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돈 나누기- 부자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없다(?)
(신명기 15장 7-11절)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약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오늘은 나눔의 이야기로 말씀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부자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없다!’라는 말은 사실, 진짜 부자는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자도 역시 자기 주머니에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명한 초대 교부 중의 하나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존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다.”
2011년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본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크리스천(better Christians)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basic’과 ‘better’의 차이는 아마추어와 프로와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추어는 뭔가 좀 어색하고 부족해도 봐 줄 수 있지만, 프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전문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몇 년 전 태능에 있는 선수촌 교회가 너무 낙후되어 있어서 파구스 수익금을 가지고 깨끗하게 수리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한 달에 한 번은 우리 교회 중보기도 팀과 스포츠 선교회가 함께 가서 수요일에 예배를 인도합니다.
언젠가 제가 예배를 인도하러 갔을 때, 무척 안 어울리는 사람이 반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미란 선수가 피아노에 앉아 있는데 어색해 보였습니다. 물론 장 선수가 가진 믿음이 너무나 아름다웠지요. 하지만, 역도에서 바벨을 잡는 모습과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분명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지요?
어떤 운동선수가 저에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와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 아마추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잘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기려고 하지만, 진정한 프로가 되면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고민하는 것이 프로라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크리스천을 프로답게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프로 크리스천의 삶은 나눔에서 드러납니다.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고민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나눔’을 실천함으로 프로 크리스천으로서 삶을 사시는 스티브 김(김윤종)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박수로 맞이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티브킴 토크설교>
동영상보기-> 만나교회 홈페이지 주일예배 동영상보기에서 토크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눔이란?
이 세상에는 나누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성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크리스천의 나눔이란 자신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결정, 믿음의 이유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은 나눔에 대하여 최대한(maximum)이 아닌 ‘최소한’(minimum)의 요구를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8절에 “반드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난한 형제가 너희 주변에 있거든 반드시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얼마를 도와야 하는가?’입니다.
많은 사람이 헌금이나 구제에 대하여 부담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신앙생활이 부담으로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분이 부담을 느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나눔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변에는 언제든지 도와야 할 사람들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의 현실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근본적인 인간들의 이기심과 욕망, 게으름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자연법칙이 깨어집니다. 아프리카의 맹수들은 절대로 배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충분히 가지고서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난 기사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쥐가 갑자기 늘어나 걱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 몸에 좋다고 뱀과 올빼미를 하도 많이 잡아 천적이 없어진 것입니다. 중국에서 걱정하는 쥐의 마릿수가 20억 마리 정도 됩니다.
제가 보았던 인간의 이기심 중의 하나가 인도네시아에 의료 선교팀과 함께 언청이 수술을 할 때입니다. 우리 의료선교팀이 다 돈을 내고 약을 가지고 수술을 공짜로 해 줍니다. 그런데 수술실이 필요해서 마취를 해야 하고 전기도 들어와야 하니까 병원을 빌리게 되었는데, 터무니없이 사용료를 달라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사람이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단 그런 인간이 본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악한 인간들의 본성들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명기 14장 28-29절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지난주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우리가 십일조라고 한다면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은 제2의 십일조, 즉 3년에 한 번 드리는 것이므로 전체 소득에서 보면 30분의 1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득에서 30분의 1을 구제로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조금 더 생각을 한다면 ‘한 달 생활의 하루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마음의 주인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었던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경우, 부자 청년 관원처럼 믿음을 시험하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자, 성경의 원리를 보세요. 수입의 나머지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의 문제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 때문에 우리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없었다면 짓지 않을 죄를, 물질 때문에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이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다가옵니다. 바로 물질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축복이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키는 것, 물질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 주신 것을 나누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마라!”
이것을 여러분의 물질의 영역에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말하는 ‘나눔’은 윤리적 의무감이나 사회적 정의감이 아닌 ‘영성의 결과’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동사들이 다 “명령형”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눔’이 성품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선택 가능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라는 것이지요.
남을 돕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유하지 않습니다. 10절에, “shall”이라는 단어로 강한 명령에 따라,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며…”
즉 나눔의 이유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적 나눔은 구제나 자선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것을 깨닫고 제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것입니다. Ambrose of Mil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나누는 부자는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적 나눔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즉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몫을 내가 빼앗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눈물짓고 있는 이상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영성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2,000년 암스테르담 회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그곳은 마약이 합법화되어 있는 곳이고, 역 근처는 세계에서 유명한 섹스 숍이 있는 곳입니다. 놀라운 일은 범죄를 막기 위해 교회가 마약을 나누어주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 나눔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성적 나눔”은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막으려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마약을 하고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성의 차원에서 나눔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에 고민이 찾아옵니다. 단순히 ‘어렵다!’라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정의’의 문제를 벗어나는 것이 영성으로서의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감리교회 목사님이 고민하시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목회 하시던 곳은 동두천지역이라 미군부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몸을 파는 “양공주”들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을 고민하게 한 것은 이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내는 십일조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소득의 원인이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평생을 고민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고민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이라면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덕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단죄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도덕적인 차원에서 저 사람은 돕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단죄할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돕고, 나누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 전에 [지선아 사랑해]로 잘 알려진 이지선 씨가 사회복지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새롭게 개정판을 낸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2,000년 5월 정말 억울하게 사고를 당했습니다. 만취상태에서 사고를 낸 운전자 때문에, 신호를 받고 서 있는 자신의 차를 들이받아 7중 충돌이 일어나 전신에 50% 이상 화상을 입고 거의 살 가능성이 없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들다고 고백할 만큼 30번의 수술을 하며 삶을 투쟁해야 했던 이지선 씨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가 밉지 않으냐고?”
다행히 그 차는 보험에 들어 있었고, 화상을 치료하는 동안 병원비 걱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고를 낸 운전자도 가족도 찾아와서 잘못을 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지선 씨가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극복하며 하나님을 만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은 화상을 입고 죽음의 기로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이유인지 소주를 다섯 병이나 먹고 그 시간 사고를 낸 그 사람이 너무나 불쌍하다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이 외롭게 술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불쌍히 여겨야 하고, 누구를 도와야 할까요? 우리의 도덕적인 기준과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진정한 나눔입니다. 죄를 짓고, 잘못한 것 중요한 일이지만, 그 죄로 고통당하는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강한 명령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충 재거나 판단해서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본문 7절입니다.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어떤 판단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가난과 어려움 자체를 바라보라는 “영성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나눔”에 관한 한 하나님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3. 나눔이 축복이다
오늘 본문에서 나눔을 명령하신 후에 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합니다.
‘나눔이 축복이다!’라는 말을 풀어 보지요.
나눔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은 내 소비를 줄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행복을 감소시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눔이란 어느 한 편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다른 한 편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는 것이 결국 나와 이웃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눔은 나와 이웃 모두를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예화가 어떨까요?
아들이 감을 따고 있었다. 아버지가 감을 광주리에 담으면서 말했다.
“까치밥으로 감 서너 개쯤은 남겨 두어야 한다.”
아들이 물었다.
“우리 먹기에도 부족한데 왜 까치밥을 남겨 두어야 하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새들과도 나누어야지, 우리만 독식해서는 안 된다.”
이해가 안 된 듯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농부가 콩을 심을 때 세 알씩 심는다. 왜 그러는지 아니?”
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한 알은 공중의 새들 몫이다.”
“또 한 알은요?”
”땅속의 벌레들 몫이지.“
아들이 물었다.
”그럼 한 알만 주인의 몫이군요.”
그러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누는 마음 없이 한 알만 심어 수확을 기대하다가는 빈손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눔의 원리를 통해 모두가 사는 축복의 원리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세요.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아니 그 집에 심방을 가려면 너무 힘이 듭니다. 들어가는 게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이 축복이 아니라 부담이 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좋은 차를 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차를 아무 데나 세워 놓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 비극이 아닌가요?
왜 우리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담을 높이 쌓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힘들어해야 하나요? 우리가 가진 것이 정말 축복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결국,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행복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가난하고 힘든 형제와 자매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신앙은 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에 대하여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에게서 배우는 “나눔의 원리”
마태복음 20장 1-16절은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데, 조금 일한 사람이든, 많이 일한 사람이든 관계하지 않고 동일한 임금을 준 이야기.
우리가 흔히 듣던 이야기로는 임금에 대한 권리는 “농부에게 있음”을 강조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의미로 배워왔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는 처음과 나중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포도원 농부가 이 포도원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포도원 농부가 어찌 보면 불공평하게 임금을 지불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논리에 의하면 열심히 일하고, 많이 일한 사람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타당한데 말입니다. 우리의 논리로는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윤을 추구하는 농부라면 적게 일한 사람에게 적은 돈을 주어야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농부의 관심은 포도원에 있기보다는 사람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포도원 경영의 이유가 일꾼의 삶을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일단 상징적으로 “한 데나리온”은 한 식구가 하루를 살아가기에 필요한 돈입니다.
말씀에 보니까, 주인이 장터에 나가 사람을 계속해서 찾습니다. 제3시에도, 6시에도, 9시에도, 11시에도 말입니다. 11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이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고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 것을 보니까 제3시에 들어간 사람은 9시간을 일한 셈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장터에 나가 사람을 계속 찾으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6절)라고 물었을 때,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다”(7절)라는 대답에 주목해 보아야합니다.
이들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이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었고, 그날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가족 전체가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이기심, 아니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본성일 것인데, 나보다 더 적게 일한 사람이 나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자본주의 원리에서는 통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내가 9시간을 일한 사람이 아니라 1시간을 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불평이 나올까요? 우리는 늘 나에게 찾아오는 은혜는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에 대하여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정말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불공평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그만큼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을 경영하는 이유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포도원을 통해 누군가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함께 일한 사람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대목에서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주인이 말을 한 대로, 각자가 모두 자신의 필요한 것을 받았으니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눔”이라는 말은 절대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는 기쁨으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지닌 사람들에게 모두 공유하고 나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가지고 와서는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5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나눔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생각이 다른데, 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를, 혹은 내가 돕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근본적이고, 적절한 나눔의 행위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8절)
나눔의 법칙입니다. 필요한 사람의 요구대로, 그들이 필요한 만큼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포도원을 경영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이런 나눔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나눔의 행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초대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바로 나눔과 공유의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 그 자체로는 그 나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눔에 대한 말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누가 큰 나눔을 할 수 있습니까? 큰돈을 가진 사람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눔이 영성적 나눔, 하나님의 은혜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영성적 나눔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필요를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지요.
“나눔”에 대한 반듯한 생각
자, 이제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발견한다는 말과 은사를 개발한다는 말 중의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알지 못하던 은사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발견된 은사를 더욱 개발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돈’이 축복이라기보다는 ‘은사’라고 정의했을 때, 수긍하지 않을 수 없지요. 돈은 우리가 아무리 벌려고 해서 벌리는 것이 아니라 주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은사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가 확신하기는 ‘돈’에 대한 은사를 주셨을 때는 ‘나눔의 은사’도 동일하게 주셨다는 확신입니다.
제가 믿건대,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안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어렵게 물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나눔의 은사’를 주셔서 피곤하게 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나눔의 사역이 어느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을 통해 나눔의 분량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나눔”이 영성적 차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지요.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일은 연습을 통해 나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나눔의 사역으로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 나눔의 은사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주목하고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을 변화시켰던 인물이, 그 유명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벌 수 있을 만큼 벌어라! (Earn money as much as you can!)
돈이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필요한 것에 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돈을 “중립적 가치”에 놓게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사용함에 있습니다.
둘째, 할 수 있을 만큼 저축하라! (Save money as much as you can!)
저축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은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 너무나도 쉽게 돈의 마력에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축하지 않으면, 그 돈의 용도가 잘못 쓰일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줄 수 있을 만큼 주어라! (Give money as much as you can!)
1774년에 웨슬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만일 10파운드를 내 뒤에 남겨 놓고 죽는다면 당신과 모든 인류는 나를 대적하여, 나는 도둑과 강도처럼 살고 죽었다는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돈을 깨끗하게 나누어 쓰고, 죽을 때도 깨끗하게 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면서, 돈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후손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구체적인 나눔의 방법을 제안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나눔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제정한 “희년법”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나눔의 운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 이하에는 희년법에 대해 나오는데,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해에는 모든 노예가 풀려납니다. 그리고 모든 땅의 소유가 원주인을 찾아갑니다. 이 희년의 법이 전제하는 것은 인간 경제법칙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다 보면 빚을 지게 되고 그러한 이유로 땅을 빼앗기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한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고 삶의 실수로 말미암은 책임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희년의 정신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제공됩니다. 누구나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가 너무나 복잡하게 되어 이 희년의 법을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이 이 희년의 정신을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고 살던 것을 다시 환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내가 열심히 일한 소득의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살면서 다 내놓으라 하면 못할 사람이 많겠지만, 죽는 마당에 모든 것을 내 놓아 나누라는 것입니다.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사회에 환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교회를 보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일로 말미암은 사회의 영향력이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이 교인들이 줄어들지만, 아직도 영향력을 잃지 않고 사회 속에서 기능을 다하는 것은 바로 이 나눔과 환원의 원리가 잘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힘을 실어주신 분이 바로 저희 아버님과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담임목사님의 은퇴를 준비하면서 주택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집을 교회이름으로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뜨면 다시 교회로 갈 텐데 하시면서 말입니다. 물론 행정적인 일들 때문에 개인 이름으로 구입을 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많은 가정이 부모의 유산 문제로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유산 때문에 자녀가 독립심을 상실하거나 의존적으로 살다가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것도 보게 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가지는 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나눔과 환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중심에 만나교회가 서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는 할 수 없되 만나교회가 그 사역을 감당하는 꿈 말입니다.
개척 당시부터 꿈꾸던 병원 사역도, 이익을 창출하는 기관이 아니라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호스피스관을 건립하려는 꿈을 가지려는 이유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사회복지관에 대한 꿈을 가지고 기도하는 이유도,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골고루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교육에 대한 꿈을 가지는 것도 이 사회가 추구하는 엘리트 교육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서 지내던 하나님의 자녀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합니까? 교회가 합니다.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교회에서 누가 이 사명을 감당합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합니다. 바로 영성적 나눔에서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모아야 하는 이유도 분명하고 나누어야 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이런 영성적 나눔이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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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