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힌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통영
설거지를 마치고
어린 섬들을 안고 어둑하게 돌아앉습니다.
어둠이 하나씩 젖을 물립니다.
저녁비 호좃한 서호시장
김밥 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댁이
도구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끙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 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매들께서도
억세고 정겨운 통영 말로 봄 장마를 고시랑고시랑 나무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어
끙,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드리면, 이래 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서
앳된 보슬비 업고 걸려 만주지산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아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둥근 등
귀 너머로 성근 머리칼 몇을 매만져두고
천천히 점방 앞을
천천히 놀이터 시소 옆을
쓰레기통 고양이 곁을
지난다 약간 굽은 등
순한 등
그 등에서는 어린 새도 다치지 않는다
감도 떨어져
터지지 않고 도르르 구른다
남모르게 따뜻한 등
업혀 가만히 자부럽고 싶은 등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품고
세상 쪽으로는 순한 언덕을 내어놓고
천천히 걸어 조금씩 잦아든다
이윽고
둥근 봉분 하나
철 이른 눈도 내려서 가끔 쉬어가는
영동에서
잎 넓은 감나무 가로수길 되도록 천천히 걸어
바람과 초가을볕에 흠뻑 젖을 일.
읍사무소 뒤켠 그늘 얌전한 아무 식당으로나
슬쩍 스밀 것.
객방은 정갈하고
다만 올갱잇국,
햇정구지도 향기로운 올갱잇국을 한그릇 주문하는 것.
먼저 내온 버섯무침을 맛보며
올갱이 잘 줍던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푸근하던 웃음과 눈매 떠오르고, 올갱이 줍던 그 희고 통통하던 종아리들 생각나고,
저녁상 물린 뒤 삶은 올갱이 옷핀으로 빼먹던 생각 나고
이빨로 올갱이 꽁지 뚝 뗀 다음 단번에 쪽 빨아 먹던 형님들 생각나고
나도 따라 해보다가 이 아파 쩔쩔매던 생각도 나다가
올갱이잇국 오고
그 쌉싸름한 맛에 마음 다시 아득해져
꼬지지한 염생이 수염 몇올과 퉁방울눈의 윤 아무개가 있어
막걸리라도 한잔 같이 하면 좋겠다고생각하다
창밖으로 문득 눈이 가는데,
감들은 나무에 편안히 잘 달려 계시고
길 건너 자전거 안장 위에 초가을 햇살도 순하고 다복하시고
간간이 지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다 조금씩 먼저 간 그를 닮았다는 것, 아아.
미안한 일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초분(草墳)
나 죽거든 애인아
바닷가 언덕에 초분 해다오.
바닥엔 삼나무 촘촘히 놓고
솔가지와 긴 풀잎으로 덮어다오.
저무는 비다에
저녁마다 나 넋을 놓겠네.
살은 조금씩 안개 따라 흩어지고
먼 곳의 그대 점점 아득해지리.
그대도 팔에 볼에 검버섯 깊어지고
시든 꽈리같이 가슴은 주저않으리.
대관절 나는 무엇으로 여기 있나,
곰곰 생각도 다 부질없고
밤하늘 시린 별빛에도 마음 더는 설레지 않을 때
어린 노루 고라니들 지나다가 캥캥 울겠지.
오요요 불러 남은 손가락이라도 하나 내주며 같이 놀고 싶겠지.
버리고 온 자동차도 바람에 바래다가 언젠가 끌려가겠지.
비라도 오는 밤은 내 남은 혼
초분 위에 올라앉아 원숭이처럼
긴 꼬리 서러워 한번쯤 울어도 보리.
선운사 풍천장어집
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
고요하고 환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이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비둘기호
여섯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금 나왔네.
커다란 여섯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 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매미
모과나무 우듬지에 매미 하나 붙어 운다.
끝나지 않을 오포(午砲) 소리같이 캄캄하다.
길게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 뒤로
살색 흰 여자가 떠나고
눈을 훔치는 손등에도 땡볕 캄캄하다.
굴속 같던 울음이 찌르찌르 개자
잠시 세상이 밝아진다.
더위에 지친 머위잎들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저물기를 기다린다.
어두운 부뚜막과
생솔가지 매운 연기의
멀건 호박풀때의 저녁이
천천히 그 위로 내리곤 했다.
무릎 꿇다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ㅡ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칭비, 2015
김사인 시인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서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1991년『시와경제』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했으며, 1982년 부터는 평론도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이 있고, 『박상륭 깊이 앍기』『시를 어루만지다』등의 편저서가 있다.
첫댓글 한결같이 옛모습이 생각나는
싯귀입니다
고맙습니다^^
선운사 노래 좋아해서 올려봤습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