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인기드라마로도 상영되어 너무나 유명한 황진이는 조선조 중반 그러니까 16세기 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 송도의 기생이다. 그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의 타고난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당대를 대표하는 시객(詩客)과 가객(歌客)들과 교유하면서 시조 6편과 한시 7편을 남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출중하였다. 그의 시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한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황진이의 시 한수가 깁시습의 시 열수에 비길만하다.”는 평을 듣는다니 그의 능력을 헤아리는데 가히 어려움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대를 풍미하던 기생이었으니 노래와 춤에 달인이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러하였으니 어찌 그를 탐하는 남정네가 많지 않았겠는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왕실의 종친이면서 풍류에 능한 벽계수의 끈질긴 구애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학자로서 당대를 대표하던 화담 서경덕을 흠모하여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진지한 한 여성의 단아한 모습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황진이는 우리 남자들이 가장 흠모하는 사랑의 화신이며 마음속에 영원한 애인으로 항상 남아있다.
이런 황진이를 나는 개의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지하의 주인공이 이 사실을 알면 땅을 치고 분개할 일이다. 하지만 어떻겠는가? 죽은 황진이가 다시 살아서 이를 탓할 리도 없고 그의 후손들이 있어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발할 가능성도 전혀 없다. 다만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몇 해 동안 황진이로 불러주니 자기 이름인양 잘 알아먹는 녀석이 있어 행복하고 기쁠 따름이다. 내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황진이는 첫 눈에 보아 범상한 개가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주말농장을 구입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을 때 곧바로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진돗개 새끼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진돗개라면 당연히 황구나 백구로 알고 있었는데 이 녀석의 어미들은 처음 본 호구였다. 짙은 황색 바탕에 호랑이처럼 검은 무늬 점들이 박힌 때문에 붙여진 종류의 것이란다. 물론 나의 황진이도 어미들을 꼭 빼닮은 전형적인 호구이다. 대여섯 마리의 새끼들 가운데 몸짓이 유난히 크고 활발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 농장으로 데려왔다. 명견이라는 주인의 설명도 있고 보통 개들과 매우 다른 기품을 지녔기에 외딴 농장에 놔두는 것이 몹시 불안하고 또한 안 쓸었다. 더욱이 개를 자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진돗개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그 결과 ‘진순이’ 대신에 붙여 준 이름이 ‘황진이’이다. 바탕색이 누런 갈색이고 진돗개 새끼라는 점을 조합하니 황진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사람들은 그 이름을 들으면 우선 개보다는 기생 황진이를 떠올릴 것임으로 다소간에 녀석의 존재를 은폐시킬 수 있으리라는 별난 생각과 함께 정말 그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황진이를 무엇보다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 한두 가지 이유 때문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불필요한 것이 될는지 모른다. 하지만 거의 매일 오후 늦은 시간에 그 녀석을 보게 될라치면 조그마한 언덕 뒤로 잔뜩 엎드려 몸을 숨긴다. 언뜻 보면 없어진 것과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녀석은 가까이 다가가면 일순간 뛰쳐나와 달려든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오줌을 질질 흘러댄다. 반가운 감정을 미쳐 누를 수 없는지 목줄에 매놓은 30m 길이의 철사 줄을 온 힘을 다하여 몇 번이고 반복하여 쏜살같이 내달린다. 그러는 와중에도 갑자기 몸을 낮춰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내가 녀석의 등을 올라타려고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 멀찌감치 달아나 버린다. 생긴 모양은 호랑이 보다 더 무섭게 생기고 덩치가 보통 개들보다 훨씬 크기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지만 녀석은 너무 귀여운 애교덩어리이다. 녀석이 이성 친구와 사귀는 것도 실제 황진이 못지않게 도도하다. 한 번은 철사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너무 미안해 목줄을 풀어주었다. 녀석이 쏜살같이 내달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큰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여 그곳을 찾아가니, 우리 황진이가 동네에서 온 하얀 개의 뒷다리를 물고 놓지 않고 있었다. 수캐인 그 백구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지만 황진이의 단단한 이빨을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 둘을 따로 떼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다행이 그 백구는 온통 피범벅이 된 채로 절뚝거리며 도망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후론 그를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무섭고 야무진 황진이지만 ‘백룡이’라고 부르는 하얀 진돗개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 전원주택을 지어 새로 이사 온 사장님 댁의 개인데 그 기품이 보통이 아니다. 나이는 황진이 보다 훨씬 아래지만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황진이 보다 체구가 더 크다. 어떻게 집을 빠져나왔는지 가끔씩 황진이를 찾아 정답게 노는 모습이 사랑하는 선남선녀에 못지않다. 들에 돌아다니는 보통의 개들은 멀리하고 있고 오직 하나뿐인 단짝 백룡이는 평소에 목줄에 매달려 있어 마음뿐이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그 결과 이미 황진이 나이 네 살이 훨씬 지났는데도 새끼를 낳지 못하였으니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뉘를 탓 하리오? 녀석을 보는 사람이면 하나같이 서로 개 사돈을 맺자고 하거나, 새끼를 달라고 하지만 녀석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제한적이어서 사랑을 맺어 줄 수 없으니 나로서도 도무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황진이를 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두 번 놀랜다. 한번은 녀석의 무서운 생김새 때문이다. 진돗개 중에서도 호구는 사냥개로 알려질 정도로 용맹스러우며 호랑이 같은 무늬에 막 연탄창고를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시커먼 얼굴 모습이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소름끼치는 무서움을 주는 모양이다. 열이면 열 모두 똑같은 반응이다. 어떤 지인은 심지어 녀석을 보고 이삼년이 지났는데도 정말로 무섭게 생겼더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녀석의 안부를 물어오는 실정이다. 나머지 한 번은 황진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그것은 왜 무섭게 생긴 개에다 절세미인의 이름을 붙인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때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마누라로서는 황진이를 맞이할 수 없었으니 개라도 황진이면 좋겠다고 응답한다. 항상 산더미처럼 많은 일거리가 쌓여 사시사철 한시라도 편할 수 없는 곳이지만 오늘도 눈이 빠지라고 기다리는 녀석이 있어 농장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이처럼 빠르고도 가볍다. 진짜 황진이를 보고 싶어 내달리듯 옮기는 벽개수의 발걸음이 이랬을까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어등산인님의 황진이 사랑이 애틋하십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이름을 적절하게 잘 지으신것 같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글을 읽다 보니 저도 황진이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황진이
좋은글에 제 얼굴에 미소가 저절로 생기는군요.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황진이 언제 소개 시켜주세요. 눈짓싸움 해보게요.
맛깔스러운 글 맛깔스럽게 읽고 갑니다.. 다음엔 어떤글이 올라올까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기다려집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어제 오전에 황진이를 보러갔는데 대경실색했습니다. 우리 황진이가 죽어 있었어요. 외상이 없이 추측컨데 독극물에 의한 의도적 살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슬프고 미안한 마음에 어제부터 살맛이 없습니다. 황진이를 나무 밑에 고이 묻어주었습니다. 황지아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서 어쩐대요..![ㅠ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9.gif)
어찌 그런일이... 참 마음이 아프네요. 황진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회장님의 글을 통해 저도 한가족이 된 듯 하였는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얼마나 슬프고 마음이 아프세여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힘내십시오.![ㅠ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9.gif)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