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에 관한 시모음 4)
눈꽃 터널 /杜宇 원영애
눈 내린 밤에
나뭇가지 휘는
꽃
하얀 꽃 속에
더러는 알 전구 숨어
빛깔을 쏘는
광속으로 헤엄쳐온 별들이
발전기를 돌려
발아되어 반짝이는
이 길을 지나면
꽃의 웃음소리에 취해
요술에 걸려
아이로 변하는 걸 봤네.
어머니께 드리는 눈꽃 편지 /이채
구름이 종일 머문다 한들
하늘이 마다하겠습니까
나무가 평생 자란다 한들
땅이 마다하겠습니까
어머니, 당신 역시 하늘처럼 땅처럼
저의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그 무엇도 헤아려주시는
당신은 평화와 고요의 나라이십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삶의 집, 그 지붕 위로
오늘은 당신의 은혜처럼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내립니다
어느 잎인들
당신의 마음이 닿지 않을 것이며
어느 뿌리인들
당신의 가슴을 떠날 수 있을까요 마는
어느 하루인들
숭고한 그 사랑 가늠치 못하니
어머니, 당신이 아니고선
태어날 수 없는 자식이란 무엇인가요
마른 가지마다
하얀 기도로 덮고 또 덮어주시는
눈꽃 같은 어머니, 이 겨울
당신을 닮은 그 고결한 꽃잎으로
따뜻한 감사의 편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설산 완주와 눈꽃 축제 /하영순
부산하게 들떠 있는 마음
아이젠을 챙기고
두툼한 오리 털 파카를 입었다
지리산 눈 등반을 한지가 얼마 만이냐
이번에는 경상북도 북부지방
태백산 산행이다
순백의 세계
묻어 버리자 서러움도 욕심 때문이 아니던가
나를 찾아보자
무릎까지 채인 설 산에서
헐떡이는 숨소리로 눈 속에 길을 내고
고지를 행해 정상이다
내려다 본 산천
천지가 백의 종군을 한다
고된 종주 끝에 하산 길
준비해간 비닐포대를 엉덩이에 붙이고
내리막길에 썰매도 타고 계곡 길 때라
여기가 눈 축제 장이다
봄이면 자취 없이 살아질
조각상을 다듬으며 땀 흘리는 손길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인생도 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오월에 내리는 눈꽃 /박종영
푸른 초원이 열리는 오월에
웬 눈꽃,
청보리 익어갈 무렵,
이팝나무 흐드러지게 피어
흩날린 줄 모르고
보릿고개 넘기려 산을 넘던 나그네 앞에
밀려오는 거대한 녹색의 바람,
배고픔의 두려움을 잊게 한다
이팝나무 아래 입 벌리고 있으면
정말로 이팝꽃 밥 한 그릇 떨어질까?
나그네 뱃속을 채워주고 있는
하얀 고봉밥 한 그릇의 언어가 따스하다
오월의 바람은 파란빛으로,
이팝나무는 싱싱한 꽃밥의 조화로 배고픔을 웃게한다
언제나 빈 뱃속을 들여다보는
이팝나무의 지혜,
눈부신 오월을 붙잡고 수작을 부린다.
눈꽃이여 빛나라 /미산 윤의섭
한점 티없는 수정 같은 백설이
온 누리를 덮었네
여명을 헤친 이 아침에
탄생의 터짐
동해를 치고 떠오르는 신태양
그대는 내 사랑 태양은 나의 것
백두대간의 꿈틀거림
소나무의 울림소리
동면의 숨소리
찬란한 꿈의 빛은 내 가슴에서 터지네
희고 작은 눈꽃의 알맹이들이여
회색빛을 거부하여라
아기의 혈맥으로
녹아들어 가듯이
이 강산 생명의 자양분이 되어라.
눈꽃 /이현우
눈꽃이 피네.
잎새도 열매도 잃은 나목의 숲을 건너
닫힌 문이 열리네.
낮은 지붕 아래
사람들은 여전히 잠 못 들고
꺼져가는 불씨를 재로 덮는 밤
온기조차 식어버린 노변爐邊에 쌓여
칠흑漆黑을 밝혀주던
겨울 이야기
듣다가 잠시 멈춘 여울목에서
남몰래 참 아파한 언제였을까.
언 땅 아래 서로 만나 움을 틔우고
아득히 멀어져 간 발자국들이
가만가만 다가와 부르는 소리
들리네 어디선가
더 가까이.
눈꽃나무 /조철형
길고 긴 겨울날 나 노래를 부릅니다
먼 길 돌아서 내게 올 당신이
바라보기 좋게 서 있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지쳐 얼음꽃 되어도
운명이라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행여 당신이 못 보고 지나갈까
달빛을 한 조각씩 가슴에 안고 밤을 지새웁니다
당신이 오시는 그 길을 비추기 위해
때론 거친 밤을 쏘다니는 짐승들의 차가운 눈빛도
가슴에 품습니다
달도 없고 별도 모두 잠든 밤
당신이 오실 길 환히 밝히기 위해
하얗게 서러운 눈꽃나무로 늘 그대로 서 있습니다
당신이 오실 그 날을 세면서.
눈꽃 2 /송기원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
죽은 몸뚱이를 하늘에 펼치고 있던
미루나무 한 그루
오늘은 온몸으로 눈꽃을 피우고 있네.
텃밭에 그늘을 들인다는 이유로
농약이며 휘발유를 들이부어 죽여버린
미루나무 한 그루
오늘은 온몸으로 눈꽃을 피우고 있네.
무슨 주검으로 남아야, 나는
미루나무 옆에 나란히 서서
온몸으로 눈꽃을 피울 수 있을까.
눈꽃의 숨결 /정심 김덕성
엄습하는 칼바람
뼛속까지 수며 들며 시리게 하는
냉혹한 겨울 깊어가고
거센 한파 이겨낼 수 있을까
간밤에 슬며시 내린
설경을 이루어 놓은 눈 덮인 세상
그 아름다움은 더 할 데 없고
사랑의 속삭임을 듣는다
뜨겁게 타 오르는 정열
불꽃같은 붉은 사랑은 아니어도
눈 속에 묻혀있는 하이얀 사랑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갈 길 막는 엄동설한
짧게 생을 다하고 떠나는 눈꽃 보며
그래도 그 사랑의 숨결을 들으며
깨끗한 영혼으로 사랑하리.
눈꽃 /이제민
온 세상을
하얀 꽃으로 물들인 새벽녘
모두 잠든 세상
반짝이는 보석을 안고
지치고 힘든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신 님
매서운 추위도
소리없이 내린 눈에
자취를 감추고
앙상했던 나뭇가지는
포근한 아침을 맞이한다.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 이정표를 새겨
한해의 출발을 남긴다.
움츠렸던 마음을
저 끝없이 펼쳐진
눈꽃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어본다.
눈꽃 피는 겨울날 /노정혜
겨울이 이대로 떠나야 하나
봄날 같다
영하의 날씨 새 하얀 눈
하얀 눈밭을 뒹굴고 싶다
눈꽃 피는 겨울날
살짝이라도 보고 싶다
아름다운 설경을 카메라 담고 싶다
봄이 오려나
꽃님의 발자국 소리 들린다
행여 오늘 밤에 눈이 오려나
추억의 눈꽃 /(宵火)고은영
그리움으로 내리던 눈의 추억이
유독 올 겨울엔 환합니다
생인손 앓듯 시시때때로
눈물로 멍울 지던 추억을 마주하면
떠나간 것들의 안부엔
건조한 바람 냄새 휘돌아 내리고
절망이 비둘기호 열차처럼 온 밤을 덜컹대며
끝없이 어둠의 선로를 달리던 길
내내 환희를 줏어 들창을 밝히던 눈꽃들이
까마귀 쪽 나무에 소복하던 고향 어귀
일출봉은 종일 푸른 파도를 읽고
눈꽃들이 하얀 여백을 그려 넣던 골목마다
까막눈이 아이들이 나무 팽이를 돌리고
눈만 쌓이면 세상 모르게 좋아라. 웃던
소싯적 까마득한 웃음소리들이
우울하고 시무룩해진 얼굴에
까르르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눈꽃이 지면 사랑이 열린다 /정민기
꽃이 지면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다
눈꽃이 지면 무슨 열매가 열릴까?
한동안 생각하는 상처럼
쪼그리고 앉아 생각하다가
하나 남은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 눈꽃이 지면 사랑이 열리는 거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사랑을 놓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 사이 눈꽃이 햇살에 두근거리며 녹는다
사랑을 따먹으면 무슨 맛이 날까?
한때의 그리움을 다시 사무치게 하는
촉촉한 속살이 부드럽게 날 울린다
이 사랑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싶다
눈꽃마당에 그려진 지도 /초월 윤갑수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삐쩍 마른 빈 가지초리에
흰 꽃송이 피었다
소복이 쌓인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에
거총하고 소피를 갈기면
하얀 대륙위에 그려 놓은
커다란 육지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추위에 떨며 온 힘을 다해
발사해도 염소 오줌 누듯
사방팔방 튀어 작은 섬들을
수놓았던 어릴 적 추억
이제는 무너져 흔적 없이
사라진 고향의 옛집은 꿈을
키우던 그리움의 안식처다.
하얀 눈꽃 /신주연
하얀 눈꽃이 하늘에서
펄펄 춤추며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내리네요
앙상한 가지마다 눈 꽃송이는
그림을 그려나가네요
가지에는 나비 모양도 토끼 모양도
고양이 모양도 어여쁜 꽃 모양들이
시화전을 방불케 합니다
하얀 눈이여!
어서 내려라
내 마음이 하얗게 그리움의 고향으로
물들어 갈 때까지 힘차게 내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