리화된 책임감 결핍은
보다 분명히 드러난 피해자 대신에
세상에서 가장 퇴폐적이고
위험한 이들에게
공감하는 변증자의 위치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렇듯
낮은 마음은
자기애적 에고의 도구가 되는데,
작용하는
그것의 병리는 너무 심해서
60으로 측정되는 메시아적 과대망상과
460으로 측정되는 온전한 정치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유아적 에고는
사회전반을 미워하지만
특히
정부와 같은
사회의 대표기관들, 학교, 산업, 자본주의, 성공한 상업, 대기업
혹은 진짜 승리자와 성공한 이들을 미워한다.
정신분석 경험으로부터
권위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유아기의 공상과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주관적으로 금세 자명해지게 되는데,
유아기 경험에서
아버지는 위협적으로 지각되거나
혹은 보호적이고 공정한 존재로 지각된다.
결과적으로
모든 권위는
투사된 태도를 물들게 되는데,
사람은
무의식적 갈등/콤플렉스의 해소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체제에 가담하고 지지하거나
아니면 불평불만자와 혁명가가 된다.
이런
무의식적인 감정적 태도들은
임상에서 50년이상 정신과 진료를 하는 동안
환자들 속에서 관찰한 바 있다.
마음은
그 자체의 이미지와
'왜곡된 신념체계를 자동적으로 남에게 투사'한다.
이 현상은
주관적 감정적으로
정말 실재하며
정신분석의에 의한
그 어떤 자극이나 해석없이도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는
물론 악마로 몰렸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의식하게 되기보다는
사회에 투사한 이들에 의해
탈신화되었다.
정신역동을 이해하는 것의 주된 가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처리하는 에고기제를 이해'하는데 있다.
해결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사회적 귀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800년대초의
의미있는 독일 철학학파에서
헤겔은,
가장 중요한
존경받는 스승이자
권위자였다.
마르크스는
초기에는
그를 따랐지만
아버지 인물 헤겔을
특히 절대자에 관한
헤겔의 제일원리(이는 570)를 거부했다.
그는
헤겔의 중요한 이해를
경쟁이라도 하듯 내던졌고,
130으로 측정되는
그래서 다른 혁명가 내면의
반항적 청소년에게 매력적이었던
어떤 이원론을 세웠다.
진보주의자와
혁명가를 혼동하는 일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
그 자체로 참으로 온전한
"진보적" 정당이 없는 것은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명사라는 지위자체에 따르는 자만심이
정치인, 독재자, 한때의 구루,
정치적 반체제분자들의 몰락으로 인도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이 되기 쉽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한다면,
측정수준 180의 악영향은
아마도 모든 사회에 심지어 세계자체에 최대의 위험요소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수준의 그럴듯함과 능란한 선전때문인데,
그 수준은 인간 마음의 무구함을
그리고 다수인구의 발달과 성숙 결핍을 먹이로 삼는다.
자유와 뇌
발달과정에서
학습된 행동은
뇌와 대뇌피질 속의
뉴런연결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 또한
생애 후반까지 계속된다.
마술을 배우는 것과 같은
특수한 기술조차,
실험 조건하에서는
뇌 특정부위의 부피증가는 물론이고
뉴런증가 및 뉴런의 상호연결의 복잡성 증가를 낳는다.
기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뉴런의 수와 부피는
점차 줄어드는데,
그것은 "쓰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흔한 경구를 확인해준다.
이는
노년의 쇠퇴를 상쇄해줄
의의가 점점 커가는 원리이지만
중퇴생들 및
부모에게 방치당한 아이들의
지적발달 손상에 대해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사회화와 성숙의 실패는
결국 뉴런 패턴화의
손상으로 귀착되며,
그로인해
원시적 배열이 존속되어
현실 검증력은 손상되고
높은 마음발달의 토대를 이루는
보다 정교하고 기본적인
뉴런패턴화와 뉴런연결의 발달이 저해된다.
영적 앎과
본능적 욕구의 사회화가
망쳐지는 것은
앞장에서 약술한 것과 같은
원시적 반응의
우세로 귀결된다.
덜 발달된 뇌와 결과적인 마음의 수준은
동물 욕구가 계속 지배하고 있음을
뜻한다.
낮은 마음의 합리화된 궤변은
따라서 자기 자신대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보다 원시적이고 미발달된 이 마음은
그 다음에 모든 참된 합리성이 저항하고
개종작업이나 소송 협박을 통해
자신의 약한 위치를 보강하고자 한다.
자유대 궤변
궤변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치 지망생들에게
설득력있는 웅변술로서,
숨은 의제를 교묘히 위장하는 법과 함께
궤변을 가르쳤다.
훈련은
정말 선전인 것으로
덜 교육받은 자들에게
간파당하는 걸
교묘히 피해갈
왜곡에 기초한
그럴듯하고 설득력있는
주장의 제시라는 형태로 제공되었다.
조셉 괴블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근세의 전문가였다. 그는 제삼제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위해 주민 전체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뒤이은 유럽침략을 뒷받침한 이론적 근거의 밑바탕에서는 가해자/피해자라는 실상에 대한 이원적 왜곡이 그러나 두 역할이 전도된 채 깔려있었다.
히틀러의 궤변은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부당함을 시정할 것에 대한 그의 제안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1차 대전에서 자행한 야만행위와 파괴에 대해 배상할 것을 요구한 것인데, 그것을 무고한 행위로 간주하기는 힘들었다. 유아적 에고는 자신의 파괴행위에 대해 아무런 귀결이 없기를 기대하고 어떤 형태로든 책임질 것을 요구받을때 분개한다. 따라서 피해망상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유아적 에고는 가상적 불의에 대한보복을 추구한다. 유아적인 이들은 그 어떤 형태로든 귀결에 대해 책임지거나 배상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이렇듯,
극단적인 정치적 위치성은
극좌든 극우든 지극히 낮게 측정되며
낮은 마음의 에고중심성을 나타내는데,
그 에고 중심성은
우리가 앞에 나온 측정 수준들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잠재적으로 폭넓은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갈등은
일차적으로 사회적 실상과 기대의 패러다임들이 전혀 다른
낮은 마음의 표현 대 높은 마음의 표현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맥락화할수 있다.
그 결과
극좌는
전통, 윤리, 도덕, 지적 온전성을 파시스트로 보고
극우는
극좌를 반역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지각은
뇌 생리, 에테르 뇌의 존재나 부재,
성숙함, 측정된 의식수준, 영적 진화의 산물인데,
이 모든 것은
인류 의식자체의
전체적 진화와 집단적으로 보조를 맞춘다.
자유와 행복의 실상
파괴적인 모든 것이
공통의 근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 성공, 건강, 평화 역시
영적 진실과 온전성이라는 공통 근원을 갖는다.
만인은
잠재적으로
자유로울 자유가 있다.
그것은 그저
진실에 이르는 길을
'따르기로 하는 선택의 문제'일뿐인데,
사람은
그 길을 확인가능하고 인식가능하고
확증가능한 것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따를 수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이는
성공을 시샘하거나 미워하는 대신
그것을 모방하고 복제하고
동일시하고 그리고
그 모범을 세운다.
자신의 행위와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그 자체로 지극히 강력하며,
사람의 측정된 의식수준을
거의 순식간에
200이상으로 끌어올린다.
모든 영적으로 진화된 사람들이
자신의 발달과정에서
학습하는 지극히 귀중한 통찰은
자신의 개인적 의식을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짓는
결정적 영향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작동하는 원리는
마음은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알아채면
결국 위치성을 더욱 존중하게 된다.
실상에서
초콜릿은
바닐라의 적이나 대립물이 아니라
대조적 선택지를
나타낼 뿐임을 아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내부에 은밀히 감춰져 있는
유아적 에고는
지극히 결핍되어 있고
칭찬과 입력을
끊임없이 바란다는 것과
또한 부당성, 불만, 불의,
원한을 키우는 것은 물론
정당성에 집착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에고가 부정적 위치성에서
많은 에너지와 이익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진짜 이득을 대가로 하여 얻는
그러한 수상쩍은 보상을 포기하려는 자발성에 의해
영적 진화는
크게 가속된다는 것을 아는데는
별다른 성찰이 필요하지 않다.
자유와 행복으로 향한 길
실패, 불행, 욕구불만, 결핍, 부족, 분노,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믿기 어려울 만큼 간단하다.
삶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견할 만한 여행이며,
해상에서
배의 나침반상으로
1도 이동하는 것의 여정의 끝에
항로를 수백마일 이탈했는지 여부를 좌우할 것이다.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최강의 도구는
영적 의지자체이고
이것이 확고할 때
그 어떤 장애와도 맞서
그것을 감당해낼 것이다.
영적의지가
모험에서의 성공을 좌우한다.
다년간의 임상진료, 영적교육, 연구는 물론 주관적 경험을 통해서 볼때 ,
'영적의지'는
이번 생만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에 걸친
사람의 의식의 경로를 결정하는
원초적 방향타임이 확증된다
(1000으로 측정).
한가지 단순한 결정에 의해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데,
왜냐하면
코르크에 붙어있던
납추들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코르크는
장의 밀도와 힘으로 인해
수월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영적 진보는 어려우며, 그리고
자신은 혼자서 그걸 해내야 한다는
이기적 환상을 놓을 수 있다.
도리어
결핍의 환상은
사라지고
이제 강력한 에너지들이
사람이 진보를 지속하도록 돕는데,
사람의 진보에는
이제 증대된 자존감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동반되고
세계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우호적이고
도움이 되는 곳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뇌의 신경과학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나비가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에테르 뇌가
영적 에너지의 흐름(즉 쿤달리니)이
시작된 귀결로서 솟아나며,
삶의 경험과
세상속 자기에 대한
경험이 변형되기 시작한다.
에고는
서로 맞물린
벽돌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벽돌 한장이라도 움직이면
구조물 전체가 흔들리고
그 다음에 구조물은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표면상으로
작은 노력조차
아주 큰 효과를 낼 수 있는데,
사람은
단순히 미소짓는 것만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음을 발견한다.
자기계발을 추구하고
영적인 길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발견의 실제를 확증한다.
다음은 승자의 태도에 관한 목록이다. 그 모두가 아주 간단히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고 지극히 장기적인 이익을 준다. 측정수준 200이상의 에너지 장에서 영위하는 삶은 180의 의식측정 수준에서 사는 삶과는 전혀 다르다.
영적 토대 : 기초 1부
건강한 | 360 | 윤리적인 | 305 |
겸손 | 270 | 의지할 만한 | 250 |
공정한 | 365 | 이상주의적 | 295 |
공평한 | 305 | 이용할 수 있는 | 265 |
균형잡힌 | 305 | 인도적인 | 260 |
느긋한 | 210 | 젊잖은 | 295 |
도움이 되는 | 220 | 정직한 | 200 |
마음에서 우러난 | 255 | 즐거운 | 335 |
만족한 | 255 | 진정한 | 255 |
명예로운 | 255 | 충실한 | 365 |
배려하는 | 295 | 친절한 | 220 |
부지런한 | 210 | 평온한 | 250 |
온건한 | 225 | 행복한 | 395 |
외교적인 | 240 | 확고한 | 245 |
우호적인 | 280 | 힘들여 일하는 것 | 200 |
유연한 | 245 |
위의 표는
200이상으로 측정되는
역사상의 모든 성공한 사회들이
가치를 두고 지지해온
성질을 드러낸다.
영적 앎에 이르는 길을
지지하는 사실은
높은 동기는 힘을 반영하는 에너지로 보강되는 반면
이기적 위치는
약하고 제한적이며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부정적 성질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긍정적 성질들 역시 그러하고 그래서 한 영역에서의 진보는 의식적으로 다뤄진 적조차 없는 다른 영역들에서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온다. 부정적 성질들은 극성을 띠고 따라서 대립물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200수준 이상에서 사람은 대립물이 없는 실상을 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우호적은 우호적의 대립물이 아니며 단지 우호성의 부재일 뿐이다.
긍정적 수준들을 통한 진보는
습관적이고 쉬워지며,
그 자체가 하나의 생활양식이 된다.
의식의 매 수준이
어떤 강력한 장을
대표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따라서
사람이
정렬하기로 선택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성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
경험을 통해
사람은
왜 부익부 빈익빈이고,
성공을 새끼치는데
성공만 한 것은 없으며,
그리고
왜 끼리끼리 어울리고,
유유상종하며,
혹은 왜 개와같이 자면
벼룩이 옮는지를 알게 된다.
마침내
사람은
승자들의 곁에 붙어있어라는 말이
전체적 장에서
유익함을 받아들이는 것과
삼투작용을 통해
그러한 이익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다음에 사람은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하는 만큼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다.
의식연구를 통해
사람은 어떤 태도를 채택하면
그 의식의 장 전체를
곧장 불러들이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 장이 부지불식간에
성격과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는 것을 신속히 확증할 수 있다.
내생각으로 여겨지는 것은
특정한 에너지 장의
공통된 생각일뿐
정말로 사적인 것은 아니다.
부정성에 대항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피하는 것이 나은데,
사람은 불을 갖고 놀면서도
불이 옮겨 붙지 않을 수 있다는
유혹과 환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의식의 온전치 못한 자들은
지극히 교묘한
유혹적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프로그램은
여러세기에 걸쳐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그럼으로써 유혹적인 외양으로
은폐되고 위장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부정적인 것에 대항하지 말고,
그냥 피하라고 했다.
폭넓은 임상경험은 물론 연구를 통해
사람은 비 온전성이라는 불을 갖고
정말 그저 놀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영적 앎이 있는 사람은
덫을 식별하는 법을 배운다.
이를 악용하고
큰 이윤과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순진한 사람들이 속기쉬운 성질을 이용하는 법과
덫의 매력을 가다듬어
그것을 지극히 유혹적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이는 요즘 오락 매체가 드리운 그늘을 통해 나타나는
그대로이다.
영적 토대 : 기초(2부)
건전한 | 300 | 마음에 드는 | 255 |
공손한 | 245 | 믿을만한 | 290 |
교훈적 | 200 | 보호적인 | 265 |
긍정적인 | 225 | 사려깊은 | 225 |
기분 좋은 | 220 | 성숙함 | 290 |
따뜻한 | 205 | 세상의 소금 | 240 |
안정된 | 255 | 지각있는 | 240 |
열린 | 240 | 지지하는 | 245 |
유머감각 | 345 | 지혜 | 385 |
유쾌한 | 275 | 질긴 | 210 |
인내심 있는 | 255 | 질서정연한 | 300 |
적당한 | 245 | 참을성 있는 | 245 |
정상적인 | 300 | 책임있는 | 290 |
존경할만한 | 250 | 충실한 | 345 |
존중하는 | 305 | 합리적 | 405 |
극도로 흥분한 사람이
물속에서 발버둥치다 익사하는 동안,
보다 진화된 사람은
물에 뜨는 법을 배운다.
궁극적으로
부력을 갖는
영적진보를 지지하는 바다는
전체적이고
강력한 의식의 장이다.
이 장이 갖는 힘은
죽음자체의 가능성조차
배제한다.
인간은
문명이 시작되었을때부터
그것을 직관하고 인식했으며
생명은 오직 형태를 바꿀 수 있을뿐
소멸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1,000).
선택이
귀결을 결정한다.
그것은 정말
비개인적인 메커니즘이며
자동적으로 작동하는데
왜냐하면
에너지 장은
선택의 귀결로서
초대되기 때문이다.
선택이 낳은 귀결로서의 개인은
쇳가루와도 같은데,
쇳가루가
장에서 갖는 위치는
쇳가루 자신이 내린 결정의
직접적 귀결이다.
이러한
실상을 수용할 때
향상됨과 동시에 자유로워진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무섭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경악스럽게도 느껴진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유일하게 참된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며,
그것은 인류가 받은 선물이다.
사람은 그 다음에 키를 잡고 있는 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이라는 것과 나 자신이 천국이요, 지옥이라(측정수준 700)는 걸 각성한다. 이 전체적 진실을 수용할때 부질없는 바람 대신 강한 결의를 갖게 된다.
영적 실상에서
사람들이 정말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의 운명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실상과 맞닥뜨릴 때이다.
천국은
지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이자 귀결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문을 여는 열쇠는
신성한 명령에 의해
전 인류에게 주어진 카르마적 유산이라는
은총에 따르는 것이다.
철학자와 철학
A,J 에어즈 | 475 | 낙관주의 | 295 |
전미총기협회 정치적 위치 | 205 | 논리 실증주의 | 390 |
객관주의 | 400 | 뉴딜정책 | 340 |
경험주의 | 475 | 던스 스코터스 | 490 |
공리주의자 | 240 | 도덕 | 405 |
관념론 | 200 | 로저 베이컨 | 460 |
권위 | 400 | 로돌프 카르납 | 485 |
그린스펀 경제학 | 400 | 랠프 왈도 에머슨 | 485 |
기독교 근본주의자 | 205 | 모리츠 슐리크 | 480 |
기사도 | 465 | 미국 보이스카우트/걸스카우트 | 455 |
ㄴ로파 불교대학 | 405 | ||
미국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선서 | 450 | 영적 현인들 | 700 |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 | 400 | 영지주의 | 503 |
버트란드 러셀 | 465 | 오귀스트 콩테 | 485 |
보수주의 | 405 | 오캄의 윌리엄 | 536 |
사회 다윈주의 | 215 | 위대한 사회(존슨 대통령) | 280 |
성인들 | 550 | 유아론 | 350 |
소크라테스 | 540 | 윤리학 | 415 |
쇠렌 키에르케고르 | 410 | 이타주의 | 435 |
스콜라 철학 | 460 | 이글 스카우트 | 460 |
신보수주의 | 395 | 자유방임주의 | 305 |
신앙에 기초한 주도권 | 480 | 자본주의 | 340 |
신학 | 460 | 장폴 사르트르 | 200 |
실용주의 | 200 | 적자생존론 | 220 |
신존주의 | 375 | 전통적 미국철학 | 440 |
아리스토텔레스 | 498 | 제국주의 | 200 |
아인랜드 | 400 | 조지오웰(1984) | 410 |
에드먼드 버크 | 410 | 존 듀이 | 455 |
에드먼드 후설 | 499 | 주지주의 | 395 |
에른스트 마흐 | 490 | 집산주의 | 200 |
에릭호퍼 | 505 | 찰스 피어스 | 465 |
에키쿠르스주의 | 305 | 초절주의 | 445 |
토머스 홈스 | 475 | 토머스 멜서스 | 204 |
플라톤 | 485 | 헤리티지 재단 | 265 |
플로티누스 | 503 | 현상론 | 420 |
합리주의 | 470 | 화신, 위대한 스승들 | 1,000 |
행동주의 | 400 | 휴머니즘 | 365 |
허버트 스펜서 | 410 |
지적부문
과학 | 450-460 | 수학 | 450 |
기하학 400 | 400 | 신학 | 460 |
대수학 | 405 | 인식론 | 475 |
산술 | 395 | 입체 기하학 | 405 |
삼각법 | 410 | 존재론 | 465 |
서양의 위대한 책들 | 465 | 형이상학 | 460 |
마음이
본래부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이상,
마음의 유일한 방어책은
이성과 지성에 대한 의존이다.
그래서
교육은
많은 수준에 대해 이롭다.
하지만
진화하지 못한 에고에게 생각하는 능력은
이성으로부터 감정에 물든 위치들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합리화로 전락한다.
진실에 대한 왜곡은
그때 사회의
부수적 의식수준들과 일치하는
층화된 수준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200 이상의
의식수준에서
진실은
그 자체로 가치를 부여받으며,
따라서
교육과 학식이
존경받는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에고에게
진실의 요건은
개인적 신념체계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분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에고는
도덕, 윤리, 책임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낮은 마음에 의한 합리화가 변증법과 정직성의 요건을 대신하며 뻔히 보이는 새빨간 거짓조차 실상에 아무런 기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실 혹은 사실로 개진된다.
요즘의 문화전쟁에서
정치화된 사회학, 궤변, 수사는
지금 상당한 정도로 이성과 검증 가능한 진실을 대체했다.
책임이나 책무는
윤리는 물론 역사, 언어, 수학, 과학조차
공격받고 부정당한다.
이 상대주의적 위치성들을
미숙하고 순진하며,
퇴행적인 것으로 봐주고 눈감아 줄 수 있지만,
이러한 퇴보의 또 다른 요소가 부상하여
퇴행의 배후에 숨은 동기,
즉 정당화된 증오를 드러낸다.
130에서 195 의식수준의 특징을 이루는 진실의 왜곡은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분노, 시샘, 악의를 감추는 양의 탈이자
피해망상적 왜곡에 대한 정당화이다.
미움은
허술하게 합리화되고
공공연하게 폭발한다.
시뻘게진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분노의 삿대질을 하는
성난 연설자는
감정에 떨며 격한 몸짓을 한다.
동일한 팽창이
동물의 과시행동에서 나타난다.
기원전 350년 경,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는
궤변과 수사를 주의깊게 분석하고 그에 대해 반박했는데,
그때 합의와 토론은 종결되었다.
따라서
2천년이 넘는 동안
보다 진화된 온전한 사상가들은
궤변과 수사를 끝난 문제로 간주했다.
하지만
매 세대마다 높은 비율의 인구가
200이하로 측정되며,
그래서 사리 추구적 도그마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튀어나와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진실을 대체한다.
그리하여
이득을 위해 진실을 뒤엎는 일이
거세게 지속되어 온 것이
사실상 전쟁과 대량 학살의 일차적 토대이다.
밈학 연구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표어 바이러스"는 여러 세대를 감염시킨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근세에 마르크스의 왜곡은 다시 수천만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혼돈에 찬 시민사회의 재앙을 낳았는데, 그러한 재앙은 대기중이던 우익 파시스트들이 그 결과 빚어진 사회적 잔해와 혼돈에 독수리처럼 달려들 수 있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했다.
전염성이 강한 밈은
비난의 밈이다.
약한 사람에게서는 이것이 온전성을 대신한다.
비난은
180으로 측정된다.
그것은 암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는 이를 약화시키고
운용상 실제로 비난하는 이를 훼손하여
그의 의식수준을 낮춘다.
그래서
유사 피해자는
그 다음에 말 그대로 실제의 진짜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이 수용될 수 있도록 그것을 올바르게 제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수사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사실 그는 의식연구의 기본 교의 중 하나를 정치적/사회적/철학적 용어로 묘사했는데, 그것은 바로 진실은 내용만이 아닌 맥락의 귀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수사의 윤리적 적용을 효과적인 진실의 제시 수단으로 묘사했는데,
다시 말하면
진실은
변증법적으로 바른 논리(로고스)만이 아니라
화자의 온전성(에토스)과
청자의 성질(파토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문제있는 철학과 위치성이
감정에 물들어 있고,
특정 입장을 옹호하는 비논리적 유행어를 이용하는 반면,
과학과 이성의 변증법의 규율과 법칙은
엄격하고 까다로우며, 불가변이다.
검증가능한 진실은
그것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느낌과는 무관한데,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는 진실과는 무관하고 개인적이며
기본적으로 자기애적이고 편향되어 있다.
측정수준 460은 박식함을 가리키고,
470은 참된 합리성을 가리키며,
499수준은 탁월함이나 천재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수사의 측정수준은
단순한 산술 수준(395)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법원 결정의 근거로 이용될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지,
혹은 공공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는지 의아하다.
다시 말하면 언론이란 단어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의미하는가, 혹은 그 모든 상황에서의 일체의 행동을 의미하는가? 쿠 클럭스 클랜이 십자가를 불태우는것이 언론인가? 공개적 간음이 자유언론인가? 그러므로 허용가능한 변수에는 내용만이 아니라 동기, 의도, 사회적 충격에 대한 책임이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직업적 정치인들은
돈을 받고 수사를 가르치는 전문가들에게서 웅변술을 배우거나
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진실을 감추고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학습되는 기술이었는데,
지나칠 경우에는 허풍, 덧칠하기
혹은 공허한 말로 불린다.
그것은
잘 속는 이, 덜 교육받은 이,
혹은 개인적 의제가 따로 있는 교육받은 이들에게
인상을 남기려는 것이다.
그러한 진실의 침해앞에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격분했고, 그 주역들의 신뢰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하지만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대화를 중단했다.
첫째, 철학으로서의 지성은 논증의 변증법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달려있다는 것,
둘째, 온전한 진실에 대한 이해 및 수용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청중에게 올바르게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는 검증가능한 진실이
내용과 맥락,
양자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식연구와 일치한다.
지도자들은 그것의 제출의 충격을 완전히 재맥락화할 정보의 빠진 조각을 제공하는데 실패하는 일이 많다.
지적으로
온전한 사람들의 그늘은
진실자체가
타인에게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점인데,
이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
즉
온전치 못한 이는
진실을
자신의 동기에 대한
거부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고 부정하거나
혹은 그것에 거짓이라는 꼬리표를 단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진실은
올바르게 맥락화될때
신뢰성으로 인해 힘을 얻으며,
그 다음에
거짓은
저절로 무너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항할 필요조차 없다.
진실자체는
그 자체의 장점 덕분에 서있지만
이상스럽게도
그것은 보기좋게
혹은 입맛에 맞게 만들어져
팔려야 하는 일이 많다.
의식수준이 낮은 인구는
오직 이득에만 관심이 있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는
온전한 이들이 충심으로 수용하는 개념이지만
온전치 못한 이들에게 진실은
그들의 위치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물이자 적이다.
만일
거짓이 법적으로 진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면,
더불어 학계의 찬성을 얻고,
그에 더해 대중매체를 통해 선전된다면
그렇다면 괴블스, 히틀러, 아이히만, 파시즘, 유대인 대학살은
스탈린, 폴포트, 부헨발트 수용소가 그랬던 것처럼
합법적이다.
문제는
거짓 자체가 아니라
거짓을 진실로 지정하는데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진실과 온전성의 왜곡이 이미 너무도 만연하여
사회는 그것이 기괴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되어서야
예컨대
9.11 희생자는
정말이지 죽어 마땅했던
나치의 아이히만들이라는 진술(90) 정도가 되어야
진실에 대한 신성모독을 겨우 인지한다.
그 진술은 나중에 동조자들로부터 옹호받았는데, 동조자들 자신의 합리적일 수 있는 능력은 9.11 희생자들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죽어 마땅했습니다라는 진술에 의한 그릇된 추론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사실을 보면 이라크 전쟁은 물론 9.11 폭탄 테러뒤에 일어났고 그것은 선행한 것이 아니라 귀결이었다. 이렇듯 상대주의는 지지자들이 만세를 합창하는 가운데 허위로 진실을 대체했는데, 그 지지자들 자신부터가 학문적 세뇌의 가련한 피해자였다.
이상과 동일한 원리를 적용할 때
거짓은 합법적이고도 정당하며
그 다음에 선동, 반역, 간첩들의 배신행위(언론 자유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한 신조가
그 다음에는 미워할 권리와 파괴세력을 지지하는데,
왜냐하면 언론은
이제 법적으로 행위를 포함한다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모순은
만일 무정부상태가 합법적이라면
합법적으로 그런 무정부 상태를 집행할
법적인 권리는 없다는데 있다.
법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진실에 대한 요구없이
그것으로 무법이라는 권리에
항의할 수 있는 법은 없다.
결론
자유는
독립된 내적 상태인 반면,
해방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판단의 귀결이며
공동선을 위해 제한된다.
모든 행위와 선택에는
귀결이 따르므로
자유와 해방을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한 선택과 결정
그리고 그 귀결에 대한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
모든 행위, 생각, 선택이
영원한 모자이크에 더해진다.
우리가 내린 결정이 파문을 일으켜
의식의 우주 전체에 번져나가며
전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을 지지하는
일체의 행위 혹은 결정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는 전 생명을 지지한다.
우리가 만든 물결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전에는
형이상학적 진술로 보였을 수도 있는 것이
이제는 과학적 사실로 확립된다.
우주 속 모든 것은
특정한 주파수를 갖는
확인 가능한 에너지 패턴을
지속적으로 방출하며
그것은 영원히 남는데,
방법을 아는 이들은
그 에너지 패턴을 읽어낼 수 있다.
일체의 말, 행위, 의도는
영구적 기록을 창조하고
그러므로
모든 생각이
영원히 알려지고 기록된다.
비밀은 없고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으며
감출수도 없다.
만인이
공적 영역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영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속에 벌거벗고 있다.
만인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주에 책임이 있다.
(이는 1,000 수준의 진실로 측정된다).
첫댓글 측정수준 540이상에서, 자유는 항상적인 내면의 경험적 실상이며 세계에서 전적으로 독립해 있다. 진화와 더불어 성공, 행복, 자유는 완전히 독립적인 내적 상태이고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각성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고맙습니다
우리의 영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속에 벌거벗고 있다. 만인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주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내린 결정이 파문을 일으켜 의식의 우주 전체에 번져나가며 전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을 지지하는 일체의 행위 혹은 결정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는 전 생명을 지지한다. 우리가 만든 물결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일체의 말, 행위, 의도는 영구적 기록을 창조하고 그러므로 모든 생각이 영원히 알려지고 기록된다. 비밀은 없고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으며 감출수도 없다. 만인이 공적 영역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영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속에 벌거벗고 있다. 만인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주에 책임이 있다. (이는 1,000 수준의 진실로 측정된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