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오전 10시 목마도서관에서 3월 글두레 정기모임을 가졌습니다.
3월의 추천시는 설하한의 시집<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에 수록된 <밝은 곳에 거하기> 시를 감상하였습니다. 3월의 추천책은 김택근의 <새벽- 김대중 평전> 이 선정되었으며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길 위에 김대중> 함께 관람하자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4월의 독서모임은 국회의원 선거일로 인해 한 주를 연기해 4월 17일 수요일에 하기로 하였습니다.
3월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 <몽테뉴의 엣세> 이 두 책 중에 각자 구할 수 있는 책을 읽고 온 터라 감상을 나누는 시간도 흥미로웠습니다. 독서 소감을 통해 취합된 몇가지의 토론 주제를 정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독서 소감과 토론의 주제 정리는 조혜정 선배님께서 정리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독서 소감 발표
ㅡㅡ <어떻게 살 것인가>와 원전 <엣세>의 일부를 읽었다. 원전을 읽는 게 내식대로 읽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몽테뉴는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이 탁월한 인물이다. 글쓰기 저력이 놀랍고, 실리적이며, 신앙의 보수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진보적이다. 생명체를 보는 시각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닿아 있는 점, 구체화된 일상성, 사람의 일반성, 삶과 죽음의 연관성 등이 의미 있었다.
——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었다. 살 날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느긋함, 안도감이 들었다. 몽테뉴의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나만의 지침을 찾으라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의식의 흐름을 느끼며 느긋하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ㅡㅡ <어떻게 살것인가>를 읽었다. 어렵기도 했지만, 계속 질문이 생기는 책이다. 왜 인간은 어려움을 겪을 때 몽테뉴를 읽는가? 귀의하려는 건가? 안도감을 느끼는 건가? 다루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여서 놀라웠다.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해주기 때문에 고민이 녹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가? 인간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위로를 얻는 건가? 양심에 대한 부분은 엣세와 얼마 전 읽었던 <김대중의 말>이 공통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보였다.
ㅡㅡ 40여 년 전 읽은 수상록이 나의 성격에 기저가 된 게 아닐까. 회피, 죽음 등 내 생각과 유사한 부분을 보니, 예전에 읽을 때 답을 얻었나보다. 회의주의를 부정적으로만 보았는데, 몽테뉴는 아타락시아를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긍정성도 담아내 인상적이었다. 지식만 추구하는 나를 보게 되어, 행동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엣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이제 이 한 권에 정착해야겠다.
ㅡㅡ <몽테뉴의 엣세>를 읽었다. 그동안 <엣세>를 교훈으로만 읽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공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환의 책을 통해 <엣세>가 얼마나 독창적인지 알게 되었다. 몽테뉴 자신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앎과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사유 방식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16세기 만큼이나 혼돈스럽고, 편견과 독선이 팽배한 지금, 여전히 유효한 엣세가 무겁기도 하지만, 반갑기도 하다. 일단은 <엣세>를 제대로 숙독해야겠다.
ㅡㅡ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었다. 저자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글이다. <엣세>를 속속들이 연구했으며, 이해하기 쉽게 썼고, 몽테뉴를 둘러싼 세가지 죽음을 실체적으로 분석했다. 아버지의 교육관이 인상적이었고, 구르네가 좀더 궁금했다. 르네상스 시대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당시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자신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토론 주제
1. 왜 책 제목을 엣세라 했을까?
2. 몽테뉴는 왜 자신을 주제로 삼았을까?
3. 엣세를 읽으며 독자들은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몽테뉴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열심히 살라는 말로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가?
4. 1, 2권과 3권 사이에는 10년 이상의 기간이 있다. 몽테뉴는 이미 출간된 책들도 죽을 때까지 수정ㆍ보완했다. 계속 수정하되, 어떤 문장도 빼지 않고 더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왜 그랬을까?
##### 독서 후기
ㅡㅡㅡ대학때 이따금 수상록을 읽곤 했다. 마음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가까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백여 페이지를 넘긴 적이 없다. 언젠가 글두레에서 추천을 받아 다시 펼쳤는데 역시 백 페이지를 못 넘겼다.
이번에 이환의 <몽테뉴의 엣세>를 읽고, 그동안 교훈으로만 읽었구나, 제대로 읽으려면 많은 공력이 필요하구나, 절실히 깨달았다. 수많은 학자들이 <엣세>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해왔다니, 민음사 번역본 출간에 15년이 걸렸다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말했듯이 이환의 책을 통해 비로소 <엣세>의 독창성을 알아보았다. 먼저 글로 쓴 자화상으로 몽테뉴 자신이 주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신을 주제로 삼는 건 어떤 것일까?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공허하고 다양하기에, 그런 삶속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되어가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그려내는 것. 자신과 거리를 두고 주체적 시선으로 탐구하며 기록하는 것.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게 어쩌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는데, 그와 유사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몽테뉴는 왜 자신을 주제로 삼았을까? 기존 철학이 추구해온 거창하고 고답적인 주제 대신에 자신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선택하고, 실제 차원의 자신을 그려낸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사유한 몽테뉴지만, 나는 시대의 한계를 넘은 그의 사유에 가슴이 흔들렸다.
또다른 독창성은 그의 사유방식이다. 기존의 철학이 앎과 진리체계를 추구했다면, 그는 자신의 사유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떤 사유방식인가? 기존의 인정받은 모든 지식과 신념체계를, 진리와 가치를 회의함으로써, 모든 편견과 독단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무엇이 진리인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함으로써. 바로 긍정적 회의이다. 흔들리면서도 계속 노력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 알기에, 몽테뉴의 긍정적 추구가 뜨겁게 와닿았다.
그의 사유방식이 자유로운 교육론, 타자의 인정, 세계인으로서 인식, 나아가 일상의 행복론으로 확장되는 걸 보면서 즐거웠다.
다만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혁신적 사유를 추구했음에도 신앙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에 머무른 점은 의아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모순이 그가 말한 인간의 한 모습 같기도 했다.
16세기 만큼이나 혼돈스럽고, 편견과 독선이 팽배한 지금, 달라진 게 있나? 불만과 회의가 스멀거리기도 했고, 왜 여전히 엣세일까? 묻기도 했다. 그 혼돈의 시대에 다시 시작하는 정신으로 글을 쓰고, 자신을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탐구했던 그를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내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위로가 되었다는 샘의 이야기도 오래 기억될 듯하다.
또다시 지금을 열심히 따뜻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온다. 우선 이 봄에는 <엣세> 읽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기대가 된다.
<늘보님>
ㅡㅡㅡ인생은 유한하고 짧다는 생각에 내 내면의 기저에는 허무주의 성향이 내재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늘 나와 함께하는 물음표였다.책을 읽는 것은 때론 그러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가히 몽테뉴의 입문서로 일컬어지는 책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것인가>를 접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선 30~40년 전에 축약본인 줄 모르고 읽었던 몽테뉴의 <수상록>을 서가에서 꺼내 읽어보았다. 가끔은 이전에 내가 줄친 부분에서 멈춰 그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이십대의 나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사고방식이 그에게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사라베이크웰의 책 <어떻게 살것인가>를 읽었다. 처음 얼마간은 읽으면서 '차라리 몽테뉴의 <에세>를 직접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곧 사라졌다. 독자들이 몽테뉴의 <에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의 세심함과 열정이 밀도있게 쓰여져 있어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환의 <에세>도 읽어보았다.(여담이지만 절판된 이 책을 가까스로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리가 과부화되었는지 무척 무거운 느낌이다. 사는 법과 죽는 법에 대한 몽테뉴의 사상이 가슴에 와닿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몽테뉴의 <에세>를 읽지 않은 탓인지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읽는 내내 따뜻했고 위안을 받았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 책은 '살기 위해서' 읽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몽테뉴의 <에세>를 구입했다. 3권으로 된 장장 이천여 페이지의 글이다. 1권 20장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와 2권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를' 먼저 읽게 되었다. '순간을 움켜쥐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윤리이자 미학이다. 자기 존재로 있는 그대로 누리는 것이야말로 삶의 절대적인 완성이다.' 비관주의자였던 그는 이처럼 <에세>를 집필하면서 행복하게 살 줄 아는 기술을 터득하였다 한다. 남은 내 생을 함께 할 친구를 찾은 듯한 벅찬 느낌이 밀려왔다.
프랑스어로 '에세예'는 '시도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16세기에 쓰여진 이 책이 오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대인에게 영향력이 있는 것은 그만큼 읽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다. 불완전하고 무지한 내가 <에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한다.
<쿠키별님>
ㅡㅡㅡ400년전의 ‘몽테뉴’, 기억의 대상으로 인간과 역사의 흐름에 불려 나올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유산은 끝없이 진화하는 그의 제2의 자아, 즉 <에세>의 큰 물줄기에서 볼수 있다. 그가 말한 주제는 자기 자신과 사회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분석하고관찰했다.
그의 사고는 현대적이라고 보여질 만큼 진보적이다.
그의 일상성에 대한 것이 새롭게 각인되면서 죽음의 연관성이 연결지어지고 의미있게 왔다.
그의 현명함은 자신의 일상을 글로 써나가면서 친밀함으로 관찰하고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의 말처럼 일상성 속에 우리의 꿈과 죽음과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몽테뉴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 속의 최대치를 살다간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솔로호프님>
ㅡㅡㅡ‘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사라 베이크웰이 서문에서 밝혀 듯이 몽테뉴의 일대기와 몽테뉴가 쓴 에세이 107편 가운데 그가 던진 질문을 바탕으로 스무 가지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일화 형식을 빌려 현대의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자유롭게 구성되어진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몽테뉴와 그의 저서 ‘에세’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였는지 자신감이 넘치는 문체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질문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얼마나 필요하고 실질적인 질문인지, 또한 그 해답 찾기는 몽테뉴가 자신을 탐구 대상으로 삼아 거듭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생동감 있고 지루하지 않게 독자를 이끌어 준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추상적인 답을 하지 않고 몸소 자신이 끊임없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 나가는지 일화마다 소개된 글을 보면 몽테뉴를 왜 삶의 철학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일 예로 그가 말을 타고 가다가 낙마하는 큰 사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을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며칠 동안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의 몸통을 관통하는 생명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당시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목격자인 하인과 자기의 부인에게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대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겪은 이후에 그는 자신의 삶을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각과 경험을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삶의 태도로 전환하고 마침내 그의 책 ‘에세’를 쓰는 버팀목이 되어진다.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이 구절은 이 책의 마지막 쳅터에 나오는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도 이 구절이 가장 마음에 남아 몇 번이고 되 뇌인다. 마지막 20장의 소제목인 “인생, 그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과거, 지금 현재 살고 있는 나, 앞으로 몇 일, 몇 년이 될지 모르는 내일의 나.
어느 누구한테도 아닌, 나자신한테 부끄럽지 않게, 쉽게 타협하지 않게 제대로 살고 싶다.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우이도감님>
첫댓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와닿습니다.
늘 보고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늘보님이 몽테뉴의 <에세>를 한마디로 정리한 듯한 느낌이에요.
저도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어요.
몽테뉴의 다짐을 상기시켜 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