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遇宗師의 陞座說法이어든 切不得於法에 作懸堐想하야
약우종사 승좌설법 절부득어법 작현애상
生退屈心하며 或作慣聞想하야 生容易心하고 當須虛懷聞之하면
생퇴굴심 혹작관문상 생용이심 당수허회문지
必有機發之時하리니 不得隨學語者하야 但取口辦이어다.
필유기발지시 부득수학어자 단취구판
所謂蛇飮水하면 成毒하고 牛飮水하면 成乳인달하야
소위사음수 성독 우음수 성유
智學은 成菩提하고 愚學은 成生死가 是也니라.
지학 성보리 우학 성생사 시야
又不得於主法人에 生輕薄想이니 因之於道에 有障하야
우부득어주법인 생경박상 인지어도 유장
不能進修하리니 切須愼之어다.
불능진수 절수신지
論에 云如人이 夜行에 罪人이 執炬當路어든 若以人惡故로
론 운여인 야행 죄인 집거당로 약이인악고
不受光明하면 墮坑落塹去矣라하시니 聞法之次에
불수광명 타갱락참거의 문법지차
如履薄氷하야 必須側耳目而聽玄音하며 肅情塵而賞幽致라가
여리박빙 필수측이목이청현음 숙정진이상유치
下堂後에 黙坐觀之호대 如有所疑어든 博問先覺하야 夕惕朝詢하야
하당후 묵좌관지 여유소의 박문선각 석철조순
不濫絲髮이어다.
불람사발
如是라야 乃可能生正信하야 以道爲懷者歟인저
여시 내가능생정신 이도위회자여
반갑습니다. 2007년 2월 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계초심학인문
若遇宗師(야우종사)의 陞座說法(승좌설법)이어든 하는 대목부터 할 차례입니다.
여기는 청법에 관한 주의사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총림에서 법을 설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자주 있지는 안 해요.
대게 상당법문은 결제날, 반결제날 그리고 해제날 한철에 3번 있죠,
결제를 하면서부터 3번 있고 그다음에 다음 결제때 3번 있고 그래서 1년에 6회가 정식 법회일인데 근래는 뭐 법회 하는 일이 아주 자주 있죠.
어느 사찰이던지 법회일을 만들어서 법회를 많이 합니다.
또 승방에서도 한철에 3번하는 그런 정기법회일 말고 승방을 잘 운영하는 방장스님, 조실스님 이시라면 반드시 소참법문을 평소에 해야 됩니다
중국 옛날 총림에서도 교수사라고 하는 소임자가 있어서 교수사는 경전과 어록을 아주 해박하게 아시는 분이 그 소임을 맡아서 대중들을 위해서 평소에 경전강의도 하고 어록도 강의를 하고 그렇게 하죠.
우리나라에서도 승방중심으로 운영되는 사찰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안목을 갖추신 그런 방장이나 조실이 계시고 또 그 방장이나 조실이 제자들을 또는 대중들을 잘 가르켜야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의지가 있는 분들이라 면은 반드시 정기적인 상당법어외 소참법문을 자주해야 됩니다.
성철스님도 방장을 맡아서 100일 법문이라고 하는 것을 했습니다.
100일 이라 면은 상당한 날짜거든요. 결제중에 100일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날짜입니다.
그것이 해인사에서 1번 있었던 것이 아니고 본래 해인사에서 방장으로 100일 법문을 하시기 전에 김룡사 라고 하는 사찰에 계셨는데 문경 김룡사에서도 100법문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해인사에서 하신 것이 두 번째입니다.
명안종사가 방장을 맡고 조실을 맡아 있다면 반드시 소참법문 통해서 대중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사실 상당법어라고 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그런 교훈적인 그런 말씀을 할 그런 게제가 아니거든요.
상당법어는 그야말로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든지 법거량을 하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냥 당신이 깨달으신 법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노출시켜서 대중들에게 그야말로 화두를 던지듯이 그렇게 일방통행씩 그런 법어를 내리는 것이 상당법어에요.
보통 그런 위치라든지, 부처님에 대한 역사라든지, 경전의 전반적인 그런 내용이라든지, 이런 것 들을 소상하게 아시는 대로 대중들에게 가르칠 그런 기회는 사실 소참법문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임제록에서는 소위 시중이라고 하는 내용이 거기에 해당 되거든요.
시중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상당법어 하고 다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참법어가 시중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평소에 가르쳐야 됩니다.
워낙 우리 불교는 경전과 어록이 많기 때문에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 아는, 눈 밝은 종사가 그런 것들을 대중들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가르쳐야 됩니다.
근래에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들이 평소에 대중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좀 소홀히 하는 그런 감이 없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달라집니다.
뭐 사람 잘 안달라진다고 하지만은 그래도 배우려고 스스로 발심을 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때문에 배울 준비가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어요.
그렇게 잘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치면은 아주 잘 먹혀듭니다. 영향이 아주 크죠.
그래서 사람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교육을 반드시 해야 되는데 승방에 그런 것이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냥 뭐 한철동안 아무 지도 없이 가르침도 없이 그냥 좌선시간만으로 한철을 때우거든요
3개월이라는 시간이 상당히 길고 긴 시간인데 정말 소중한 시간이고 그런데 아무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이 그냥 묵묵히 앉아 좌선하는 것만으로 한철을 보낸다고 하는 것은 참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철이라고 하는 시간이 정말 화두일념으로 잘 정진이 된다. 면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만은 뭐 해봐서 아는 일이고 다 짐작해 본 일입니다 만은 그렇게 일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기도를 하나 경전을 읽으나 화두를 드나 그게 일사분란하게 1시간 딱 정진하면 1시간동안 잡념 없이 화두가 아주 쭉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일이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많은 정보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산란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사람들은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대신에 단순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일념이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좋든 싫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우리가 접하면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이라고 하는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옛날사람이 비해서 그러기 때문에 그 많은 지식과 정보가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일념이 되기란 참 어려운 거예요. 정신일도가 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일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전이나 오후에나 1시간정도씩 승방에서는 꼭 경전이나 어록을 가지고 가르침을 펴고 그 나머지 시간 그 가르침에 의해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야 효과적인 화두참선이 될 수가 있고 또 경전이나 어록공부도 상당히 효과적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100법문이외 그 다음해 철에도 보면은 영가 증도가라든지 신심명이라든지 또 저가 승방에 있을 때만 해도 육조단경을 가지고 한철을 강의를 하셨다던지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전강스님이라고 인천 용화사에서 오랫동안 선지식으로 계셨는데 그 스님은 새벽에 예불하고 나서 수좌들에게 화두참선법에 대해서 일러주는 아주 간절한 법문은 정말 감동적이죠.
3시에 일어나서 예불 간단히 하고 쉰 새벽에 법당에 차가운 법당에 앉아서 선지식의 간절한 법문을 듣는 다고 하는 것은 이건 참 값진 시간이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전강스님도 결제 중에는 항상 매일 아침 예불 끝에 한 20~30분 짧고 간단하게 그렇게 가르침을 꼭 펴셨습니다. 그런 어떤 선지식이나 그런 승방 분위기가 참 그립고 아쉬운 그런 때입니다.
보조스님께서 송광사에서 결사를 하시면서 초심납자에게 일러준 수행규칙 총림의 어떤 생활규범을 말씀하시면서 청법 법을 듣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필요한 꼭 필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若遇宗師(약우종사)의 陞座說法(승좌설법)이어든
만약 종사가 법좌에 올라가서 설법하는 기회를 만나거든 그렇게 했어요.
이 말만 보더라도 그렇게 큰스님께서 법문하시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참 귀한 일이거든요.
切不得於法(절부득어법)에
간절히 법에 대해서, 종사가 설법하시는 그 법에 대해서
作懸堐想(작현애상)하야 生退屈心(생퇴굴심)하라 그랬어요.
현애상을 지어서 퇴굴심을 내지 말라 이런 말입니다.
懸堐想현애상이라고 하는 것은 법문을 이렇게 들으면 요즘 신도님들도 마찬가지고 스님들도 마찬가지고 또 인터넷을 통해서 이렇게 방송강의를 하는 이일에 대해서도 똑 같습니다. 경우는 요.
이렇게 들어보고 익숙하지 않고 대단히 아주 생소한 말씀으로 들리는 분 들고 상당히 많을 거예요.
그러면은 아이고 불교는 어렵다 저렇게 어려운 표현과 저렇게 어려운 이치를 이야기해서 우리가 어떻게 아나 에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그만 나갈란다. 또 안들을 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懸堐想(현애상)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산이나 어떤 높은 벼랑을 두고 그것을 타고 올라간다든지 넘어가야 할 그런 고개나 산이라 면은 이렇게 쳐다만 보고 벌써 높다.
저 높은 봉우리를 내가 어떻게 올라가나 저 높은 재를 저 높은 산을 내가 어떻게 올라가겠는가?
이렇게 올라 가보지도 않고 지래 겁을 먹고는 물러서 버리는 그런 마음 상태를 여기서 경계하는 것이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건마는 괜히 지래 겁을 먹고 산만 높다고 한다고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있듯이
법문을 듣는데 제가 비록 대승찬이라든지 신심명이라든지 또 증도가라든지 등등 좀 차원 높은 말씀을 했다 손치더라도 열 마디 중에 아홉마다를 못 알아듣고 한마디만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그게 어디입니까
그렇지만 못 알아듣는 아홉마다가 차츰차츰 줄어들어요.
그래서 이제 두 마디를 알아듣게 되고 세 마디를 알아듣게 되고 그렇습니다.
저가 경전을 본다든지 어록을 봐도 본다고 다 아는 것 아니에요 아닌 것만 아는 거죠
경전 한 장에 한 줄만 알아도 어디 입니까?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 참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그분들의 가르침을 한 장 경전 한 장이나 아니 한권이라고 쳐도 좋습니다.
한권을 다 읽고 그 가운데 한 구절만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그 얼마나 귀중하고 보배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평소에....
그래 생각하고 몰라도 그냥 읽고 넘어갑니다.
몰라도 그냥 읽고 넘어가고 또 이제 곱씹어보고 알 듯 알 듯 하는 것은 또 한번 곱 씹어보고 또 곱씹어보고 그러다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거죠.
그렇게 해야지 불교의 가르침이라든지 경전의 말씀에 대해서 아이고 어렵다 저렇게 수준 높고 어려운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그렇게 해서 退屈心(태굴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에 막 들어와서 수행하려고 처음 발심한 사미들에게 일러주는 말로써 꼭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或作慣聞想(혹작관문상)하야 生容易心(생용이심)하라
관문상 혹은 관문상을 지어서 용이한 마음을 내지 말라
아니 불자를 그렇게 두 번 해석해요. 切不得於法(절부득어법)에 하는 부자요
관문상이라고 하는 것은 에이 늘 듣던 소리 익숙하게 들어왔다고 하는 그런 생각
아이고, 또 소리 또 그 소리 어디가도 그 소리 무슨 뭐 A라고 하는 절에서 듣던 소리가 B라고 하는 절에서 또 하고 갑이라고 하는 스님이 하던 설법 을이라고 하는 스님이 또 하고 늘 뭐 그 소리가 그 소리고 같은 소리 같은 소리 수없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거야 그 까짓것 들을 것도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두 가지 병을 참 아주 지적을 잘해놓았습니다. 그것도 병이라는 것입니다
늘 듣던 소리 무비스님 법문 늘 하는 소리 아니야 인불사상 누가 모르나 이렇게 이제 익숙하게 들어왔다고 하는 마음으로 용이하다는 마음을 내는 거죠. 그렇게 하지 말라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當須虛懷聞之(당수허회문지)하면
虛(허)자에요 빌 허(虛)자 그런데 오자가 되었죠. 虛懷聞之(허회문지)하면 마땅히, 모름지기, 마땅히 라고 하나만 쓰도 좋고, 모름지기 수자 하나만 쓰도 좋은데 마땅히 모름지기 강조하는 것이죠.
虛懷聞之(허회문지) 마음을 비워서 법문을 들을 것 같으면 이런 말입니다.
어떤 마음도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자기가 뭐 어렵다는 생각도 쉽다는 생각도 다 비워버리고 그저 텅빈 마음이 되어서 그것을 가만히 이렇게 유심히 들어볼 것 같으면
必有機發之時(필유기발지시)하리라
반드시 기가 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기는 뭐라고 꼭 집어서 우리말로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뭐라고 할까요? 전기로 말하자면 어떤 기계의 스위치라고나 할까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 스위치를 올리므로 해서 기계가 전부 작동이 되죠. 그게 스위치는 간단하지만은 뭐 불을 켜는 것도 그렇잖습니까. 전기 스위치 딱 올리면 방이 환하게 밝아지죠.
또 큰 기계도 큰 아파트만한 큰 기계도 사람이 간단한 스위치 하나 짝 이렇게 올리면 그냥 그 큰 기계가 돌아가고 자동차도 키를 이렇게 딱 돌리면 그냥 자동차도 시동이 걸리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우리 마음의 세계도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다단합니까.
그런데 거기에도 어떤 자동차의 키와 같고 어떤 기계의 스위치와 같은 그런 중심 되는 그런 마음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라고 그래요
여기는 이제 기틀 기(機) 그러는데 기틀, 기틀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그 기틀이 발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이거에요
예를 들어서 방에 캄캄한 방 스위치라 면은 스위치 딱 이렇게 켜면 그게 기발지시거든요
그럼 방이 환하듯이 우리마음에 스위치가 딱 켜지면 그냥 지혜의 광명이 환하게 펼쳐진다 하는 것입니다.
그 스위치 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가?
종사 설법하는 사람이 그것을 내리는데 그것이 내 마음 하고 나에게 준비된 마음하고 설법하는 종사의 가르침하고 딱 맞아 떨어질 때 된다는 거죠.
그건 비록 종사가 설법을 하는 경우가 아니고 혼자 경을 보든지 어록을 보든지 또 이렇게 방송 듣던지 혼자 독서를 하던지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이 나무 팔러 갔다가 불교고 뭐 스님이고 부처님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나무 팔러 갔다가 금강경 읽는 구절 한 구절 딱 듣고는 그만 기발 기가 발했거든요 그게 기발입니다.
기가 발했다. 기틀이 발했다 스위치 짝 올라가니까 마음에 지혜의 등불이 환하게 켜졌다 하는 이렇게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을 보던지 읽던지 아니면 법문을 듣던지 이런 시간을 통해서 강의를 듣던지 어떤 기회가 되었던지 간에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이렇게 정성스럽게 마음을 가다 넘어서 들을 것 같으면 그렇게 마음의 등불이 확 켜지는 그런 때가 있다 하는 것이죠.
얼마나 참 신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좋은 일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때가 일을 것이니 不得隨學語者(부득수학어자) 하야 但取口辦( 단취구판)이어다.
隨學語者(수학어자) 말 배우는 사람을 따라서
말 배우는 隨學語者(수학어자) 學語(학어) 말 배우는 사람을 따라서 다만 입으로 판단함을 취하지 말지어다. 그랬습니다.
외우고 읽히고 또 그 표현이 교묘하다고 그것을 자꾸 이제 외우고 읽혀가지고서 말만 그렇게 흉내 내는 거죠.
어떤 경우 보면 큰스님 밑에 제자로 있는 사람들이 음성이라든지 법문하는 거라든지 염불하는 거라든지 이런 것이 거의 그 스님하고 똑같이 그렇게 흉내 내서 어느 수에 닮아져서 그런 거죠. 흉내 내서 라기보다는 닮아져가지고 분간을 밖에서 들으면 분간을 못 할 정도로 그렇게 유사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뭐 누구라고 지적은 안하겠습니다. 만은 그런 스님들이 있어요.
그게 이제 말 배운 말만 이제 배우는 거죠 그래서 입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고 마음의 어떤 지혜의 소견이 열리고 그래야 되는데...
큰스님 이렇게 이렇게 말하면은 그것이 아주 근사하게 들리면 그걸 그대로 배우고 본받아가지고 그만 말만 배우는 거죠. 그렇게 해서는 법문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배워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죠.
所謂蛇飮水(소위사음수)하면 成毒(성독)하고 牛飮水(우음수)하면 成乳(성유)인달하야
참 좋은 비유죠.
소위 이른바 이건 과거에도 이런 말을 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소위 蛇飮水(사음수)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참 그렇죠.
똑같은 물인데 뱀은 그물을 마시면은 독이 되어서 사람을 물어죽이기도 하고요. 소는 그물을 마시면은 우유가 되어서 사람에게 영양공급을 하는 그런 일이 되지 않느냐.
같은 토양에서도 아카시아나무를 심어놓으면 아카시아 꽃이 피고 감나무를 심어놓으면 감이 열리도록 되어있지 않습니까?
내 자신이 어떤 자세로서 법문을 듣고 불교를 공부하느냐에 따라서 그저 앵무새처럼 말만 잘 지껄이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정말 마음을 환하게 밝혀가지고서 만인의 사표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여기서는 좋은 비유로써 잘 아주 말씀하고 계시죠.
智學(지학)은 成菩提(성보리)하고 愚學(우학)은 成生死(성생사)가 是也(시야)니라.
지혜로운 공부는 보리를 이루고 깨달음이죠. 도를 이루고
지혜로운 공부는 인생의 도를 이루고
어리석은 공부는 어리석을 우(愚)자데 만날 우(遇)자로 교재가 조금 잘못되어 있네요.
어리석은 공부는 생사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생사 죽고 사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보리고 도고 불도인데
오히려 그 생사 속으로 더 빠져드는 수가 생긴다 이거에요. 그게 어리석은 공부죠
지혜로운 공부와 어리석은 공부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비록 처음 출가해서 발심한 그런 초심학인을 두고 하는 가르침이기는 하지만은 우리불자들에게 영원히 귀감이 될만한 그런 가르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又不得於主法人(우부득어주법인)에 生輕薄想(생경박상)이니
법을 주관하는 사람 법문하는 사람입니다.
뭐 여기서는 제가 하니까 저라고 봐도 좋고요, 어느 사찰에 법문하는 스님이라고 봐도 좋고 경을 강의하는 스님이라고 봐도 좋고 라디오에서나 TV에서 법문하는 사람이나 그 누구라도 좋습니다.
법문을 주관은 법을 주관하는 사람에게 경박상을 내지 말지니
가볍고 가볍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
아이고, 무비스님 하면은 아이 무비스님 뭐 요즘 아파가지고 지몸도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데 뭐 법문 오직 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봐가지고 법문까지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안 듣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알아 누구지 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허허~
이건 이제 지금 염화실에서 지금 내가 이 방송을 통해서 드리는 말씀이고....
어느 사찰에 뭐 1년, 2년 3년, 4년 내지 10년 이렇게 꾸준히 다니게 되면 그 주지스님이라든지 거기에 법문하는 스님이라든지 이런 스님들의 온갖 내막들을 환히 알아가지고
아이고, 우리 주지스님 뭐 그냥 살림이나 살지 뭐 공부한 게 있다고 이런 씩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결국 누가 손해겠습니까
비록 사람이 뭐 온전치 않다 하더라도 법문하는 법문의 내용은 그렇지 않을 것 아닐 것 아니겠어요
법문이 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유를 달수가 있고 시정을 할 수가 있고 거기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다 주법인 법을 주관하는 사람에 대해서 가벼운 생각을 낸다 면은
그 자리에 아예 안 가서야죠 가서 앉아놓고는 그런 소리 한다든지 그 절에 다니면서 그런 소리 한다든지 그런 생각을 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因之於道(인지어도)에
그것을 인해가지고서 우리 인생길을 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다
장애가 있죠. 누가 손해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것 정말 생각해야 되요.
법문하는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건 그 사람 몫이에요 그건 그 사람 몫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듣는 사람 몫이에요
뭐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승방이나 뭐 정말 지금도 훌륭한 배움의 장이 있다면 찾아가서 들을 마음이 있습니다.
걸망을 지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여기 저기 선지식 찾아 헤매고 큰스님들의 강의가 있다고만 하면 그저 찾아다니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법문을 설하고 강의를 하신분의 인간적인 그런 내면들을 모를 리가 없죠. 다 들어서 알고 보아서 알고 느껴서 알고 그렇지만은 법문은 또 다른 문제잖습니까
사람을 생각해서 법문을 우리가 들으려고 하지 않는 다면은 이건 참 큰 착각입니다 잘못된 거죠.
有障(유장)하야 不能進修(불능진수)하리니 切須愼之(절수신지)어다.
不能進修(불능진수)하리니
장애가 있어가지고서 그것으로 통해서 우리가 도를 닦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어서 능히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切須愼之(절수신지)어다
간절히 모름지기 삼가하고 삼갈 할지어다.
정말 삼가야 할 일이죠.
여기 좋은 예를 들었습니다.
論(론)에 云如人(운여인) 이 夜行(야행)에 罪人(죄인)이 執炬當路(집거당로)어든
평소에 나쁜 사람 죄지은 사람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동네사람에서 소문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마침 횃불을 들고 길을 간다 이거야 그런데 나는 그 횃불을 빌어서 같이 길을 가야 돼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까 동네에서 별로 소문이 좋게 나자 않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해서
若以人惡故(약이인악고)로
만약에 그 사람이 악한 까닭으로
不受光明(불수광명)
불수광명 그 사람이 들고 가는 불빛마저 받지 않이 한다면은
墮坑落塹去矣(타갱락참거의)라
구형에 떨어지고 저 구렁위에 떨어진다 말이죠. 그 어디로 덜어 설지 모른다는 거죠
돌을 차고 가다가 그만 발을 다칠 수도 있는 것이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깜깜한 길에 나무에 부딪칠 수도 있는 것이고 뭐 어떤 불행이 닫칠지 모르는 그런 일이죠.
그렇습니다. 광명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취할 것은 빛이지 사람이 아니라 이알이죠.
우리가 취할 것은 법을 설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삶을 통해서 나오는 법문이다 이거야
이런 소리해도 사람이 온전해야 뭐 법문을 들을 마음이 나지 사람이 온전하지 않는데 법문 무슨 법문 들을 마음이 나냐고 이런 생각이 곧잘 할 것 입니다. 그 생각 비워야 되요
온전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들을 것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들을 것이 있고요 뭐 온갖 시장의 잡다한 소리 속에서도 깨달을 것이 있고 들을 것이 있는데 하물면 법문을 한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사람생각해서 법문을 안 들으면 자기만 손해지 뭐
聞法之次(문법지차)에 如履薄氷(여리박빙)하야
법문을 듣는 그때에
如履薄氷(여리박빙)
마치 얇은 얼음을 밝는 듯이 그렇게 조심조심 얇은 얼음을 밝고 강을 건너가야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만은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길을 가다보면 그런 겨울에는 그런 사례들이 아주 많아요. 건너기는 건너야 되는데 얼음이 얼어있다는 거야 얼음이 마침 두껍게 얼지 못하고 박빙이라 그래서 그 얇은 얼음을 밝고 건너가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 떨리겠습니까? 힘 조금만 주면 푹 꺼져 버리고 물속으로 빠져 들 텐데 그런 상황에서처럼
必須側耳目而聽玄音(필수측이목이청현음)하며
반드시 모름지기 이목을 기울여서 必須(필수) 여러 번 강조하는 그런 말들이 참 여기 많이 나오죠.
단수 이런 말들, 절수 간절히 모름지기 삼가할지어다
마땅히 모름지기 생각을 비워서 들을 것 같으면 이런 말이라든지
여기도 이제 必須(필수) 반드시 모름지기 耳目(이목)을 귀와 눈을 기울여서 눈이 빠지게 듣고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정말 귀를 기울여서 玄音(현음) 아주 깊고 오묘한 이치를 들을 것 같으면 들으며
肅情塵而賞幽致(숙정진이상유치)라가
정진을 엄숙히 해서 정진은 우리의 마음에 의한 정에 의한 먼지들이죠. 그것을 깨끗이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정의 티끌이죠.
말하자면은 먼지가 많이 잃었다 그럴 때 가만히 있어면은 먼지가 가만히 있으면 먼지가 싹 가라않죠
마당에서 빗질을 했을 때 빗질을 하면 먼지가 확 이렇게 뜹니다. 뜨지만은 조금 있으면 먼지가 땅에 싹 가라앉거든요 우리의 마음도 법문을 듣기 전에 이것저것 생각하고 과거생각 미래생각 온갖 사람 이런 것을 생각하는 그런 순간은 우리의 마음의 먼지가 막 요동치고 들뜨있습니다.
법문 하기 전에 선정에 드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요
우리 입정합시다. 한다든지 아니면 법문하기 전에 반드시 짧은 시간이지만 입정을 하지 않습니까.
입정하는 것이 바로 그런 들뜨있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정진을 가라앉혀서 肅(숙)자는 엄숙히 한다는 숙자지만은 가라앉힌다는 그런 뜻입니다.
마음의 먼지들을 가만히 가라앉혀서 그런 말이죠.
賞幽致(상유치)라가
유치를 그윽한 이치를 맛보다가 맛본다고 이제 맛볼 상자입니다만 감상을 한다. 느낀다.
깊이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下堂後(하당후)에 黙坐觀之(묵좌관지)호대
당에서 내려온 후에 법문을 하는 그런 장소에서 내려온 후에
黙坐觀之(묵좌관지) 이건 사실은 하당이라고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당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법문하시는 분이 당에서 내려온 뒤에 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묵묵히 앉아서 그것을 관찰한다.
오늘법문이 어떤 내용이었는가. 어떤 말씀이었는가. 메모해서 적을 것은 반드시 적고요 또 한번 다시 생각할 것은 생각을 하고요
黙坐觀之(묵좌관지)입니다 묵묵히 앉아서 관한다.
우리가 강의를 할 때나 법문을 할 때 잠깐 입정에 드는데 사실은 법문을 마치고 나서 잠깐 입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는 그런 게 있어요. 법문 끝나고 나서 정에 들었어요.
저기 법화경에 보면 은 무량이경 처음에 무량이경을 설하시고 그다음에 선정에 들었어요. 부처님이
그러고 나서 선정에서 깨어나신 후 그다음에 법화경을 설하시고 이렇게 이제 되어있습니다.
법문을 하기 전에도 우리가 입정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참 필요한 일이고 또 법문을 듣고 나서 또 입정을 해가지고 그날 들은 법문을 마음속에서 가만히 정리해보고 또 대내여 보고 곱씹어보고 취할 것은 취하고 메모할 것은 메모하고 하는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법문 듣자마자 후다닥 일어나가지고 뭐 사람만나고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신 찾는다고 정신없고 빨리 집에 갈려고 정신없고 그러면 조금 그나마 들어놓은 법문이 다 흘려버리죠 뭐 가다가 일어나면서 다 흘려버리는 그런 상황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듣고 나서 사실은 입정이 더 필요할지 모릅니다.
경전에 그런 예가 있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下堂後(하당후)에 黙坐觀之(묵좌관지)호대
당에 내려온 후에 묵묵히 앉아서 그것을 관하되
如有所疑(여유소의)어든
만약 의심되는 봐가 있거든
博問先覺(박문선각)하야
산각자에게 널리 물어라. 이거야
오늘 법사스님이 이러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선배님 이건 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게 어떤 뜻입니까 하고 선각자에게 반드시 물어라 이말 입니다. 이것 필요하죠.
밑에 사람에게 묻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거든요. 묻는 일같이 참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는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누가 물어는 것 답해주길 제일 좋아해요
그러기 때문에 물어면은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夕惕朝詢(석철조순)하야
두려워할 惕(척)자인데 저녁에는 조심하고 아침에 그것을 물어서
예를 들어서 저녁에는 그것을 곰곰이 자면서 생각을 해가지고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그것 또 묻는다.
이런 말입니다.
不濫絲髮(불람사발)이어다.
일상생활에 어린 사미들을 두고 경책하는 말이니까
항상 법사로부터 종사로부터 큰스님으로부터 배운 것에 대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그런 주의사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래서 이제 저녁에 잘 때도 마음에 간직하는 그런 자세가 척자에요
두려워할 척 惕자,
저녁에는 간직을 했다가 아침에는 물어서
不濫絲髮(불람사발)이어다
털끝만치라도 흘려버리지 말라 넘쳐서 흘려버리지 말라
람자는 이제 그릇에 물이 넘치면은 그 한 방울이라도 넘치면은 땅에 스며들고 없죠.
털끝만치라도 법문들은 것을 흘려서 넘치고 빠뜨려버리지 말라
如是(여시)라야
이와 같이 해야 이런 자세가 되어야
乃可能生正信(내가능생정신)하야 以道爲懷者歟(이도위회자여)인저
이에 가히 능히 바른 믿음을 내어서 도로써 생각을 삼는 자 라고 할 수 있을 것 인즉 도로써 생각을 도 닦는 일로써 도를 깨닫는 일로써 인생의 진실한 삶의 길이 인생으로써 참으로 보람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늘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불교를 만나고 불교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뭐라도 한마디라도 못 듣던 소리를 듣고 거기에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내 인생에 정말 바른길을 갈 수 있는 지혜의 가르침으로 삶아야 그게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를 믿는 보람이 있고 이익이 있는 것이 않겠습니까?
이건 출가를 한사람에게나 재가를 하고 있는 청신사 청신녀나 누구를 막론하고 이러한 법을 공부하는 자세는 정말 바람직한 것이 아니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계초심학인문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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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정리 : 자혜성】
첫댓글 감사 합니다._()()()_
만약 종사가 법좌에 올라가서 설법하는 기회를 만나거든 간절히 법에 대해서 현애상을 지어서 퇴굴심을 내지 말라(법문이 어렵다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마음 상태를 경계하는 것).혹은 관문상(늘 익숙하게 들어왔다는 생각)을 지어서 용이하다는 마음을 내지 말라.마땅히 모름지기 마음을 비워서 법문을 들을것 같으면 반드시 기(지혜의 등불이 켜지는 것)가 發할때가 있을 것이다.말 배우는 사람을 따라서 다만 입으로 판단함을 취하지 말지니라.이른바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지혜로운 공부는 인생의 道를 이루고 어리석은 공부는 생사를 이룬다.또 법을 주관하는 사람(법문하는 사람)에게
가볍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그것으로 인해서 인생길을 가는데 장애가 되어 능히 나아가지 못할지니 간절히 모름지기 삼가하고 삼가할 지니라.논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밤길을 가는데 있어서 횃불을 들고 가는 그 사람이 악한 까닭에 그사람이 들고 있는 불빛마저 받지 않는다면 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다(우리가 취할것은 법문이요 빛이지 사람이 아니다).법문을 듣는 그때에는 마치 얇은 얼음을 밟고 조심조심 건너야 하듯이 반드시 모름지기 이목을 기울여서 깊고 오묘한 이치를 들으며 마음의 먼지들을 가라 앉혀서그윽한 이치를 느낀다(마음 속에 간직한다).법문하신 분이 당에서 내려온 후에 묵묵히 앉아서 그것을 관찰하되
만약에 의심되는 바가 있거든 선각자에게 널리 물어 보라.저녁에는 조심하고 (곰곰히 생각하여) 아침에 그것을 물어서 털끝만치라도 넘쳐서 흘려 버리지 말라.이와같이 해야 이에 능히 바른 믿음을 내어서 道를 닦는 사람으로서 생각을 삼는者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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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法之次(문법지차)에 如履薄氷(여리박빙)하야 必須側耳目而聽玄音 (필수측이목이청현음)하며 肅情塵而賞幽致(숙정진이상유치)라가 下堂後(하당후)에 묵坐觀之(묵좌관지) 호대 : 법문을 듣는 그때에 마치 얇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조심 가는 상황처럼 반드시 모름지기 이목을 기울여 듣고 쳐다보고 깊고 오묘한 이치를 듣고 정의 티끌을 가라앉혀서 그윽한 이치를 깊이 마음속에 느끼고 간직하여 하당후에 묵묵히 앉아서 그것을 관하여
如有所疑(여유소의)어든 博問先覺(박문선각)하야 夕척朝詢(석척조순)하야 不濫絲髮(불람사발)이어다 : 만일 의심되는 바가 있거든 선각자에게 널리 물어서 저녁에는 곰곰이 생각을 해서 아침에 물어서 털끝 만치라도 흘러서 넘치고 빠뜨려 버리지 말라 (하나도 놓치지 말라.)
如是라야 乃可能生正信하야 以道爲懷者歟 인저. : 이와 같이 해야 이에 가히 능히 바른 믿음을 내어서 도로써 생각을 삼는자 라고 할 수 있을 것인저.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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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고맙습니다._()()()_. 법우님 자료정리 하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사정이 있어 직접참여치 못했는데 다시들을수 있어 참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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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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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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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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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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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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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懸堐想(작현애상)하야 生退屈心(생퇴굴심)하라.- 법에 대해서 현애상을 지어서 퇴굴심을 내지 말라.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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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각합장()()()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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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법문과 녹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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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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