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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움직임 때문이라는 생각에 묘하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그 어떤 다른 생각도 불쑥 침입하지 못했다.
단순하지만 그 중독성에 어떤 복잡한 생각도 감히 불쑥 자신의 존재를 들어 내지 못하니까…….
눈을 떠 창문을 바라보기 전까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그라지어가는 초록빛과 그 사이로 보이는 노랗고 붉은 빛이 그녀의 눈 안에도 가득 담긴다.
아무리 느리다고 해도 기차는 기차였는지, 창문 곁을 지나가는 나뭇잎 하나하나를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추억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기차의 종착역은 빛바랜 그녀의 추억 그 어느 한 지점이고, 지금 기차가 지나가는 길은 과거와 현재로의 시간의 흐름인 것 같았다.
“달걀 있어요, 호두과자 있어요, 음료수 있어요.”
말꼬리를 흐리며 지나가는 판매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갈증에 주머니를 뒤척이던 그녀는 무심코 본 앞좌석의 사람들에게 시선이 고정된다. 남자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머리위에 자신의 머리를 포개고 눈을 감고 있는 남자. 그 어떤 것도 자신들을 방해 할 수 없다는 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 때문에 오래 전 묻어두었던 기억 한 조각이 빛을 내며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 버린다.
‘나도 저렇게 아름다웠을까. 나에게도 저런 시간이 정말 존재했던 걸까. 그 때 좀더 시간이 있었다면.......’
한번 빛을 내기 시작한 추억 끄트머리는 쉽게 빛을 잃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드는 생각에 이미 그녀의 두 눈은 예전 그 시간 속 자신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창문가로 해가 비췄는지, 아님 어둠이 사방을 꽁꽁 감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한건 10년 전 그와 그녀도 저들처럼 빛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한 차례 빠져나간 플랫폼에서 가방 하나 쥔 채 걸어오던 그녀가 벤치 앞에서 우뚝 선다.
세월의 흐름을 입어, 낡기도 하고 색도 벗겨진 그 벤치는 오랫동안 사람이 앉지 않았는지 썰렁함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자신의 어깨를 만져본다. 자꾸만 빈 어깨를 지분거리던 그녀의 손이 빈 허공에 툭 하고 떨어진다.
자신의 눈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런 여자를 무덤덤하게 보고 있는 남자, 아니 그러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 남자의 눈 속에서 느껴지는 그 앳된 감정에 그녀의 코끝이 찡해진다.
그 환상이 너무나 따뜻해서 손을 올리는 그녀의 손끝에 차가운 공기가 스쳐지나간다.
추억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임을 그녀의 말단 신경이 그녀에게 전해주고 있다.
더 이상 그녀의 환상 속 젊은 여자와 그녀가 같은 사람인 동시에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의 차가운 이성이 그녀의 심장에게 날카롭게 전해준다.
‘바이올린도, 자전거도, 음악을 들으면서 여행을 하는 것도 이제 그 무엇도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낯설고 두려운 일일 뿐이다.
25살 내가 좋아했던 것을 35살의 나는 싫어한다. 아니 할 수 없다. 이젠 25살의 내 모습조차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몽롱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왜 난, 이곳을 찾아 온 걸까’
역을 나선 그녀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개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끔씩 감정에 휘둘릴 때는 시간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해 고생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휴가를 얻어서 이곳까지 온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년 전부터 간신히 얻은 명성과 인정받기 시작한 실력 덕분에 그녀는 오히려 젊은 시절 마음껏 누렸던 여유마저 반납한 채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매진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얻은 이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인지, 단 한번의 실수에도 저 나락 끝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들이 잠시 얻은 명성에 기대, 조금 나태해 졌을 때 돌아오던 그 매섭던 결과에 그녀는 몸서리치도록 분노했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인정받으면 인정받을수록 무섭게 자신을 몰아친 방식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일을 버리고 이렇게 무작정 여행을 오다니, 그녀 스스로도 정말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피식 웃어버린다.
“방이 이거 하나 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잠 잘 곳이면 충분합니다.”
창고라도 바람을 피할 곳이면 족하다는 생각에 온 그녀는 잘 꾸며진 방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좀 춥죠? 아궁이에 불 붙였으니까 곧 따뜻해 질 거예요.
이건 대추차인데 좀 마셔 봐요“
언제 준비했는지 소담한 쟁반에 대추차 두 잔을 들고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들어오라는 의미로 살짝 비켜선다.
“서울에서 오셨나봐요?”
“네.”
“저도 서울에서 살다가 여기로 내려왔거든요.”
“사투리를 안 쓰시기에, 타지 분 인줄만 알았는데......”
놀란 듯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는 여자는 자신의 앞에 하얀 김을 내며 기다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근데 여긴 왜 오셨어요?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지만, 곧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모르겠어요. 저도.”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웃기 시작한다.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심각하던 그녀의 얼굴에 불편함이 스치고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미안해요. 누구랑 너무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아까 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나와서 놀랐죠?
실은 그 친구인줄 알았어요. 매년 이 맘 때 즈음에 오거든요.
근데 그 친구도 제가 여기 왜 오냐고 물어보니까, 같은 답을
하더라고요. “
그제야 얼굴이 풀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여자 사이에는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계절상으로는 늦가을이지만, 외투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움츠린 그녀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돌아선다.
“말 못하고 떠나서 미안해요.
하지만 돌아올 때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찾아서 올게요. “
한걸음 한걸음을 내 딛을수록 고지는 가까워오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정말 그곳에 가면 답을 알 수 있을지 조차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확신이 없어졌다.
방을 나오는 그 순간에 생겼던 확신조차 불안감과 의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 곳에 가면 더 복잡해질까 두려워 아래를 내려본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려가고자 한 걸음까지 내 딛었지만, 10년 전 이곳을 오르던 25살 자신의 모습이 내려가려고 하는 자신을 막아섰다.
“하......”
코끝과 귀는 이미 얼어 빨개졌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도 파랗게 변해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그녀는 여몄던 외투를 벗어버린다.
분명 감기에 걸릴 거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움직일 뿐이다. 외투를 벗어 한손에 걸친 그녀가 찬찬히 언덕을 둘러본다.
해가 뜨지 않아 온 세상이 어두울 것 같았지만 오히려 세상은 더 분명히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도 명암이 존재했고, 멀리서 보이는 불빛이 마치 망망대해에서 길을 알려주는 등대 같았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열기를 식히려는 듯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의 호흡소리가 잔잔해지고, 그녀의 마음 또한 차분해졌다.
올라오면서 느꼈던 열기, 혼란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한걸음 내딛는 그녀는 나무를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10년 전 그를 잊기 위해 시작한 자전거 여행이 끝을 보이고 있을 때 그녀는 알았다. 그를 잊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사랑하기 위한 여행이었음을. 그래서 이 곳에 올라오는 그 순간이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그 사랑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홀로 울더라도, 그 사랑을 지키고 싶은 게 이 곳을 올라오던 10년 전 그녀의 마음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이곳을 찾지 않아서, 너무 멀리 돌아와서 처음 자신이 가졌던 마음을 잊고 산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 엄지손가락을 네 번째 손가락에 가져다대고 한번 튕겨본다. 그가 던져주었던 반지를 끼고 있었을 때, 하루에도 수백 번씩 버릇처럼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보고 싶을 때, 그리울 때, 또는 생활이 너무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하루에도 수많은 이유를 들어 반지를 굴리고 또 굴렸다. 그리고 5년 전, 자신을 찾아와 반지를 뺏어가던 그를 마지막으로 본 그 날 이후로는 절대로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차갑게 언 그녀의 얼굴위로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서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사랑이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반지와 함께 했던 5년도, 반지의 흔적과 함께 했던 나머지 5년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뿐이다. 반지를 뺏어간 그를 아직도 사랑한다면, 왠지 그에게 지는 것 같아서, 그가 비웃을 것 만 같아서 부정하고 싶었다. 잊고 싶었다. 그깟 반지 따위는 내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저 길거리에서 산 액세서리 따위 밖에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날 잊었듯이, 나도 당신을 잊었다고, 당신은 나에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곳을 온 것도, 굳이 제일 느린 그 기차를 탄 것도 모두 그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을 가져오지 않은 것도, 자전거를 타지 않은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을 매고 자전거를 타고 왔을 때 가지게 될 10년 전 그 기대를, 그 마음을 애써 누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 기대 대신 그와 함께 탔던 그 기차를 탐으로써 기억 속 그 사람을 더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왠지 기차를 타면 그와 함께 이곳에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던 것이다.
웃음이 났다. 눈에서는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났다. 비웃음도 아니고, 잔잔한 미소도 아니었다.
언제 그렇게 웃어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보고 싶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그녀가 큰소리로 밝게 외친다. 더 이상 속일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끄트머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좋아한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이제는 편하게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와의 사랑이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없어진다고 해도 이제는 받아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소중해, 모셔만 두다가 바라만 보다가 한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세월의 흔적을 더 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더 빨리 닳아 헤진다 해도 오롯이 사랑하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안 잡히는 거야.”
벌써 라디오를 잡고 20분 째 씨름을 하고 있는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라디오 전파 때문에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잡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10년 전 한없이 밝고 맑았던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지방이라 그런지 서울과 다른 주파수 때문에 그녀는 하나하나 채널을 돌리고 있다. 가요, 팝송, 그리고 교육방송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듯, 다시 한번 더 채널을 돌리는 그녀의 손길이 멈칫한다.
“오, 그대여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천천히 따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그런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었다. 그 마음 하나 그에게 주고 싶었다.
“한번 안아 줄걸, 다시 한번 더 그냥 안길 걸.”
후회했다. 5년 전 그 때, 반지를 뺏어가는 그에게 차갑고 모진 말을 했던 자신을, 한번도 그를 잡지 않았던 자신을, 그의 마음 속 커튼 하나 들추지 않았던 자신을 그렇게 후회했다. 반지를 뺏어가는 그 사람이 결국 그 5년 동안 자신을 잊지 않았음을 왜 그 땐 몰랐는지, 자꾸만 먹먹해 지는 가슴과 뿌옇게 변하는 눈앞에 5년 전 그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미안해요. 다 들린다고, 선생님 말씀 다 들린다고 했는데…….
귀가 완전히 먹지 않아서, 미세하게 청력이 남아있어서
선생님 가슴이 하는 말 못 들었나 봐요. “
아이처럼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은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역시, 10년이 지나도 쌈닭은 쌈닭인가 봐요.
다시 쌈닭모드로 돌아왔으니까, 이번엔 진짜 끄트머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사랑할게요. 약속“
허공에다 손을 뻗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 한 편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쌈닭이 퍽이나 약속을 지키겠군.”
바람이 실려 보낸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코끝이 찡해지는지 인상을 몇 번 쓴다.
“그래도 좋아요. 이렇게라도 들을 수 있어서.
환청이면 어때요. 그것 또한 내 안의 선생님인데,
내 안의 당신인데, 내 사랑인데. “
괜찮다고 위로 해봐도,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였다. 이기지 못한 슬픔에 그녀의 깊은 곳에서 눈물과 함께 슬픔이 배어나온다. 소리를 가슴으로 삼키는 그녀의 울음에, 바람이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훔친다. 그 차가움에 몸서리가 처질만도 하지만,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는 얼굴에 있는 눈물대신 심장을 붙잡고 있다.
“진짜 닭이라도 됐나보군.”
자신의 뺨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본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그가 오롯이 받고 있다.
“누구세요?”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그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심각한 그녀는 그를 향해 재차 물어본다.
“누구세요?”
“어이 쌈닭, 눈에도 이상 있는 거야?”
인상을 쓴 채 눈을 감는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그녀의 입가로 새어나오는 한숨에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으로 떨어진다.
“유령 아니니까 울지마.
아직도 애군. 나이는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거야“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안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어둠이 사라지고 햇살만이 비추는 곳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오랜만이군.”
늘 언제나 그녀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네. 잘 지내셨죠?”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점점 색을 잃어가는 들판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그녀가 잔기침을 한다.
“괜찮아?”
놀라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가에 걱정이 서린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매만진다.
“변한게 없네요.
주름 한두 개 느신 거 빼고는 정말 변한게 없어요. “
“쌈닭도 마찬가지더군. 여전히 멍청해”
머리를 만지는 그의 손길에 놀라 고개를 들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결국 그녀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반지의 감촉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진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그럼 언제 떠나세요?”
자신의 말에 멈칫하는 그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버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만 내려가야겠어요.
밑에서 걱정할 사람이 있거든요“
그를 바라보지 않고 터덜터덜 내려가는 그녀는 혹시 그가 자신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늦어진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그곳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지금 느끼는 그의 향기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꾹꾹 담아보는 그녀의 입가에 애잔한 미소가 걸린다.
목까지 차오른 숨과 움직이고 있는 다리가 아픈지도 모른 채 달려가던 그녀가 멍하니 한 곳을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스쳐지나가는 매서운 바람도, 거친 호흡도, 더 이상 못 달릴 것처럼 아픈 다리도 다 무시한 채 그저 달려간다. 달려가 그 때처럼 그를 안아버린다.
“사랑해요”
거친 호흡과 함께 섞여 나오는 자신의 고백에도 여전히 목석처럼 뻣뻣이 서 있는 그를 한 번 더 꽉 안아준 그녀는 꽤 오랫동안 그를 안고 서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10년 전 그 때 말하지 못 했던걸
후회했어요. 고마워요. 말 할 수 있게 이렇게 와줘서“
이제 됐다는 듯 그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풀린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그의 등을 몇 번 쓸어준다.
“이젠 됐어요. 이젠 정말.......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봐요. 뛰어오는데 힘들더라고요.”
손을 풀던 그녀의 등 뒤로 따뜻한 무엇인가가 그녀를 누른다.
“나도 후회했어. 여기서 널 안아주지 못한 거.
널 내 품안에 가두지 못했던걸. “
“고마워요. 말해줘서”
그를 안고 있는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어본다.
언제 어떻게 그를 다시 볼지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웃으면서
그를 보내주고 싶은 그녀의 바람이었다.
“너에게 반지를 가져간 이후로 매년 이 곳에 왔어.”
놀란 그녀가 그의 말에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의 품안에 있을 때, 그의 말이 또다시 그녀의 귀에 파고든다.
“모르겠어. 나도 너에게 날 잊으라고 했으면서
여기를 매년 왜 그렇게 찾아왔는지.
올 때 마다 나도 왜 오는지를 몰랐지만, 그렇다고 안 올 수는
없었어. 나도 모르게 이맘 때 즈음엔 비행기 표를 끊고 있더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가, 그녀를 좀 더 꽉 안아버린다.
“이제야 알겠군.
쌈닭, 너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왜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를 뱉은 그녀가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는다.
“사랑이었으니까.
쌈닭이, 두루미씨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고백에 결국 그녀의 눈에 눈물이 떨어져 그의 가슴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그녀의 떨림이 그에게로 전달된다.
“두루미, 사랑해”
예전에 제본북에 들어갔던 건데, 생각이 나서 올립니다.
원 제목은 return 이었지만 동그라미를 그리다로 바꿨어요..
return 은 너무 직설적인거 같아서...
원래는 수정하고 올리려고 했으나, 귀차니즘이 생활인고로 그냥.... 이렇게 올립니다.
3개월 전 아직 겨울이었을 때 쓴거라서 뭘 듣고 썼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ㅠㅠ
이은미씨 헤어지는 중입니다.. 지금 듣고 있는데... 오래된 기억도 좋은거 같아요...
동그라미도 뫼비우스의 띠도 모두 원을 그리지만 하나는 처음으로 되돌아오고 또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삶은 뫼비우스의 띠지만, 기억은 동그라미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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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이리 늦어도 만날 사람은 꼭 만나는군요,,,,,
그 자리에 그 시간에 꼭 운명처럼 우리는 놓여있었던 거죠..... 성시경군의 노래가사 처럼.... 아마도 그렇거겠죠.....
삶은 기다림의 여정이겠지요. 행복을 기다리고....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인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기다림이 있기에 설렘도 있고 아픔도 있고...... 희망도 있는 거겠죠..![아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34.gif)
...... 그래도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어요.... (아... 인간의 욕심.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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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꼭 만난다는 얘기...... 음... 둘은 다시 만났어요..
만해 한용운님의 시의 한 구절처럼....... 거자필반...... 제![종](https://t1.daumcdn.net/daumtop_deco/icon/deco.hanmail.net/contents/emoticon/things_34.gif)
교는 기독교인데.... 한용운님의 시를 유난히 좋아합니다. ![그냥](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3.gif)
.. 그분의 시가 좋아요.... 제가 문학소녀는 아니지만... 왠지 그분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나 할까요...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동그라미처럼 두루미와 마에도 원래는 만나는 인연인거죠...
결국 돌도 돌아 제자리로 왔지만,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그 시간동안 행복했을까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어쩌면......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 시간이 꼭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도...시간은 필요하니까요.. (저 오늘 왜 이렇게 진지하답니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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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슴이 벅차오르네요....눈물 날 만큼....
오래전에 쓰고 묻어둔거라 그런지.......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포기했습니다.. 귀차니즘의 병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아.......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다시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느 군요...가슴이 뜨거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