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 / 분노에 대한 번즈 박사의 깨우침
- 보리 김종필 수사신부
열면서 /
교정에 육백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는 초등학교시절의 기억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 지역에는 아직 상하수도시설이 없었습니다. 동네마다 천연의 샘이나 두레우물에서 식수를 해결했습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에는 여기저기에 물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펌프는 물이 곧잘 빠져 내겨가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마중물을 부으며 다시 자아올려야 했습니다. 새로운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꼭 필요했습니다. 마중물은 홀로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사에 꼭 필요한 상호관계의 단면입니다.
"수레를 말 앞에 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기부여가 먼저가 아니라 활동이 먼저입니다. 직면하는 상황이 마치 물이 빠져버린 펌프 같으면 먼저 펌프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활동으로 동기부여가 되기 시작할 것이며 물은 흘러나올 것입니다. 미루는 버릇procrastination이 있는 사람은 흔히 동기부여와 활동을 혼동합니다. 어리석게도 그런 사람은 어던 것을 할 기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때를 놓치고 허송세월합니다. 봄이 오면 산천초목에 물이 올라 꽃눈과 잎눈이 피어나듯이 손바을 열심히 움직여 일해야 새로운 생명력이 일어납니다. 활동이 먼저오고 동기부여는 나중입니다.
데이비드 번즈David D. Burns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는 고목의 매화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입춘과 우수를 지나면서 몇몇 가지를 꺾어 서재에 두었더니, 경칩부터 꽃망울이 터지고 있습니다. 지난 초겨울부터 이십여 년 전에 깊은 감동으로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았던 소중한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데이비드 번즈 지음 박승룡 옮김, <우울한 현대인에게 주는 번즈 박사의 충고>란 표제로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책입니다. 원제목은 <Feeling Good - The New Mood Therapy>입니다.
정신과 의사요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번즈 박사는 35세가 되기도 전에 정신 의학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베네트 상A. F. Bennett Award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예를 누리게 만든 의학적 발견들이 자기가 만나는 일상의 환자들에게 소용되지 않는 데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 중에 있던 그는 기분장애에 관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아론 베크Aaron T. Beck박사와 인연이 됐습니다. 그들은 이 책의 기초를 이루는 '인지요법認知療法'의 개발과 완성을 위하여 함께 노력했습니다.
데이비드 번즈 박사의 <우울한 현대인에게 주는 번즈 박사의 충고 Feeling Good - The New Mood Therapy>란 책을 통하여 '화/분노에 대한 번즈 박사의 깨우침'이란 제하에 그분의 메시지를 정리해봅니다.
누가 나를 화나게 만드는가? /
우리 수도원 공동체의 한 수도자가 "오늘 오전에 똥 덩어리를 밟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어느 병원에서 뇌수술을 한 동생의 제수 씨가 그병원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조금은 아는 상황이어서 속으로 "내가 보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하면서도, 그 순간 난감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을 상황에 처했던 그 수조자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누가 나를 화나게 하는가? 씁쓸한 진리는 자기가 체험하는 모욕의 가장 작은 것까지 만들어 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은 적극적*부정적*중립적 속성들의 복합체입니다. 분노는 다른 정서들처럼 자신의 인지認知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정서적 반응은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서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의 느낌은 그 사건 자체로부터가ㅏ 아니라 그 사건에 자신이 부여한 의미의 결과입니다.
화/분노의 한계는?
어디에 화/분노의 한계를 정할 것인가? 실제로 분노는 어떤 상황에서 적합하고 생산적일 수 있을까? 나의 분노를 돋우어 나로 하여금 분통 터지게 하는 그 사람(배우자나 자녀, 부모형제, 그 어떤 사람 등등)은 그렇게 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을까? 다음 두 지침은 언제 자신의 분노가 생산적이고 언제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알아차리게 할 것입니다. 이 두 기준은 분노에 대한 의미 있는 스스로의 철학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나의 분노는 의식적, 의도적으로 그리고 불필요하게 유해한 방식으로 행동한 사람에게 향해져 있는가?
2) 나의 분노는 유용한가? 그것은 나로 하여금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저 나를 패배시킬 뿐인가?
그래도 화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최선의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분노를 감소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 중에 또 다른 하나는 이렇습니다. 찰나적인 순간일지라도 마음의 공책에 '분노의 이익과 불이익의 목록'을 작성해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가슴에 일어나는 그 뜨거운 생각들을 식힐 수 있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어떤 활동을 다시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화를 만드는가? /
무엇이 화를 만드는가? 스스로의 마음에 품고 있는 뜨거운 생각들이 당신의 화/분노를 만듭니다. 그 화/분노의 상狀을 그리기로 의식*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분노의 폭발은 누구에게로 향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줍니다. 화/분노가 폭발되는 순간 자신의 무력함이 노출되고 자기존중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화나게 하는 그런 짓을 계속하고 싶습니까?
인간관계는 좀처럼 자발적으로 '상호적'이지 않습니다. 상호성은 안타깝게도 일시적입니다. 상호성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한 이상이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노력에는 상호의식과 의사소통, 타협과 성장이 포함됩니다. 상호성은 지속적인 협상과 힘든 노력을 요구합니다.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 삶의 굴레에 광기에 가까운 이상한 일이 생겨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기분(정서, 느낌)이 누군가의 통제가 아닌 자기 자신의 통제아래 두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분노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내는 데 에너지 소비하기를 그치면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갖는데 노력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홀로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향상시키고 싶으면 다음과 같은 시도를 해볼 수 있습니다.
1) 상대방을 책망하는 대신 그가 잘한 일을 찾아 칭찬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의 일이나 삶에서 무언가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직하게 그를 칭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가 당신의 칭찬에 이의를 달면 그의 진술이 얼마나 불합리하든지 상관 말고 그에게 동의할 길을 찾음으로써 먼저 그를 무장해제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침묵시키고 그의 허를 찌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3) 그러고는 즉시, 스스로의 관점을 조용하고 단호하게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훌륭한 전문가답게 일할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잘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네요."
감정이입 /
감정이입이란 무엇인가?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사고와 동기를 그들이 "맞아, 그게 정확히 내 마음이다!"라고 반응할 만큼 정확히 이해되게 하는 정서적인 소통의 능력입니다. 정확한 감정이입은 최종적인 분노 해독제입니다. 그 극적인 효과는 현실에서 강하게 확립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화를 만드는 것은 실제로 당신 생각이지 다른 이의 행동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다른 이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지 당신이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의 분노를 작동시키는 사고에 변화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정이입은 획득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스스로의 지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태도에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힘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당신의 분노에 대해 알아야 할 10가지 /
1. 이 세상의 사건이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생각'이 당신의 화를 만듭니다. 비록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라도 당신의 정서적인 반응을 결정짓는 것은 당신이 사건에 부여한 의미입니다. 당신의 분노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사람, 사물, 사건 등)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통제할 수 있고 '정서적인 선택'의 기회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정서는 불가피하게도 대부분 당신의 통제 밖에 있는 새상의 외부사건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2. 당신의 분노는 대체로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분노는 당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적개심으로 스스로를 얼어붙게 할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적 해결을 위한 연구와 활동적인 방법에 강조점을 둔다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고 무력함과 좌절감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치기 어려운 몸에 밴 습習으로 말미암아 반복적으로 비슷하게 화내게 될 기회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통제 밖에 있어서 해결이 불가능한 그 무엇(사람, 사물, 사건 등) 때문에 일으키는 분노는 스스로를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분노와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습니다. 혹이라도 당신의 분노가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당신 생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중 하나를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평화와 환희로 충만했던 그 한 순간이라도 좌절과 초조와 분노의 느김과 교환하고 싶은가 자문해보세요.
3. 당신의 분노를 작동시키는 사고들은 흔히 왜곡들을 포함합니다. 이 왜곡들을 고쳐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당신의 분노를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궁극적으로 당신의 분노는 누군가가 불공정하게 행동한다든지 무슨 사건이 불공정하다는 당신의 가정에 의해 비롯됩니다. 그 분노늬 강도는 지각된 악의의 가혹성과 그 행위가 의도적으로 보였는지에 비례하여 증가될 것입니다.
5. 당신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면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행동들이 불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당신은 적지 않게 놀랄 것입니다. 그 사례들의 불공정은 오직 당신 마음 안에 있는 환상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진리와 정의와 공정에 대한 당신의 개념이 모든 이와 공유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개념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당신의 분개와 실망과 좌절이 ㅁ낳이 사라질 것입니다.
6. 다른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당신의 벌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보복 같은 분노는 그들과 당신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도록 당신을 도울 가능성이 없습니다. 당신의 분노는 흔히 더 많은 악화와 약극화를 야기할 것이며 자기 성취적 예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이 일시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다해도 그런 적대적인 조작에서 얻는 단기적 소득은 당신이 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장기적 분개와 보복에 의해 흔히 상쇄될 것입니다. 적극적인 보상체계가 더 효과를 내는 까닭입니다. 아무도 통제되거나 강제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7. 당신의 많은 분노는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하고 반대할 때, 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자기존중의 상실을 막으려는 방어를 포함합니다. 그너 화는 언제나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사고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자기존중을 상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가치감에 대해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8. 좌절은 충족되지 않은 기대로부터 생깁니다. 당신을 실망시킨 사건은 '현실'의 일부였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입니다. 그처럼 당신의 좌절은 언제나 당신의 비현실적인 기대로부터 생깁니다. 당신은 현실에 영향을 주어 당신의 기대와 조화되도록 만들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실용적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 기대들이 인간본성에 관한 다른 모든 이의 개념과 상응하지 않는 이상일 대 더욱더 그러합니다. 가장 간단한 해결은 당신의 기대를 고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좌절로 이그는 몇 가지 비현실적인 기대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내가 무엇(사랑, 행복, 승진 등)을 원하면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하다.
2)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일한다면 나는 성공해야 한다.
3) 다른 사람들은 나의 기준에 들어맞고 '공정'에 대한 나의 개념을 믿도록 노력해야 한다.
4) 나는 어떤 문제든 빠르고 쉽게 잘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5) 내가 좋은 사람(아내, 남편, 친구, 동료 등등)이라면 그(그녀, 배우자, 공동체 등등)는 나를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6) 사람들은 내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7) 내가 누군가에게 잘 하면 그들은 보답해야 한다.
9. 당신이 화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우기는 것은 단지 유치한 샐쭉거림일 뿐입니다. 당신은 물론 그런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화(분노)는 이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허용됩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화를 느끼는 것이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가?'입니다. 당신이나 세계가 당신의 분노로부터 정말 유익함을 얻을 것인가?
10. 당신이 인간이기 위하여 당신의 화/분노가 거의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 없이 당신은 느낌 없는 허수아비나 로봇robot이 될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상, 당신이 그 꾀 까다로운 자극과민성에서 벗어날 때 더 큰 열정과 기쁨, 평화와 창의성을 지닐 것입니다. 당신은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당신>
사노라면, 세월이 무게를 더해갈수록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비롯하여 수족의 상실, 직업의 상실, 생명의 상실 등등 피해갈 수 없고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요인들이 산적한 사바세계를 실감합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슬픔은 우울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연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은가?
1) 당신은 스스로와 다른 이들의 안녕에 기여할 것이 있는 한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2) 당신은 스스로 행한 무엇인가가 적극적인 효과를 갖는 한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3) 당신은 살아있음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어떤 차이가 있는 한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일 수 있습니다.
4) 당신이 사랑과 자비, 용서화 화해, 이해와 사귐, 친교와 우정, 격려와 위로를 준다는 것이 무엇이든 의미한다며,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5) 당신은 스스로의 의견과 지성을 존중할 수 있다면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6) 다른 이들이 당신을 존경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상여금입니다.
7) 당신이 자기존경의 품위를 가진다면,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8) 당신이 고용인/고용주의 가족의 생계에 기여하여 돕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9) 당신이 스스로의 생산성과 창조성으로 당신 고객들이나 행상인들을 도우려고 최선을 다 한다면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10) 주어진 환경에서 당신 존재가 다른 이들과 어떤 차이가 있다면 당신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11) 당신은 결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현저히 가치가 있으며 참으로 소중합니다.
<실수할 수있다는 것>
어째서 실수할 수있다는 것이 위대할까요? 완벽하려 애쓰는 것이나 실수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비합리적이고 자멸적입니다. 당신이 완벽하다면 어떨까요? 배울 것도, 개선할 사항도 없을 것입니다. 실수하기를 두려워하는 인생이라면, 도전이나 노력을 들여서 어떤 것을 숙련하고 정통하는 데에서 오는 보람이나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1) 실수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절대론자나 완벽주의자적인 망상입니다. "한번 실수하면 전체를 망친다."는 개념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옥鈺의 티가 훌륭한 옥을 망치지 않습니다.
2) 실수는 좋은 것입니다. 더 잘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실, 우리가 실수하지 않는다면 참 소중한 것을 잘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실수하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인생 여정에서 실수는 발생할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3)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스스로가 더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 행동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 실수가 매사를 더 잘 되게 하고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더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4) 실수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마비됩니다. 우리는 실수할까봐(사실, 필시 실수할 테니까) 어떤 것을 하거나 시도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실수하지 않도록 우리 활동들을 제한한다면 끝내 우리 자신을 패배시키고 말 것입니다.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실수할수록 궁극적으로 더 빨리 더 잘 배우고 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5) 누군가가 실수하더라도 우리는 화를 내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수하기로는 우리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벽주의자적인 사람 주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6) 실수하더라도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태도 수정>
성공은 행복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 둘은 같지도 않고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행복과 큰 업적은 필연적인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전율이나 우승컵은 금방 사그라지고, 오래된 업적은 금방 구식이 됩니다. 성공이 행복이라는 집착은 끝내 신기루를 좇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서(느낌 / 기분) 의 밑바탕에 있는 진정한 열쇠는 당신의 생각이지 성공이나 실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 교우관계, 혼인 등이 행복과 자기존중을 위한 필수 요건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행복과 자기존중의 계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꼭 충족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일이 당신의 가치는 아닙니다. 일중독에서 해방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악의 시작인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야하며, 지혜와 분별로 일과 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지구촌의 사람들은 대부분 위대한 성취기가 아니어도 행복하고 매우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히 점점 더 평범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닥뜨릴 진정한 질문들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기 존경 청사진>
1) 누가 당신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할 때 그 불찬성의 중심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비합리적인 사고일 수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 그 비판이 타당하다면 이것이 굳이 당신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 잘못을 정확히 가려내어 그것을 고칠 단계를 밟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잘못에서 배울 수 있고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때때로 실수할 것이고 당연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3) 당신이 실수하여 잡쳤다고 해서 타고난 실패자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늘 또는 거의 늘 잘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당신 생애에 올바르게 했던 수천 가지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더구나 당신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4)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행하거나 말하는 구체적인 것의 타당성이나 장단점을 판단할 수 있을 뿐 한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가치에 대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5) 당신이 얼마나 잘하거나 잘못 행동하거나 간에 각자 다르게 당신을 판단할 것입니다. 불찬성은 들불처럼 퍼질 수 없으며 하나의 거부가 끝없는 거부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혹이라도 설상가상의 일이 생기고 당신이 누군가에게 거부당해도 당신은 완전히 홀로 되어버릴 수 없습니다.
6) 불찬성과 비판은 보통 불편합니다. 그러나 불편은 지나갈 것입니다. 그만 침울하세요. 시작하기가 절대로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과거에 당신이 즐긴 활동에 열중해보세요.
7) 비판과 불찬성, 당신을 상대로 제기된 고발들은 당신이 '사들이는' 만큼만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습니다.
8) 불찬성은 좀처럼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비판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불찬성한 사람과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끝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논쟁은 삶의 일부이며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나중에 공통이해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9)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이 완전히 나쁜 사람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할 힘과 권리를 줍니까? 우리는 모두 인간일 뿐 대심원 재판관들이 아닙니다.
10) 여기에 더 추가시킬 당신의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 생각들을 종이에 메모해 보세요. 불찬성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개발해보세요. 그것들이 얼마만큼 당신을 도와 당신의 전망을 바꾸고 독립심을 향상시키는지 보게 되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자기존경의 예술>
자기존경에 이르는 길은 하나의 예술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사고들만이 자기존중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존경의 예술을 배워보세요. 자기 자신에 대해 훨씬 더 기분(정서/느낌)이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가기기준과 타인을 비교할 필요도 없거니와 '가치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은 인간에게 적용될 때 그저 공허한 개념들일 수 있습니다. '참된 자아'라든가 '인격적 가치'라고 하는 개념도 거의 의미 없는 뜨거운 공기와 같습니다. 당신의 '가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세요. 원한다면 '참된 자아'도 거기에 넣으세요. 그 순간 당신은 잃어버릴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여기서 생기롭게 활동하는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에서 무슨 문제들과 맞서고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을 그것들을 다루고 있습니까? 현 순간現瞬間 바로 여기가 당신의 행동이 있어야 할 활동의 장場이지 붙잡기 어려운 '가치'의 신기루에서가 아닙니다. 물론 당신은 '자아'나 '가치'의 포기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생길 것으로 상상합니까?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남을 깨달을 것입니다.
<내면의 빛을 밝히기>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의 규정'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 말씀 중에 '화/분노'에 대한 깨우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을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소서5장 25~32절
<닫으면서>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살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이래도 하루살이는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최선을 다해 살며 열애로 종족을 번성시킵니다.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단면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홀로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미루는 버릇procrastination을 내려놓고 서로를 향해 마중물이 되어줄 수 있는 활동을 우리 모두가 선택한다면 얼마나 살맛나는 세상이겠습니까! 최종적인 분노 해독제인 정확한 감정이입으로 "맞아, 그게 정확히 내 마음이다!"라고 반응할 만큼 서로 이해/공감/수용하게 되는 너와 나의 소통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듣고/보고/느끼듯이 인간관계를 열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때때로 일어날 수 있는 화/분노의 문제에 직면하여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슴에 순응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봄 길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너머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바라봅니다. / 癸巳年 早春에 弼 / 보리는 뽈리카르포 金鐘弼 修士神父의 아호로, 보리와 밀의 보리입니다. 신부님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 원장님이며,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의 '聖母茶山茶會'의 지도신부입니다. /