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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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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자료와 맛집 스크랩 영월의 인물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추천 0 조회 135 16.05.08 17:0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영월의 인물



엄흥도(嚴興道)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 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르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 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가족들과 같이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호장 엄흥도의 충성은 인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렸다하여 후세인들이 그를 항상 추모하였다.
그 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 묘를 찾아 수축하고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 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지금의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정사종(丁嗣宗)

  정사종은 봉선대부 전의감 부정 정극실(丁克實)의 아들이다.
정사종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단종을 모시기 위해 영월로 내려와 정거실(丁居實)이라 이름을 고치고 운둔생활을 하였다. 군위현감이던 정사종은 1455년(세조 원년)에 참판 박팽년(朴澎年)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복위모의가 발각되어 박팽년이 해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에 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단종이 마침내 승하하니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죽으려 하자. 그 아들이 울면서 “임금을 위하여 진충(盡忠)하심은 당연한 길이오나 반드시 임금을 감장(勘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단종을 염장한 후에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기회는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그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라고 대답하면서 결심을 변경하였는데, 이때 세조는 “단종의 시체를 감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고 명을 내렸기로 황망한 가운데 엄흥도와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 후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귀전생 이 자손 위초목 불구공명(余歸田生 以子孫 爲樵牧 不求功名)’ (너는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후 자손들은 나무나 하고 소 기르며 공명을 구하지 말라)고 유언을 한 뒤에 청령포에 나가 물에 빠져 죽었다. 동학지에는 또 “단종이 승하 하실 때 이조참의 덕식도정(德息覩正) 이종(李種)이 엄호장과 같이 단종을 염습하여 장사 지낸 후 밀양으로 갔다.”고 하였으나, 이조참의 이종이 그때 어떻게 영월에 왔었는지 또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추익한(秋益漢)

  자(字)는 우삼(友三)이요 호(號)는 우천(愚川)이니 세종 계묘년에 등과하였다가 갑인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월에 귀향하여 한적하게 지내던 중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그 해 가을장마로 인하여 홍수가 나 단종께서 관풍헌으로 어소를 옮기게 되자 저녁이면 자규루에 오르시어 원한에 사무치고 외로운 감회를 읊으며 지나실 제 추익한은 항상 단종과 같이 자리를 하여 대황을 위로해 드리고 같이 시를 읊으며 산머루를 진상하였다.
10월 24일 날씨가 몹시 차가운데 추익한은 상중유물 머루를 구하려고 영월읍 연하리(당시 상동면 두평리) 험한 산골짜기 까지 도착하였을 때 뜻밖에 단종대왕께서 백마를 타고 행차하시었다.
추익한은 황급히 달려가서 어찌된 사실인지 아뢰니 대왕께서는 “지금 짐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대답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추익한은 꿈인지 생시인지 하도 의심스러워 대왕의 어소까지 돌아와 알아보니 세조의 엄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의 사약을 받고 단종께서는 승하하시고 시녀와 궁녀들은 낙화암 절벽에서 투신 절사하였다는 소식이다. 이때 갑자기 뇌성벽력과 폭우가 내리며 강풍이 불어 나무뿌리를 뽑고 먹구름이 천지를 뒤엎는데 추익환은 단종이 가신 태백산을 향하여 단숨에 달려갔으나 끝내 뵈옵지 못하고 숙식을 잊으며 애통하게 대왕을 부르며 두평리까지 도착하여 피를 토하고 절사하였다.
중종 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때 영월 호장을 지낸 엄주(嚴誅)와 양인 지무작(智無作)이 노산묘를 찾았다.(호현 11세때 부친과 함께 밀장하였었다.) 영월군민들은 추익한의 충성심을 경모하여 영월읍 성황당에 단종께서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타신 행차 앞에 추익한이 산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을 봉안하고 영모전이라 개칭하였으며 매년 10월 24일 제사를 올리고 있다.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

  김삿갓은 안동김씨로서 본명은 병연(炳淵)이요 호는 난고(蘭皐)인데 그가 다섯 살 때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평안도 선천부사로 있을 때 서북인을 등용하지 않았던 조정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선천 가산군을 수중에 장악하려하자 정시 가산 군수는 끝내 저항하다가 홍경래의 손에 죽었으나,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김익순은 처형되고 그의 부친 김안근도 배소에서 죽었다.
병연이 연루를 피하기 위하여 김익순의 하인이었던 김성수에 의해 그의 공향인 황해도 곡산에서 은신하여 자랐던 것이다. 김익순의 죄는 본인에 국한하게 되자 그의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왔고 그 모친은 세상에 떳떳이 살수 없으므로 산골을 찾아 이천, 가평, 평창 등지를 전전하다가 영월 삼옥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 당시 영월은 도호부였으므로 동헌에서 백일장을 보게 되었고, 김병연은 이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제(時題)가 「정시 가산군수의 충성스럽게 죽은 것을 논하고 김익순으 죄를 규탄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사연을 모르고 자란 김병연은 정군수를 예찬하고 김익순의 죄를 호되게 나무란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다.
장원한 뒤 모친의 말에 의해서 김익순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난 후 삼옥리에서 살 수 없어서 충청도 의풍 가는 길목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어둔의 무인촌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조상을 지탄한 죄책감과 운명에 대한 회의로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유명한 많은 시를 지었으며 57세 때 전라도 동복에서 객사한 것을 둘째 아들 익균이 자기 동네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다 장사 지냈던 것이다.
그 후 120년이 지남에 따라 세상에서 잊혀 져 가던 것을 1982년 10월 17일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옹이 이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응수 선생은 김삿갓의 시문은 세계수준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 러시아에서도 김삿갓의 시가 크게 인기가 있다고 198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삿갓이 세계적인 시인임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김삿갓의 유일한 유적지인 영월에서는 「시선 김삿갓 유적 보전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적 보전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고종원(高宗遠)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88) 5월 18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26일 영남지방의 전병사(前兵使)인 김성일(金誠一)과 호남지방의 동래 부사였던 고경명(高敬命)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하여 도내 각읍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과 병기주철(兵器鑄鐵)을 모으고 청장년을 소집하여 적과 싸우게 하였다.
이때 공의 중제(仲弟) 종경(宗慶)은 향인이 대회를 가진 자리에서 문무의 재능인 춘천과 홍천사이를 수비코저 하던 차에 도백(道伯)이 그 솔선창의(率先倡義)를 가상히 여겨 관군 오백명을 첨송(添送)해 주며 흥원진(興原陣 흥업면 소재)을 원조케 했는데 행군도중 관군의 도망이 심해 이를 추포(追捕)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됨에 도백은 종경의 지휘책임을 물어 행형을 하명하였다. 이때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景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 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권군수(權郡守)도 공의(公儀)로 사죄공문(赦罪公文)을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공문은 길이 막혀 전달치 못하게 되니 상사의 명을 지연시킬 수 없다 하여 행형을 하고 말았다. 참으로 애통가석(哀痛可惜)한 일이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도백은 파출(罷黜)되었다.
8월 17일 적이 영월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노리곡(지금의 진별리 고씨굴) 석굴 안으로 피난했다. 다음날에 적이 굴 안에 불을 지펴 생포하려 하자 부인 조씨(曺氏)는 굴 안 벽상에서 투신 자결하였고, 계제(季弟)종길과 같이 잡혀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木柵)속에 수감되었다.
9월 1일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권군수(權郡守)는 평창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형제는 영월로 가다가 단구역(丹邱驛) 근처에서 적에 잡혀 종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공은 요행이 방면돼 9월 6일 포로 된지 20일 만에 천신만고 끝에 영월에 돌아와 노친(老親)(71세)을 만났다.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이 남아있다. 그리고 공이 피난했던 노리곡 석굴은 그 후 고씨굴(高氏堀)이라 일컫게 되었다.

윤기영(尹基永)

윤기영은 파평 윤씨로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무장리 923번지 간무곡 고려대마을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도의를 숭상하는 가풍 속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했고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한때 어영청에서 군관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실망하여 낙향했으며 이때 인내천(人乃天)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혁명운동인 동학(東學)에 가담하게 되고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켜 원주를 중심으로 영월 평창 제천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는 1907년 11월 19일 강릉 연곡 가평(嘉坪)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장렬히 순국했다. 유해는 가매장했다가 후에 제천으로 운구하여 전국의 병진의 진중장례로 거행되었으며 영월군 수주면 무릉러 명마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일생은 의병장으로서 13년에 걸친 전?후기 의병활동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민족항쟁을 벌인 한민족 정신사적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윤의병장의 호는 무곡(茂谷), 이름은 기영(其永)인데 의병활동 중 신분을 숨기기 위해 돌림자를 바꾸어 기영(其榮?起榮)을 사용했고 1856년(병진)에 태어나 1907년 53세를 일기로 순국한 조선의 병 창의대장이다.
그의 애국사상은 향리에서 인근의 저명한 유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졌으며 침착하고 대범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성품이었고 기골이 장대하여 학식과 지략을 겸비하였다.
이런 기질이 동학사상에 접목되면서 일본군 및 관군에게 항거하는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두 무릎을 부러뜨리는 악형을 당하면서도 의지를 전혀 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도부 및 구성원 명단을 말하지 않았다. 병세 악화로 풀려난 후 원주에 사는 송창관씨9주사)의 도움으로 은신 치료 중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분연히 궐기하여 자발적으로 을미의병을 일으켜 원주를 시발로 하여 춘천 강릉 지평 제천 단양 문경 등 각처에서 활약했으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제 침략에 맞서 거의(擧義)하게 되었다.
윤의병장은 그해 겨울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선생을 중심으로 전국의 의병들이 호좌창의진(湖左倡儀陳)을 결성하자 원주와 영월 주천지역의 의병 약 20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게 된다.
이때 이강년(李康秊)의 병장의 요청으로 함께 부대를 편성하고 호좌의진의 유격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중부지역 일본군 거점인 충주성을 점령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또 조령(鳥嶺)관문의 일본군 무기고 습격, 문경 전투, 수안보 전투, 제천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는 서행장정(西行長征)후에도 계속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독자적으로 소규모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1907년까지 원주를 중심으로 평창 영월 제천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07년 7조약 해결과 함께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다시 정미의병을 거의하고 그해 8월 5일 원주에서 거의한 원주진위대 민긍호 특무정교로부터 소총과 탄약을 제공받아 대규모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원주 평창 영월지역의 기존 의병들과 해산군인 중 일부를 포함, 약 400여명으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8월 5일 평창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일본인을 사살했다. 그 후 8월 13일 원주군 신림면 신목정에서 전국의 40여의병진과 함께 전국연합 의병부대 창설에 합의하고 호좌의진 도창의대장에 이강년, 전군장에 윤기영, 중군장 김상태, 우군장 이중봉, 후군장 신태워, 선봉장 백남균, 독권장 이만원등 각기 독립된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그 후 8월 15일 민긍호 박여성 오경묵 정대무 등이 참여한 약 2천명으로 연합의진을 편성 제천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어 8월 23일 충주전투, 9월 7일 문경 갈평전투 등에 참가하여 많은 수의 일본군을 사살 또는 생포하였다.
특기할 것은 10월 22일 원주 신림면 싸리재 전투에서 민긍호 의병부대와 긴밀한 합동전선을 구축하여 일본군을 크게 궤멸시킨 것이다.
이후 강릉지방으로 이동 11월 19일 연곡 가평전투 중 일본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부상하여 포로로 잡힐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자결하여 장렬히 순국했다.
그의 일생은 민족자존과 일제에 대한 항쟁으로 일관된 구국항쟁이었으므로 무력으로 한민족의 혼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한 민족혼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었다.

김동관(金東觀)

김동관은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서 1859년(철종 10년) 9월에 태어났다.
호는 우산(又山)이다. 의암 유인석에게서 수학하였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일본에 병합되자 유인석 의병대로 유대장을 찾아가서 소모장(召募蔣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맡은 장수)이 되어 병력 충원에 공을 세웠고 영월, 평창, 정선, 원주 등지에서 왜 병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왜병과 관군이 증강되고 일제 통치가 강화되자 유대장과 같이 만주로 건너가 활약했다.
이때 유인석 대장 밑에서 이강년 장군 등과 같이 활동을 하다가 1917년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나가지 못하였으나 일제의 압정이 계속되자 “지금 팔도는 도시 볼 것이 없고 머리는 있으되 관례 때의 삼가의 의식은 어찌 할고.”라는 시를 지어 민족의 불운을 통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요시찰인이란 낙인이 찍혀 일제의 감시 속에 불우한 생활을 하다가 1920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의병으로서의 활동상은 의암집 316면에 유인석과 서신을 왕래한 기록이 있으므로 입증되고 있다. 그는 문장이 출중하여 당시 이름이 높았으며 <우산문집>(又山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김상태(金尙台)

김상태는 삼척 김씨로 1894년 지금의 단양시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고 호는 백우(白愚)라 하였으며 하동면 옥동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문경출신 이강년(李康秊) 의병장과 손을 잡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이강년과 의형제를 맺고 중군장을 삼아 나가 싸우게 하니 도처에서 일군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강년과 같이 영서에서 이름을 날리던 유인석(柳麟錫) 대장의 휘하로 들어가 합세하여 도처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정세가 불리하여 유인석 대장과 함께 만주에도 갔다 온 것으로 추측된다. 1911년 당시 경북 영주 수비대장 일본군 대위 종편겸(宗片謙)이 보관하고 있던 일본군 기록을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자료는 일본 고오베에 살고 있던 종편겸 대위의 아들이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때는 김선생님이나 자기 아버지나 서로 나라를 위한다는 입장이었겠으나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한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김선생님의 유족을 찾을 수 있다면 빨리 돌려주고 싶다면서 고오베 한국 총영사관에 들고 온 자료이다.
수인복에 수갑을 찬 채로 가부좌한 모습이 전신상 사진과 가로 3cm, 세로 4cm의 십자가가 있었으며 1911년 명치 44년에 쓴 체포전말서와 거괴 김상태지약전(巨魁 金尙台之略傳)이란 기록들이었다. 40페이지에 달하는 체포 전말보고서에 의하면 경상, 충청, 강원의 3개도에 걸쳐 산악지방을 근거로 신출귀몰 교묘하게 추적 망을 벗어 나온 적도의 수령 김상태를 6개월여에 걸친 추적 끝에 한국인 밀정의 결정적인 제보로 6월 14일 경북 풍기면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중턱에서 체포하였다고 한다. 또 이 조서에는 김장군은 이강년, 민긍호와 함께 셋이 거의(擧義)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민긍호 의병장(원주 진위대가 해산될 때 의병에 가담한 의병장)과도 함께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은 1908년 모두 사로잡혀 처형됐으므로 이후 3년간은 수천 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저항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체포되었을 때의 그가 이끈 부대의 구성원이 9백 명, 총은 700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또 물음에 대하여 안동의 서벽리 전투와 풍기의 죽령전투를 비롯하여 41호의 전투를 들었는데 , 이들 3개 전투는 일본군이 수백 명씩 희생된 전투로서 한국의 병사 상 빛나는 전공이었다. 그는 “너는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나쁜 놈들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거괴 김상태 약전“에 의하면 키는 6척, 골격은 크며 태도는 호걸풍이며 얼굴은 검붉고 눈은 보통 크기이나 안광은 사람을 쏘는 듯하다. 고 하였다.

한학을 수학하고 향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1904년 동학당이 각도에서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여 일부장이 되어 관병에 대항하다가 동학란이 평정되자 향교로 돌아와 학문을 가르쳤다. 1906년 이강년 등과 일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삼도에 걸쳐 일본 관현에 저항하여 더욱 그 세력이 커졌다. 이에 각 관헌은 협력하여 이의 검거에 노력하였으나 신출귀몰하여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영주수비대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 감옥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향년 50세였다. 이상은 일본군 수비대의 기록이다.

이 고장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김장군의 의연한 자세와 굴할 줄 모르는 기개에 감옥 사람들도 감탄하여 오히려 존경하였다고 하여 그 시체를 고향으로 옮길때는 특별히 호송하였는데 대구에서 제천까지 연도의 조객군중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3·1절을 기하여 김장군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여 그 장한 공적을 빛나게 하였으며 순의사(殉義祠)를 지어 그 영령을 봉안 하였다.

정대억(丁大億)

정대억은 야은공(野隱公)의 14대손이다.
남다른 용기와 장부다운 기질, 뜻이 서고 야망이 있는 분이었다. 그는 구한말 의병운동에 항상 앞장섰으며 또 그가 순국하던 1908년경에는 영월을 중심으로 왜적과 혈투하여 큰 공훈을 세운 용감한 항일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조선 말엽 나라 정세가 극히 어지러운 틈을 타서 제국주의 일본은 강압적 침략근성을 드러내 마침내 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이완용 내각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우리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국의 분노만 사게 되어 결국 퇴위의 슬픔에 이르게 되었다.
정미조약과 함께 1907년 8월 1일에는 조선의 군대 해산식이 훈련원에 거행되었다. 이때 서소문안의 병영에 있던 시위보병 제1대대 대대장 박성환(朴性煥)이 자살로서 무언의 명령을 내리자, 마침애 해산당한 경향(京鄕)의 군인들은 의병과 합류하여 무력항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 영향은 점차로 전국에 확대되어 자주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영월에 까지 파급되어 의사(義士) 정대억을 중심으로 거의하였다. 정대억은 의병대장 이강년과 함께 모의하여 여러곳을 다니면서 특히 주천면 관운리의 왜병과의 싸움에서 왜병 36명을 찔러 죽였고 충주 가흥에서 역시 왜병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이강년 대장 및 설창해와 연합하여 영월읍에서 30여명의 왜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왜군의 거센 저항에 못이겨 각기 흩어졌다가 정대억은 제천 송학원 입석리 백평에서 1908년 1우러 15일 왜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정대억은 왜군에게 의병대장이라고 대답한 후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아 왜군 6~7명을 부상시키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1908년 6월 3일 다시 포로가 되어 영월로 연행되었다.
6월 10일 왜놈들은 그의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죽이니 그 잔인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당시 한겨레이면서 한 고장 사람으로서 이 잔인무도한 참상현장을 목격한 자 어찌 눈물뿐이었으랴. 뼈 속에 사무치는 원한의 적개심은 이 고장 역사에 영원히 아로 새겨져있을 것이다.

장기영(張基永)

1943년 봄 구미위원부는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한미공동전투 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를 비롯한 재미한국청년들을 미국방성 전략정보처(OSS)에 추천하여 정보·통신 등 특수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동안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8년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49∼1952년까지 체신부장관, 아시아반공대회 한국대표(1956∼1960),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사장(1957∼1960), 서울특별시장(1960) 등을 지냈다.
그뒤 정당활동에 정열을 쏟아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 1971년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를 지냈다.
저서는 《우익정당의 단합론》·《우익정당의 갈 길》이 있다.
1977년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심명보(沈明輔)

1935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태어나 주천 중학교와 주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주천농고 재학시절 주위에서 수재라는 얘기를 들었으며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졸업 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지방부장, 주월특파원, 종합편집부장, 일간스포츠레저부장, 한국일보 체육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에 올랐다.
특히 월남전이 한창일 때 주월특파원으로 활약하다가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후일 신군부(新軍部) 등장과 함께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1987년 한국일보 편집국장 재직 때 10 · 26사태 후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측으로부터 정계진출 권유를 받고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81년 3월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영월 · 평창 · 정선지구에 민정당 공천후보로 출마 당선되었으며 곧 민주정의당 원내부총무에 기용되어 중앙정치무대의 발판을 넓혔다. 이어 1985년 2월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5만6,932표를 얻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재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제12대국회 재임 중에는 2년3개월이라는 최장수 대변인(민정당)을 맡아 언론인 출신다운 탁월한 언로(言路)를 활용하여 야당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88년 소선거구제로 바뀌어 치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영월, 평창 선거구에서 무난히 당선되어 3선의원으로서 국회내에서 중진으로 성장했다.
그는 1992년 제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종찬후보를 지지, 선거본부장을 맡아 민정계 8인방으로 활약했다. 그는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민정당총재 비서실장, 중앙집행위원,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권력의 핵심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정치인으로 성장, 지역개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현안사업은 영월읍중앙시장 배수펌프장, 영월읍 철도이설사업, 평창지역 농공단지 유치, 평창~정선 간 비행지 재멧둔재터널 완공, 영월전문대학(현 세경대학 전신)유치 등 지역주민의 숙원을 해결하는 열정을 보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되어 4선 의원으로서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활약 중 그해 가을 지병을 얻어 2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4년 5월 타계했다.
그의 일생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경동기에 의정활동을 폈으며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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