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조식품의 대명사 '알로에'.
국내에 알로에가 보급된 지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인기는 여전하다.
이는 국내 알로에 보급의 전도사로 불릴 만큼 지대한 역할을 해온 김정문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0년 이상 자신을 괴롭히던 병마를 극복하고 알로에 보급과 연구에 평생을 바친 김회장의 질곡 많은 삶. 그리고 그 성공스토리.
중소기업인으로서 2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고 라디오·TV 등에 1,000회 이상 출연한 인물.
단 한가지 품목으로 자신의 이름을 온 국민의 머리 속에 확실히 각인시킨 주인공.
특별히 경영학이나 마케팅 공부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5만개의 기업과 점포가 무너져 갔던 IMF 위기를 거뜬히 넘긴 우량기업인. 바로 ㈜김정문알로에의 김정문 회장을 이르는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건강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요즘, 건강보조식품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이 '알로에'지만 그 앞에 '김정문' 이라는 이름 석자가 빠진 '알로에'는 뭔가 알맹이가 없는 듯 허전하게 느껴진다.
'김정문알로에'는 이제 단순히 한 기업의 고유 브랜드 이상이다. 건강보조식품의 보통명사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회장이 몇년전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프로그램 진행자가 그를 두고 “알로에 하면 김정문, 김정문 하면 알로에”라고 소개했던 것은 결코 의례적 방송용 멘트나 과장이 아니었다.
이처럼 국내에 알로에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온 '김정문알로에'는 현재 알로에를 주원료로 건강보조식품과 화장품은 물론이고 키토산·자라·초유·벌집 프로폴리스 등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이 회사는 국내산이 수입산보다 비싼 값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993년부터 김제에 2만평, 제주에 5만평(자체농장 1만평, 계약재배 4만평) 규모로 국내산 알로에로만 원료로 쓰고 있다.
최근 알로에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올해부터는 세계적인 청정지역인 호주 번다버그시에 소재한 호주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원료 공급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 건강보조식품의 보통명사 ‘김정문알로에’
해외에는 1993년부터 본격 수출하기 시작해 현재 미국·중국·호주·일본·캐나다 등을 주요 수출시장으로 하고 있다.
지난 1999년에는 미국 AMECOR 상사와 300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체결해 알로에 제품을 본고장에 역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지난 5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지사를 개설하고 시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호주의 세계적 알로에업체인 ‘하이테크 알로에베라사’와 R&D 및 마케팅 등 업무 전반에 관한 제휴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세계화에 전력하고 있다.
아울러 김정문알로에의 제조기술을 이전해 청정지역인 호주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우리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1997년 ‘우량중소기업체’로 선정된 바 있는 김정문알로에는 지난 91년부터 지금까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추천받아 완치될 때까지 적절한 건강보조식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산수유제도’를 운영하는 등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밖에 건강보조식품업계 최초로 ISO9001 인증을 획득한 김정문알로에는 자체 자연과학연구소를 운영, 연구범위를 알로에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생명공학기술로까지 확대해 나가고 있다.
1995년 천안에 제품개발실, 연구기획실, 산학공동 연구실의 조직을 갖춘 200평 규모의 연구소를 신축한 것이다.
1999년에는 여기에 미용연구실을 새로 보강하여 현재 박사 1명, 석사 7명, 학사 4명 등 총 12명의 연구인력이 상주하며 연구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점차 연구인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연구소 설립 이후 현재까지 많은 연구과제를 수행해 알로에 추출물의 항암성 연구를 시작으로 건강식품 소재로써의 알로에 용도 적성탐색, 알로에 유효이용 연구, 알로에의 화장품 소재화에 관한 연구, 알로에 속 식물의 알콜 대사 촉진 성분에 관한 연구, 알로에 추출물의 항바이러스 연구 등 총 15건의 산학공동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기반을 토대로 1993년 국내 최초로 합성 보존료를 첨가하지 않은 알로에 겔인 ‘베라겔’ 용액의 제조에 성공해 가열과 농축 및 희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알로에 생잎의 겔 성분을 갈아 만드는 제조법을 특허등록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특허를 획득한 ‘항 고혈압 효능의 알로에 아세틸만난 함유 조성물’은 알로에에서 고혈압 촉진을 억제하는 조성물을 국내 최초로 분리 추출한 것으로, 그 응용분야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김정문알로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반평생을 병마와 싸우며 힘겨워했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알로에에 대한 김회장의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질곡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가치있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나타났다.
* 두번의 자살 시도, 그리고 알로에와의 만남
김회장은 192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시절이던 1942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이어 3년 뒤에는 만성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믿기지 않는 병을 얻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폐결핵은 치유됐지만 여전히 질병의 고통은 계속됐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위장병·신경쇠약·약물중독·중증변비·빈혈·알레르기 등이 연이어 찾아온 것이다.
병마와 싸우던 30년의 삶은 김회장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너무 힘든 나머지 두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김회장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김회장은 서울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한때 신교사란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약관 30세의 나이에 현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초창기의 감사역을 맡기도 했지만 그의 재능과 열정은 이듬해 부산에서 꽃 재배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김회장은 화훼·원예업계 최초로 가을에만 피는 국화를 겨울에서 봄까지 피게 하는 기술을 도입하는가 하면 고무나무·몬테스테라 등 꽃이 피지 않고 잎을 감상하는 관엽식물을 재배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지금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산 파인애플과 바나나 재배를 20년전 국내 처음으로 성공해 한때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적 경제상황에서 그가 재배한 작물들은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하기에는 고가였고, 시장 역시 협소하여 사업적 성공은 거둘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알로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병마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 있던 1975년이었다.
우연히 일본에서 발간된 '알로에 건강법'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알로에로 치료할 수 있는 수많은 병이 열거돼 있었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세균학자인 일본의 소에다 박사가 기고한 알로에 연구 실험 결과가 소개돼 있었어요.
책을 다 읽고 나서 혹시 알로에가 내 병을 낫게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김회장이 알로에 생잎을 구해 먹기 시작한 지 1년만에 그의 육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각종 병증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특히 중증의 변비·위궤양·류머티스 그리고 그 많던 머리 비듬에 직효를 발휘했던 것이다.
몸소 알로에의 효능을 체험한 김회장은 건강을 회복해 가면서 알로에에 관해 조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복음(服飮)체험과 면밀한 자료검토를 통해 알로에는 종류에 따라 위장에 대한 반응이 정반대인 것이 있고, 인체효능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독자적으로 알아냈다.
알로에가 수십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병마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는 임상체험도 있었지만, 이후 알로에를 조사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알로에에 대한 김회장의 호기심은 점차 믿음과 확신으로 변해갔다.
"나는 동양적인 것보다 서양적인 것을 동경했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에 의해 증명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았습니다. 알로에를 접한 후 설마 하던 내 병이 점차 나아가자 알로에 역시 과학적으로 그 효능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 80년대 초반 전국적인 알로에 열풍, 그리고 좌절
그는 부평에 있는 친구의 농장에서 알로에를 재배하는 한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알로에라는 어휘가 들어 있는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3,500년전 이집트 의서(醫書)에서부터 20세기 구소련 의사들의 임상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알로에에 대한 인류 역사의 수천년의 경험이 김회장의 10년에 걸친 조사작업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돼 갔다.
1979년 김회장은 본격적으로 알로에를 재배하여 대중적으로 보급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또 이미 50을 넘긴 초로의 나이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이미 알로에에 대해 신앙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던 김회장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작은 것을 잃는 것이고, 친구를 잃는 것은 큰 것을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도, 나를 도와줄 친구도 없었지만 믿음과 용기 하나로 버텼어요.”
이듬해(1980년) 봄 김회장은 어렵게 끌어모은 자본과 20년 경력의 원예업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알로에 재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만본의 알로에를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알로에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자금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좋은 약초를 왜 몰라줄까 하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아왔어요.”
그는 수중에 남은 돈을 다 털어 일간지에 작은 광고를 내기로 결심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광고를 보고 찾아온 모신문 기자에 의해 알로에 관련 기사가 나간 뒤 TV·신문·잡지 등 김정문알로에에 대한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방송을 본 청취자들의 문의가 방송국으로 빗발쳐 업무에 큰 지장을 줄 정도였다.
드디어 전국적인 알로에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알로에 붐은 소비자들이 그 효능을 체험한 이후 더욱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련이 닥쳤다.
김정문알로에 덕분에 한국에 비로소 건강산업이라는 것이 움트기 시작하던 1982년, 알로에의 인기에 편승하여 검증받지 않은 각종 건강식품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또 알로에 수입업자와 재배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업자들은 수입한 알로에 제품을 턱없는 고가에 팔거나 엉터리 제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심지어 보건사회부의 식품검사에서 대장균이 허가치의 수천배나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알로에 과열현상이 빚어낸 부작용은 확산돼 갔다. 얼마전 까지 호의적인 시각을 견지했던 언론은 서서히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또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알로에와 같은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법률적인 보호와 규제가 미비한 상태였다.
* 기업경영은 감동과 행복을 주는 예술
알로에의 권위는 점차 타격을 입게 됐고, 과도한 경쟁은 결국 모든 알로에업자를 도산으로 몰고 가는 극한상황까지 연출했다.
김회장 역시 타격이 컸다. 하지만 그는 알로에에 대한 신념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와 경험을 밑천으로 알로에 건강 강연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갔다.
주변에서는 알로에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로에사업의 난점과 극복 방안을 잘 알고 있었다.
알로에를 생잎이나 생그루로 공급할 때는 판매되기 전에 썩거나 불량이 많이 발생해 수지를 맞추기가 곤란했다.
그는 시행착오 끝에 보관과 휴대, 복용이 간편한 분말 형태의 알로에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냉동건조분말의 베라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방식이었으나 1988년 마침내 국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냉동건조분말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0년 7월, 알로에사업 7년만에 김회장은 당당한 법인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두개의 자회사를 설립했다. 하나는 건강식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건도식품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푸른알로에화장품이 그것이다.
이후 '김정문알로에'는 국내 건강보조식품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기업경영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창조성에서 시작되지요. 기업인 역시 경영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또 예술이 인류에게 감동을 주듯 기업도 소비자, 더 나아가 인류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가로서의 제 인생에서 알로에야말로 바로 그런 감동과 행복을 가져다준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