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금강산 (기행문) 서울에서 승용차로 춘천→양구→진부령 넘어 약6시간을 달려, 화진포에 이르렀다. 우리가족은 화진포에서 이승만, 이기붕, 김일성 별장을 관람하고, 집결지인 현대아산 화진포 휴게소를 찿아 확인하고 근처에 1박 할 숙소를 정하여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침 05시에 기상하여 밖을 보니 생각치도 않은 비가 제법 세계 창을 두드린다. 06시 휴게소에 도착하여 아침밥을 먹고 하늘을 보니 여정을 축하라도 하듯이 비는 주춤한 상태로 금방 그칠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06시30분 현대측으로부터 이미 제출한 사진과 신분증으로 본인임을 확인하고 관광증을 발급 받아 목에 걸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동해 남북 출입 사무소에 들려 여권에 비자를 발급하는 식이 아니고 출국신고서와 신분증을 대조하는 것으로 출국수속을 마쳤다. 휴대폰, 녹음기, 배율 높은 사진기 그리고 라디오 등은 세관에 맡겨야 했다. 출국 절차가 끝나고 오전 8시 10분경에 금도 없는 38선을 넘어 금강산을 향했다. 안내양의 설명은 동해남부선 철길위에 세워 놓은 철도 받침목 하나가 38선 이란다. 포장이 잘 되어 있는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 행렬은 장관이었다. 군사 분계선을 넘으니 커튼 없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북측 군인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로 위에도, 들판 한 가운데도, 그리고 숲 속 나무 뒤에도 북측의 나이 어린 군인들이 옛날 독립군 영화에 나오는 일본군의 옷차림을 하고 하나 같이 무표정한 퀭한 얼굴로 서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마을들은 온통 회색 일색이고 집들은 축사와 같았다. 한적한 거리에는 군 트럭이 간혹 지나갈 뿐 활기라곤 느낄 수가 없다. 말로만 듣던 회색의 나라.......... 남쪽 땅 고성에서 온정리 까지 걸린 시간은 약 50분 정도. 제도를 허무니 이렇게 지척인 것을.......... 더러 더러 외국 땅을 밟아 봤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가장 멀게 느꼈던 북한 땅. 노비자로 입국한 외국 같은 조국. 이곳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 땅이 맞단 말인가?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비는 그치고 뜨거운 햇살이 우릴 반긴다. 베이스 캠프격인 온정각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 이름은 『 외금강호텔 』. 지하 2층 지상 12층의 규모로 과거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묵었다는 초대소를 현대가 리모델링하여 금년 7월에 개관한 호텔로서 시설은 수준급이었다. 온정각 내에는 동관, 서관, 옥류관의 음식점과 훼미리마? 사진 현상소가 있으며 평양 모란봉 교예단이 공연하는 금강산 문화 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휴게소도 온정각 내에 현재 건설 중이다. 북에서는 금강산을 5금강으로 나눈다.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외에 별금강과 신금강이 더 있다. 그리고 금강산 3대 절경이라는 만폭동, 구룡연, 만물상 중 오늘은 구룡연 방면과 삼일포 방면, 내일은 만물상과 삼일포, 해금강 방면을 돌아본다고 한다. 구룡연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북한의 앳된 남녀 환경감시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산행 중 요소요소에 둘씩 서있으면서 말 그대로 환경감시를 한다. 대소변을 아무데서나 보는지, 침을 뱉는지 등등. 금강산 구내에서는 소변을 보는 데도 많은 값을 치러야 한다. 남자는 1불, 여자는 4불. 세계 곳곳에 화장실 이용료를 받는 데가 많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받는 곳은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살기에 꽤 괜찮은 나라 인 것 같다. 비가 내린후의 햇살은 습도가 높아 엄청난 땀을 발산하여 시야를 가리고 안개는 아름다운 금강산의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든다. 가장 걱정스러운것은 아름다운 금강산의 사진이 제대로 찍힐수 있을까? 목란관을 지나 옥류동을 향해 골짜기를 오르니 산세가 더욱 아름답다. 금강산은 4계절 마다 그 이름이 다르다. 겨울에는 한 웅큼의 흙도 없이 바위뿐 이라고 개골산(皆骨山),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전설 속의 산이라고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단풍들면 더욱 좋다고 풍악산(楓嶽山), 봄에는 금강석만큼 아름답다고 금강산(金剛山)이란 이름을 잘도 지었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금강산을 느끼게 되는 금강문에 들어섰다. 바위가 갈라져 문이 되었다는 금강문 앞에는 김일성의 교시를 새긴 기념대가 있었다. 기념대와 함께 사진 한 컷 찍고, 금강문을 지나 옥류동, 비봉폭포를 감상하며 산행을 재촉했다.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조선의 3대 폭포 중 하나인 아홉 마리 용이 오른다는 구룡폭포가 양쪽 산세와 함께 장엄하게 펼쳐졌다. 휴정 서산대사의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다.”는 말이 반증되는 장면이었다. 직접 보니 금강산은 수려하고도 장엄했다. 연담교를 건너 가파른 산행을 강행하며 구룡대에 오르니 엄청난 바람과 씨름을 하며 북의 안내원에게 사진 한장 찍어 달라고 부탁하니 반가워 한다. 상팔담은 옛날부터 전해 오는 금강산 팔선녀 전설 (일명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깃들어 있어 의미를 더한다. 구룡대에서 발 아래를 굽어보면 구룡폭포 위쪽으로 8개의 큰 구멍이 난 듯한 소(沼)가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므로 상팔담이라고 부른다. 아쉬움을 남긴 채 구룡연과 상팔담을 뒤로하고 삼일포 관광 출발시간을 맞추기 위해 우리가족은 뛰다시피 하산하여 셔틀 버스를 타고 온정리 휴게소에 도착했다. 옥류관에 들러 12달러에 평양냉면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출발하려는 버스를 붙잡아 타고 삼일포 관광(1인당 10,000원)을 떠났다. 정철이 노래한 관동8경의 하나로 이름높은 삼일포 호수가의 둘레는 8㎞이며 넓이는 0.87㎢이다. 호수의 전경이 한 눈에 굽어 보이는 좋은 전망대에 이르는데 이것이 장군대이며 현재의 북한 최고지도자 생모(김정숙)가 삼일포를 찾은 것을 기념하여 단풍관이라는 수준급의 식당이 들어서 있다. 장군대에서 흔들다리를 건너서면 나지막한 바위산 언덕에 마주 선 두 개의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위쪽으로 조금만 더 오르면 호수풍경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봉래대에 이른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생긴 호수의 기슭이 굴곡이 많고 목란꽃 같은 36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으며 호수 가운데 소가 누운 것 같은 형상을 한 와우섬과 단서암, 사선장터, 무선대 등 바위섬들이 보인다. 삼일포는 육지에 있는 호수다.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지금은 민물 호수가 된 석호(潟湖)란다. 호수 주위에 수백 개의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수줍은 듯 고요히 자고 있는 삼일포. 호수 한 가운데 소처럼 한가하게 누워있는 와우도 (臥牛島)가 평화로움을 더해준다. 주위를 돌아 삼일포 남쪽에 있는 봉래대에 올랐다. 봉래 양사헌 선생이 기거하며 시를 지었다는 봉래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르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평범한 진리를 글로 옮겨 놓은 이해하기 쉬운 시. 이런 한가하고 평화로운 곳에 살았다면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웃어 본다. 삼일포 관광을 마치고 온정각으로 돌아와 숙소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오후 4:30분 평양 모란봉 가무단의 공연을 보러 문화 예술 회관으로 갔다. A석은 30불, 일반석은 25불. 공연장의 규모는 아담했다. 인민배우, 공헌배우 들이 펼치는 그네뛰기, 널뛰기, 자전거 타고 줄넘기, 접시돌리기 등 세계 수준급이며 공연이 끝날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공연을 마치고 교예단의 인사 속에 관광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사회자는 한복을 곱게 입고 예의 그 소프라노 목소리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동포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동포 여러분 다시 만납시다아~ 사람들마다 터뜨리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인다. 박수와 환호. 잠시 남북이 하나가 되었다. 금강산은 금강석처럼 빛났고 溫井里는 溫情里가 되어 고향처럼 포근했다. 오늘은 마지막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금강산의 일출을 보고 기지개를 폈다. 갖고 간 짐을 버스용과 산행용으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호텔 식당에서 뷔페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호텔을 check-out했다. 온정각에서 버스에 오르니 차는 오늘의 관광지인 만물상을 향하여 출발했다. 북에 온 후 처음으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갔다. 온정리 마을을 거쳐 영어의 M자를 길게 늘여 놓은 듯한 비로봉이 가장 늠름해 보인다. 만물상 가는 길에도 변함없이 북쪽 군인들이 누르스름한 군복 차림에 붉은 깃발을 들고 커튼 없는 차창을 통해 남쪽 관광객들을 감시하기 위해 들판에 도로에 차려 자세로 서있다. 북에 온 후 처음으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갔다. 우체국에 붙여 놓은 <신분소>라는 간판이 생소하다. 주택들의 초라함도 그렇지만 다듬지 않은 소나무로 만들어 세운 전신주가 북한의 생활상을 말해주었다. 마을의 좁은 도로와 협소하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30여분 달려 만물상 주차장에 도착했다. 만물상은 금강산 여러 명승 중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악미로 하여 가장 인상적인 곳이다. 지질적 특성으로 하여 수십길, 수백길 솟아 서로 키자랑을 하며 봉우리들과 절벽들이 하늘 높이 솟고 천태만상을 나타내고 있다. 만물상은 그 생김새가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물체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만물상의 입체적인 경치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천하절승이다. 나란히 선 3개의 바위들이 깎아 세운 듯이 하늘 높이 솟았는데 구름이 덮일 때면 바위들이 움직이는 듯한 모양이 마치 하늘에서 신선들이 내리는 것 같아서 이 바위들을 삼선암이라고 이름지었다. 삼선암은 맨 앞의 것은 창끝같이 날카롭고 중간 것은 자루같이 뭉뚝하고 맨 뒤의 것은 주먹같이 불뚝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천선계를 따라 오른면 오른쪽 세지봉 줄기에는 곰, 독수리 등 여러 가지 모습의 바위들이 보이고 왼쪽에는 칠층암(七層岩)이 있다. 칠층암에서 120m 올라 오른쪽 세지봉 줄기의 벼랑중턱에 묘하게 솟은 바위가 있다. 장수가 큰 도끼를 들어 바위중턱을 찍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절부암(折斧岩)이라고 한다. 절부암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70 ∼80도의 가파른 경사를 굽이굽이 오르면 말안장처럼 생긴 곳에 이르게 되는데 가파롭고 험한 길로 이곳까지 오르면 마음이 놓인다 하여 안심대(安心臺)라고 한다. 안심대에서 잠시 쉬고 계단길을 내려오면 깎아지른 바위벽에 설치 된 쇠난간을 땀 흘리며 어렵게 오르려니 협소한 쇠난간 덕분에 이곳에서도 정체가 극심하다.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天仙臺)이다. 천선대는 온통 돌로 된 칼등같은 등말기가 잘려나간 것 같기도 하고 아래는 수백길 벼랑이 늘어서 있는데, 만물상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만물상의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조감하는 전망대의 역할을 한다. 깎아지른 바위벽이 산줄기의 등 말기를 이루었는데 그 중간쯤에 좁은 구멍이 세로 뚫리고 그 위로 넓다란 바위가 절반쯤 덮어 지붕을 이룬 자연돌문이 있다. 금강산에 있는 자연돌문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을 나서면 하늘에 맞닿는다 하여 천일문(天一門 : 하늘문) 이라 한다. 너비는 사람 한 명이 지날 정도이다. 이곳을 지나 하산길로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왼쪽으로 망양대에 오른다. 망양대 제1.2.3. 전망대를 오르면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무더운 날씨로 힘들게 오른 마지막 코스인 만물상을 보고 힘들여 올라 온 보람을 느꼈다. 다만, 대형 바위에는 사람의 크기보다도 훨씬 큰 싸이즈로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만세!”라는 글씨가 멀리서도 읽을 수 있도록 선명하다. 가는 곳 마다 반반한 바위에는 이렇게 김일성 찬양 문구를 새겨놓아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 중 마지막 코스인 만물상를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온정각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4시 30분 북측 세관에서 체크아웃 절차를 마치고 오후 5시 남측 통일전망대를 향해 출발했다. 이제 금강산 한 귀퉁이라도 보았으니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 보다는 내가 행복하다 해야 할까? 願生高麗國 (고려에 태어나서) 一見金剛山 (금강산 한 번 보았으면...) 그러나 누가 금강산에 대해 묻는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지척이니 직접 가서 보십시요.”(百聞而不如一見)라고 할 수 밖에. 2006년 8월 1일 금강산을 다녀와서...... 노루지 최 현종 심 경섭 최 주연 최 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