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현서원 배향인물
(1). 정광필(鄭光弼, 1462~1538)
본관은 東萊, 자는 士勛, 호는 守夫, 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李知止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사진 숭현서원 사당; 崇賢祠]
1519년 중종이 思政殿에 들러 天災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韓忠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申用漑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几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 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國葬 때 摠護使를 맡아 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禧가 중종의 장녀 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崇賢書院, 용궁의 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文翼이다.
(2). 김정(金淨, 1486~1521)
본관은 慶州, 자는 元冲, 호는 冲庵·孤峯. 보은 출신. 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金孝貞이며, 어머니는 陽川許氏로 判官 許允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고, 수찬·병조좌랑을 거쳐 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헌납·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求言(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朴元宗 등을 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權敏手·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應敎·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崔壽峸·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金鳳祥·金顧·崔汝舟 외에 조카인 金天富·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象賢書院, 청주의 莘巷書院, 제주의 橘林書院, 금산의 星谷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冲庵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濟州風土錄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文貞이고, 나중에 文簡으로 고쳐졌다.
(3). 송인수(宋麟壽, 1499~1547)
본관은 恩津, 자는 眉叟 또는 台叟, 호는 圭庵, 사헌부 지평 繼祀의 현손이며, 정랑 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 世良이다. 어머니는 柳承陽의 딸이다. 진사 嚴用恭에게 배웠고, 金安國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이 때 金安老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인사 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검토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尹元衡·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 柳希春, 무장현감 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 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圭庵集이 있다. 시호는 文忠이다.
(4).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본관은 光山, 자는 希元, 호는 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金繼輝이며, 어머니는 平山申氏로 우참찬 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金集이다. 1560년 宋翼弼로부터 四書와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고, 1581년 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과 평시서 봉사를 거쳐 활인서·사포서·사옹원 등의 別提와 奉事가 내려졌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인의를 거쳐 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익위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 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 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庶弟)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司業으로 옮겨 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司業을 겸하였다. 집의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尹昉, 이조판서 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의 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을 제향 하는 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 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 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宋時烈·宋浚吉·李惟泰·姜碩期·張維·鄭弘溟·崔命龍·金慶餘·李厚源·趙翼·李時稷·尹舜擧·李楘·尹元擧·崔鳴吉·李尙馨·宋時榮·宋國澤·李德洙·李景稷·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宋祀連의 일로 還賤(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徐渻·鄭曄 등과 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家禮輯覽·典禮問答·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近思錄釋疑·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元이다.
(5).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본관은 恩津, 자는 明甫, 호는 同春, 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應瑞이고, 아버지는 榮川郡守 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李珥를 私淑했고, 20세 때 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洗馬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 직에 나갔다가 장인 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山堂의 우두머리인 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金自點·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朞年祭(만 1년)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의 尹鑴·許穆·尹善道 등의 3년 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大功說(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同宗이면서 학문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崇賢書院에 제향되고 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에 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忠賢書院·鳳巖書院·遯巖書院·龍岡書院·滄洲書院·興巖書院·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忠烈祠碑文, 남양의 尹啓殉節碑文이 있다.
(6).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은 恩津, 아명은 聖賚, 자는 英甫, 호는 尤庵 또는 尤齋. 봉사 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 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 宋甲祚이다. 어머니는 善山郭氏로 봉사 郭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擊蒙要訣·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朱子·李珥·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李德泗의 딸 한산이씨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의 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 진선·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尊周大義와 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 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國舅 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金錫胄·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諡狀 없이 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저서로는 朱子大全箚疑·朱子語類小分·二程書分類·論孟問義通攷·經禮疑義·心經釋義·纂定小學諺解·朱文抄選·戒女書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尤庵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宋秉璿·宋秉夔 등에 의하여 宋書拾遺 9권, 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7). 이시직(李時稷, 1572~1637)
본관은 延安, 자는 聖兪, 호는 竹窓·三松, 延城府院君 石亨의 6대손이며, 양주목사 기(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廷顯이고, 아버지는 察訪 빈(賓)이며, 어머니는 목사 李應掑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사축서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 직장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같은 해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종묘서직장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635년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 주부 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자, 묘 둘을 파서 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한 다음 활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특히, 아들에게 전하라는 편지의 글 중에는 ‘殺身成仁 俯仰無怍’이라는 말이 보인다. 어려서 총명이 뛰어나 10세에 曺好益에게 배웠으며, 뒤에 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의 忠烈祠와 회덕의 崇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忠穆이다.
(8). 송시영(宋時榮, 1588~1637)
본관은 恩津, 자는 公先 혹은 茂先, 호는 野隱. 奉事 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都事 應期이고, 아버지는 좌랑 邦祚이며, 어머니는 監正 鄭谷의 딸이다. 時烈의 종형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金長生의 문인이 되었다. 인조 초년에 향인들에 의해 그의 학행이 감사에게 천거되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를 모아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이듬해 김장생에 의하여 천거되어 司宰監 參奉을 제수받고, 봉사·직장·상의원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왕명을 따라 강화도의 分司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월 22일에 강화성이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남문이 함락되자 金尙容·洪命亨·沈誢·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 해 정려가 세워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忠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강화도의 사람들이 忠烈書院을 세워 김상용과 함께 제향 하였다. 이밖에 회덕의 崇賢書院, 영동의 草江書院)등에 제향 되었다.[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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