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법대 폴리우레탄학과를 나왔습니다.
(1) 플라스틱과 연관을 맺다.
‘나의 사랑이 그대에게 건낼 수 있는 것은 꽃다발과 눈물과 기억뿐이다.’
-페트라르카도(이태리)-
심신이 고달프거나, 새로운 마음을 다지고 싶어 할 때,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 보는 근교가 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 마을 茶山 정약용 生家와 묘소를 다녀온다.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어우러진 곳이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정겨운 분위기가 있다. 의미 있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7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는 동안 10여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여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보통사람의 삶은 죽음을 통해 끝나지만 위대한 인간의 삶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것 같다. 다산은 부나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의 길을 버리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식과 지혜를 추구한 위대한 철학자이며 실학자의 길을 걸었다.
흘러가는 물을 바라본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남이 없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흘러간다. 쉼 없이 흐른다. 그저 흘러 갈 뿐이다.
S법대를 나온 그해 1966년 3월 개발은행인 한국산업은행(KDB)에 입행한 후 ‘폴리우레탄 세계’ 발행까지 나의 사회생활 45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지나 온 길에 미련을 갖지 않고 잘못된 길이라 하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물이 흐르는 것 같이 가던 길을 향하여 앞만 보고 흘러 갈 뿐이다. 이 길의 첫 발이 나의 운명을 이끌었다. 바로 폴리우레탄의 길인 것이다.
제 2차 5개년 정부 경제정책 핵심 사업은 울산 석유화학 공업 단지 사업이다. 당시 미국의 Gulf, Dow가 중심이 되어 선진 주요 Major들이 자본과 기술 투자로 참여하였다. 입사 후 개발은행의 중추인 Control Department에서 5년 간 매일 야근을 하며 경제 정책 수립의 실무에 참여하였다. 국내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는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과 구라파 몇 개 나라만 갖고 있던 석유화학 장치산업에 투자한 다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과 같았다. 당시의 일화 한마디를 소개하면, ‘납사가 무었인가?’라는 물음에 ‘해조류에서 나오는 먹는 것이다’ ‘섬유의 일종이다’라고 말하는 등 우리에게는 생소한 산업이었던 것이었다. 이 때 플라스틱을 배우고 신비의 소재인 폴리우레탄을 알게 되었다.
1968년 3월 22일 에틸렌 기준 연산 6만 6천 톤의 납사 크레킹 공장을 비롯하여 폴리에틸렌, 폴리스틸렌, 카프로락탐 등 9개의 공장 기공식을 하게 된다. 지금은 울산과 여천, 대산에 3개의 석유화학 공업 단지에 에틸렌 기준 761만 톤(2010 년)으로 세계 5위의 석유화학단지를 갖추고 국내 제조업 분야의 생산량으로 보면 4위(‘09년 63조원)인 국가 중추 산업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처음 계획할 때에는 아무 지식과 경험이 없었고 자본과 기술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계획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저력을 보인 쾌거로 45년이 지난 현재의 상황은 놀랄 만한 발전을 하였다. 감회가 새롭다.
은행에서 나의 일은 석유화학공업을 비롯하여 기계, 조선, 제철, 비료공업 등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중핵을 이루는 공업 분야에 대한 자금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개발은행이 지원한 사업이 반드시 잘 운영되는 것은 아니었다.
KDB가 지원하고 외화지급 보증한 PVC 5개사가 은행 대출금과 차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불실 기업이 되었다. 수요 전망을 무시한 정부의 무분별한 공장 승인으로 건설된 5개사들이 과당경쟁을 함으로 도저히 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는 이 업체에 대수술을 하기로 하고 해결 방법은 5개사를 합병하기로 하였다. 1972년 5월 15일 정부가 구성한 합병추진위원회에 차출되어 합병 작업을 하게 되었다.
1966년12월에 가동한 대한프라스틱(충북 부강 생산규모 6,600톤 주주 최성모),1967년에 가동한 울산의 공영화학(6,600론 주주 김종수->최성모), 진해의 한국화성(15,000톤, 한국화약의 김종희 1968), 그리고 1969년에 가동한 군산의 우풍화학(20,000톤, 동부그룹의 김진만, 풍한산업의 김영구), 인천의 동양화학(6,000톤, 이회림)등 5개사의 공칭 생산능력은 연간 54,200톤이나 당시 실제 수요량은 25,000톤-30,000톤 정도였다. 당시 PVC를 제조하는 공법은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석회석에서 추출하여 중간 원료 VCM을 제조하는 재래식 아세틸렌 공법으로 후진국형 방법이고 또 하나는 석유화학원료에서 VCM을 제조하는 새로운 공법으로 대한프라스틱과 동양화학은 아세틸렌 공법이고 나머지 3사는 VCM을 수입하여 PVC를 제조하는 공법이다. 양자 모두 원가가 높을 뿐 아니라 공급이 2배 이상이 되다 보니 출혈 경쟁으로 계속 적자 폭이 늘어나고 차관 원리금 상환이 어려워지자 지급보증을 한 KDB가 대신 상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판매 공판을 하기도 하고 PVC조합을 조직하여 적정가 공급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워낙 입김이 센 주주들이라 유통 구조가 엉망이 되었다. 당시에는 소생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5개사를 한회사로 합병하는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 합병 작업의 멤버로 참여하였다. 1972년 3월15일이다. 5개사가 모두 저가인 회사를 합병하기란 물리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이 5개사 주주들이 당시 정치적으로나 재계에서 내 노라 하는 인물이라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로 5개사 합병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계속)
(2)편은 PVC5개사 합병의 뒷이야기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